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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복음화를 향한 환원운동의 양대 과업(최재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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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댓글 0 조회 9,794 2006.03.12 07:26

본문

세계 복음화를 향한 환원운동의 양대 과업:
성서 환원과 기독교 일치

최  재  운
서울기독대학교 (조교수 조직신학)

목차

I.  서론
II. 환원운동의 과업 자각
    환원운동의 시작과 관련한 과업의 자각
    환원운동의 과정에서 자각된 과업
III.환원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세계 복음화
IV. 환원운동의 시원(始原)적 목표: 성서 환원
    "환원"의 개념
    성서 환원
    기-환원과 미-환원
V. 환원운동의 과정상 목표: 기독교 일치
  기독교의 일치를 향한 환원운동의 노력
  기독교 일치에 대한 환원운동과 에큐메니칼운동간의 차이
  일치된 기독교의 주요 목적
VI.결론

세계 복음화를 향한 환원운동의 양대 과업:
성서 환원과 기독교 일치

서론

환원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반세기 이상의 역사를 기록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생소한 운동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운동은 이미 미국에서 2세기의 세월 동안 전개
되어 왔고, 큰 결실을 얻어 왔다. 그리고 그 운동은 그곳에서 기독교 운동들 중 하나로서 든
든히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상황이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환원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
국에서 발생한 그 운동을 한국의 관련 교회가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능숙하게 전하지
못한 것일 것이다. 물론, 그 운동이 한국 사회에 뒤늦게 소개된 탓으로 중요하게 부각되지
못한 점도 있거니와, 그 운동 관련의 교회 성장만큼이나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특수성에 영
향을 받고 있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운동이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환원운동이란 무엇인
가?" 라는 의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해야 하는 필요성은 여전하다. 그 질문에 대한 많은 대답
들이 있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그 중 대다수는 환원운동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어 왔
다. 우리가 지금 그 질문에 대해 또 하나의 대답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들이 모자랐다
기보다는 그것들에 더 보충하고자 하는 것이다.

환원운동의 과업 자각

환원운동은 처음부터 그 운동의 원대한 계획을 수립하고서 시작된 운동이 아니다. 그 운
동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경험된 사실에 기초하여 점차적으로 교회가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는 자각을 하게 되고, 그러한 자각이 성서에 근거한 기독교 일치를 부르짖으면서 그 일치를
이루어 가는 차원으로 발전되어 하나의 운동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
는 것은 환원운동의 이해에 더욱 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환원운동의 시작과 관련한 과업의 자각

하나의 특별한 모임이 1807년이나 1808년 어느 날 에이브러햄 올터스(Abraham Altars)의
시설에서 소집되었는데, 그 모임에서 토머스 캠블은 환원운동의 가장 위대한 진술을 했다.
그는 "성경이 말씀하면 우리도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면 우리도 침묵한다"는 법칙을 제안하
였다. 그렇지만 당시에 그것은 단지 하나의 선언이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지에
대한 방안이 아니었다. 이 성스러운 계시와 성스러운 침묵에 관한 환원운동의 입장은 그들이
그것을 실천하려고 했을 때 더욱 구체화될 수 있었다.
토마스와 알렉산더 캠블 부자는 1811년 5월 4일 30명의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가 브러쉬 런 교회(Brush Run Church)이다. 그 교회의 치리 원리는 성경의 최고 권
위와 하나님의 백성의 일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교회를 설립함에 있어서 중시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브러쉬 런 교회에서 알렉산더 캠블은 1812년 1월 1일에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 교
회는 유아 적례를 시행했고, 그 의식이 교회로 입교하는 적합한 전제라고 가르쳐왔다. 그렇
지만 아무런 의문 없이 수용해 왔던 이 전제는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해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1811년 3월 14일 결혼한 알렉산더와 마가렛 캠블 사이에 일년 뒤(1812) 딸이 태어났
다. 토머스 캠블은 손녀의 세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결국 세례가 회개하는 신자에 대해
시행하는 것이고 유아에게는 불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물론, 알렉산더 캠블도 세례에 관한 성경연구를 했는데, 그는 신약의 세례가 침수에 의한
것이고, 세례가 죄의 용서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는 신자들의 물에의 장사
이며 물로부터의 부활이라고 결론지었고, 만약 이러한 논증이 옳다면, 그 자신이 세례를 받
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더 캠블은 침례교 목사 마티어스 루스와 협의하여 버펄로우 크
릭에서 1812년 6월 12일에 침례를 받았다. 침례 전, 토머스 캠블은 침례가 세례의 신약 성서
적 행위라는 설교를 하였고, 알렉산더 캠블도 침례만이 성서적 세례요, 회개하는 신자들만이
세례의 수세자라는 것을 주장하는 강론을 이어갔다. 알렉산더 캠블은 그 의식이 신약 정형과
일치되어야 하며 세례를 위한 필수 조건으로 "종교적 체험"의 전례가 없다면 생략되어야 한
다고 루스 목사를 설득하였다. 캠블가(家)와 다른 사람들은,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사도 베드로에 의해 고백된 "참 고백(good confession)"을
간단히 만들었다.
다음 날 브러쉬 런 교회에서 13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신앙으로 고백하였고,
토머스 캠블이 집행했던 기독교 세례로 장사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모든 신자들이 침례를
받았다.
이와 같이 유아세례로부터 시작한 세례 논의는 유아세례의 무용론으로 결론지어졌고, 세
례가 결국 적례보다는 침례라는 데에 동의하여 이를 실천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각 사안들에서 성서로 환원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을 적용함에서
발생하는 판단이나 시행의 착오는 적지 않았다. 무엇이 성서 원리이고, 무엇이 인간 견해인
가? 이것은 알렉산더 캠블의 오랜 고민이기도 했다.
우리는 처음에 우리의 원리들이 우리의 견해들에 의거하여 만들어내었을 해악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곧 논전 속에서 어떤 요지에 관한 우리의 원리들과
견해들을 발견하였다. 우리가 우리의 견해들에 대해 우리의 원리를 포기해야 할 것인
가, 아니면 우리의 원리에 대해 우리의 견해를 포기할 것인가 라는 의문이 직접적으로
야기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원리들이 우리의 견해들보다 더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후자에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부터 이 기초를 바다
건너 해외로 전파한 이후로 우리는 원리와 견해간의 차이점을 결코 알지 못했던 사람
들에게서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도 소중했던 몇몇 견해들을 강제로 배제
해왔다.
이 견해들 중 몇 개는 (가장 약하고 어린 싹들이 서리 때문에 곧장 병드는 것처럼)
즉시 위축되었고, 우리의 첫 원리 적용으로 희미해져 버렸다. 모든 유아의 정신 상태
를 가진 유아 세례와 유아 적례는 성서만이 신앙과 의무의 유일한 한계와 기준을 설
정하는 것으로써 즉시 직접적으로 우리 생각에서 축출되었다. 그 견해에 근거하여 배
우는 모든 지적 구성물, 즉 끊임없이 파괴되고 있는 유아세례파 성전의 기초는 파멸의
무더기가 되었다. 우리는 매우 부지런히 그 소멸들을 조사하였고, 그리스도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을 거기서 수집하였다. 그렇지만 남은 쓰레기 더미는 엄청
났다.

알렉산더 캠블은 1835년에 초판을 내고 1839년에 증보 재판한 그의 저서 기독교 체계(The
Christian System)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환원운동의 출발에 대해 말했다.
현세대 속에서 기독교계 내의 어떤 종파나 당파가 성서만으로 일치되고 소망을 가
졌을 그런 때가 이르지 않자, 동시에 철학과 신비주의와 정치가 그 당파들을 모든 의
문에 정반대 되는 극단으로 치닫게 했고, 오직 형이상학적 신앙에 의한 인의를 주장하
였으며, 모든 종파들의 형식과 의식이 죠오지 폭스의 사고 속에서 "오직 영만으로"를
발아시켰고, 칼빈의 5대 요지는 알미니안의 5대 요지를 초래하였으며, 그리고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은 작성자들에 의해 서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여 가지 다른
신앙고백을 낳게 되었다.
그 이래로 신조와 개혁에 대한 모든 논쟁을 포기하고 다만 초대 기독교를 환원시
키거나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긴요한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만 의
뢰하려는 것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노력이 계속되어왔다.
종교 내의 새로운 신조들과 새로운 당파들과 개혁을 개혁하기 위한 많은 실패했던
노력에 싫증을 느끼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연합이 세상의 대화에 본질적이라
는 것과, 기독교계 내의 무-신조나 당파 설립의 수정과 개선이 스스로에 대해 호전적
인 교회에 평화를, 일반적인 구원에 공로를 회복시켰던 것과 같이 이와 같은 일치와
교제와 협력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관찰과 경험에서 확신하고 성경에서 확신
했던 몇몇 사람들은 현세기의 시작에서 초대 기독교를 환원시키려는 수단과 방법을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사안에 있어서 성서로의 환원은 초기 환원운동가들의 이러한 자각에 의
해 시작되었고, 역사적 경험을 통해 세련되게 적용되었으며, 결국에는 환원운동의 원리적 기
초가 되었다.

환원운동의 과정에서 자각된 과업

"오직 하나의 신앙이지만, 수만의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지금부터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하
나가 되려 한다면, 그들은 견해로서가 아니라 신앙으로 하나가 되어야 함이 틀림없다." 이것
은 1832년 초에 캠블 지지자들과 스톤 지지자들이 연합을 결의했던 제2차 켄터키협의회에서
"래쿤" 죤 스미스가 했던 말이다.
물론 기독교 일치는 처음부터 환원운동의 주요한 과업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
교 일치에 우선되던 성서 환원의 추구가 어느 정도 진척이 있었을 때, 기독교 일치는 환원운
동에 있어서 또 다른 중대한 과업으로 부각되었다. 피. 에이치. 웰쉬머가 말하듯이, "일치에는
힘이 있다." 환원운동가들 사이에서조차도 그러한 일치가 요원한 일인 것처럼 보였을 때, 기
독교 일치는 그만큼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었다. 아무리 성서 환원의 중요성을 호소한다고 해
도, 결과적으로 나타난 기독교 일치가 없으면, 환원운동이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나 다
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톤 더블유. 스톤과 알렉산더 캠블이 1824년에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 대단히 존경했지
만, 몇 가지의 가르침들에 있어서는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함께
친밀해지고, 서로를 인격적으로 알고, 각각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일들은 다소 이해 차이가 해소되기 시작함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대체로 동일한 동기 위
에 서 있었다. 결국 캠블 지지자들과 스톤 지지자들이 공통된 동기로 연합하는 것은 캠블과
스톤 양자의 깊은 바램이 되었다. 양편 대의원 회의가 1831년 크리스마스를 포함해 4일간을
계속하면서 켄터키 주 죠오지타운에서 개최되었고, 그 다음 해 첫날에 다른 협의회가 켄터키
주 렉싱턴 힐 스트리트에 있는 "스톤 형제들"의 옛 회관에서 개최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켄
터키협의회는 양대 단체들의 모든 사람들이 참석하는 대중 집회였고, 이 협의회들에서 천명
된 원리에 의거하여 양대 진영의 모든 사람들은 연합하였다.
이와 같이 기독교 일치는 이와 같이 환원운동가들 가운데서 먼저 그 필요를 절실하게 느
꼈고, 그랬기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전 기독교 세계에 호소하는 것
이 되었다.

환원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세계 복음화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오해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 환원운동은 하나의 교파적 운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계 선교를 위해 필요한 교회의 전열 정비와 그 선교의 수행
을 위한 움직임이다. 그래서 웰쉬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세계의 복음화이
다. 다른 종파를 설립한다거나 다른 교파를 만드는 것이 지금도 우리의 목적이 아니고 목적
이 되어본 적도 없다. 이미 이러한 것들은 너무도 많았다."
세계 복음화는 환원운동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일
치가 진정으로 목표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기독교 일치가 필요한가?
단지 환원운동가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 운동의 목적이 너무 부실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오늘날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계 선교를 위해 참으로 많은 연구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환원운동이 마치 전도운동처럼 보여진다. 특히, 매년마다 열리는 전미
선교사대회(National Missionary Convention)는 각 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모여 예배하고
격려하고 토의하고 모금하는 하나의 행사장이다. 미국 환원운동가들이 세계 선교를 위해 흘
리는 땀들을 거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선교 국가의 그 많은 국기들을 들고 입장하는 기
수단을 보고서, 그리고 그들의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서, 환원운동의 진면목이 거기에 있음을
확인한다.
환원운동을 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단지 종말론적 관점에서만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
리지 않는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는 말씀에 의거하여, 그 날과 그 때는 알지 못하지만, 온 세상의 모든
민족에 대한 복음 전파의 비율을 측정함으로써 재림의 대비를 하고 있다. 나아가 그 날을 앞
당기기 위해 세계 복음화에 더욱 앞장서고 있다.

환원운동의 시원적(始原的) 목표: 성서 환원

환원운동의 시원적 목표는 성서 환원이다. 여기에서부터 환원운동은 실제적으로 시작된다
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환원" 개념에 대한 다양한 정의만큼 환원운동은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그 운동의 광범위한 포괄주의를 보여주
는 듯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그 운동에 대한 정연한 이해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
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와 같은 혼동의 요인을 제거하고 환원운동의 이 기본적인 방향을 바
르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환원"의 개념

"환원(還元)"이란 용어는 단순하게 말해 "근본으로 되돌아감(restoration)"을 의미한다. 이
런 의미에서 가끔 환원운동은 근본주의와 혼동되고 있다. 그렇지만 근본주의가 기독교에는
"변할 수 없는 체계"가 있고, 그 근본이 신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환원
운동은 그 체계 이전에 그 체계를 존재하게 한 근본을 더욱 중시하는 것이다. 물론, 전자가
후자의 중시하는 것을 경시하지 아니하고, 후자는 전자가 강조하는 것을 존중한다. 그럼에도
"근본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는 데에는 여전히 "어떤 차이"가 있다.
해롤드 더블유. 포드(Harold W. Ford)는 "'환원'은 신약성서에서 세상을 위해 기록되고 그
세상을 소개된 기독교로의 환원, 즉 요구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사용되어지는 방법을 묘사하
는 용어이다. 그것[환원운동]은 현존하는 교파주의를 개혁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본래적인
말씀에로 모든 전통과 견해를 돌아가게 하고 그 안에 기록된 제도를 다시 세우는 것, 즉 신
약의 교회를 환원하는 운동이다." 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환원운동은 종교개혁과도 다
르다. 종교개혁은 구교 세계의 일탈된 현상을 타파하고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운동이다. 반
면에 환원운동은 종교개혁 이후의 성찰과 반성에 철저히 실천적으로 대응하고자 모든 전통
과 인간적 견해를 성서의 가르침대로 돌아가게 하고, 성서에 기록된 제도를 회복시켜 온전한
성서적 교회를 지금 다시 세우는 운동이다. 모리스 워맥(Morris Womack)은 그의 책 환원운
동사에 관한 13개 학과(Thirteen Lessons on Restoration History)에서 "개혁과 환원"이란 소표
제로 양자간의 차이를 지적한다.
캠블과 스톤이 일반적으로 그들이 일부를 차지했던 그 운동을 "하나의 개혁(a
reformation)"으로서 언급하더라도, 그것은 가장 훌륭한 교회사가들에 의해 "환원운동
(Restoration Movement)"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종교개혁 초기 시대의 루터, 칼빈, 그
리고 다른 사람들의 의도는 그들의 사역을 실존하는 교회(the existing church)를 "개
혁함(reforming)"이나 "청소함(cleaning up)"의 하나로서 보았다. 우리가 여기에서 연
구하려는 환원운동 지도자들은 그보다 더욱 돌아갔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도하기 위
해서는 지도자들부터 신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들의 역할을 깨달았다.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피. 에이치. 웰쉬머(P. H. Welshmer)는 환원운동이 그 개혁 운동
이후의 성찰에 근거하고, 그보다 더 원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환원 지도자
들은 좋은 것 전부와 개혁자들에 의해 강조되어왔던 영적인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고, 그리고
그들의 어깨 위에 서서 개혁자들이 보았던 것보다 더 멀리 내다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
씀을 그들의 신앙의 법칙으로 취하여 행하였다."

성서 환원

환원은 "근본인 그 무엇으로의 되돌아감"이다. 그것은 나아와 있는 지금의 상태가 근본적
으로 뒤틀려져 있는 것을 다시 그 근본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당연히 성서에 기반을 두어
야 할 어떤 교회가 성서로부터 멀어져 있다면,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교회는 비정상
적이고, 따라서 환원되어야 할 대상이다. 다시 말해, 그 교회는 근본, 즉 사물이 발생하는 근
원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 근원은 교회에 있어서는 성서이다. 자신이 시작된 근원으로 돌아
가야 할 그 교회는 이미 근원과의 연결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 교회는 극단적으로 말해 "그
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교회는 성서로 돌아가서 그 성서에 기반을 두는 기독
교적 정체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교회를 성서에서 멀어지게 하고 이 세상에서 혼란스럽게 했던 것들 중 하나는 기독교 신
조들이다. 이단의 발호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조는 어떤 의미에서는 제 역할을 잘 감
당했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기독교계 내의 분열을 조장하는 요인이 되었고, 교회가 성
서에 다가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때에 환원운동은 "기독교계 내의
무-신조"나 "당파 설립의 수정과 개선"을 통해 "초대 기독교를 환원시키려는 수단과 방법을
반영"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았다. 그 수단과 방법은 성경 밖에서는 찾을 수 없고, 따라서
성경만이 유일한 법칙이었다. 알렉산더 캠블은 "성서만이 세상을 개혁하고, 교회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와 같이 말한다.
성서만이 말과 행위, 고백과 실행에서 유일한 성서이다. 그리고 이 성서만이 세상
을 개혁하고, 교회를 구원할 수 있다. 우리가 한번 우리 자신들을 판단했듯이 다른 사
람들을 판단해 보면, 성서만을 주장하면서 그들의 견해를 설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우리가 성서만을 우리의 의견에 적용하거나 우리의 의견들과 종교적 실천을 성서로
인도하기 이전에, 우리는 "성서만이 개신교도들의 종교이다" 라는 고래의 주제를 호소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주제를 성서만을 따라 어법을 정선하고 어투를 정결하게 하
려는 난점과 이십 년의 수고 가운데 하나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는 전체
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애쉬도드의 이 말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직 신앙과
정서와 행위에서 순결한 말과 저 기독교라고 불리는, 순결하고 거룩하며 천상의 실재
의 바른 개념에서 필연적으로 유래하게 될 법칙들에 의해 실행하고 처신하고 고백한
다.

토머스 캠블은 그의 아들 알렉산더 캠블과 함께 "모든 종교적 의문들이 성경에 의해 해
결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성서가 말씀하면 우리도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면 우리도 침
묵한다"는 표어를 만들어 내었다. 이 환원 표어의 전반부는 신적 계시이고, 그 후반부는 신
적 침묵이다.
"성서가 말씀하면 우리도 말한다." 이것은 토머스 캠블의 그 위대한 진술의 전반부이고,
그 성서의 말씀은 곧 신적 계시(the divine revelation)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현존하는 계시
는 성서만이 담고 있다. 성서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환원운동에 있어서 신학의 유일한 규범은 오직 이 신적 계시, 즉 성서뿐이다. 따라
서 어떤 주제에 대해 성서가 말씀하면(계시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환원운동이 일관되게 호소하고 실천해 온 것이다.
그러나 신학의 규범과 관련하여, 성서와 동등한 자리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전통을 자리
하게 하고, 또한 자유주의적 개신교 교회들이 이성이나 경험을 그 자리에 갖다 놓았을 때,
신학은 왜곡되고 파행을 겪어 왔다. 그리고 해방신학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중시하는 전통의
자리에 상황을 위치하게 했을 때, 신학은 변절되고 과격화되었다. 신적 계시가 경시되거나
무시된 곳에서 경험된 역사적 사실들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말씀을 얼마나 중히 여
겨야 하는 지를 반증한다.
그리고 19세기의 거의 같은 시기에 환원운동과 함께 일어난 구-프린스톤파 보수주의 운
동은 성서 중심의 프로테스탄트주의적 관점을 보수하려고 했지만, 신조의 문제와 관련해서
역시 어떤 딜레마에 빠지기 시작했다. "신조주의인가, 아니면 성서주의인가?" 현대주의를 앞
세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19세기의 보수주의는 역사적 신조들을 들고서 대항하
였으나 자유주의를 공격하던 논리가 도리어 그들의 함정이 되었다. 자유주의의 현대성 추구
에 대항하여 신학의 전통성을 소리 높였던 구-프린스톤파는 그들에게 붙여진 "신조주의"라
는 별명 앞에서 "성서주의"를 강조하는 데 쑥스러운 면이 있었던 것이다.
초기 환원운동의 두 축을 이루었던 한 사람인 바톤 더블유. 스톤(Barton W. Stone)은 복
음주의 계열에서 반-신학, 또는 무신조의 대표적인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에 대해서 죤
제퍼슨 데이비스(John Jefferson Davis)는 복음주의 신학의 기초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자들(disciples)"이나 "그리스도인" 운동의 창시자 바톤 스톤은 장로교인으로 안
수를 받았지만 즉시 장로교의 교리들과 정치가 적절하지 않다고 깨달았던 변경의 부
흥사(a frontier revivalist)였다. 스톤은 모든 교파적 구조들을 의심쩍게 생각했고 "그
리스도인 이외의 어떤 이름도 없고, 성서 이외의 어떤 신조도 없다(no name but
Christian and no  creed but the Bible)"는 것을 인정하기로 맹세했다. 교회의 상태를
깨끗케 하려는 그의 노력에서 스톤은 18세기에 걸친 신조들, 신앙고백들, 그리고 신학
들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했던 인간적 궁리의 쓰레기 더미에 던져져
야"한다고 결론지었다. 스톤의 "신약 기독교(New Testament Christianity)"는 교회의
역사적 신학의 소용이 없다.

스톤의 무신조주의는 성서 이외에는 어떤 신조도 기독교 권위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주장
한다. 그는 신조가 중심 되는 신학, 즉 신조주의가 성서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성서주의를 빗나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무신조주의는 성서주의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간혹 환원운동가들 중에는 무신조주의를 신학 무시의 경향을 가진 사조,
즉 무신학주의로 보고 있기도 하지만, 그의 진의는 성서주의를 강조하는 것 이상도 그 이하
도 아니다.
그렇지만 환원운동가들 가운데는 실제로 신학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잭
카트럴은 그러한 사람들이 규범이나 법칙으로서 성경만을 언급하는 솔라 스크립투라의 개념
을 오해해서 신학을 경시한다고 한다. "그들은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성서만이 신
앙과 실천의 우리의 유일한 법칙이다')의 원리에 근거하여 신학에 반대하는 논증을 한다. 성
경은 그 자체로서 충분하고, 우리는 성경에 덧붙여서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그들
은 말한다. 이것은 규범이나 법칙으로서 성경만을 언급하는 솔라 스크립투라의 개념을 오해
한다. 그것은 조력들과 방편들이 이해와 가르침의 방법으로서 단순히 사용될 때 그 본문에
부가되는 이것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환원운동 내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 하나를 들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적 침묵
(the divine silence)"이다. 이것은 토머스 캠블의 위대한 진술 중 후반부에 해당하는 것이다.
"성서가 침묵하면 우리도 침묵한다." 우드로우 필립스(Woodrow Phillips)는 이 "'신적 침묵'
이 신적 계시와 동등한 존중을 받아야만 한다는 가정 때문에" 토머스 캠블이 "선언과 제언
(Declaration and Address)"에서 "성경이 실행의 명시된 시기나 방법에서와 같이 침묵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과 의식과 관련하여, 만약 어떤 것이 이와 같이 거기에 있다면,
어떤 인간의 권위도 교회를 위해 법을 만듦으로써 그 생각하고 있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
하여 간섭하는 힘을 지니지 못한다"고 말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예견하듯이, 이에 대한 해
석들은 환원운동의 세 집단들에 의해 명백히 구분되고, 그들을 구별짓게 하는 특징이 되기도
하는 반면에, 분열들의 불가피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우드로우 필립스는 자신의 저서 환원 핸드북(Restoration Handbook)의 10-12면에서 각
집단의 해석을 설명한다. 우선, "무악기파"라고 알려지고 처어취즈 오브 크라이스트(Churches
of Christ)라고 일반적으로 불리는 한 집단은 거룩한 말씀에 의해 독특하게 시인되지 않은
어떤 예배나 종교적 실천이 교회에 의해 장려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이것을 해석해 왔다. 일명
"유악기파"라고 불리고 처어취즈 오브 크라이스트/크리스챤 처어취즈(Churches of Christ/
Christian Churches)라고 호칭되는 집단은 어떤 것을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는 교회법으로
"신적 침묵"에 삽입하지 않을 것이지만, 신약의 특정 계명들에 반대되지 않는 어떤 종교적
실천이나 예배 행위에 권리를 가진다는 뜻으로 이것을 해석한다. 일반적으로 "제자파(the
Disciples)"라고 불리는 환원계열의 한 집단은 그들의 더욱 자유적인 요소들로 하여 어떤 것
이든 회중이 다수의 찬성에 의해 이 행위를 승인하는 한 신적 침묵에 삽입될 수 있다는 뜻
으로 이것을 해석해 왔다.
"신적 침묵," 즉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사안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금지의 영역인가, 아니면 자유의 영역인가? 아니면 합의의 영역인가? 만약 신적 침묵
이 인간에 대한 금지 명령이라면, 인간은 신적 계시의 부분이 아닌 한 제한된 세계 속에 살
게 된다. 그것이 만약 인간에 대한 무한한 자유의 허용이라면, 인간은 신적 계시 이외에는
제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적 침묵의 부분이 합의의 영역인가? 교회의 일정한 편의 사안
이나 "세상 사건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일정하게 허용된 합의의 부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렇지만 모든 부분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아니다. 많은 부분은 개인의 판단과
선택과 실행의 자유에 맡겨져 있고, 그에 따른 책임도 부여되어 있다.

기-환원과 미-환원

환원운동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어떤 것이 미-환원 부분으로 환원 과정에 있는가, 아니면
환원 과정을 끝내고 기-환원의 부분이 되었는가?" 라는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아
직도 모든 면에서 환원 과정에 있는 운동이라면, 환원운동은 미국에서의 2세기의 세월에 비
해 그 결과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churches of Christ/
christian churches)는 환원 교회(the restoration churches)이되, "아직도 환원 중인 교회(a
church restoring still)"가 아니라 "이미 환원된 교회(a church restored already)"이다.
먼저, 환원 교회(the restoration churches)는 두 가지의 의미로 정의될 수 있다. 하나는 배
교 교회와의 대조에서, 다른 것은 종교개혁 교회와의 대조에서 그렇다.
먼저, 환원 교회는 배교 교회와 반대되는 개념의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로부터
멀어진 교회를 통칭해서 배교 교회라고 하고, 많은 교회들이 이런 배교의 물결 속에서 허우
적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환원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선교 과정에서 회
의를 소집하여 교회 내에 존재하는 이견을 정리하고자 모여 반-선교 율법주의의 폐단을 척
결하고 교회의 신앙적 기초를 든든히 세우고 세계 선교의 사상적 기반을 공고히 했던 전통
을 계승하는 교회로서 이 땅에 존재하고, 어떤 경우에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에 바르게
나아가는 교회이다.
다음으로, 환원 교회는 종교개혁 교회와도 구별된다. 종교개혁은 실존하는 교회를 고치려
고 하는 데 반해, 환원운동은 근본적으로 신약의 교회를 재건하려고 한다.
환원하는 교회(the church restoring)는 아직 온전한 환원에 이르지 못했다고 고백하면서 꾸
준히 환원운동의 과정 속에서 자신을 성서에 적응시키려는 교회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일
반적으로 말하는 환원 교회는 19세기 초엽부터 시작된 미국 환원운동의 선구자들이 이 땅에
온전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그래서 온전히 주께 돌려드리기 위해 탐구하여 실천
적인 개념으로 확립한 교회 개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환원 교회라 함은 불완전한 상태의
고백을 전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환원하는 교회이다. 환원운동가들은 당시의 교회
들이 말씀에서 멀어져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서 그 원형으로 돌아가야 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돌아가는, 아니 돌아가야 하는 교회는 아직 돌아가야 할 지점이 있기에 그
곳에 이르기까지는 미완의 교회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환원교회라는 개념으로 이 땅에 존재
하게 하자는 것은 배교 교회의 수치와 오욕을 청산하자는 데 그 뜻이 있다. 이 교회들은 확
실히 환원하는 중인 교회들이었다.
환원된 교회(the church restored)는 성서에 기초하여 현재에 재건된 초대교회이다. 많은
이들은 "환원 교회"에 대한 개념을 "환원하는 교회"로 보고 있지만, 이 개념은 자칫 그 교회
가 "영원히 미완의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암시하고, 따라서 "그런 교회에서 구원의 완
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 문제에 대해 미국 환원운동가들은 적
절한 개념의 설정을 하고 있는 데, 그것은 "환원된 교회(a restored church)"이다. 이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를 개혁하는 그런 교회와는 질적으로 다른 교회이고, 철저히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그렇게 세워지고 만들어진 교회이다. 오늘날 환원 교회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러한 의미에서 환원된 교회이다.
환원된 교회는 교회 조직 뿐 아니라 전반적인 교리가 성서에로 완전히 환원된 것들로서
이루어진 교회이고, 환원하는 교회는 어떤 부분은 환원된 상태이지만 어떤 부분은 아직도 환
원하는 중에 있는 교회이다. 각 교회는 스스로를 "환원 중인" 상태에 있게 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환원된" 상태 속으로 자신을 돌입케 할 것인가? 그 해결은 각 교회가 내릴 결정에 달
려 있다.

환원운동의 과정상 목표: 기독교 일치

환원운동은 성서 환원의 결과가 곧 일치된 교회라고 본다. 교회의 일치가 그 운동 과정
속에서 어느 정도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면. 환원운동은 운동으로서 그 역할을 다 하지 못
한 것일 것이다.

기독교의 일치를 향한 환원운동의 노력

알렉산더 캠블은 기독교 일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개인 구원의 다음
으로, 두 가지 목적은 모든 세속 역사를 희생시킬만한 가치 있는 지고선(summun bonum)를
이루고 있었다. 그 첫째는 성경에 의해 조명된 이해로 인도하는 기독교 일치와 평화와 정결
과 조화로운 협력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죄인들의 대화였다. 모든 종교적 의
문에 관한 편애와 혐오는 이 모든 흥미진진한 관심들로부터 일어나고, 그 관심에 의해 제어
되었다. 이러한 관심들로부터 신조들에 반대하는 우리의 조직 운동을 시작하였다." 기독교
일치는 이와 같이 초기 환원운동가들이 인간 구원에 이어 중요시한 부분이다.
기독교 일치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무엇이 기독교 일치인가? 그것은 본질적인 것
에 있어서의 일치이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금언은 "본질적인 것에 있어서는 일치를,  비본질
적인 것에 있어서는 자유를, 모든 것에 있어서는 사랑을(In necessariis unitas, in non
necessariis libertas, in omnibus caritas)"이다. 이것은 또한 토머스 캠블의 유명한 진술인
"신적 계시 및 침묵"과 함께 환원운동의 또 하나의 금언이기도 하다.
제이. 엘. 니이브와 오. 더블유. 하이크는 어거스틴의 그 금언에 대해 두 가지의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로, 비본질적인 것을 결국에는 본질적인 것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중요한
문제 주변에 있는 것들과 혼동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둘째로, 물론 우리는 오류에 대한
필요한 비판을 자비의 정신으로 해야 된다고 주장할 것이지만, 그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이러한 기독교적인 자비의 정신이 희생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증거에 있어서 적극성의 결
여를 가져오는 일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본질적인 것에 있어서의 일치는 환원운동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어야 한다.
환원운동가들은 지금까지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노력해 왔으나 별
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잭 카트럴은 "무엇에 본질적인 것이 우리가 일치해야 하는 본
질적인 것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던지면서 이에 답하고 있다. 첫째로, 어떤 정확한 이해는
구원 자체에 필수적이고, 따라서 신앙의 표준이나 교제의 표준이다. 둘째로, 어떤 교리들은
  가시적 교회의 통합을 위해 (믿음과 실  천 양면에) 본질적이다. 셋째로, 더욱 확실한 교리 m1신앙  에서의 성숙, 즉    뵉煊 지식에서의 성장(벧후 3:18)에 본질적이다. 넷째로, 더욱 더
이해는 교회에서의 지도력에 본질적이다.

기독교 일치에 대한 환원운동과 에큐메니칼운동간의 차이

기독교 일치에 대한 환원운동의 기본적인 입장은 오직 성서에 근거한 일치이다. 성서 이
외의 다른 근거에 의거하는 일치는 기독교의 일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모습
은 성서에서 보여지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일치를 위해서는 성서와 관련한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소위 일치 지상주의
를 주장하는 교회일치운동(ecumenical movement)은 그런 의미에서 일치를 다룸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환원운동과 다르다. "에큐메니칼운동(Ecumenical Movement)은 분열된 기독교계
의 문제들의 점증하는 각성과 기독교 일치를 더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캠블-스
톤 전통의 환원운동과 어떤 현저한 유사성들을 지니고 있지만, 그 환원운동과는 몇 가지 의
미심장한 차이들을 보여준다."
특히, 환원운동가들 가운데 제자파의 "극단적 좌파들은 열렬한 에큐메니칼주의자들
(ecumenicists)이다. 그들은 캠블가(家)와 스톤과 스코트에 그 기원을 두는 환원운동이 원래
일치운동(a unity movement)이고 그 주요 기능이 통합하고 일치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러나 이 제자파에서 발견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한 새로운 관심은 전적으로 환
원운동 밖에 있는 자료들로부터 생겨났다." 그리고 성서에서 교회 일치에 대한 그들의 자
료를 찾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은 세계 공동체와 그 본질과 기능들과 관계들과 전략을 다루
는 교회일치학[ecumenics; 필자주, 기독교에서의 교회일치적 각성과 교회일치 운동을 연구하
는 학문]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교육받고 있다."
"'선언과 제언(Declaration and Address)'의 출판 이래로 지나온 그 한 세기는 기독교 일
치를 위한 유일의 현실적인 소망이 교회협의회(Council of Churches)와 유사한 어떤 계획 속
에서 교파들과 함께-성장함을 통해 있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제자들 중 주요한 대변자는
매릴랜드주 볼티모어에 소재한 크리스챤 템플 교회 목사였으며, 1910년 캔자스주 토페카
(Topeka)에서 회집된 국제대회의 대회장이었던 피터 아인슬리(Peter Ainslie; 1867-1934)였
다. 제자파는 에큐메니칼운동(교회일치운동)을 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교제하고 있
고, 그 협의회는 1948년 홀랜드 암스테르담에서 44개국에서 온 145교회가 모여 시작하였던
진보주의적인 교회 단체이다. 세계교회협의회의 교회일치운동은 그 기본 철학으로 종교 다
원주의를 표방하고, 제자파는 그런 그들과 전혀 거리낌이 없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일치된 기독교의 주요 목적

환원운동은 물론 개인 구원을 가장 중시한다. 그리고 그 운동은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
야 할 그 본질적인 이유가 인간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기독교가 일치된
모습으로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과 하나님간의 대화를 주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된 개인들의 집합체인 기독교는 하나의 모습으로, 하나의 힘으로, 하나의 호소로,
한 가지 관심으로 세상 앞에 나서야 한다.
세상과의 하나님의 대화는 그 자체로 목적하는 바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개종이다. 대
화는 곧 설득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 대화에서 인류에게 구원받도록 설득하신다. 교회는
이를 위한 현장을 만들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설득이 용이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에 최선을 대해야 한다. 환원운동은 이를 위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환원운동이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려는 의지를 담고 있지 않다면, 그 운동은 하나님의
운동이 아니다. 그러한 운동은 단지 기독교의 일부가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하면서 또 하나의
세력화를 조장하려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환원운동은 또 하나의 교파를 이 세상에
만드는 운동이 되어서도 안 되고, 그럴 듯한 대의를 내걸고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잡다한
운동들 중 하나가 되어서도 안 된다. 환원운동이 의미상으로는 "근본으로 되돌아가자는 운
동"임에 틀림없으나, 그 명칭은 세상 구원에 그러한 방법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세상 구원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환원운동
의 그 과정상 목표가 기독교 일치라는 것도 그 궁극적인 목적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함
축하고 있다. 인류 구원은 하나님의 그 크신 뜻이다. 이것은 환원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결론

세계 복음화를 최종적인 목적으로 하는 환원운동의 양대 과업은 성서 환원과 기독교 일
치이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환원운동은 이 세상에서 적절한 대처를 해 왔는가? 이와 관련
해서, 2세기에 걸친 환원운동의 역사는 이에 대해 현실적인 판단을 이미 내리고 있다. 그것
은 환원운동의 주역으로 나서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느덧 세계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
고, 그들의 성과는 세계전도대회(World Evangelism conference)나 전미선교사대회(National
Missionary Conference) 등에서 보고되고 있다.
오늘날 성서 환원은 현대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 일부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환원운동가
들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호소하는 주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이는 성서
환원이란 주제가 기독교 본래의 주요한 과제이기도 하지만, 환원운동이 끼친 영향 또한 과소
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독교 일치는 단지 기독교 분열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극복하려는 교회일치주
의를 표어로 내걸고 있는 에큐메니칼운동이 특별히 추구해 오지 않았더라도 기독교 일반이
염원해 온 것일 것이다. 교회조직상의 실질적 일치는 요원할뿐더러 교회조직간의 연합을 통
한 느슨한 일치도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서, 환원운동은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완전
한 일치를 추구하고 있고, 또한 이를 호소하고 있다. 어쩌면 그러한 일치는 주의 재림에서
주께서만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환원운동은 그 호소를 중단하지 않아야 할 것이
다.

참고문헌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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