성만찬의 코이노니아와 한국 교회
본문
신앙과 직제 위원회 제5차 세계 대회 주제 "Towards Koinonia in Faith, Life and Witness" 가운데서 "Koinonia in Life"는 세례, 성만찬, 직제를 둘러싼 교회론적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코이노니아를 말한다. 상호간에 세례, 성만찬, 직제를 인정하고 나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와 공동의 삶을 말한다.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의 공동의 삶(common life)은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거행에 뿌리 내리고 있다." 성례전 가운데서도 특히 성만찬은 우리가 추구하는 코이노니아의 본질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1982년 리마에서 수렴되고 1983년 뱅쿠버 WCC의 인정을 받은 BEM문서는 이런 그리스도인의 공동의 삶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BEM 문서에서 밝히고 있는 성만찬의 의미는 다섯 가지이다. A.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서의 성만찬, B.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성만찬, C. 성령 초대로서의 성만찬, D.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 E.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 이 그것이다. 이것을 코이노니아적 관점에 분류하면, A, B, C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이고, D는 성도의 코이노니아이며, E는 세계와의 코이노니아를 뜻한다. 이런 성만찬의 의미를 다시 한번 요약하고 이를 보완하는 김동선의 논문을 요약 소개하고자 한다.
성만찬 식탁의 성서적 배경
BEM문서 Ⅱ의 1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록된 것처럼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함께 나눈 식사들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또 실제화 한다.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징표가 많은 무리들을 먹이신 사건이다. 마지막 식사에서 하나님 나라의 교제는 예수가 당할 고난의 임박성과 연계되어 있었다. 부활 후 주님은 떡을 떼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임재를 알리셨다. 따라서 성찬식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뿐만 아니라 부활 후에도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서 행하신 식사를 지속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만찬이 이스라엘 백성이 억압의 땅으로부터 해방됨을 기념하는 유월절에서 또 시내산 계약의 식사(출 24: )에서 이미 나타났다고 본다. 성만찬은 교회의 새로운 유월절 식사, 즉 새 계약의 식사로서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념(anamnesis)으로서 또 어린양의 잔치(계 19:9)에 대한 기대로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 인용에서 자세히 보면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서 식사가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만찬은 유월절 식사와 시내산 계약의 식사와 연계되어 있고, 부활하신 후의 제자들과의 식사, 그리고 미래의 어린양의 잔치까지 연결을 지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다 성만찬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는 구약과 신약성서에 나타나고있는 식탁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금년 초 영국 에딘바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김동선 박사의 논문에 이 부분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고, 예장바른목회실천협의회 여름대회에서 "성만찬: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코이노니아"란 주제로 요약 발표한 바 있다.
유월절 식사는 '제바흐'(zebhah)의 형태로 진행이 되었는데, 성서에서 주로 '화목제'로 번역이 되는 제바흐는 '올라'(olah)라고 불리는 '번제'와는 달리, 희생 제물의 일부는 신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먹는 공동식사의 코이노니아가 중심이 되는 제사이다. 제바흐의 특징은 바로 이런 이중의 교제에 있다. 즉 하나님의 현존을 통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교제, 그리고 제바흐에 참여한 공동체 상호간의 교제가 그것이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유월절을 제바흐라고 부르고 있고(출 12:27, 34:25), 출애굽의 목적도 바로 제바흐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시내산에 이르면서 하나의 전환을 이루었는데, 애굽 탈출의 여정은 끝나고,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고, 노예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변신이 이루어졌다. 애급에서의 제바흐가 유월절 식사였다면, 시내산에서의 제바흐는 계약 식사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들어감으로 식탁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출 24:1-11). 이 두 식탁은 별개의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이 두 개의 공동식사가 공동체로 하여금 ①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계약 관계를 재확인하고, ②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공동체가 그들 가운데 실현됨을 경험하며, ③그들이 경험한 새로운 공동체가 역사 한 가운데서 이루어지리라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만나를 함께 먹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 계시되었고, 공동 식사에서 나타난 평등주의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계약 식사의 정신이 공동체의 삶 한 가운데서 실현될 수 있는 신학과 윤리가 강력하게 요구됨을 인식하였다. 성서는 이스라엘이 역사 한 가운데에 종말론적으로 임할 새로운 공동체를 얼마나 강하게 갈망하였는지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그들의 갈망 배후에는 언제나 계약 식사의 경험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공동 식사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공동 식사의 주제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의 공동체 상호간의 교제로서, 공동 식사의 의미가 완전히 공동체 안에 전달되어질 때 공동 식사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둘째, 공동 식사의 역사화의 전과정은 신학과 공동체 윤리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셋째, 공동 식사의 체험이 공동체의 삶과 연결될 때 공동체는 새로운 공동체의 건설을 위한 역동적인 힘을 얻을 수 있지만, 공동 식사의 의미가 구체적인 삶과 유리될 때 공동체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상실하게 된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많은 비유들이 식사에 관한 이야기, 즉 먹고 마심과 굶주림과 목마름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예수와 그를 따르는 무리 사이에서 이루어진 식탁의 코이노니아는 종종 하나님의 나라의' 실천된 비유'로 이해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식탁 공동체는 '사회적 실체'였으며,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식탁 공동체 안에서 ①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 나가야 할 공동체의 모습과 ②메시아의 출현과 더불어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질 공동체의 모습이 동시에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식탁은 ①사죄와 용서 ②공동체 상호간의 섬김 ③새로운 공동체의 건설로 특징 지워진다.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유월절 식사였다. 이 유월절 식사에서 예수는 '유월절 양'(고전 5:7)인 자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을 번제의 의미로만이 아닌 '제바흐'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의 죽음은 제바흐의 두 가지 기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제바흐가 희생 제물의 일부를 불에 태움으로서 속죄의 기능을 가지고 있듯이,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었고, 또한 제바흐가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남은 희생 제물의 나눔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공동체를 갈망하고 나아갔듯이,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양식으로 주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길을 따르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부활 후 제자들과 나눈 식사를 통해서 이런 사실들은 확인된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여러 형태의 식사 전승들―예수의 식탁 공동체, 십자가에 달리기 전 날밤 제자들과 함께 나눈 마지막 만찬, 부활 후 제자들과 함께 나눈 식탁들, 그리고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식탁 등 ― 은 역사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식탁들은 구약성서에서 보았던 여러 식탁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질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초대 교회의 식탁 공동체는 역사적 예수의 지상사역의 결과로서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①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역사적 예수가 가졌던 것과 똑같은 사회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②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식탁은 그들이 당시의 사회에 전해 내려온 식사 전승을 예수의 식탁 공동체의 빛 안에서 재해석하였다. ③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식탁은 최초의 복음서가 쓰여지기 전까지 복음서 전승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즉 역사적 예수의 식탁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의 '삶의 자리'였다면,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식탁은 복음서 전승의 삶의 자리였다.
김동선은 그의 결론 부분에서 성만찬은 신학적으로는 다양한 식사 전승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실천적으로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해 열려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의만찬은 교회와 교회가 이루어야 할 새로운 공동체의 요약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요약"이라고 하였다.
BEM의 성만찬론
이런 이해를 가지고 BEM 문서를 살필 때 더욱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A.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서의 성만찬'에서 "성만찬은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대신하여 드리는 찬양의 대제사이다"('성만찬' 4)라 했고, "성만찬은 영원히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시는 그리스도만이 유일무이하게 드릴 수 있는 희생의 성례전"('성만찬' 8)이라 했다. 이것은 제바흐가 제물의 일부를 불살라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과 비교가 된다. 제바흐는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모든 구원의 역사에 대한 감사의 제사이다. 유월절 식사가 바로 제바흐였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여 내셨기 때문이다. 또한 시내산에서 이루어진 계약 관계에서 드려진 제바흐도, 보잘 것 없던 노예인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된 데 대한 감사의 제사이다. BEM은 성부께서 창조, 구속, 성화 및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통해서 성취하셨고, 성취하실 것에 대한 감사를 말한다.
카톨릭교회에서는 성만찬을 사제에 의한 반복적인 희생 제사라 주장한다. 갈보리 산상에서 일어난 십자가상의 유일회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사제가 떡과 즙이라고 하는 봉헌된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은 반대를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유일회적인 희생 제사임을 역설하였다. BEM 문서는 "찬양의 대제사"(the great sacrifice of praise)로 표현하므로 반복적인 희생 제사로서가 아니라 감사의 제사로 이해한 것은 카톨릭교회와 개신교의 간격을 많이 좁히는데 크게 공헌한 것이라 하겠다.
한국개신교회가 성만찬을 소홀히 하므로 하나님이 하신 모든 창조와 구속의 역사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올바로 드리지 못한 것이 아닐까? 이것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체험을 최소화하고 인간 중심의 예배로 전락시키는 요인이 된 것은 아닐까? 한국 교회가 기복적인 신앙 형태를 띄게된 것도 창조와 구원에 대한 감사보다는 이기적 욕구를 앞세우기 때문이 아닐까?
다음으로, B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성만찬'에서 "성만찬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anamnesis)"('성만찬' 5)이라고 하므로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쯔빙글리는 성만찬의 주된 의미는 과거에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단회 유일적인 희생 제사를 기념하는 데 있는 동시에 이에 대한 '감사'에 있다고 주장한다.
기념(anamnesis)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과거 구원의 사건을 오늘에 재현하는 것을 뜻한다.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의 사건을 새로운 현재적인 현실성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기념은 아주 익숙한 것이었고, 역사적 예수의 성만찬도 이런 배경 속에서 제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기념은 그 사건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을 오늘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만찬에서 말하는 기념에 대한 성경의 생각은 성만찬이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예전으로써 거행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의 현재적 효과를 가리킨다"(5).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그가 이루신 모든 일들과 함께 이 기념 속에 임재하며 우리와 친히 교제를 나누신다"(6)고 하므로 '기념'과 '임재'를 분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친히 그와의 교제(communion)를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성만찬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의 식탁임을 뜻한다. 이 역시 하나님이 임재하신 자리에서 이루진 계약 식사의 관점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동시에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봄이라고 한다. 4항에서도 성만찬은 "창조주에 대한 봉헌과 찬양,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우주적 교제, 성령 안에서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인 미래의 세상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성만찬은 미래의 이상적인 새로운 공동체를 미리 맛봄이요, 동시에 그것을 지향해 가는 식탁임을 뜻한다. 완전한 코이노니아가 회복된 미래의 공동체를 미리 체험하는 자리로서의 성만찬에 대한 인식은 오늘 우리에게 많이 부족한 상태이다.
이와 같이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현재적인 코이노니아를 이룩함과 동시에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본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이며, 십자가로 다가온다. 그 구체적인 삶을 10항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아 있고도 거룩한 제사로 드리게 된다(롬 12:1, 벧전 2:5).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 영적인 예배는 성만찬을 통해 풍성하게 되며, 이 성만찬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화해의 종들이 되기 위하여 사랑으로 성화되고 화해된다." 거룩한 제사적 삶이란 결국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를 희생함이며, 적대적인 세계 속에서 화해의 종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다. 박종천은 그의 글에서 "진정으로 성찬을 사는 것은 위험 속에 빠진 자들과의 기념적 연대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특히 성령 안에서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인 미래의 세상을 미리 맛봄은, 오늘 모순과 불의와 증오와 분쟁으로 가득찬 세계에 대한 부정이며, 그와의 투쟁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만찬에서 경험한 코이노니아를 어떻게 통일 문제 등과 같은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교회의 운동과 연결시킬 수 있느냐 라는 과제를 안고 고민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할 때 모든 종류의 부정의, 인종차별, 인종분리주의, 자유의 결핍이 근본적으로 도전 받게 된다"(20).
그러나 이런 성만찬의 분명한 의미가 밝혀지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 선포가 동반되어야 한다. 12항이 이 점을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이 성만찬의 내용 바로 그것인 것처럼, 또한 선포된 말씀의 내용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성만찬과 선포된 말씀은 서로를 보강한다. 즉 올바른 성만찬 거행은 말씀 선포를 포함한다." 그러나 BEM문서는 말씀 선포보다 성만찬 쪽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만찬 예전의 거행은 교회 예배의 중심 되는 행사로서 계속되고 있다"고 하므로 예배의 중심이 말씀 선포가 아닌 성만찬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개혁자들의 입장과는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이형기 교수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BEM 문서의 성만찬 비교연구라는 글에서 이 점을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BEM 문서가 동방정교회와 성공회와 심지어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영향으로 성만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경향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하면서, 루터, 쯔빙글리, 칼빈의 '복음설교'에 대한 강조를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루터나 쯔빙글리나 칼빈은 다같이 복음 설교를 성만찬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쯔빙글리는 성만찬은 이 주인인 신앙의 하녀라고 하였고, 칼빈은 성례전이란 복음의 설교에 의해서 생긴 신앙을 강화시키는 또 다른 하나의 보조 수단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복음이 설교되어야 성만찬의 가시적 표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다" 고 하였다. 사실상 성만찬의 의미 그 자체가 복음이며, 이 복음이 선포될 때에 올바른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를 신앙으로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만찬을 소홀히 하고 복음 선포만 강조해 온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는 성만찬을 소홀히 함으로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고, 그 설교가 복음에서 멀리 벗어나 엉뚱한 강연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 개신교회의 성만찬의 회복은 시급하다고 하겠다. 칼빈은 성례전을 복음 설교의 외적인 보조 수단이라고 하였지만, 동시에 복음 설교와 함께 있어야 할 은혜의 수단임을 강조하였다.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성만찬을 그 예배의 중심으로 삼아 온 카톨릭 교회와 복음 설교를 그 예배의 중심으로 삼아 온 개신교의 현실 참여를 비교할 때 오히려 카톨릭 교회가 더 적극적이었음을 상기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카톨릭교회는 성만찬을 중심으로 하되 복음 설교도 짧지만 항상 동반된 반면, 개신교회는 복음 설교는 매주일 선포되지만, 성만찬은 1년에 두 번 정도에 그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셋째로, '성령 초대로서의 성만찬'은 성만찬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 부분으로서, 성령은 모든 코이노니아를 가능케 하시는 사랑의 힘이라고 한다. "성령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만찬 때 우리에게 실제로 임재 하도록 하시며, 성만찬 제정 때 하신 말씀에 담긴 약속을 성취하신다." "성령은 성만찬을 가능케 하시며 성찬식이 계속해서 유효하도록 만드시는 무한한 사랑의 힘이다"(14). 14항 해설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만찬 임재를 영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 사이의 불가분리적인 연합을 확증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만찬 사건의 근원이 되시며 궁극적으로 성취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만찬의 중심인 하나님의 성육신 하신 아들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로 체험케 하시는 성령의 힘, 결국 성만찬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코이노니아를 동시에 체험하게 되는 것이며, 아울러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은 또한 "성만찬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한다"(18)고도 하였다. 기념이 순히 회상이 아닌 현재적 경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오직 성령이 가능하게 하시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런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동방 교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성령론의 새로운 발견이라 할 수 있다. WCC가 칸베라 총회의 주제를 성령으로 정한 것도 이런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구속사에 함께 하신 성령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활발하게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특히 성령의 은사에 깊은 관심과 체험을 가지고 있으나 성령의 역사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므로 성령 운동이 대체로 잘못 전개되어 많은 부작용을 낳게 만들었다. 성자와 불가분리적인 연합을 이룬 성령이라면, 그의 역사 또한 성자가 이루신 구속의 사건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령 운동은 은사 중심이 아닌 구속사 중심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에서는 앞 부분에서 달리 수평적인 코이노니아를 다루고 있다. 앞부분에서는 믿는 자들이 성만찬 예전에서 성령과 제정의 말씀을 통하여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사업을 만난다는 사실을 말했다. 즉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코이노니아를 다루었다. 여기서는 믿는 자들의 수평적인 사귐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교회의 삶을 양육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성만찬적 사귐은 동시에 교회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충분히 드러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성만찬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제바흐에 참여한 공동체 상호간의 코이노니아에 해당한다.
성만찬을 통한 성도의 교제는 동시에 역사와 사회 속에서의 기독교적 책임으로 이어진다. "성만찬 의식은 하나님의 한가족 안에서 형제자매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 간의 화해와 동참을 요구하며 사회, 경제, 정치적 삶 속에서 합당한 관계를 추구하도록 촉구는 끊임없는 도전이 된다. ...성만찬은 신자들을 세계사의 중심적 사건과 연결시켜 준다"(20). 성만찬에 참여한 신자들이 이 세계 속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그리고 불의와 분열과 교파주의 같은 것들을 계속한다면 언제나 심판 아래 놓여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 문서는 강력하게 교회의 선교적 범위를 세계사의 중심적 사건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이런 해석은 이제까지 전도에만 열중하던 교회들이나, 교회와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던 교회들에게는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성만찬론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던 이런 이해는 시대적 상황 변화에 따른 선교신학의 영향일 것이다. 이런 점은 다음 항에서 더욱 분명하게 천명되고 있다.
끝으로,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에서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며, 이 땅에 나타난 그 나라의 징표들에 대해 감사를 드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임해 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쁜 마음으로 기념하고 또 고대하는 축제"라고 하였다(22).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는 축제인 성만찬에 참여한 자들은 버림받은 자들과 연대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셨던 그리스도의 사랑의 징표가 되도록 화해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면서, "성만찬을 거행하는 자체가 교회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증거"(25)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선교가 효과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이 성만찬 교제를 통하여 연합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26). 이 부분에 대하여 세계 교회들은 광범위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고 하였다.
축제로서의 성만찬과 하나님의 선교에 이어지는 성만찬에 대한 이해는 한국 교회에는 결여되어 있는 부분이다. 한국 교회는 지나치게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실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BEM 문서에 나타난 성만찬의 코이노니아는 세 방향으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 둘째는 성도간의 코이노니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계와의 코이노니아가 그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는 성부께 대한 감사의 제사(sacrifice)와 성자에 대한 기념(anamnesis)과 성령의 초대(epiklisis)로 이루어지며, 성도간의 코이노니아는 교회 일치로 발전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고, 세계와의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 선교를 통하여 실현되어야 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형기 교수가 종교개혁자들의 성찬론과 BEM의 성찬론을 비교 연구한 논문에서 대체로 개혁교회들이 이 성찬론을 수렴하는데 있어 신학적으로 별 문제가 없음을 밝힌 바대로 한국 교회는 적극적으로 이를 수렴하므로 세계 교회와의 연대와 일치를 이루어감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너무도 이런 중요한 성만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던 한국 교회들에게 이를 널리 알리고, 성만찬 횟수를 증가시키며, BEM의 성만찬론에 따른 예식서들을 발간하여 보급함이 시급하다. 이런 노력들은 한국 교회 일치를 위해서나, 교회의 적극적이 사회 참여를 위해서나, 그리고 이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BEM 문서에서 밝히고 있는 성만찬의 의미는 다섯 가지이다. A.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서의 성만찬, B.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성만찬, C. 성령 초대로서의 성만찬, D.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 E.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 이 그것이다. 이것을 코이노니아적 관점에 분류하면, A, B, C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이고, D는 성도의 코이노니아이며, E는 세계와의 코이노니아를 뜻한다. 이런 성만찬의 의미를 다시 한번 요약하고 이를 보완하는 김동선의 논문을 요약 소개하고자 한다.
성만찬 식탁의 성서적 배경
BEM문서 Ⅱ의 1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록된 것처럼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함께 나눈 식사들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또 실제화 한다.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징표가 많은 무리들을 먹이신 사건이다. 마지막 식사에서 하나님 나라의 교제는 예수가 당할 고난의 임박성과 연계되어 있었다. 부활 후 주님은 떡을 떼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임재를 알리셨다. 따라서 성찬식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뿐만 아니라 부활 후에도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서 행하신 식사를 지속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만찬이 이스라엘 백성이 억압의 땅으로부터 해방됨을 기념하는 유월절에서 또 시내산 계약의 식사(출 24: )에서 이미 나타났다고 본다. 성만찬은 교회의 새로운 유월절 식사, 즉 새 계약의 식사로서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념(anamnesis)으로서 또 어린양의 잔치(계 19:9)에 대한 기대로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 인용에서 자세히 보면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서 식사가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만찬은 유월절 식사와 시내산 계약의 식사와 연계되어 있고, 부활하신 후의 제자들과의 식사, 그리고 미래의 어린양의 잔치까지 연결을 지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다 성만찬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는 구약과 신약성서에 나타나고있는 식탁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금년 초 영국 에딘바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김동선 박사의 논문에 이 부분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고, 예장바른목회실천협의회 여름대회에서 "성만찬: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코이노니아"란 주제로 요약 발표한 바 있다.
유월절 식사는 '제바흐'(zebhah)의 형태로 진행이 되었는데, 성서에서 주로 '화목제'로 번역이 되는 제바흐는 '올라'(olah)라고 불리는 '번제'와는 달리, 희생 제물의 일부는 신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먹는 공동식사의 코이노니아가 중심이 되는 제사이다. 제바흐의 특징은 바로 이런 이중의 교제에 있다. 즉 하나님의 현존을 통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교제, 그리고 제바흐에 참여한 공동체 상호간의 교제가 그것이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유월절을 제바흐라고 부르고 있고(출 12:27, 34:25), 출애굽의 목적도 바로 제바흐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시내산에 이르면서 하나의 전환을 이루었는데, 애굽 탈출의 여정은 끝나고,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고, 노예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변신이 이루어졌다. 애급에서의 제바흐가 유월절 식사였다면, 시내산에서의 제바흐는 계약 식사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들어감으로 식탁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출 24:1-11). 이 두 식탁은 별개의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이 두 개의 공동식사가 공동체로 하여금 ①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계약 관계를 재확인하고, ②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공동체가 그들 가운데 실현됨을 경험하며, ③그들이 경험한 새로운 공동체가 역사 한 가운데서 이루어지리라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만나를 함께 먹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 계시되었고, 공동 식사에서 나타난 평등주의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계약 식사의 정신이 공동체의 삶 한 가운데서 실현될 수 있는 신학과 윤리가 강력하게 요구됨을 인식하였다. 성서는 이스라엘이 역사 한 가운데에 종말론적으로 임할 새로운 공동체를 얼마나 강하게 갈망하였는지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그들의 갈망 배후에는 언제나 계약 식사의 경험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공동 식사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공동 식사의 주제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의 공동체 상호간의 교제로서, 공동 식사의 의미가 완전히 공동체 안에 전달되어질 때 공동 식사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둘째, 공동 식사의 역사화의 전과정은 신학과 공동체 윤리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셋째, 공동 식사의 체험이 공동체의 삶과 연결될 때 공동체는 새로운 공동체의 건설을 위한 역동적인 힘을 얻을 수 있지만, 공동 식사의 의미가 구체적인 삶과 유리될 때 공동체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상실하게 된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많은 비유들이 식사에 관한 이야기, 즉 먹고 마심과 굶주림과 목마름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예수와 그를 따르는 무리 사이에서 이루어진 식탁의 코이노니아는 종종 하나님의 나라의' 실천된 비유'로 이해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식탁 공동체는 '사회적 실체'였으며,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식탁 공동체 안에서 ①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 나가야 할 공동체의 모습과 ②메시아의 출현과 더불어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질 공동체의 모습이 동시에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식탁은 ①사죄와 용서 ②공동체 상호간의 섬김 ③새로운 공동체의 건설로 특징 지워진다.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유월절 식사였다. 이 유월절 식사에서 예수는 '유월절 양'(고전 5:7)인 자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을 번제의 의미로만이 아닌 '제바흐'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의 죽음은 제바흐의 두 가지 기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제바흐가 희생 제물의 일부를 불에 태움으로서 속죄의 기능을 가지고 있듯이,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었고, 또한 제바흐가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남은 희생 제물의 나눔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공동체를 갈망하고 나아갔듯이,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양식으로 주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길을 따르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부활 후 제자들과 나눈 식사를 통해서 이런 사실들은 확인된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여러 형태의 식사 전승들―예수의 식탁 공동체, 십자가에 달리기 전 날밤 제자들과 함께 나눈 마지막 만찬, 부활 후 제자들과 함께 나눈 식탁들, 그리고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식탁 등 ― 은 역사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식탁들은 구약성서에서 보았던 여러 식탁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질 때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초대 교회의 식탁 공동체는 역사적 예수의 지상사역의 결과로서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①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역사적 예수가 가졌던 것과 똑같은 사회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②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식탁은 그들이 당시의 사회에 전해 내려온 식사 전승을 예수의 식탁 공동체의 빛 안에서 재해석하였다. ③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식탁은 최초의 복음서가 쓰여지기 전까지 복음서 전승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즉 역사적 예수의 식탁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의 '삶의 자리'였다면,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식탁은 복음서 전승의 삶의 자리였다.
김동선은 그의 결론 부분에서 성만찬은 신학적으로는 다양한 식사 전승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실천적으로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해 열려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의만찬은 교회와 교회가 이루어야 할 새로운 공동체의 요약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요약"이라고 하였다.
BEM의 성만찬론
이런 이해를 가지고 BEM 문서를 살필 때 더욱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A.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서의 성만찬'에서 "성만찬은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대신하여 드리는 찬양의 대제사이다"('성만찬' 4)라 했고, "성만찬은 영원히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시는 그리스도만이 유일무이하게 드릴 수 있는 희생의 성례전"('성만찬' 8)이라 했다. 이것은 제바흐가 제물의 일부를 불살라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과 비교가 된다. 제바흐는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모든 구원의 역사에 대한 감사의 제사이다. 유월절 식사가 바로 제바흐였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여 내셨기 때문이다. 또한 시내산에서 이루어진 계약 관계에서 드려진 제바흐도, 보잘 것 없던 노예인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된 데 대한 감사의 제사이다. BEM은 성부께서 창조, 구속, 성화 및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통해서 성취하셨고, 성취하실 것에 대한 감사를 말한다.
카톨릭교회에서는 성만찬을 사제에 의한 반복적인 희생 제사라 주장한다. 갈보리 산상에서 일어난 십자가상의 유일회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사제가 떡과 즙이라고 하는 봉헌된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은 반대를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유일회적인 희생 제사임을 역설하였다. BEM 문서는 "찬양의 대제사"(the great sacrifice of praise)로 표현하므로 반복적인 희생 제사로서가 아니라 감사의 제사로 이해한 것은 카톨릭교회와 개신교의 간격을 많이 좁히는데 크게 공헌한 것이라 하겠다.
한국개신교회가 성만찬을 소홀히 하므로 하나님이 하신 모든 창조와 구속의 역사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올바로 드리지 못한 것이 아닐까? 이것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체험을 최소화하고 인간 중심의 예배로 전락시키는 요인이 된 것은 아닐까? 한국 교회가 기복적인 신앙 형태를 띄게된 것도 창조와 구원에 대한 감사보다는 이기적 욕구를 앞세우기 때문이 아닐까?
다음으로, B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성만찬'에서 "성만찬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anamnesis)"('성만찬' 5)이라고 하므로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쯔빙글리는 성만찬의 주된 의미는 과거에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단회 유일적인 희생 제사를 기념하는 데 있는 동시에 이에 대한 '감사'에 있다고 주장한다.
기념(anamnesis)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과거 구원의 사건을 오늘에 재현하는 것을 뜻한다.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의 사건을 새로운 현재적인 현실성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기념은 아주 익숙한 것이었고, 역사적 예수의 성만찬도 이런 배경 속에서 제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기념은 그 사건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을 오늘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만찬에서 말하는 기념에 대한 성경의 생각은 성만찬이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예전으로써 거행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의 현재적 효과를 가리킨다"(5).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그가 이루신 모든 일들과 함께 이 기념 속에 임재하며 우리와 친히 교제를 나누신다"(6)고 하므로 '기념'과 '임재'를 분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친히 그와의 교제(communion)를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성만찬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의 식탁임을 뜻한다. 이 역시 하나님이 임재하신 자리에서 이루진 계약 식사의 관점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동시에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봄이라고 한다. 4항에서도 성만찬은 "창조주에 대한 봉헌과 찬양,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우주적 교제, 성령 안에서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인 미래의 세상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성만찬은 미래의 이상적인 새로운 공동체를 미리 맛봄이요, 동시에 그것을 지향해 가는 식탁임을 뜻한다. 완전한 코이노니아가 회복된 미래의 공동체를 미리 체험하는 자리로서의 성만찬에 대한 인식은 오늘 우리에게 많이 부족한 상태이다.
이와 같이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현재적인 코이노니아를 이룩함과 동시에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본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도전이며, 십자가로 다가온다. 그 구체적인 삶을 10항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아 있고도 거룩한 제사로 드리게 된다(롬 12:1, 벧전 2:5).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 영적인 예배는 성만찬을 통해 풍성하게 되며, 이 성만찬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화해의 종들이 되기 위하여 사랑으로 성화되고 화해된다." 거룩한 제사적 삶이란 결국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를 희생함이며, 적대적인 세계 속에서 화해의 종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다. 박종천은 그의 글에서 "진정으로 성찬을 사는 것은 위험 속에 빠진 자들과의 기념적 연대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특히 성령 안에서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인 미래의 세상을 미리 맛봄은, 오늘 모순과 불의와 증오와 분쟁으로 가득찬 세계에 대한 부정이며, 그와의 투쟁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만찬에서 경험한 코이노니아를 어떻게 통일 문제 등과 같은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교회의 운동과 연결시킬 수 있느냐 라는 과제를 안고 고민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할 때 모든 종류의 부정의, 인종차별, 인종분리주의, 자유의 결핍이 근본적으로 도전 받게 된다"(20).
그러나 이런 성만찬의 분명한 의미가 밝혀지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 선포가 동반되어야 한다. 12항이 이 점을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이 성만찬의 내용 바로 그것인 것처럼, 또한 선포된 말씀의 내용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성만찬과 선포된 말씀은 서로를 보강한다. 즉 올바른 성만찬 거행은 말씀 선포를 포함한다." 그러나 BEM문서는 말씀 선포보다 성만찬 쪽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만찬 예전의 거행은 교회 예배의 중심 되는 행사로서 계속되고 있다"고 하므로 예배의 중심이 말씀 선포가 아닌 성만찬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개혁자들의 입장과는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이형기 교수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BEM 문서의 성만찬 비교연구라는 글에서 이 점을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BEM 문서가 동방정교회와 성공회와 심지어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영향으로 성만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경향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하면서, 루터, 쯔빙글리, 칼빈의 '복음설교'에 대한 강조를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루터나 쯔빙글리나 칼빈은 다같이 복음 설교를 성만찬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쯔빙글리는 성만찬은 이 주인인 신앙의 하녀라고 하였고, 칼빈은 성례전이란 복음의 설교에 의해서 생긴 신앙을 강화시키는 또 다른 하나의 보조 수단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복음이 설교되어야 성만찬의 가시적 표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다" 고 하였다. 사실상 성만찬의 의미 그 자체가 복음이며, 이 복음이 선포될 때에 올바른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를 신앙으로 인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만찬을 소홀히 하고 복음 선포만 강조해 온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는 성만찬을 소홀히 함으로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고, 그 설교가 복음에서 멀리 벗어나 엉뚱한 강연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 개신교회의 성만찬의 회복은 시급하다고 하겠다. 칼빈은 성례전을 복음 설교의 외적인 보조 수단이라고 하였지만, 동시에 복음 설교와 함께 있어야 할 은혜의 수단임을 강조하였다.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성만찬을 그 예배의 중심으로 삼아 온 카톨릭 교회와 복음 설교를 그 예배의 중심으로 삼아 온 개신교의 현실 참여를 비교할 때 오히려 카톨릭 교회가 더 적극적이었음을 상기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카톨릭교회는 성만찬을 중심으로 하되 복음 설교도 짧지만 항상 동반된 반면, 개신교회는 복음 설교는 매주일 선포되지만, 성만찬은 1년에 두 번 정도에 그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셋째로, '성령 초대로서의 성만찬'은 성만찬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 부분으로서, 성령은 모든 코이노니아를 가능케 하시는 사랑의 힘이라고 한다. "성령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만찬 때 우리에게 실제로 임재 하도록 하시며, 성만찬 제정 때 하신 말씀에 담긴 약속을 성취하신다." "성령은 성만찬을 가능케 하시며 성찬식이 계속해서 유효하도록 만드시는 무한한 사랑의 힘이다"(14). 14항 해설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만찬 임재를 영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 사이의 불가분리적인 연합을 확증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만찬 사건의 근원이 되시며 궁극적으로 성취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만찬의 중심인 하나님의 성육신 하신 아들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로 체험케 하시는 성령의 힘, 결국 성만찬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코이노니아를 동시에 체험하게 되는 것이며, 아울러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은 또한 "성만찬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한다"(18)고도 하였다. 기념이 순히 회상이 아닌 현재적 경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오직 성령이 가능하게 하시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런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동방 교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성령론의 새로운 발견이라 할 수 있다. WCC가 칸베라 총회의 주제를 성령으로 정한 것도 이런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구속사에 함께 하신 성령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활발하게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특히 성령의 은사에 깊은 관심과 체험을 가지고 있으나 성령의 역사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므로 성령 운동이 대체로 잘못 전개되어 많은 부작용을 낳게 만들었다. 성자와 불가분리적인 연합을 이룬 성령이라면, 그의 역사 또한 성자가 이루신 구속의 사건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령 운동은 은사 중심이 아닌 구속사 중심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에서는 앞 부분에서 달리 수평적인 코이노니아를 다루고 있다. 앞부분에서는 믿는 자들이 성만찬 예전에서 성령과 제정의 말씀을 통하여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사업을 만난다는 사실을 말했다. 즉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코이노니아를 다루었다. 여기서는 믿는 자들의 수평적인 사귐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교회의 삶을 양육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성만찬적 사귐은 동시에 교회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충분히 드러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성만찬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제바흐에 참여한 공동체 상호간의 코이노니아에 해당한다.
성만찬을 통한 성도의 교제는 동시에 역사와 사회 속에서의 기독교적 책임으로 이어진다. "성만찬 의식은 하나님의 한가족 안에서 형제자매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 간의 화해와 동참을 요구하며 사회, 경제, 정치적 삶 속에서 합당한 관계를 추구하도록 촉구는 끊임없는 도전이 된다. ...성만찬은 신자들을 세계사의 중심적 사건과 연결시켜 준다"(20). 성만찬에 참여한 신자들이 이 세계 속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그리고 불의와 분열과 교파주의 같은 것들을 계속한다면 언제나 심판 아래 놓여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 문서는 강력하게 교회의 선교적 범위를 세계사의 중심적 사건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이런 해석은 이제까지 전도에만 열중하던 교회들이나, 교회와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던 교회들에게는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성만찬론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던 이런 이해는 시대적 상황 변화에 따른 선교신학의 영향일 것이다. 이런 점은 다음 항에서 더욱 분명하게 천명되고 있다.
끝으로,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에서 성만찬은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며, 이 땅에 나타난 그 나라의 징표들에 대해 감사를 드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임해 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쁜 마음으로 기념하고 또 고대하는 축제"라고 하였다(22).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는 축제인 성만찬에 참여한 자들은 버림받은 자들과 연대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셨던 그리스도의 사랑의 징표가 되도록 화해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면서, "성만찬을 거행하는 자체가 교회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증거"(25)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선교가 효과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이 성만찬 교제를 통하여 연합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26). 이 부분에 대하여 세계 교회들은 광범위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고 하였다.
축제로서의 성만찬과 하나님의 선교에 이어지는 성만찬에 대한 이해는 한국 교회에는 결여되어 있는 부분이다. 한국 교회는 지나치게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실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BEM 문서에 나타난 성만찬의 코이노니아는 세 방향으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 둘째는 성도간의 코이노니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계와의 코이노니아가 그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는 성부께 대한 감사의 제사(sacrifice)와 성자에 대한 기념(anamnesis)과 성령의 초대(epiklisis)로 이루어지며, 성도간의 코이노니아는 교회 일치로 발전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고, 세계와의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 선교를 통하여 실현되어야 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형기 교수가 종교개혁자들의 성찬론과 BEM의 성찬론을 비교 연구한 논문에서 대체로 개혁교회들이 이 성찬론을 수렴하는데 있어 신학적으로 별 문제가 없음을 밝힌 바대로 한국 교회는 적극적으로 이를 수렴하므로 세계 교회와의 연대와 일치를 이루어감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너무도 이런 중요한 성만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던 한국 교회들에게 이를 널리 알리고, 성만찬 횟수를 증가시키며, BEM의 성만찬론에 따른 예식서들을 발간하여 보급함이 시급하다. 이런 노력들은 한국 교회 일치를 위해서나, 교회의 적극적이 사회 참여를 위해서나, 그리고 이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이전글 해방신학의 올바른 이해 02.06.25
- 다음글 목회지도력의 영성적 차원 02.06.2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