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의 올바른 이해
본문
1. 물음의 성격
1-1. 서언
우리는 지금 엄청난 역사의 변혁기에 살고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동구권에 불어닥친 개혁의 바람은 이제는 동구의 블럭을 무너뜨린 태풍으로 변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미소 강대국을 주축으로 이원화되었던 국제질서도 이제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때에 도달했다. 냉전체제의 종말로 인해서 소련과 동구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수민족들의 독립요구와 제 3세계에서의 민주화와 경제적 독립을 위한 투쟁들은 새 시대를 낳으려는 해산의 고통이다. 앞으로 어떠한 사상, 제도 그리고 이념이 세계를 이끌어 나갈 '방향타'로 등장할 것인가?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를 극복하고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있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섣불리 주장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말들은 모두 냉전 이데올로기의 소산물들이다. 인간의 자유로부터 출발해서 경제적 평등에 이르고자 한 자본주의나 경제적 평등에서부터 출발해서 인간의 자유에 이르고자한 사회주의나 모두 다 목표점에 이르지 못할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력의 편중화로 인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초래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며, 사회주의권에서는 생산력의 저하로 인해서 가난으로 평준화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앞으로 세계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날 세계는 대립과 긴장, 갈등과 투쟁으로부터 화해와 평화로 향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 3세계 민중들은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불평등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현실 속에서 책임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학의 기능과 교회의 역할은 또한 무엇인가?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제 3세계 민중들은 그들이 겪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및 사회적 제 모순들의 근본적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억압과 착취를 영속시키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방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우리가 이 시간 살펴보고자 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이러한 민중들의 해방투쟁 과정 속에서 생겨난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지난 20여 년에 걸쳐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지배적인 신학으로 등장해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해방신학 주창자들은 해방신학이야 말로 모든 신학적 사고의 모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이는 해방신학자들이 과학적 분석방법을 통하여 경험적 근거에서 인간의 가장 절박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더불어서 해방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서구신학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그 허구성이나 맹점들을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삶의 현실들을 분석해냄으로서 지적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전 세계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 만큼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것은 해방신학이 갖고 있는 자체의 특이성 때문이다. 그 특이성을 표현해 본다면, 해방신학은 서구 신학과는 달리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의 삶의 현장을 신학의 가장 중요한 자리로 삼고 있으며, 이러한 자리를 근거로 하여 성서를 해석하며, 억압과 가난으로부터 민중의 해방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기독교의 사랑을 이해하며,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분석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해방신학은 전통적인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해방신학자들은 그들의 선험적인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복음을 악용하고 있으며, 기독교 구원의 보편성을 훼손하면서 가난한 자들의 편에선 당파적 신학이며 마르크스 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관점을 채택함에 있어서 너무 비현실적이고 무비판적이기 때문에 해방신학은 신학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이다. 그리고 해방신학이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무시하는 극히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신학이라는 비판이다.
1-2. 글의 전개방법
60년대 초부터 등장한 이른바 세속화 신학들 -- 신죽음의 신학, 과정신학, 정치신학, 희망의 신학 --이 단명했던 것과는 달리 해방신학은 앞으로도 우리들과 오랫동안 같이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해방신학이 담고 있는 내용들이 인간의 본원적인 삶의 문제들과 많은 관련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해방신학의 사상적인 뿌리와 그 내용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삶에 미칠 영향력 등을 진지하게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해방신학의 비판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방신학을 올바로 이해하고 규명하기 위해서 해방신학의 성립배경과 내용 그리고 그 기능들을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따라서 전반부는 해방신학의 역사적 배경과 개관, 후반부는 해방신학의 방법론과 내용 그리고 해방신학의 중심 주제들을 살펴 볼 것이다.
2. 해방신학의 역사적 배경
2-1.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에 대한 개관
해방신학을 이해하기 위해 해방신학자들의 저서를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큰 잘못이다. 그것은 해방신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사회 정치에 미친 영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해방신학이 태동되어 왔던 역사적 자리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기로 하자. 남미 역사가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다음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는 식민지 기독교 국가시대(1492-1808)이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식민지 기독교 국가가 형성된 것은 스폐인 제국의 정치적 침략을 통해서이다. 스폐인은 남미를 정복하면서 그와 동시에 기독교를 이식시켜 놓았다. 이 시기의 남미 사회 구조는 폐루와 멕시코에 총독부가 설치되어 있는 관료제였다. 또한 이 시기에 남미 교회는 광대한 토지와 자본을 갖게되었는데 결국에는 식민중앙국가의 편을 들게 되었다. 둘째는 민중주의적 자유주의 국가 시대(1850-1930)이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스폐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한 것은 나폴레옹이 스폐인을 정복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스폐인으로부터의 해방은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영국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산업혁명(1688)에 힘입어 세계에서 자본주의 중앙국가로 군림하게된 영국에 의해서 라틴 아메리카는 영국의 상품시장이 되었고 그 대신 천연자원을 헐값에 수출해야 하는 실정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20세기까지 라틴 아메리카는 독자적인 산업구조를 가질 수가 없었다.
세 번째는 민중주의 국가시대(1930-1958)이다. 1930년대부터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민중주의 현상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주변국가의 산업 부르조아와 노동계급, 그리고 농민들과의 결탁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이것도 다국적 기업을 불러들이게 되어 종속적 자본주의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네 번째는 사회주의 국가시대(1959-1964)이다. 남미에서 사회주의 국가를 처음으로 수립한 국가는 쿠바였다. 1959년 피렐 카스트로는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 사회주의 생산제도를 도입했지만 종국에는 소련의 종속주의를 면치 못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미국 자본주의에의 종속국가시대(1964-현재)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이전의 라틴 아메리카 역사적 단계와는 다른 독특성을 지닌 종속국가들을 라틴 아메리카에 세워 놓았다. 미국은 이러한 종속국가들 내에서 다국적 기업을 보호 육성하기 위해서 국가권력기관들--국무성, 국방성, CIA 등--의 동원도 서슴치 않았다. 그리하여 다국적 기업과의 이해관계에서 수립된 남미의 정부들은 오늘날 미국에 예속된 종속국가라는 파행성을 보여주고 있다.
2-2.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 경제적 상황
우리는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이 사회,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적으로 남미를 지배해온 역사적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세기초부터 스폐인과 포르투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많은 독립국가들을 낳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유럽의 지배로부터 미국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독립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이건 간에--삶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 남아 있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의 물결은 오히려 많은 대중들을 억압하는 구실만 하였다. 따라서 남미 사회와 경제는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었다. 극히 소수만이 경제적 풍요로움과 문화적 혜택을 입으면서 살게 되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 영양부족, 주거난, 문맹 등의 극한 상황에서 고통받으며 살고 있다. 역사가 아더 슐레진저 경(Sir Arthur Schlesinger)은 라틴 아메리카의 냉험한 현실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지금 이곳 남미에서는 미국 인구보다 1/8이 더 많은 사람들이 미국국민 총생산의 1/8의 수준에도 못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국민의 5%가 수입의 1/3을 차지하고 있고 70%가 극빈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들 배후에 있는 나라는 이러한 체제를 계속유지하기 위해서 정치 사회적 구조들을 조직화하고 있다.[Louis M. Colonness, ed., Conscientization for Liberation (Washington: Division for Latin America, U. S. Catholic Conference, 1971), p. 223.]
이러한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대다수 민중들의 피폐한 삶들은 무엇보다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착취에 기인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지배 엘리트 집단들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는 또 하나의 극심한 사회불안의 요소로 등장하였다. 이리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들은 다국적 기업들과 자국내의 지배세력으로부터의 이중적 수탈과 억압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다국적 기업에 의해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은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자 1960년대이래 수많은 민중봉기를 시도하였다. 이렇게 되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다국적 기업을 베후세력으로 한 군사독재 정권이 출현하게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의 구조적인 억압체제는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것은 물론 거의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넣게 되었다.
2-3. 해방 신학의 태동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 없었더라면 형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해방신학은 이러한 극한 상황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절감하면서 태동되었다.
1960년대는 남미역사의 일대 전환기였다. 몇 가지 사건들, 즉 쿠바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성공,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서 주도된 제 2차 바티칸공의회,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Ⅱ)인 메델린 회의는 대다수 라틴 아메리카인들에게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준 상징적인 사건들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해방신학을 태동하게 만든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부터 남미에서 독자적인 운동(self-conscious)으로 등장하였다.
쿠바에서의 사회주의혁명의 성공은 모든 남미국가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었으며 이 사건을 통해서 남미인들은 사회정의와 평화라는 입장에서 낡은 구조가 붕괴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인들은 채 몇년이 못되어 쿠바의 미사일 위기를 통하여 미국의 신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제국주의를 수용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교황 요한 23세의 영도하에 열린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논의되어지고 있던 새로운 주제들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하는 많은 가톨릭 사제들의 마음을 흥분시켰다. 사회정의와 평화에 지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요한 23세는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사상을 크게 변경시켰다. 이러한 교황의 태도는 남미인들에게 크나큰 기대를 안겨 주었다.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1세기가 지난 후에 역사가들이 이 시기를 평가할 때 교황 요한 23세는 20세기에 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할 것이다.
해방신학 출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1968년 콜롬비아 메델린에서 열린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Ⅱ) 일 것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회의에 직접 참석하여 개막연설을 하였는데 그는 개막 연설에서 압재적이고 무거운 불평등을 감싸고 있는 조직과 구조를 공격하고 과거의 소수 과두정치를 지지했던 일과 관계를 끊고자 열망하는 주교들에게 찬사를 보냈다.[Gremillion, Gospel and Peace, p. 18.] 교황의 개막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남미의 주교들은 남미가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과 그것을 해결하는데 있어 가톨릭교회의 역할에 대한 극적인 비젼을 제시하게 되었다. 즉 이 회의에 모인 주교들은 '해방'이라는 기치아래 억압적인 체제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표명하였다. 이 회의에 모인 주교들은 남미에 사는 절대 다수의 민중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사회 구조적 불의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그리고 가난과 비극과 억압과 부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주교단은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사유재산이라는 관념은 잘못된 것이요,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전체주의적 국가권력도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그들은 폭력의 사용을 경고하기는 했지만, 남미의 불의한 상황이 '구조적인 폭력'(institutional violence) 때문에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한편 주교단은 가난의 문제에 언급하면서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야 하고 또한 그들에 대한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메델린 문서들은 비록 여려 측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하고 분명치 않은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해방신학의 기본적인 관점들을 천명해 주었다는 점에서 해방신학의 사상적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볼 수 있겠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은 남미 역사 속에서의 오랜 식민지 경험과 그 후에 계속된 억압적 상황 속에서 혼란을 체득했던 역사적인 학습과정, 즉 민중의 고난과 비참 속에서 창출된 민중의 자각에서 태동되었다.
3. 해방신학의 방법론과 내용
이제 우리는 해방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다달았다. 사실 해방신학의 방법론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해방신학의 방법론적 전제, 즉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방법론,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분석, 그리고 해방의 프락시스 등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해방신학 자체를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 해방신학을 왜곡하여 매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전통 서구신학과의 비교를 통하여 해방신학의 방법론을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3-1. 해방신학의 신학적 방법론
3-1-1. 해석학적 순환
남미 해방신학자들은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을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말한다.[J. M. Bonino, {오늘의 행동신학}, 주재용 역. p. 121.] 해 신학과 더불어서 신학은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의 인식론적 전제는 "진리란 실천을 통해서 도달될 수 있다"이다. 즉 진리의 출발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인간적으로 감득할 수 있는 준거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신학자들은 "실재란 이념의 구현화"[J. M. Bonino, "The Struggle of the Poor and the Church," Ecumenical Review 27 (1975), p. 40.]라는 이상주의적 진리의 관점을 배격하고 있다. 해방신학자들은 전통적 신학내용의 허구성을 밝혀내면서 신학하는 방법은 달라도 신학의 내용은 고유한 것이라는 구미 신학자들에 반해서 신학하는 방법이 바른 것이어야 신학의 내용도 바른 것이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세군도(J. L. Segundo)는 "신학의 해방적 성격을 유지시켜 주는 유일한 것은 그것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의 방법론이다"[J. L. Segundo, The Liberation of Theology (New York: Orbis Books, 1976), p. 40.]라고 말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해방신학은 우리들의 현실 상황을 신학화하기 위해서 사용된 방법과 더 깊은 관계가 있지 그 내용에는 덜 관계한다고 한다. 보니노 또한 "인간이 주체자로 개입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 밖에서나 그 너머에는 진리란 없다"[J. M. Bonino, op. cit., p. 88.]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통적 진리의 관점을 진리와 실천과의 인식론적 분열상태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구띠에레즈(G. Gutierrez)는 "하나님 신앙은 그의 존재를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위해 행동하는데서 성립된다"[G. Gutierrez & R. Shaull, Liberation and Change(Atlanta: John Knox Press, 1977), p. 89.]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 신학자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해 보면, 해방신학이 신학적 작업의 발판 혹은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이론 보다 실천에 우선권을 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인식론적 전제에서 제기된 신학의 기능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성서의 원초적 역사성과 그것을 지금의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이다. 성서 사건들의 원초적 역사성과 우리가 현실적인 신앙생활에서 그것을 체득하는 일 사이에는 어떤 간격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자들은 성서의 원초적 역사성과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역사성과의 상호작용을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즉 현실적 상황에의 적용과정에서 성서의 원초적 독자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석학적 순환작용은 성서의 본문과 오늘의 상황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세군도는 해석학적 순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해석학적 순환은 새로운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만물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하고, 그에 따라 현실을 변화시키도록 하며,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서 그것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되풀이하는 것이다.[J. L. Segundo, op. cit., p. 8.]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해석학적 순환과정의 과학적 기준의 정당성이다. 즉 현실에 대한 이해나 그것에 따른 성서해독, 또 그 역의 순환관계가 임의적이 아니라, 어떤 과학적 절차를 밟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세군도는 해석학적 순환과정에서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현실에서 지금 유발되는 문제들은 생, 죽음, 지식, 사회, 정치, 더 나아가서는 세계 전반에 대한 우리의 재래적인 관념에 변화를 가져다 줄 만큼 충분히 풍부하고, 전체적이고, 근본적이어야 한다"[Ibid.]는 이다. 즉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지금까지 우리의 사상체계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도전적이고 파격적이고 전반적인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는 "만약 신학이 성서의 관습적인 해석학적 방법을 변경시키지 않고 새로 제기된 치명적인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곧 해석학적 순환을 정지시켜 버리게 된다"[Ibid., p. 9.]는 것이다. 이것은 곧 성서에 대한 우리의 해석학적 관점이 새롭게 제기된 문제에 따라 변경되지 않으면 그 문제의 해답은 얻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해석학적 순환과정에서 필요한 두 방법론적 전제에는 다음 네 가지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Ibid., p. 9.] 1) 이데올로기적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실재를 경험하는 새로운 방법. 2) 이데올로기적 의혹을 초자연적 구조, 특히 신학에 적용하는 일. 3) 지금까지 유행되어온 성서해석은 중요한 자료들을 감안하지 않았다는 의혹심, 즉, 주석에 대한 의혹을 품게 하는 신학적 실재를 경험하는 새로운 방법. 4)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새로운 요소로서 우리의 신앙의 근원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 즉 새로운 해석학 개발. 이 네 가지 과정은 해석학적 순환의 두 전제조건이 충족되는 방법론적인 과정이다.
하나님은 역사에서 계속해서 자기를 다르게 표현하신 것처럼 그에 대한 진리도 계속해서 새롭게 나타났었다. 그래서 세군도에 의하면, 성서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한다.
3-1-2. 프락시스 신학
해방신학자들은 '프락시스'를 해방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구띠에레즈는 '해방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기독교적 프락시스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과거의 신학이 계시를 통해 나타난 진리를 이해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면 해방신학은 진리를 실천하는 일에 더 역점을 둔다고 한다. 이 말은 과거의 신학은 복음에 대하여 관념론적으로 사고했지만, 해방신학은 먼저 복음을 실생활에서 직접 실천해 보고 이러한 체험을 근간으로 하여 다시 복음에 대해 숙고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신학적 숙고는 계시와 전통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과 역사 속에서 제기되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프락시스란 말은 '생각하는 행위'라는 뜻이다. 즉 프락시스는 사고 혹은 이론과 분리된 행동이 아니라 사고와 병행하는 행위라는 의미이다. 사고는 행위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이 단어는 라틴 아메리카 신학의 중심 개념이 되었으며, 신학의 출발점은 민중들의 삶속에 참여하여 그들의 삶을 변형시키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프락시스는 실천과 이론, 행동과 사고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다. 말과 행동의 이원론이란 있을 수 없다. 프락시스로서의 신학은 올바른 사고(정통교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사고(정통실천)의 상호혼합을 추구한다. 신학의 임무는 단지 무엇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진정한 신학은 민중들의 해방을 위해서 적극적인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이다.
프락시스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해방신학자들은 신학은 보편적이거나 어떤 틀에 규정되어 있는(monolithic) 학문이 아니라, 억압받는 민중들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규정지어지는 학문이다 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목적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데 있다. 신학은 인간상황에 관해서 조직적인 사고를 하는 학문이 아니라 행동과 이론이 함께 맞물려 계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민중들의 해방의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련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해방신학은 프락시스를 그 출발점으로 상정함으로서 세 가지 측면에서 전통적인 신학과 차이를 나타낸다.
첫째, 전통적인 신학이 성서와 교회의 교리에서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해방신학은 상황에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현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학, 즉 사회과학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둘째, 해방신학은 신학적 진리가 연구만을 통해서 습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노력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서 습득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전통적인 신학과 차이를 보인다.
셋째, 전통적인 신학에서 실천은 신학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서 신학은 완전히 이론적인 작업이며 실천의 매개 없이 그 자체로서 완결적이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신학의 개념 속에는 실천의 계기가 조금도 내포되어 있지 않다. 이와 반대로 해방신학에 있어서 실천과 이론은 신학 안에서 내재적으로 서로 맞물려 있다. 여기서 이론은 실천에 대한 이론이기 때문에 실천은 이론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론은 또한 다음의 실천을 위한 이론이기 때문에 실천은 이론화작업의 지침대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론은 실천 안에서 수립되기 때문에 실천은 이론이 형성되는 모태이다. 이와 같이 해방신학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추상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개념적 숙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방법, 즉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추구하려 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신 구체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해방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실천과 이론은 불가분리적으로 맞물려 있다.
3-1-3. 마르크스주의의 선택적 수용
유럽과 북미의 서구신학자들이 해방신학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부분은 바로 해방신학과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이다. 이들의 비난을 정리해 보면,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분석방법을 채택하고 있고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철학과 사상까지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 방법을 빌어 쓰는 데 그 분석 방법에 연루되어 있는 철학과 목적에서 인식론적 비판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에는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사상이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사상은 계급투쟁을 불러일으키며 이것은 폭력을 수반하게 되므로 기독교 진리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해방신학과 마르크스주의와의 만남의 정도는 어떠한가?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그들이 처한 새로운 삶의 현실에서 나온 신앙고백을 근거로 마르크스주의와 만났다. 그들이 처한 삶의 현실이란 어떠한 상황인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라틴 아메리카는 서구의 식민지가 된 이래 서구의 자본주의하에서 신음해 왔고 지금도 남미 국가의 거의 전부가 미국의 자본주의의 우산 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해방신학자들은 지금의 남미의 사회적 불의와 억압적 상태는 자본주의 체제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해방신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여건의 근원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해 사회분석 방법을 찾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19세기에 구라파에서 자행되고 있었던 자본주의의 병폐를 분석한 마르크스의 분석방법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해방신학자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분석하는 도구로써 마르크스주의를 사용한 것이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철학이나 세계관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보니노는 해방신학이 현실분석에 필요한 과학적 수단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사용한 것이지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적 교조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교리로써가 아니라 현실적 관점에서 인간의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수용하는 것이다.[J. M. Bonino, {오늘의 행동신학}, p. 70.] 브라질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인상적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민중의 해방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분석 방법이 억압의 원인을 찾아내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이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마르크스에게 감사하지 않는다.[J. Moltmann, "종교와 마르크스주의," {신학사상} 47(1984. 겨울), p. 904.]
이와 같이 해방신학자들은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적 정통주의와 교조주의를 배제한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나타나게 될 사회주의 체제가 현존하는 공산주의의 복사판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회현실과 관련된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본다.[J. M. Bonino, Christian and Marxist, p. 119.] 해 신학은 남미의 압제의 현실에서 새로운 신학 방법론을 수립함에 있어 이데올로기적 선택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분석의 도구로써 사용하였다. 해방신학이 신앙과 현실을 다리 놓는 이데올로기적 필요성에 의거하여 마르크스주의와 만남을 갖는 가운데서도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적 측면을 배제하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체제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3-2. 해방신학의 중심 주제들
3-2-1. 가난은 제도의 산물이다
오늘날 가난은 여전히 세계 도처에 편만해 있다. 1분에 24명 1년에 천 삼 백만 명 가량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고 한다. 제 1세계와 제 3세계로 각기 분류되는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빈부의 격차는 날로 심화 되어 가고 있다.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가난으로 인해 굶어 죽어 가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무엇인가? 이것은 해방신학자들의 물음이자 그들 신학의 중심 주제였다. 도대체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내용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그것은 신앙의 가르침들을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의 삶과 연관시키려는 노력이다. 구띠에레츠는 신학은 억압받는 자들과 더불어 시작되며 그들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줌으로서 끝난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가난의 사슬에 묶여 살아가고 있는 수백만의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며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신학은 비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 궁극적 실재의 본질에 관해서 사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중들의 비인간적인 비참한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구띠에레츠의 다음의 말은 이러한 신학의 입장을 잘 설명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와 같은 대륙에서 . . . .주요 도전은 비신자(nonbeliever)로부터가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인간(nonhuman), 즉 기존의 사회제도에 의해서 그 자신을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들로부터 제기된다. 이들은 바로 가난하고 착취당하고 있는 민중들이며 . . .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도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 . .그들이 처한 상황은 지금 비인간화시키고 있는 사회 그 자체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도록 우리를 강요하고 있다.[Rosino Gibellini, ed., Frontiers of Theology in Latin America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79), p. ⅹ.]
구띠에레츠는 "가난은 성서의 중심적 주제이다"라고 말하면서 가난에 대한 문제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그는 가난이란 포착하기 어려운 용어(equivocal term)라고 전제하고 나서 용어 자체가 모호하다는 것은 바로 그 개념이 모호하다는 뜻이라고 말한다.[G.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p. 288.]
그는 '가난'을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으로 구분하여 고찰한다. 먼저 '물질적 가난'은 인간 삶을 인간답게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재화의 결핍을 말한다. '정신적 가난'은 대개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하여 초연한 마음의 자세라고 여긴다. 이러한 '가난'에 대한 영성론적 사고방식은 현대인이 실제로 살아가고 생각하는 그러한 가난이 아니고 전혀 종류가 다른 가난, 즉 추상적인 가난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정신적 가난은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개방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서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개인적 또는 정신적 차원의 가난이 아니다. 예수는 가난을 사회적 관계의 산물로 보았다. 이것은 그의 복선언과 저주 선언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슬피우는 사람들에 대한 복을 선언할 때, 이들을 사회적인 무관계 속의 집단으로 언급하지 않고 이들에게 적대하는 집단과 대조해서 언급한다. 즉 부요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기뻐 웃는 사람들에 대한 저주의 선언을 잇고 있는 것은 복의 선언을 받는 집단의 현재의 불행은 저주받는 집단에 의해서 야기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에서는 가난을 불의한 사회의 소산으로 이해한다. 또한 가난을 있는 그대로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가난을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야기되는 가난의 문제는 다국적기업의 경제적 착취와 이를 옹호하는 군사독재정권에 기인하고 있다. 따라서 가난은 구조적이고 조직적인 불의한 사회체제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라틴 아메리카의 불의한 사회체제 속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선교적 사명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억압받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일이라 하겠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요청에 대한 응답이다.
3-2-2. 역사적 사회적 차원으로서 해방과 구원
인간이 처한 각양의 압제적 현실을 벗어나려는 해방운동을 목표로 삼고 있는 해방신학은 인간의 죄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 이해의 핵심이 죄의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죄란 신적 위엄을 무시하고 이에 거스르는 인간의 행동, 즉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며 그 불순종의 뿌리는 불신앙이라고 한다.[J. Calvin, {기독교 강요} 2권 4절, p. 244.]
그는 하나님에 불순종과 불신앙이 죄의 본래적 형태이고 으뜸가는 죄라고 본 것이다. 칼빈의 이와 같은 죄에 대한 해석은 이후의 많은 서구 신학자들의 죄론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전통적인 죄론의 근간이 되었다. 즉 구미 신학자들의 죄 이해의 공통된 출발점은 인간의 교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해방신학자들의 죄에 대한 이해는 무엇인가? 해방신학자들은 인간의 태만, 즉 인간의 자기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죄악이라고 하는 사실을 구체화 시켰다.
구띠에레츠는 죄악이란 자아를 향한 이기적 전환이며, 범죄란 이웃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종국에는 주님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죄란 역사적 실재다.[G. Gutierrez, Liberation and Change, p. 195.] 또 그는 죄를 인간적이고 사회적이며 역사적 실재라고 하여 죄악의 사회적 집단적 차원을 언급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의 죄는 압제적 구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민족들과 인종들 사이에 또한 사회계층 사이의 지배와 노예제도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Ibid., p. 233.] 미 다 역시 죄악의 집단성을 강조하고 있다. 미란다는 죄와 악은 단순히 인간과 역사 속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을 통해 매일 드러나는 것이라고 한다.[J. P. Miranda, Marx and Bible (New York: Orbis Books, 1974), p. 250.]
이상과 같이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자들은 구미 신학자들의 개별적이고 내면적인 죄 해석을 뛰어넘어 죄악의 전체성, 집단성을 중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죄를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무엇, 즉 인간 내면에 해당되는 무엇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죄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실재로서 하나님과 동료, 그리고 이웃들과의 친교의 단절,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인격적인 균열이라고 보고 있다.[G. Gutierrez, op. cit., p. 175.] 그러므로 해방신학자들이 말하는 구원이나 해방은 이러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차원의 죄된 상황을 극복 내지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2-3. 전인적 차원으로서의 해방과 구원
해방과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심주제이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으면 대부분 구원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해방을 말할 때 무엇으로부터 해방을 뜻하는가? 마르크스는 종교적인 신을 상정하지 않고 인간 해방을 말하였다. 그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해방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말한 해방이란 물론 '계급 없는' 사회였다. 그러나 동구권이 몰락해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이런 식의 인간 해방은 계속해서 유효한가? 그것에 대한 대답이 "아니요"라면, 우리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의 해방과 구원을 말할 수 없는 것인가? 이러한 시점에서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해방과 구원의 개념을 살펴보는 일은 상당한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해방신학의 구원론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구띠에레츠는 먼저 구원의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구원의 개념에는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있어 왔다. 첫 번째는 양적인 구원의 개념인데, 구원이란 이 세상에서 죄를 치유 받는 일이며 이 치유가 곧 후세에서 구원을 얻는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질적인 구원개념으로 , 구원이란 인간과 하나님과의 친교요 인간과 인간의 상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실재를 전부 내포하며 그것을 변혁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역사의 실재'의 문제이다.[G.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pp. 193-196.]
해방신학은 개인적 죄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죄의 극복, 다시 말해서 착취와 억압이라는 소외된 구조에서 인간이 해방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본다. 사유재산 철폐 등의 경제적 해방 뿐 아니라, 인간을 얽어매는 종교, 정치, 문화 등의 제반 소외 요인의 철폐를 통한 전인적인 인간해방론이 마르크스의 인간해방론이었다. 이에 비해 해방신학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해방사건의 개입과 인류에게 무조건 개입해 오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그에 대한 인간의 자유롭고 의식적인 동의가 겹쳐진 것이다. 그러기에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선물로 내리시는 것이며 그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과 이루는 친교,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이루는 친교이다.[G. Gutierrez, Liberation and Change, p. 203, 206.] 종합해 보면 해방신학에서의 해방에는 다음 세 가지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 1) 사회, 경제, 정치적 해방, 2) 인간화 3) 죄로부터의 해방.[Bonino, 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 p. 70.]
해방신학은 사회적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의 내적인 영역과 심리학적 차원에서의 해방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의 해방이 사회적 관계를 외면하는 이념적 회피, 또한 인간이 처한 수평적 예속의 상황을 내면화하려는 위험을 해방신학은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3-2-4 신앙의 실천과 해방의 실천장소로서의 교회의 역할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유럽으로부터 이식된 남미의 가톨릭교회는 해방과 정복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고 나섰다. 즉 남미 인디언들을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토착 제국들을 정복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 이후의 남미 교회(가톨릭)는 여러 측면에서 왕정 기독교로 전락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식민지 행정관 노릇을 하게 되었고 식민지 모국의 왕들은 교회의 내부적인 문제까지 깊숙이 개입하였다. 물론 식민주의적 기독교에 반기를 든 양심적인 성직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숫자나 힘에 있어서 너무 미약하여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19세기초부터 시작된 남미의 독립투쟁을 통하여 남미 사회는 물론 남미 교회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종전에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동반자 역할을 해왔던 가톨릭교회가 이제는 새로 들어선 공화국 안에서는 전통적 가치와 보수적 사회정책을 강력하게 고수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남미의 가톨릭교회는 안팎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기존의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던--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간에--교회 내에서의 생활과 전통적인 교리, 그리고 교회의식의 변경에만 관심을 쏟는 반면 현실 세계에서의 정치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교회는 현재의 체제에 대해 전혀 도전하지 않는 채 그 체제가 그대로 존속하도록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선포한 메시지 내용, 즉 계급은 자연스러운 위계질서라는 사회적 교훈,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운명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라는 설교, 평화와 화해에 대한 지나친 강조, 충돌을 피하라는 권고 등을 통하여 교회는 기존 체제를 정당화 시켜 주는 결과만을 초래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내부에 진보적인 신학사상과 해방신학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남미 교회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교회의 역할과 사명에 대한 일대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해방신학자들은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교회는 무엇보다도 정의를 수립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기존체제와 철저하게 단절되는 방향으로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G. Gutierrez, The Power of the Poor in History, p. 70.] 해방신학자들은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해방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가난한 자와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이 당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투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 즉 다국적 기업에 의해 불의와 수탈이 자행되고 군사정권에 의해서 억압당하는 상황 속에서 교회의 사명은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해방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교회의 해방운동이 소외되고 착취당하며 억압당하는 인간들 속에서 일어나게 될 때 비로소 교회는 민중의 교회가 될 것이며 모든 인간이 복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이며 역사 속에서 주님의 해방을 나타내는 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Ibid., p. 72.]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의 불의한 사회체제 속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선교적 사명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억압받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일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 역사 속에서 전개시키는 구원의 장이다.
4. 물음의 종합: 결론을 대신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해방신학의 역사적인 배경과 그 방법론 그리고 그 신학의 중심 주제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그 내용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서론에서 제기된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과 물음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 몇 가지 점들을 정리하고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1)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은 남미 역사 속에서의 오랜 식민지 경험과 그 후에 계속된 억압적 상황 속에서 혼란을 체득했던 역사적 학습과정, 즉 민중의 고난과 비참 속에서 창출된 민중의 자각에서 출발하였다. 2) 해방신학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반영 내지 옹호하는 기존의 신학을 비판한다. 3) 참여와 프락시스 신학: 해방신학은 억압과 착취의 상황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현실변혁의 예언자적인 파토스를 가지고 신학하는 방법을 새롭게 정립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역사적 프락시스 내에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그것에 대해 행해진 비판적 숙고이다. 4)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의 사회분석 방법을 도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남미의 사회현실을 분석하는 데 더 유용한 방법이 있다면 그들은 지체없이 그 방법을 수용할 것이다. 5)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은 정통교리 보다는 정통실천을 우선시한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기존의 교회가 행해왔던 역기능들을 지적해 내면서 예수의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억압받고 고난 받는 민중들의 삶에 투신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들 편에 서서 기독교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한다.
어떤 신학도 절대적일 수는 없다. 기독교 진리는 불변하지만 그 진리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학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유럽의 신학적 방법과 내용이 그대로 아시아에 적용될 수도 없고 또 아시아의 신학이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곧 바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만큼 세계는 다양한 문화와 체제, 사상을 배경으로 삶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해방신학 자체가 하나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학일 수도 없다. 해방신학이 앞으로 발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신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발굴해내서 진지하게 비판과 검증을 거쳐야 하며 다른 신학자들과의 폭넓은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기존의 어떤 다른 신학보다도 하나님에게 성실하게 접근해 보려는 신학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한마디로 이 신학의 목적은 억압받는 자들을 인간답게 살도록 만드는 데 있는 것이다. 남미의 해방신학이 앞으로 남미 이외의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적 사고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지수로 남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해방신학이 이미 세계 교회의 태도를 변혁시켰고 각기 다른 상황에 있는 교회의 프락시스를 근원적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이 해방신학의 가장 큰 공헌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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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언
우리는 지금 엄청난 역사의 변혁기에 살고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동구권에 불어닥친 개혁의 바람은 이제는 동구의 블럭을 무너뜨린 태풍으로 변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미소 강대국을 주축으로 이원화되었던 국제질서도 이제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때에 도달했다. 냉전체제의 종말로 인해서 소련과 동구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수민족들의 독립요구와 제 3세계에서의 민주화와 경제적 독립을 위한 투쟁들은 새 시대를 낳으려는 해산의 고통이다. 앞으로 어떠한 사상, 제도 그리고 이념이 세계를 이끌어 나갈 '방향타'로 등장할 것인가?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를 극복하고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있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섣불리 주장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말들은 모두 냉전 이데올로기의 소산물들이다. 인간의 자유로부터 출발해서 경제적 평등에 이르고자 한 자본주의나 경제적 평등에서부터 출발해서 인간의 자유에 이르고자한 사회주의나 모두 다 목표점에 이르지 못할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력의 편중화로 인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초래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며, 사회주의권에서는 생산력의 저하로 인해서 가난으로 평준화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앞으로 세계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날 세계는 대립과 긴장, 갈등과 투쟁으로부터 화해와 평화로 향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 3세계 민중들은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불평등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현실 속에서 책임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학의 기능과 교회의 역할은 또한 무엇인가?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제 3세계 민중들은 그들이 겪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및 사회적 제 모순들의 근본적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억압과 착취를 영속시키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방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우리가 이 시간 살펴보고자 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이러한 민중들의 해방투쟁 과정 속에서 생겨난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지난 20여 년에 걸쳐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지배적인 신학으로 등장해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해방신학 주창자들은 해방신학이야 말로 모든 신학적 사고의 모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이는 해방신학자들이 과학적 분석방법을 통하여 경험적 근거에서 인간의 가장 절박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더불어서 해방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서구신학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그 허구성이나 맹점들을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삶의 현실들을 분석해냄으로서 지적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전 세계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 만큼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것은 해방신학이 갖고 있는 자체의 특이성 때문이다. 그 특이성을 표현해 본다면, 해방신학은 서구 신학과는 달리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의 삶의 현장을 신학의 가장 중요한 자리로 삼고 있으며, 이러한 자리를 근거로 하여 성서를 해석하며, 억압과 가난으로부터 민중의 해방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기독교의 사랑을 이해하며,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분석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해방신학은 전통적인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해방신학자들은 그들의 선험적인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복음을 악용하고 있으며, 기독교 구원의 보편성을 훼손하면서 가난한 자들의 편에선 당파적 신학이며 마르크스 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관점을 채택함에 있어서 너무 비현실적이고 무비판적이기 때문에 해방신학은 신학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이다. 그리고 해방신학이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무시하는 극히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신학이라는 비판이다.
1-2. 글의 전개방법
60년대 초부터 등장한 이른바 세속화 신학들 -- 신죽음의 신학, 과정신학, 정치신학, 희망의 신학 --이 단명했던 것과는 달리 해방신학은 앞으로도 우리들과 오랫동안 같이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해방신학이 담고 있는 내용들이 인간의 본원적인 삶의 문제들과 많은 관련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해방신학의 사상적인 뿌리와 그 내용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삶에 미칠 영향력 등을 진지하게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해방신학의 비판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방신학을 올바로 이해하고 규명하기 위해서 해방신학의 성립배경과 내용 그리고 그 기능들을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따라서 전반부는 해방신학의 역사적 배경과 개관, 후반부는 해방신학의 방법론과 내용 그리고 해방신학의 중심 주제들을 살펴 볼 것이다.
2. 해방신학의 역사적 배경
2-1.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에 대한 개관
해방신학을 이해하기 위해 해방신학자들의 저서를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큰 잘못이다. 그것은 해방신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사회 정치에 미친 영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해방신학이 태동되어 왔던 역사적 자리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기로 하자. 남미 역사가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다음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는 식민지 기독교 국가시대(1492-1808)이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식민지 기독교 국가가 형성된 것은 스폐인 제국의 정치적 침략을 통해서이다. 스폐인은 남미를 정복하면서 그와 동시에 기독교를 이식시켜 놓았다. 이 시기의 남미 사회 구조는 폐루와 멕시코에 총독부가 설치되어 있는 관료제였다. 또한 이 시기에 남미 교회는 광대한 토지와 자본을 갖게되었는데 결국에는 식민중앙국가의 편을 들게 되었다. 둘째는 민중주의적 자유주의 국가 시대(1850-1930)이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스폐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한 것은 나폴레옹이 스폐인을 정복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스폐인으로부터의 해방은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영국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산업혁명(1688)에 힘입어 세계에서 자본주의 중앙국가로 군림하게된 영국에 의해서 라틴 아메리카는 영국의 상품시장이 되었고 그 대신 천연자원을 헐값에 수출해야 하는 실정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20세기까지 라틴 아메리카는 독자적인 산업구조를 가질 수가 없었다.
세 번째는 민중주의 국가시대(1930-1958)이다. 1930년대부터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민중주의 현상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주변국가의 산업 부르조아와 노동계급, 그리고 농민들과의 결탁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이것도 다국적 기업을 불러들이게 되어 종속적 자본주의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네 번째는 사회주의 국가시대(1959-1964)이다. 남미에서 사회주의 국가를 처음으로 수립한 국가는 쿠바였다. 1959년 피렐 카스트로는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 사회주의 생산제도를 도입했지만 종국에는 소련의 종속주의를 면치 못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미국 자본주의에의 종속국가시대(1964-현재)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이전의 라틴 아메리카 역사적 단계와는 다른 독특성을 지닌 종속국가들을 라틴 아메리카에 세워 놓았다. 미국은 이러한 종속국가들 내에서 다국적 기업을 보호 육성하기 위해서 국가권력기관들--국무성, 국방성, CIA 등--의 동원도 서슴치 않았다. 그리하여 다국적 기업과의 이해관계에서 수립된 남미의 정부들은 오늘날 미국에 예속된 종속국가라는 파행성을 보여주고 있다.
2-2.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 경제적 상황
우리는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이 사회,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적으로 남미를 지배해온 역사적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세기초부터 스폐인과 포르투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많은 독립국가들을 낳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유럽의 지배로부터 미국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독립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이건 간에--삶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 남아 있었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의 물결은 오히려 많은 대중들을 억압하는 구실만 하였다. 따라서 남미 사회와 경제는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었다. 극히 소수만이 경제적 풍요로움과 문화적 혜택을 입으면서 살게 되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 영양부족, 주거난, 문맹 등의 극한 상황에서 고통받으며 살고 있다. 역사가 아더 슐레진저 경(Sir Arthur Schlesinger)은 라틴 아메리카의 냉험한 현실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지금 이곳 남미에서는 미국 인구보다 1/8이 더 많은 사람들이 미국국민 총생산의 1/8의 수준에도 못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국민의 5%가 수입의 1/3을 차지하고 있고 70%가 극빈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들 배후에 있는 나라는 이러한 체제를 계속유지하기 위해서 정치 사회적 구조들을 조직화하고 있다.[Louis M. Colonness, ed., Conscientization for Liberation (Washington: Division for Latin America, U. S. Catholic Conference, 1971), p. 223.]
이러한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대다수 민중들의 피폐한 삶들은 무엇보다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착취에 기인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지배 엘리트 집단들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는 또 하나의 극심한 사회불안의 요소로 등장하였다. 이리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들은 다국적 기업들과 자국내의 지배세력으로부터의 이중적 수탈과 억압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다국적 기업에 의해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은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자 1960년대이래 수많은 민중봉기를 시도하였다. 이렇게 되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다국적 기업을 베후세력으로 한 군사독재 정권이 출현하게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의 구조적인 억압체제는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것은 물론 거의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넣게 되었다.
2-3. 해방 신학의 태동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 없었더라면 형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해방신학은 이러한 극한 상황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절감하면서 태동되었다.
1960년대는 남미역사의 일대 전환기였다. 몇 가지 사건들, 즉 쿠바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성공,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서 주도된 제 2차 바티칸공의회,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Ⅱ)인 메델린 회의는 대다수 라틴 아메리카인들에게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준 상징적인 사건들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해방신학을 태동하게 만든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부터 남미에서 독자적인 운동(self-conscious)으로 등장하였다.
쿠바에서의 사회주의혁명의 성공은 모든 남미국가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었으며 이 사건을 통해서 남미인들은 사회정의와 평화라는 입장에서 낡은 구조가 붕괴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인들은 채 몇년이 못되어 쿠바의 미사일 위기를 통하여 미국의 신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제국주의를 수용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교황 요한 23세의 영도하에 열린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논의되어지고 있던 새로운 주제들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하는 많은 가톨릭 사제들의 마음을 흥분시켰다. 사회정의와 평화에 지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요한 23세는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사상을 크게 변경시켰다. 이러한 교황의 태도는 남미인들에게 크나큰 기대를 안겨 주었다.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1세기가 지난 후에 역사가들이 이 시기를 평가할 때 교황 요한 23세는 20세기에 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할 것이다.
해방신학 출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1968년 콜롬비아 메델린에서 열린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Ⅱ) 일 것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회의에 직접 참석하여 개막연설을 하였는데 그는 개막 연설에서 압재적이고 무거운 불평등을 감싸고 있는 조직과 구조를 공격하고 과거의 소수 과두정치를 지지했던 일과 관계를 끊고자 열망하는 주교들에게 찬사를 보냈다.[Gremillion, Gospel and Peace, p. 18.] 교황의 개막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남미의 주교들은 남미가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과 그것을 해결하는데 있어 가톨릭교회의 역할에 대한 극적인 비젼을 제시하게 되었다. 즉 이 회의에 모인 주교들은 '해방'이라는 기치아래 억압적인 체제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표명하였다. 이 회의에 모인 주교들은 남미에 사는 절대 다수의 민중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사회 구조적 불의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그리고 가난과 비극과 억압과 부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주교단은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사유재산이라는 관념은 잘못된 것이요,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전체주의적 국가권력도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그들은 폭력의 사용을 경고하기는 했지만, 남미의 불의한 상황이 '구조적인 폭력'(institutional violence) 때문에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한편 주교단은 가난의 문제에 언급하면서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야 하고 또한 그들에 대한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메델린 문서들은 비록 여려 측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하고 분명치 않은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해방신학의 기본적인 관점들을 천명해 주었다는 점에서 해방신학의 사상적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볼 수 있겠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은 남미 역사 속에서의 오랜 식민지 경험과 그 후에 계속된 억압적 상황 속에서 혼란을 체득했던 역사적인 학습과정, 즉 민중의 고난과 비참 속에서 창출된 민중의 자각에서 태동되었다.
3. 해방신학의 방법론과 내용
이제 우리는 해방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다달았다. 사실 해방신학의 방법론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해방신학의 방법론적 전제, 즉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방법론,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분석, 그리고 해방의 프락시스 등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해방신학 자체를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 해방신학을 왜곡하여 매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전통 서구신학과의 비교를 통하여 해방신학의 방법론을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3-1. 해방신학의 신학적 방법론
3-1-1. 해석학적 순환
남미 해방신학자들은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을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말한다.[J. M. Bonino, {오늘의 행동신학}, 주재용 역. p. 121.] 해 신학과 더불어서 신학은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의 인식론적 전제는 "진리란 실천을 통해서 도달될 수 있다"이다. 즉 진리의 출발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인간적으로 감득할 수 있는 준거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신학자들은 "실재란 이념의 구현화"[J. M. Bonino, "The Struggle of the Poor and the Church," Ecumenical Review 27 (1975), p. 40.]라는 이상주의적 진리의 관점을 배격하고 있다. 해방신학자들은 전통적 신학내용의 허구성을 밝혀내면서 신학하는 방법은 달라도 신학의 내용은 고유한 것이라는 구미 신학자들에 반해서 신학하는 방법이 바른 것이어야 신학의 내용도 바른 것이 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세군도(J. L. Segundo)는 "신학의 해방적 성격을 유지시켜 주는 유일한 것은 그것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의 방법론이다"[J. L. Segundo, The Liberation of Theology (New York: Orbis Books, 1976), p. 40.]라고 말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해방신학은 우리들의 현실 상황을 신학화하기 위해서 사용된 방법과 더 깊은 관계가 있지 그 내용에는 덜 관계한다고 한다. 보니노 또한 "인간이 주체자로 개입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 밖에서나 그 너머에는 진리란 없다"[J. M. Bonino, op. cit., p. 88.]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통적 진리의 관점을 진리와 실천과의 인식론적 분열상태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구띠에레즈(G. Gutierrez)는 "하나님 신앙은 그의 존재를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위해 행동하는데서 성립된다"[G. Gutierrez & R. Shaull, Liberation and Change(Atlanta: John Knox Press, 1977), p. 89.]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 신학자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해 보면, 해방신학이 신학적 작업의 발판 혹은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이론 보다 실천에 우선권을 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인식론적 전제에서 제기된 신학의 기능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성서의 원초적 역사성과 그것을 지금의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이다. 성서 사건들의 원초적 역사성과 우리가 현실적인 신앙생활에서 그것을 체득하는 일 사이에는 어떤 간격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자들은 성서의 원초적 역사성과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역사성과의 상호작용을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즉 현실적 상황에의 적용과정에서 성서의 원초적 독자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석학적 순환작용은 성서의 본문과 오늘의 상황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세군도는 해석학적 순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해석학적 순환은 새로운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만물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하고, 그에 따라 현실을 변화시키도록 하며,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서 그것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되풀이하는 것이다.[J. L. Segundo, op. cit., p. 8.]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해석학적 순환과정의 과학적 기준의 정당성이다. 즉 현실에 대한 이해나 그것에 따른 성서해독, 또 그 역의 순환관계가 임의적이 아니라, 어떤 과학적 절차를 밟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세군도는 해석학적 순환과정에서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현실에서 지금 유발되는 문제들은 생, 죽음, 지식, 사회, 정치, 더 나아가서는 세계 전반에 대한 우리의 재래적인 관념에 변화를 가져다 줄 만큼 충분히 풍부하고, 전체적이고, 근본적이어야 한다"[Ibid.]는 이다. 즉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지금까지 우리의 사상체계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도전적이고 파격적이고 전반적인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는 "만약 신학이 성서의 관습적인 해석학적 방법을 변경시키지 않고 새로 제기된 치명적인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곧 해석학적 순환을 정지시켜 버리게 된다"[Ibid., p. 9.]는 것이다. 이것은 곧 성서에 대한 우리의 해석학적 관점이 새롭게 제기된 문제에 따라 변경되지 않으면 그 문제의 해답은 얻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해석학적 순환과정에서 필요한 두 방법론적 전제에는 다음 네 가지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Ibid., p. 9.] 1) 이데올로기적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실재를 경험하는 새로운 방법. 2) 이데올로기적 의혹을 초자연적 구조, 특히 신학에 적용하는 일. 3) 지금까지 유행되어온 성서해석은 중요한 자료들을 감안하지 않았다는 의혹심, 즉, 주석에 대한 의혹을 품게 하는 신학적 실재를 경험하는 새로운 방법. 4)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새로운 요소로서 우리의 신앙의 근원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 즉 새로운 해석학 개발. 이 네 가지 과정은 해석학적 순환의 두 전제조건이 충족되는 방법론적인 과정이다.
하나님은 역사에서 계속해서 자기를 다르게 표현하신 것처럼 그에 대한 진리도 계속해서 새롭게 나타났었다. 그래서 세군도에 의하면, 성서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한다.
3-1-2. 프락시스 신학
해방신학자들은 '프락시스'를 해방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구띠에레즈는 '해방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기독교적 프락시스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과거의 신학이 계시를 통해 나타난 진리를 이해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면 해방신학은 진리를 실천하는 일에 더 역점을 둔다고 한다. 이 말은 과거의 신학은 복음에 대하여 관념론적으로 사고했지만, 해방신학은 먼저 복음을 실생활에서 직접 실천해 보고 이러한 체험을 근간으로 하여 다시 복음에 대해 숙고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신학적 숙고는 계시와 전통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과 역사 속에서 제기되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프락시스란 말은 '생각하는 행위'라는 뜻이다. 즉 프락시스는 사고 혹은 이론과 분리된 행동이 아니라 사고와 병행하는 행위라는 의미이다. 사고는 행위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이 단어는 라틴 아메리카 신학의 중심 개념이 되었으며, 신학의 출발점은 민중들의 삶속에 참여하여 그들의 삶을 변형시키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프락시스는 실천과 이론, 행동과 사고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다. 말과 행동의 이원론이란 있을 수 없다. 프락시스로서의 신학은 올바른 사고(정통교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사고(정통실천)의 상호혼합을 추구한다. 신학의 임무는 단지 무엇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진정한 신학은 민중들의 해방을 위해서 적극적인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것이다.
프락시스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해방신학자들은 신학은 보편적이거나 어떤 틀에 규정되어 있는(monolithic) 학문이 아니라, 억압받는 민중들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규정지어지는 학문이다 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학의 목적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데 있다. 신학은 인간상황에 관해서 조직적인 사고를 하는 학문이 아니라 행동과 이론이 함께 맞물려 계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민중들의 해방의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련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해방신학은 프락시스를 그 출발점으로 상정함으로서 세 가지 측면에서 전통적인 신학과 차이를 나타낸다.
첫째, 전통적인 신학이 성서와 교회의 교리에서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해방신학은 상황에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현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학, 즉 사회과학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둘째, 해방신학은 신학적 진리가 연구만을 통해서 습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노력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서 습득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전통적인 신학과 차이를 보인다.
셋째, 전통적인 신학에서 실천은 신학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서 신학은 완전히 이론적인 작업이며 실천의 매개 없이 그 자체로서 완결적이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신학의 개념 속에는 실천의 계기가 조금도 내포되어 있지 않다. 이와 반대로 해방신학에 있어서 실천과 이론은 신학 안에서 내재적으로 서로 맞물려 있다. 여기서 이론은 실천에 대한 이론이기 때문에 실천은 이론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론은 또한 다음의 실천을 위한 이론이기 때문에 실천은 이론화작업의 지침대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론은 실천 안에서 수립되기 때문에 실천은 이론이 형성되는 모태이다. 이와 같이 해방신학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추상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개념적 숙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방법, 즉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추구하려 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신 구체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해방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실천과 이론은 불가분리적으로 맞물려 있다.
3-1-3. 마르크스주의의 선택적 수용
유럽과 북미의 서구신학자들이 해방신학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부분은 바로 해방신학과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이다. 이들의 비난을 정리해 보면,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분석방법을 채택하고 있고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철학과 사상까지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 방법을 빌어 쓰는 데 그 분석 방법에 연루되어 있는 철학과 목적에서 인식론적 비판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에는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사상이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사상은 계급투쟁을 불러일으키며 이것은 폭력을 수반하게 되므로 기독교 진리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해방신학과 마르크스주의와의 만남의 정도는 어떠한가?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그들이 처한 새로운 삶의 현실에서 나온 신앙고백을 근거로 마르크스주의와 만났다. 그들이 처한 삶의 현실이란 어떠한 상황인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라틴 아메리카는 서구의 식민지가 된 이래 서구의 자본주의하에서 신음해 왔고 지금도 남미 국가의 거의 전부가 미국의 자본주의의 우산 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해방신학자들은 지금의 남미의 사회적 불의와 억압적 상태는 자본주의 체제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해방신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여건의 근원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해 사회분석 방법을 찾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19세기에 구라파에서 자행되고 있었던 자본주의의 병폐를 분석한 마르크스의 분석방법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해방신학자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분석하는 도구로써 마르크스주의를 사용한 것이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철학이나 세계관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보니노는 해방신학이 현실분석에 필요한 과학적 수단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사용한 것이지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적 교조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교리로써가 아니라 현실적 관점에서 인간의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수용하는 것이다.[J. M. Bonino, {오늘의 행동신학}, p. 70.] 브라질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인상적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민중의 해방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분석 방법이 억압의 원인을 찾아내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이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마르크스에게 감사하지 않는다.[J. Moltmann, "종교와 마르크스주의," {신학사상} 47(1984. 겨울), p. 904.]
이와 같이 해방신학자들은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적 정통주의와 교조주의를 배제한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나타나게 될 사회주의 체제가 현존하는 공산주의의 복사판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회현실과 관련된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본다.[J. M. Bonino, Christian and Marxist, p. 119.] 해 신학은 남미의 압제의 현실에서 새로운 신학 방법론을 수립함에 있어 이데올로기적 선택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분석의 도구로써 사용하였다. 해방신학이 신앙과 현실을 다리 놓는 이데올로기적 필요성에 의거하여 마르크스주의와 만남을 갖는 가운데서도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적 측면을 배제하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체제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3-2. 해방신학의 중심 주제들
3-2-1. 가난은 제도의 산물이다
오늘날 가난은 여전히 세계 도처에 편만해 있다. 1분에 24명 1년에 천 삼 백만 명 가량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고 한다. 제 1세계와 제 3세계로 각기 분류되는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빈부의 격차는 날로 심화 되어 가고 있다.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가난으로 인해 굶어 죽어 가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무엇인가? 이것은 해방신학자들의 물음이자 그들 신학의 중심 주제였다. 도대체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내용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그것은 신앙의 가르침들을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의 삶과 연관시키려는 노력이다. 구띠에레츠는 신학은 억압받는 자들과 더불어 시작되며 그들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줌으로서 끝난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가난의 사슬에 묶여 살아가고 있는 수백만의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며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신학은 비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 궁극적 실재의 본질에 관해서 사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중들의 비인간적인 비참한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구띠에레츠의 다음의 말은 이러한 신학의 입장을 잘 설명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와 같은 대륙에서 . . . .주요 도전은 비신자(nonbeliever)로부터가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인간(nonhuman), 즉 기존의 사회제도에 의해서 그 자신을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들로부터 제기된다. 이들은 바로 가난하고 착취당하고 있는 민중들이며 . . .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도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 . .그들이 처한 상황은 지금 비인간화시키고 있는 사회 그 자체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도록 우리를 강요하고 있다.[Rosino Gibellini, ed., Frontiers of Theology in Latin America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79), p. ⅹ.]
구띠에레츠는 "가난은 성서의 중심적 주제이다"라고 말하면서 가난에 대한 문제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그는 가난이란 포착하기 어려운 용어(equivocal term)라고 전제하고 나서 용어 자체가 모호하다는 것은 바로 그 개념이 모호하다는 뜻이라고 말한다.[G.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p. 288.]
그는 '가난'을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으로 구분하여 고찰한다. 먼저 '물질적 가난'은 인간 삶을 인간답게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재화의 결핍을 말한다. '정신적 가난'은 대개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하여 초연한 마음의 자세라고 여긴다. 이러한 '가난'에 대한 영성론적 사고방식은 현대인이 실제로 살아가고 생각하는 그러한 가난이 아니고 전혀 종류가 다른 가난, 즉 추상적인 가난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정신적 가난은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개방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서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개인적 또는 정신적 차원의 가난이 아니다. 예수는 가난을 사회적 관계의 산물로 보았다. 이것은 그의 복선언과 저주 선언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슬피우는 사람들에 대한 복을 선언할 때, 이들을 사회적인 무관계 속의 집단으로 언급하지 않고 이들에게 적대하는 집단과 대조해서 언급한다. 즉 부요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기뻐 웃는 사람들에 대한 저주의 선언을 잇고 있는 것은 복의 선언을 받는 집단의 현재의 불행은 저주받는 집단에 의해서 야기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에서는 가난을 불의한 사회의 소산으로 이해한다. 또한 가난을 있는 그대로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가난을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야기되는 가난의 문제는 다국적기업의 경제적 착취와 이를 옹호하는 군사독재정권에 기인하고 있다. 따라서 가난은 구조적이고 조직적인 불의한 사회체제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라틴 아메리카의 불의한 사회체제 속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선교적 사명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억압받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일이라 하겠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요청에 대한 응답이다.
3-2-2. 역사적 사회적 차원으로서 해방과 구원
인간이 처한 각양의 압제적 현실을 벗어나려는 해방운동을 목표로 삼고 있는 해방신학은 인간의 죄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 이해의 핵심이 죄의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죄란 신적 위엄을 무시하고 이에 거스르는 인간의 행동, 즉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며 그 불순종의 뿌리는 불신앙이라고 한다.[J. Calvin, {기독교 강요} 2권 4절, p. 244.]
그는 하나님에 불순종과 불신앙이 죄의 본래적 형태이고 으뜸가는 죄라고 본 것이다. 칼빈의 이와 같은 죄에 대한 해석은 이후의 많은 서구 신학자들의 죄론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전통적인 죄론의 근간이 되었다. 즉 구미 신학자들의 죄 이해의 공통된 출발점은 인간의 교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해방신학자들의 죄에 대한 이해는 무엇인가? 해방신학자들은 인간의 태만, 즉 인간의 자기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죄악이라고 하는 사실을 구체화 시켰다.
구띠에레츠는 죄악이란 자아를 향한 이기적 전환이며, 범죄란 이웃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종국에는 주님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죄란 역사적 실재다.[G. Gutierrez, Liberation and Change, p. 195.] 또 그는 죄를 인간적이고 사회적이며 역사적 실재라고 하여 죄악의 사회적 집단적 차원을 언급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의 죄는 압제적 구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민족들과 인종들 사이에 또한 사회계층 사이의 지배와 노예제도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Ibid., p. 233.] 미 다 역시 죄악의 집단성을 강조하고 있다. 미란다는 죄와 악은 단순히 인간과 역사 속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을 통해 매일 드러나는 것이라고 한다.[J. P. Miranda, Marx and Bible (New York: Orbis Books, 1974), p. 250.]
이상과 같이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자들은 구미 신학자들의 개별적이고 내면적인 죄 해석을 뛰어넘어 죄악의 전체성, 집단성을 중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죄를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무엇, 즉 인간 내면에 해당되는 무엇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죄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실재로서 하나님과 동료, 그리고 이웃들과의 친교의 단절,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인격적인 균열이라고 보고 있다.[G. Gutierrez, op. cit., p. 175.] 그러므로 해방신학자들이 말하는 구원이나 해방은 이러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차원의 죄된 상황을 극복 내지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2-3. 전인적 차원으로서의 해방과 구원
해방과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심주제이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으면 대부분 구원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해방을 말할 때 무엇으로부터 해방을 뜻하는가? 마르크스는 종교적인 신을 상정하지 않고 인간 해방을 말하였다. 그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해방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말한 해방이란 물론 '계급 없는' 사회였다. 그러나 동구권이 몰락해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이런 식의 인간 해방은 계속해서 유효한가? 그것에 대한 대답이 "아니요"라면, 우리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의 해방과 구원을 말할 수 없는 것인가? 이러한 시점에서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해방과 구원의 개념을 살펴보는 일은 상당한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해방신학의 구원론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구띠에레츠는 먼저 구원의 개념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구원의 개념에는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있어 왔다. 첫 번째는 양적인 구원의 개념인데, 구원이란 이 세상에서 죄를 치유 받는 일이며 이 치유가 곧 후세에서 구원을 얻는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질적인 구원개념으로 , 구원이란 인간과 하나님과의 친교요 인간과 인간의 상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실재를 전부 내포하며 그것을 변혁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역사의 실재'의 문제이다.[G.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pp. 193-196.]
해방신학은 개인적 죄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죄의 극복, 다시 말해서 착취와 억압이라는 소외된 구조에서 인간이 해방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본다. 사유재산 철폐 등의 경제적 해방 뿐 아니라, 인간을 얽어매는 종교, 정치, 문화 등의 제반 소외 요인의 철폐를 통한 전인적인 인간해방론이 마르크스의 인간해방론이었다. 이에 비해 해방신학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해방사건의 개입과 인류에게 무조건 개입해 오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그에 대한 인간의 자유롭고 의식적인 동의가 겹쳐진 것이다. 그러기에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선물로 내리시는 것이며 그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과 이루는 친교,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이루는 친교이다.[G. Gutierrez, Liberation and Change, p. 203, 206.] 종합해 보면 해방신학에서의 해방에는 다음 세 가지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 1) 사회, 경제, 정치적 해방, 2) 인간화 3) 죄로부터의 해방.[Bonino, 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 p. 70.]
해방신학은 사회적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의 내적인 영역과 심리학적 차원에서의 해방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의 해방이 사회적 관계를 외면하는 이념적 회피, 또한 인간이 처한 수평적 예속의 상황을 내면화하려는 위험을 해방신학은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3-2-4 신앙의 실천과 해방의 실천장소로서의 교회의 역할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유럽으로부터 이식된 남미의 가톨릭교회는 해방과 정복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고 나섰다. 즉 남미 인디언들을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토착 제국들을 정복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 이후의 남미 교회(가톨릭)는 여러 측면에서 왕정 기독교로 전락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식민지 행정관 노릇을 하게 되었고 식민지 모국의 왕들은 교회의 내부적인 문제까지 깊숙이 개입하였다. 물론 식민주의적 기독교에 반기를 든 양심적인 성직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숫자나 힘에 있어서 너무 미약하여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19세기초부터 시작된 남미의 독립투쟁을 통하여 남미 사회는 물론 남미 교회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종전에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동반자 역할을 해왔던 가톨릭교회가 이제는 새로 들어선 공화국 안에서는 전통적 가치와 보수적 사회정책을 강력하게 고수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남미의 가톨릭교회는 안팎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기존의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던--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간에--교회 내에서의 생활과 전통적인 교리, 그리고 교회의식의 변경에만 관심을 쏟는 반면 현실 세계에서의 정치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교회는 현재의 체제에 대해 전혀 도전하지 않는 채 그 체제가 그대로 존속하도록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선포한 메시지 내용, 즉 계급은 자연스러운 위계질서라는 사회적 교훈,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운명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라는 설교, 평화와 화해에 대한 지나친 강조, 충돌을 피하라는 권고 등을 통하여 교회는 기존 체제를 정당화 시켜 주는 결과만을 초래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내부에 진보적인 신학사상과 해방신학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남미 교회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교회의 역할과 사명에 대한 일대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해방신학자들은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교회는 무엇보다도 정의를 수립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기존체제와 철저하게 단절되는 방향으로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G. Gutierrez, The Power of the Poor in History, p. 70.] 해방신학자들은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해방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가난한 자와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이 당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투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 즉 다국적 기업에 의해 불의와 수탈이 자행되고 군사정권에 의해서 억압당하는 상황 속에서 교회의 사명은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해방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교회의 해방운동이 소외되고 착취당하며 억압당하는 인간들 속에서 일어나게 될 때 비로소 교회는 민중의 교회가 될 것이며 모든 인간이 복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이며 역사 속에서 주님의 해방을 나타내는 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Ibid., p. 72.]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의 불의한 사회체제 속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선교적 사명은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억압받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일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 역사 속에서 전개시키는 구원의 장이다.
4. 물음의 종합: 결론을 대신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해방신학의 역사적인 배경과 그 방법론 그리고 그 신학의 중심 주제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그 내용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서론에서 제기된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과 물음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 몇 가지 점들을 정리하고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1)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은 남미 역사 속에서의 오랜 식민지 경험과 그 후에 계속된 억압적 상황 속에서 혼란을 체득했던 역사적 학습과정, 즉 민중의 고난과 비참 속에서 창출된 민중의 자각에서 출발하였다. 2) 해방신학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반영 내지 옹호하는 기존의 신학을 비판한다. 3) 참여와 프락시스 신학: 해방신학은 억압과 착취의 상황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현실변혁의 예언자적인 파토스를 가지고 신학하는 방법을 새롭게 정립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역사적 프락시스 내에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그것에 대해 행해진 비판적 숙고이다. 4)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의 사회분석 방법을 도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남미의 사회현실을 분석하는 데 더 유용한 방법이 있다면 그들은 지체없이 그 방법을 수용할 것이다. 5)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은 정통교리 보다는 정통실천을 우선시한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기존의 교회가 행해왔던 역기능들을 지적해 내면서 예수의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억압받고 고난 받는 민중들의 삶에 투신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들 편에 서서 기독교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한다.
어떤 신학도 절대적일 수는 없다. 기독교 진리는 불변하지만 그 진리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학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유럽의 신학적 방법과 내용이 그대로 아시아에 적용될 수도 없고 또 아시아의 신학이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곧 바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만큼 세계는 다양한 문화와 체제, 사상을 배경으로 삶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해방신학 자체가 하나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학일 수도 없다. 해방신학이 앞으로 발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신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발굴해내서 진지하게 비판과 검증을 거쳐야 하며 다른 신학자들과의 폭넓은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기존의 어떤 다른 신학보다도 하나님에게 성실하게 접근해 보려는 신학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한마디로 이 신학의 목적은 억압받는 자들을 인간답게 살도록 만드는 데 있는 것이다. 남미의 해방신학이 앞으로 남미 이외의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적 사고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지수로 남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해방신학이 이미 세계 교회의 태도를 변혁시켰고 각기 다른 상황에 있는 교회의 프락시스를 근원적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이 해방신학의 가장 큰 공헌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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