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개론 - 제6장 부록-왕조시대의 개혁과 포로기 이후의 개혁, 참고도서
본문
제6장 부록-왕조시대의 개혁과 포로기 이후의 개혁
A. 왕조시대의 개혁
왕조시대에 있었던 개혁 중 비교적 그 형태가 뚜렷하고 분명한 것은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이다. 히스기야는 주전 715-687년에 유다왕조를 통치했던 왕이다. 히스기야의 개혁은 정치적 개혁과 종교적 개혁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1. 히스기야의 개혁
히스기야의 정치적 개혁의 동기는 그의 아버지 아하스왕의 친앗수르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앗수르의 침공을 막기 위해 굴욕적인 봉신의 입장에서 떠받들고 조공을 받쳐야 했다. 더우기 솔로몬 성전에 앗수르의 신을 위한 제단까지 만들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이처럼 유다는 모든 면에서 자신들의 자주권을 상실하였다. 아하스의 뒤를 이은 히스기야는 비교적 신중하게 앗수르에 대한 정책을 펼치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 기회는 앗수르의 사르곤 대왕이 죽고 그 아들 산헤립(704-681)이 즉위하고 앗수르 제국내의 바벨론에서 므로닥-발라단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 산헤립의 통치권을 약화시키고, 블레셋, 모압, 에돔 등 앗수르 서남부지역과 에집트가 결합하여 반앗수르정책을 취하자 그동안 기회를 노리던 히스기야도 이 정책에 가담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바쳐오던 조공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앗수르의 보복을 예상하여 예루살렘성을 비롯하여 요새들을 강화하였다(역하 32:3-5).
이러한 히스기야의 정책은 그의 민족심과 야훼숭배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히스기야의 정책이 산헤립의 보복성 침공으로 비록 무산되었지만 그의 정책은 이스라엘의 독립의지를 표명한데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그의 종교개혁에서는 이러한 정신이 더욱 잘 표출되고 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우선 그는 그의 부친 아하스가 만들어 놓은 앗수르 신의 제단과 앗수르의 종교를 상징하는 물건들은 제거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속신앙의 상징인 산당과 주상, 그리고 아세라 목상을 제거한다.(왕상18:4) 히스기야의 개혁에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모세가 만들었던 구리뱀을 제거한 사건이다. 지금까지는 구리뱀이 야훼종교와 별 마찰 없이 공존할 수 있었지만 점차로 야훼 종교의식이 발전되면서 가나안의 풍요종교의 상징인 뱀과 결탁되어 감을 인식하고 히스기야의 개혁에서 이를 제거한 것이다.
히스기야는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거국적인 유월절 행사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 유다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의 옛 영토까지 사람을 보내어 예루살렘 유월절 축제에 초대하였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에게 분단된 이스라엘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 요시야의 개혁
요시야가 즉위할 무렵에는 팔레스틴에 대한 앗수르의 지배력이 상당히 약화되고 있었다. 결국 앗수르는 나보폴라살에 의해 수도 니느웨가 멸망당하고 말았다. 유다의 요시야왕은 이런 절호의 기회를 틈타 국가독립의 기회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요시아의 정치개혁은 우선 사마리아와 므기또, 그리고 갈릴래아 지방을 쳐서 유다에 합병하였다. 그리고 요빠에까지 이르는 지중해 해안지역도 이 때 회복하여 그의 나라에 예속시켰던 것 같다. 이러한 요시야의 독립정책을 앗수르는 저지할 힘이 없었다. 앗수르는 612년에 수도 니느웨가 함락됨으로 멸망하게되었다. 요시야는 결국 이런 기회를 잘 포착하였으며 결국 그의 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의 종교개혁은 성전수리로 부터 시작되었다(왕하 22:1-7). 이 과정에서 율법책이 발견되고 개혁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이스라엘의 합법적인 유일한 성소라는 정책에 따라 지방에 산재해 있는 모든 지방성소와 산당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앗수르의 제단을 헐고 앗수르의 제의를 폐쇄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각종 제의와 우상숭배제도를 금지하였다. 요시야에게서도 히스기야와 만찬가지로 유월절행사가 종교개혁의 절정이 되었다(대하 35:1-19). 그는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유월절 행사를 치루었다. 이와같이 남북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 유월절행사를 치룬 것은 사무엘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요시야의 개혁도 위에서 살핀 것처럼 히스기야의 개혁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3. 히스기야와 요시야 개혁의 특징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을 통해 왕조시대의 개혁을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왕조시대의 개혁은 왕실 주도하에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
히스기야의 개혁과 요시야의 개혁에 나타난 특징은 첫째, 통일된 옛 이스라엘의 재건과 이에 따른 영토회복에 관심을 갖는다. 둘째, 유다왕정의 주도하의 온 이스라엘의 재통일을 위한 구심점으로 예루살렘을 재구축할 필요를 느낀다. 세째, 다윗 왕조의 전이스라엘 통치권을 다시 주장하고, 그 아래 남, 북 이스라엘의 재통일이라는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특징들은 제의의 중앙 집중화와 반 앗수르 정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로 나타난다.
B. 포로기 이후 개혁
1. 에스라의 종교 개혁
율법학자요, 서기관이요, 제사장인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의 위탁을 받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다. 에스라의 임무는 귀향한 공동체의 종교 생활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즉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르치고 거기에 따라 종교적 생활을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다(스7:25f). 한편 그의 권한은 유다에만 한정되지 않고 강 서편에 살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적용된다. 에스라는 그밖에도 성전을 지원하기 위해 바벨론에 남아있는 포로민들로부터 기부를 받고(스7:15-19), 더 많은 비용이 소용 될 경우에는 왕실의 내탕고나 지방 행정기관의 공고를 일정한 한도내에서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스7:20-22).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잡혼이 성행하고 있었다. 에스라는 단호한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서술하면서 현 상태의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 설명을 했다(스 9장). 그러나 이에 대한 반응이 없자, 그는 대단히 격한 감정을 드러내어 울면서 야웨 앞에 백성들의 죄를 고백하니, 마침내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율법을 어긴 자들의 죄를 인정하고(스10:1-5), 자발적으로 이방인 아내들과 이혼할 것을 약속하면서 에스라가 어떤 조치를 취하더라도 그를 지지하겠다고 서약한다. 그 다음 에스라가 계속하여 단식하고 기도하는 동안, 방백들과 장로들은 모든 백성에게 사흘 안에 예루살렘에 출두하라고 명령하고 만약 불응할 때는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스 10:6-8).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그들은 에스라의 질책을 듣기 위해 성전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스 10:9). 백성들은 일기가 불순하고 또 진상을 조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겨 에스라에게 얼마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스10:6-8). 그리하여 에스라가 임명한 위원회가 진상조사를 하게되어, 일은 즉시 착수되어 3개월 후에 그들의 일은 마무리된다(스10:16-17). 그 후 모든 잡혼이 파기, 해소된다(스 10:44). 잡혼문제가 파기되자 에스라는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하고 가지고 온 율법서를 낭독한다. 백성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도 덧붙여지고 있다(느 8:7-8). 백성들은 너무 감격하여 땅에 엎드려서 운다(느 8:9). 에스라는 주의 성일의 기쁨을 이야기하면서 가까스로 그들의 울음을 제지한다. 다음날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사적으로 가르쳐 주고(느 8:13f), 초막 축제를 지내는 동안, 매일 율법을 더 자세히 읽어준다. 그 후 그들은 율법을 따라 살기로 서약한다(느 9:38, 10:29). 특히, 그들은 앞으로 다시는 이방인들과 혼인하지 않고,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으며, 7년마다 땅을 묵히고, 빚준 것 거두기를 포기하겠다고 서약한다(느 10:30-39). 그들은 또 성소를 유지를 위해 매년 스스로 세금을 부담하고, 제단에 쓰일 나무, 첫 수확물, 십일조를 율법이 규정한 대로 바치는 데 유의하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하여 율법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조직하는 에스라의 임무는 완수된 것이다. 에스라에 의해 율법서는 백성들 앞에서 낭독되었으며 이후로 모세의 율법을 중심으로한 종교적 공동체로서 자기의식을 재정립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느헤미야는 실제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공경에서 구하고, 그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게 하고 공정한 행정을 실시하였을 뿐 아니라, 종교적 악습에 대해서도 단호한 조치를 하였다. 에스라는 주로 종교적 생활질서를 바로 잡는 일을 행하여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공동체로서 자기의식을 재정립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붕괴직전에 구하고 제 갈 길을 들어서게 한 공로를 종교적 개혁사업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주고 부추긴 느헤미야에게 돌릴 수 있다. 또한 가지고 온 율법서로 백성들의 삶을 바로잡은 에스라 역시 중요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역대기사가는 주로 종교문제에 대한 관심이 컸으므로 느헤미야의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서의 활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주로 종교적 임무만을 수행한 에스라의 활동을 우선적인 것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포로기 이후 공동체에서 전개된 개혁사업의 주요 공로를 에스라에게 돌리고 있다
2. 에스라 개혁의 특징 ( 종교 개혁의 결과)
에스라가 에루살렘과 유다에서 차례로 착수하였으며 그를 종교적인 개혁자요, 유대교 본래의 기초자로서 지시하는 두 가지 특징적인 조치들이 있었다.
첫째는 율법을 백성들에게 낭독한 행위이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후 좌절했던 공동체에게 새로운 시도가 되었다. 둘째는 그의 시대에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 하는 데 율법의 규정을 엄격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잡혼에 관한 문제였다. 물론 이런 조치는 달갑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오래된 토착민들은 자기 딸들이 소박을 맞고. 그들 모두가 예루살렘에서 부정한자로 따돌려진데 대해 격분하였을 것이다. Fohrer는 아마 소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8
에스라의 사업은 유대와 예루살렘의 명백한 법률과 한계를 형성하는 점에 있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정책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정책은 그 광대한 왕국 전역에 통용되는 법률을 선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방에 따라 조상 전래의 법률 체제를 국법으로 인가해 주는 것이다. 에스라가 유대교의 조상이 된다는 사실은 에스라 이후 이스라엘-유다의 율법이 페르시아의 국법으로 효과를 발생하였다는 것이된다.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야웨의 숭배자로서 인정을 받고, 유대인으로서 모든 법적 보장을 받으려면 이 율법을 지켜야 했다. 그 율법이 누구에게 적용되며, 누가 유대의 법령에 복종해야 되는지를 설명하고, 규정하는 것이 에스라의 조직적인 과제였다.
유대교룰 위한 에스라의 업적은 매우 중요하였다. 사람들은 후에 그를 모세와 동일하게 놓았으며, 모세의 업적의 계승자요, 완성자로 표현했다. 사실상 에스라는 본래적인 유대교를 세우고, 역사, 율법과 함께 그 신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에스라의 활동은 유대공동체를 보존할 수 있었다.
3. 느헤미야의 개혁
느헤미야 개혁의 발생은 시대적인 정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벨론의 멸망과 동시에 한차례의 전환점을 맞은 이스라엘은 고레스의 칙령을 통하여 성전 재건의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느헤미야 이전까지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만큼의 원활한 공동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공동체 내부로 부터 종교적, 도덕적 기풍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직무에 태만하여 흠있는 제물을 바쳤고(말 1:6-14), 안식일이 무시되었으며(느 13:15-22), 더 나아가 이혼이 성행하여 사회문제가 되었으며(말 2:13-16), 약한 동포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고용인들이 늘어났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종교적 도덕적 광범위한 문란으로 공동체가 내부로부터 붕괴 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19 이런 모습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방인과의 통혼이 통례가 되었던 것에서 단적으로 증명되고 있다(느 13:23-27).
그들은 여전히 자치적인 국가를 갖지 못했으며 따라서 다른 나라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위치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 공동체는 장기간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 그 공동체가 깨어질 수밖에 없는 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는 역사적 어려움 속에서 존속하였다. 공동체가 존속할 수 있었던 그 요인은 바로 느헤미야가 실시한 개혁에서 비롯되고 있다.
느헤미야는 445년 아닥사스다Ⅰ세때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자 유다 총독의 직분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428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느헤미야와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다(느 2장).
성벽재건은 산발랏과 토비야 같은 반대 세력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 당시 민중들과 더불어 성벽을 완공하였다. 이 성벽작업에 참여했던 민중들은 자신들의 생활고에 의한 어려움을 폭로하고 느헤미야는 이들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1차 개혁).
느헤미야의 1차 개혁의 특징은 구약의 약자보호법 중 희년법에 의한 조치였기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구약성서가 알려주는, 이른바 약자보호법에 근거하여 개혁을 하였던 것이다. 희년법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시되었던 근거는 찾아 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유일하게 느헤미야 개혁에서 희년법에 의한 조치가 있었다. 비록 시기적으로 정확하게 희년이 되어서 실시한 개혁은 아니었지만 현대까지 이스라엘 역사에서 단 한번 있었던 유일한 예이다.
느헤미야의 2차 개혁에서는 그 동안 와해되었던 예루살렘의 성전제의에 대한 조치를 하면서 예루살렘을 중심한 유다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시키고 있다. 유다 공동체에게 닥친 신앙적 위기를 이스라엘의 정통성 회복을 통하여 정체성을 확립하여 대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개혁의 결과로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는 자신들의 운명과 공동체의 방향성을 페르시아의 정책이나, 타자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의 외부적인 형태는 페르시아등 강대국의 식민지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공동체내부에서는 시대적 어려움을 자각하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하여 스스로 선택하여,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후대의 유대교의 모습이 국수주의적이고 율법적인 형태를 띠었으며, 그 원인이 느헤미야 개혁에서 비롯되었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또한 개혁을 통하여 지향하고자 했던 평등 공동체의 모습이 외부적인 형태로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을 지라도 그 정신은 공동체내부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 개혁이 이루어 놓은 보물과 같은 결과이다.
이제, 구약성서를 읽는 독자들이라면 느헤미야의 개혁의 결과가 단지 후대 유대교에서 느끼게 되는 율법중심의 국수주의적 틀만을 제공하였다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딛고 사는 땅은 하늘나라가 아니며, 따라서 완벽한 그 어떤 사상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느헤미야의 개혁도 후대에 올바른 평가를 내린다면 느헤미야는 총독의 권리를 포기하며 이스라엘이라는 위기의 공동체를 이끌어간 지도자 입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였던 것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이런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며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서 그의 정신이 계속 살아 숨쉬도록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느헤미야가 왕이 없는 시대에서 왕의 역할과 예언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왕조시대에서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왕조의 부패함을 지적하고 백성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었다.(20 그러나 포로기 이후 예언이 사라지고 율법이 강조되는 시대에 누가 민중을 대변해 줄 것인가? 느헤미야는 그가 비록 총독의 위치에 있었지만 백성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예언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한편으로 그는 왕이 아니었지만, 중앙 예루살렘에서 왕의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느헤미야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주로 느헤미야 개인에 집중하고 있다.
박준서 교수는 느헤미야를 유능하고, 솔선수범하였던 청렴한 총독이였으며 이스라엘 역사중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21
장일선 교수는 느헤미야의 비망록을 의지에 찬 한 사람의 산 기록으로 보고, 불굴의 사나이 느헤미야의 정신이 온 인류의 유산이 되었다고 한다.(22
느헤미야는 그가 실시한 개혁 조치에서 희년정신을 실현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의 공동체는 가진자가 더 갖지 않게 되었으며 상대적 못 가진자가 갖게하는 평등한 사회로 개혁되였다(1차 개혁). 이런 느헤미야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개인은 느헤미야 당시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에서 용납되지 않았다(2차 개혁).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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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왕조시대의 개혁
왕조시대에 있었던 개혁 중 비교적 그 형태가 뚜렷하고 분명한 것은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이다. 히스기야는 주전 715-687년에 유다왕조를 통치했던 왕이다. 히스기야의 개혁은 정치적 개혁과 종교적 개혁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1. 히스기야의 개혁
히스기야의 정치적 개혁의 동기는 그의 아버지 아하스왕의 친앗수르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앗수르의 침공을 막기 위해 굴욕적인 봉신의 입장에서 떠받들고 조공을 받쳐야 했다. 더우기 솔로몬 성전에 앗수르의 신을 위한 제단까지 만들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이처럼 유다는 모든 면에서 자신들의 자주권을 상실하였다. 아하스의 뒤를 이은 히스기야는 비교적 신중하게 앗수르에 대한 정책을 펼치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 기회는 앗수르의 사르곤 대왕이 죽고 그 아들 산헤립(704-681)이 즉위하고 앗수르 제국내의 바벨론에서 므로닥-발라단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 산헤립의 통치권을 약화시키고, 블레셋, 모압, 에돔 등 앗수르 서남부지역과 에집트가 결합하여 반앗수르정책을 취하자 그동안 기회를 노리던 히스기야도 이 정책에 가담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바쳐오던 조공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앗수르의 보복을 예상하여 예루살렘성을 비롯하여 요새들을 강화하였다(역하 32:3-5).
이러한 히스기야의 정책은 그의 민족심과 야훼숭배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히스기야의 정책이 산헤립의 보복성 침공으로 비록 무산되었지만 그의 정책은 이스라엘의 독립의지를 표명한데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그의 종교개혁에서는 이러한 정신이 더욱 잘 표출되고 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우선 그는 그의 부친 아하스가 만들어 놓은 앗수르 신의 제단과 앗수르의 종교를 상징하는 물건들은 제거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가나안의 토속신앙의 상징인 산당과 주상, 그리고 아세라 목상을 제거한다.(왕상18:4) 히스기야의 개혁에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모세가 만들었던 구리뱀을 제거한 사건이다. 지금까지는 구리뱀이 야훼종교와 별 마찰 없이 공존할 수 있었지만 점차로 야훼 종교의식이 발전되면서 가나안의 풍요종교의 상징인 뱀과 결탁되어 감을 인식하고 히스기야의 개혁에서 이를 제거한 것이다.
히스기야는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거국적인 유월절 행사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 유다뿐만 아니라 북왕국 이스라엘의 옛 영토까지 사람을 보내어 예루살렘 유월절 축제에 초대하였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에게 분단된 이스라엘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 요시야의 개혁
요시야가 즉위할 무렵에는 팔레스틴에 대한 앗수르의 지배력이 상당히 약화되고 있었다. 결국 앗수르는 나보폴라살에 의해 수도 니느웨가 멸망당하고 말았다. 유다의 요시야왕은 이런 절호의 기회를 틈타 국가독립의 기회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요시아의 정치개혁은 우선 사마리아와 므기또, 그리고 갈릴래아 지방을 쳐서 유다에 합병하였다. 그리고 요빠에까지 이르는 지중해 해안지역도 이 때 회복하여 그의 나라에 예속시켰던 것 같다. 이러한 요시야의 독립정책을 앗수르는 저지할 힘이 없었다. 앗수르는 612년에 수도 니느웨가 함락됨으로 멸망하게되었다. 요시야는 결국 이런 기회를 잘 포착하였으며 결국 그의 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그의 종교개혁은 성전수리로 부터 시작되었다(왕하 22:1-7). 이 과정에서 율법책이 발견되고 개혁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이스라엘의 합법적인 유일한 성소라는 정책에 따라 지방에 산재해 있는 모든 지방성소와 산당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앗수르의 제단을 헐고 앗수르의 제의를 폐쇄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각종 제의와 우상숭배제도를 금지하였다. 요시야에게서도 히스기야와 만찬가지로 유월절행사가 종교개혁의 절정이 되었다(대하 35:1-19). 그는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유월절 행사를 치루었다. 이와같이 남북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 유월절행사를 치룬 것은 사무엘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요시야의 개혁도 위에서 살핀 것처럼 히스기야의 개혁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3. 히스기야와 요시야 개혁의 특징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을 통해 왕조시대의 개혁을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왕조시대의 개혁은 왕실 주도하에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
히스기야의 개혁과 요시야의 개혁에 나타난 특징은 첫째, 통일된 옛 이스라엘의 재건과 이에 따른 영토회복에 관심을 갖는다. 둘째, 유다왕정의 주도하의 온 이스라엘의 재통일을 위한 구심점으로 예루살렘을 재구축할 필요를 느낀다. 세째, 다윗 왕조의 전이스라엘 통치권을 다시 주장하고, 그 아래 남, 북 이스라엘의 재통일이라는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특징들은 제의의 중앙 집중화와 반 앗수르 정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로 나타난다.
B. 포로기 이후 개혁
1. 에스라의 종교 개혁
율법학자요, 서기관이요, 제사장인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의 위탁을 받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다. 에스라의 임무는 귀향한 공동체의 종교 생활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즉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르치고 거기에 따라 종교적 생활을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다(스7:25f). 한편 그의 권한은 유다에만 한정되지 않고 강 서편에 살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적용된다. 에스라는 그밖에도 성전을 지원하기 위해 바벨론에 남아있는 포로민들로부터 기부를 받고(스7:15-19), 더 많은 비용이 소용 될 경우에는 왕실의 내탕고나 지방 행정기관의 공고를 일정한 한도내에서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스7:20-22).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잡혼이 성행하고 있었다. 에스라는 단호한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서술하면서 현 상태의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 설명을 했다(스 9장). 그러나 이에 대한 반응이 없자, 그는 대단히 격한 감정을 드러내어 울면서 야웨 앞에 백성들의 죄를 고백하니, 마침내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율법을 어긴 자들의 죄를 인정하고(스10:1-5), 자발적으로 이방인 아내들과 이혼할 것을 약속하면서 에스라가 어떤 조치를 취하더라도 그를 지지하겠다고 서약한다. 그 다음 에스라가 계속하여 단식하고 기도하는 동안, 방백들과 장로들은 모든 백성에게 사흘 안에 예루살렘에 출두하라고 명령하고 만약 불응할 때는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스 10:6-8).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그들은 에스라의 질책을 듣기 위해 성전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스 10:9). 백성들은 일기가 불순하고 또 진상을 조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겨 에스라에게 얼마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스10:6-8). 그리하여 에스라가 임명한 위원회가 진상조사를 하게되어, 일은 즉시 착수되어 3개월 후에 그들의 일은 마무리된다(스10:16-17). 그 후 모든 잡혼이 파기, 해소된다(스 10:44). 잡혼문제가 파기되자 에스라는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하고 가지고 온 율법서를 낭독한다. 백성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도 덧붙여지고 있다(느 8:7-8). 백성들은 너무 감격하여 땅에 엎드려서 운다(느 8:9). 에스라는 주의 성일의 기쁨을 이야기하면서 가까스로 그들의 울음을 제지한다. 다음날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사적으로 가르쳐 주고(느 8:13f), 초막 축제를 지내는 동안, 매일 율법을 더 자세히 읽어준다. 그 후 그들은 율법을 따라 살기로 서약한다(느 9:38, 10:29). 특히, 그들은 앞으로 다시는 이방인들과 혼인하지 않고,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으며, 7년마다 땅을 묵히고, 빚준 것 거두기를 포기하겠다고 서약한다(느 10:30-39). 그들은 또 성소를 유지를 위해 매년 스스로 세금을 부담하고, 제단에 쓰일 나무, 첫 수확물, 십일조를 율법이 규정한 대로 바치는 데 유의하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하여 율법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조직하는 에스라의 임무는 완수된 것이다. 에스라에 의해 율법서는 백성들 앞에서 낭독되었으며 이후로 모세의 율법을 중심으로한 종교적 공동체로서 자기의식을 재정립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느헤미야는 실제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공경에서 구하고, 그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게 하고 공정한 행정을 실시하였을 뿐 아니라, 종교적 악습에 대해서도 단호한 조치를 하였다. 에스라는 주로 종교적 생활질서를 바로 잡는 일을 행하여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공동체로서 자기의식을 재정립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붕괴직전에 구하고 제 갈 길을 들어서게 한 공로를 종교적 개혁사업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주고 부추긴 느헤미야에게 돌릴 수 있다. 또한 가지고 온 율법서로 백성들의 삶을 바로잡은 에스라 역시 중요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역대기사가는 주로 종교문제에 대한 관심이 컸으므로 느헤미야의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서의 활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주로 종교적 임무만을 수행한 에스라의 활동을 우선적인 것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포로기 이후 공동체에서 전개된 개혁사업의 주요 공로를 에스라에게 돌리고 있다
2. 에스라 개혁의 특징 ( 종교 개혁의 결과)
에스라가 에루살렘과 유다에서 차례로 착수하였으며 그를 종교적인 개혁자요, 유대교 본래의 기초자로서 지시하는 두 가지 특징적인 조치들이 있었다.
첫째는 율법을 백성들에게 낭독한 행위이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후 좌절했던 공동체에게 새로운 시도가 되었다. 둘째는 그의 시대에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 하는 데 율법의 규정을 엄격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잡혼에 관한 문제였다. 물론 이런 조치는 달갑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오래된 토착민들은 자기 딸들이 소박을 맞고. 그들 모두가 예루살렘에서 부정한자로 따돌려진데 대해 격분하였을 것이다. Fohrer는 아마 소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8
에스라의 사업은 유대와 예루살렘의 명백한 법률과 한계를 형성하는 점에 있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정책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정책은 그 광대한 왕국 전역에 통용되는 법률을 선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방에 따라 조상 전래의 법률 체제를 국법으로 인가해 주는 것이다. 에스라가 유대교의 조상이 된다는 사실은 에스라 이후 이스라엘-유다의 율법이 페르시아의 국법으로 효과를 발생하였다는 것이된다.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야웨의 숭배자로서 인정을 받고, 유대인으로서 모든 법적 보장을 받으려면 이 율법을 지켜야 했다. 그 율법이 누구에게 적용되며, 누가 유대의 법령에 복종해야 되는지를 설명하고, 규정하는 것이 에스라의 조직적인 과제였다.
유대교룰 위한 에스라의 업적은 매우 중요하였다. 사람들은 후에 그를 모세와 동일하게 놓았으며, 모세의 업적의 계승자요, 완성자로 표현했다. 사실상 에스라는 본래적인 유대교를 세우고, 역사, 율법과 함께 그 신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에스라의 활동은 유대공동체를 보존할 수 있었다.
3. 느헤미야의 개혁
느헤미야 개혁의 발생은 시대적인 정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벨론의 멸망과 동시에 한차례의 전환점을 맞은 이스라엘은 고레스의 칙령을 통하여 성전 재건의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느헤미야 이전까지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만큼의 원활한 공동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공동체 내부로 부터 종교적, 도덕적 기풍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직무에 태만하여 흠있는 제물을 바쳤고(말 1:6-14), 안식일이 무시되었으며(느 13:15-22), 더 나아가 이혼이 성행하여 사회문제가 되었으며(말 2:13-16), 약한 동포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고용인들이 늘어났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종교적 도덕적 광범위한 문란으로 공동체가 내부로부터 붕괴 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19 이런 모습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방인과의 통혼이 통례가 되었던 것에서 단적으로 증명되고 있다(느 13:23-27).
그들은 여전히 자치적인 국가를 갖지 못했으며 따라서 다른 나라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위치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 공동체는 장기간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 그 공동체가 깨어질 수밖에 없는 위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는 역사적 어려움 속에서 존속하였다. 공동체가 존속할 수 있었던 그 요인은 바로 느헤미야가 실시한 개혁에서 비롯되고 있다.
느헤미야는 445년 아닥사스다Ⅰ세때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자 유다 총독의 직분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428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느헤미야와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다(느 2장).
성벽재건은 산발랏과 토비야 같은 반대 세력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 당시 민중들과 더불어 성벽을 완공하였다. 이 성벽작업에 참여했던 민중들은 자신들의 생활고에 의한 어려움을 폭로하고 느헤미야는 이들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1차 개혁).
느헤미야의 1차 개혁의 특징은 구약의 약자보호법 중 희년법에 의한 조치였기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구약성서가 알려주는, 이른바 약자보호법에 근거하여 개혁을 하였던 것이다. 희년법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시되었던 근거는 찾아 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유일하게 느헤미야 개혁에서 희년법에 의한 조치가 있었다. 비록 시기적으로 정확하게 희년이 되어서 실시한 개혁은 아니었지만 현대까지 이스라엘 역사에서 단 한번 있었던 유일한 예이다.
느헤미야의 2차 개혁에서는 그 동안 와해되었던 예루살렘의 성전제의에 대한 조치를 하면서 예루살렘을 중심한 유다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시키고 있다. 유다 공동체에게 닥친 신앙적 위기를 이스라엘의 정통성 회복을 통하여 정체성을 확립하여 대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개혁의 결과로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는 자신들의 운명과 공동체의 방향성을 페르시아의 정책이나, 타자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의 외부적인 형태는 페르시아등 강대국의 식민지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공동체내부에서는 시대적 어려움을 자각하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하여 스스로 선택하여,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후대의 유대교의 모습이 국수주의적이고 율법적인 형태를 띠었으며, 그 원인이 느헤미야 개혁에서 비롯되었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또한 개혁을 통하여 지향하고자 했던 평등 공동체의 모습이 외부적인 형태로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을 지라도 그 정신은 공동체내부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 개혁이 이루어 놓은 보물과 같은 결과이다.
이제, 구약성서를 읽는 독자들이라면 느헤미야의 개혁의 결과가 단지 후대 유대교에서 느끼게 되는 율법중심의 국수주의적 틀만을 제공하였다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딛고 사는 땅은 하늘나라가 아니며, 따라서 완벽한 그 어떤 사상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느헤미야의 개혁도 후대에 올바른 평가를 내린다면 느헤미야는 총독의 권리를 포기하며 이스라엘이라는 위기의 공동체를 이끌어간 지도자 입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였던 것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이런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며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서 그의 정신이 계속 살아 숨쉬도록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느헤미야가 왕이 없는 시대에서 왕의 역할과 예언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왕조시대에서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왕조의 부패함을 지적하고 백성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었다.(20 그러나 포로기 이후 예언이 사라지고 율법이 강조되는 시대에 누가 민중을 대변해 줄 것인가? 느헤미야는 그가 비록 총독의 위치에 있었지만 백성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예언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한편으로 그는 왕이 아니었지만, 중앙 예루살렘에서 왕의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느헤미야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주로 느헤미야 개인에 집중하고 있다.
박준서 교수는 느헤미야를 유능하고, 솔선수범하였던 청렴한 총독이였으며 이스라엘 역사중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21
장일선 교수는 느헤미야의 비망록을 의지에 찬 한 사람의 산 기록으로 보고, 불굴의 사나이 느헤미야의 정신이 온 인류의 유산이 되었다고 한다.(22
느헤미야는 그가 실시한 개혁 조치에서 희년정신을 실현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의 공동체는 가진자가 더 갖지 않게 되었으며 상대적 못 가진자가 갖게하는 평등한 사회로 개혁되였다(1차 개혁). 이런 느헤미야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개인은 느헤미야 당시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에서 용납되지 않았다(2차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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