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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6-01 05:46
하나님과의 사귐18: 택하심을 받은 부녀(요이 1:1-13)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79  

하나님과의 사귐18: 택하심을 받은 부녀(요이 1:1-13)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요한이서 1장 1절,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에서 “택함을 받은 부녀”는 교회를, “그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복음서에 회당장 야이로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었고, 병들어 죽어가다가 예수님 덕분에 살아난 기사가 나온다(마 9:18-26, 막 5:21-43, 눅 8:40-56). 이 일화에 십이 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댄 직후 나음을 입은 사건이 첨가되었다. 이 두 여성의 공통점은 ‘12’란 숫자이다. 여기서 12란 숫자는 열두 부족 곧 이스라엘을 의미한 것이고, 이스라엘이 깊은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상태를 상징한 것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때 신부 또는 여성에 해당되었다. 복음서 저자들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신부로 보았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낳은 자녀들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 했는데, 여기서 “너희”는 교회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아내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낳은 자녀이다.

또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서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했고, 28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했으며, 31절에서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고 했는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와 “자유 있는 여자”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비유로써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 곧 교회가 낳은 자녀이다.

요한계시록 12장 13절은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고 하였고, 17절은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고 했는데, 여자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비유로써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곧 교회가 낳은 자녀이다.  

또 요한계시록 21장 2절은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했고, 9절에서는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는데,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는 10절에 기록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곧 교회를 의미한다. 그 거룩한 성 곧 교회의 성민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혹은 아내이다. 여기서 "신부"는 육체적 생물학적 의미가 아니고, 교회의 순결성을 말한다. 또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이므로 딸린 자녀들이 많다.

“서로 사랑하자”

1-3절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에서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은 교회와 그것의 구성원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한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부녀”란 말로써 표현될 수 있는데, “부녀”란 ‘숙녀’(kyria, lady)를 뜻한다. 또 “부녀와 그의 자녀”로 표현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택하심을 받은”(eklekte, elect) 자들이다. 목회자인 장로는 진리 가운데 있는 자로써 이 “부녀와 그의 자녀” 곧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했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에게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영원히 함께 살 자라고 했다.

4-6절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는 진리 가운데 있는 자 또는 “진리를 행하는 자”가 계명대로 행하는 자란 점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란 점도 말해준다. 이 계명은 주님께서 처음부터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지키고 행하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가 된다고 하였다.

7-9절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는 요한일서 4장 3절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에 연결된다. 여기서 “미혹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 “적그리스도”는 다른 교훈,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주장한 영지주의 성향을 띤 유대인 에비온파이다. 이런 자들에게 미혹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고 권하였고, 사도들이 가르치고 전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말고 끝까지 지켜서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고 권하였다.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 자란 말은 그리스도를 모시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도 모시지 못한 자란 뜻이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하였다.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0-13절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는 사랑의 한계 또는 경계에 대해서 말한 것이고, “네 자매의 자녀들”은 여러 교회들의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며, 그들이 보내는 문안으로 요한이서를 마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 “미혹하는 자,” “적그리스도,” 다른 교훈,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주장한 자들은 하나님의 포도원 곧 교회를 허무는 여우들이었다. 아가서 2장 15절은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고 하였다. 사도시대의 교회들은 막 꽃이 피던 때였다. 교회를 허는 여우들은 잡거나 몰아내야할 대상이었지, 복음으로 교화시킬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싸워서 물리쳐야할 대상이었지, 사랑이나 온정을 베풀어야할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한 불신자들이 아니라 교회를 공격하고 파괴하는 적대자들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8-9절에서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서신에 언급된 ‘서로 사랑’을 아가페 사랑보다 열등하고 저급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계명에 비해서 ‘서로 사랑’과 ‘사랑의 한계’를 말한 요한서신의 사랑은 월등히 저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이 말한 “서로 사랑”이 끼리끼리의 사랑이 아닌 것은 요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계명대로 또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하라고 지속적으로 권했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 속에 주님의 계명대로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또 적그리스도를 교회에 들이지 말아야했던 이유는 그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여러 지역의 교회들에 몰래 침투한 이들 적그리스도들과의 싸움에서 많은 상처를 입었다. 특히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받았던 상처가 고린도후서 10-13장에 상세히 담겨 있다. 이때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고린도까지 원정을 해야 했다. 그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바울의 원정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다음에는 디모데가 고린도 원정에 나셨지만 그도 역시 실패하였다. 결국 싸움은 디도가 나선 다음에야 이길 수 있었고, 고린도교회와 바울 사이에 평온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 무렵이 주후 56년경이었다. 이 일뿐 아니라, 에베소에서의 유대인들의 핍박과 소요로 인해서 바울 일행은 서둘러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끝내야했다. 이밖에도 바울은 유대교 회당에 끌려가 유대인들로부터 39대의 매를 5번 이상 맞았고, 옥에도 수없이 갇혀야 했다. 사랑에도 끊을 것은 끊는 기술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속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공의가 있었음을 깨달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