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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1-29 09:50
산 소망 산 돌16: 그리스도인들의 삶(4)(벧전 4:12-19)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8  

산 소망 산 돌16: 그리스도인들의 삶(4)(벧전 4:12-19)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베드로전서는 크게 두 개의 설교로 나눠진다. 첫 번째 설교는 1장 1절부터 4장 11절까지로써 침례식 때의 설교가 일부 포함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고난당하는 신자들을 격려하면서 그들이 침례 받고 그리스도인이 될 당시의 신앙적 결단과 감격을 되살려 주려는 목적에서 첨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두 번째 설교는 4장 12절 이하의 말씀으로써 고난으로 인해서 신앙의 위기를 맞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격려하고 권면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 설교의 내용은 성도가 당할 고난에 대한 당부와 목회자인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양떼를 잘 돌보라는 권면과 성도들에게는 목회자인 장로들에게 순종할 것을 부탁한 말씀이다. 본문 12-19절은 두 번째 설교의 시작 부분이자 고난에 대한 당부의 말씀이다. 성도의 고난은 용광로의 불처럼 단련하는 불길이 될 터인데, 그와 같은 시련의 불길이 닥치더라도 놀라지 말고, 오히려 기뻐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자신의 영혼을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맡겨야한다고 권면하였다.

성도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믿음의 소중한 가치를 아는 자들이고, 불같은 시련을 당하여도 배도하지 않고 그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자들이다. 히브리서 11장 36-38절은 성경시대에 신앙인들이 믿음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종류의 악형들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놓고 있는데, 그 내용들을 보면, 조롱당하고, 채찍에 맞고, 결박당하고, 곤장을 맞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고, 톱으로 켜이고, 칼에 맞아 죽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양과 염소 가죽을 쓰고 맹수에 찢기고,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디며, 사막과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숨어살았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가톨릭신자들도 이에 못지않은 잔학한 박해를 당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배고픔이었다. 배교하면 준다고 밥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박해 가운데 신자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이 배고픔이요, 목마름이었다. 다른 형벌은 잘 이기고도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진 사람들이 많았다. 전북 완주군 동상면 광암리에 있는 대아리 저수지에 있었던 속칭 고산 널바위에 살았던 김성철은 아들을 포함한 가족 6명과 마을사람 17명과 함께 체포되어 여산으로 끌려와 신문을 받고 나이 62세 때에 교수형을 받았다. 구전에 의하면, 이들은 얼마나 혹형과 굶주림에 시달렸던지, 옷 솜에 있는 솜을 뽑아 먹다가 풀밭인 처형지로 끌러 나오자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었다고 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둘째, 귀양살이였다. 16세 이상의 아들은 교수형에 처하고, 15세 이하의 자녀와 처는 노비로 삼으며, 시집가기로 약속된 여자는 친정으로 보냈고, 그 밖의 식솔들은 3천리 밖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가산을 몰수했다. 예를 들면, 전주에서 육시형을 받았던 유항검의 큰아들 유중철은 동생 문석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고, 유항검의 처 신희는 함경도 경원부로, 여섯 살 난 아들 일석은 흑석도로, 세 살 난 일문은 강진 신지도로, 그리고 아홉 살 난 딸 섬이는 거제도로, 며느리 이순이는 평안도 벽동으로, 조카 중성은 함경도 회령으로, 유관검(유항검의 동생)의 처 이육희는 평안도 위안으로 각각 보내져 노비로 삼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셋째, 고문이었다. 교인들이 체포되면 제일 먼저 당하는 것이 매질이었다. 해미에서는 교인들의 머리채를 묶어 나무(회화나무)에 매달아 매질하고, 활을 쏘았고, 커다란 돌다리 위에서 머리채를 잡고 팔다리를 들어, 마치 곡식을 타작하듯이, 돌에 메치어 가슴이 터지도록 머리가 부서지도록 자리개질을 했다.

원주감영에서 순교한 최해성은 어찌나 맞았던지, 다리뼈가 부서져 뼛조각 두 개가 땅에 떨어졌고, 등과 배에 구멍이 나서 창자가 빠져 나왔다.

13년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옥중수기를 낸 신태보는 주리를 트는 고문을 당하였는데, 다리뼈가 으스러지고 손발을 쓸 수 없게 되어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고문에 있어서 주리를 트는 것은 가장 기본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조카 정하상은 1839년 기해년 박해 때에 체포되어 그가 쓴 한국 최초의 기독교 변증서인 <상재상서>를 트집 잡는 관헌들에게 몽둥이 끝으로 찔리고 톱질을 당한 끝에 뼈가 드러나는 고문을 당하였다.

합덕 사람 손자선은 공주감영에서 거꾸로 매달려 매를 맞고 얼굴에 인분까지 덮어쓰는 고문을 당했다. 그때마다 그는 늘 웃는 얼굴로 “고맙습니다.”고 말했다. 포졸들이 때리다가 지쳐 “무엇이 고마우냐?”고 물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나와 같은 큰 죄인을 위하여 피를 많이 흘리시고 목이 말라 가래침을 잡수시며 돌아가셨거늘, 나를 이 모양으로 대접하여 주니, 이제야말로 내 죄를 보속하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네 이빨로 네 살을 물어뜯지 않으면 배교한 것으로 여기고 놓아 주겠다”는 꼬임에도 “만 번을 죽어도 배교는 못하겠다.”면서 양팔을 한 입씩 물어뜯어 기절하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27세였다.

넷째, 죽음이었다. 순교자들 가운데는 양쪽 귓바퀴에 화살이 꽂이고, 얼굴에 물을 뿌린 후에 횟가루를 발린 채로 참수형을 당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고, 교수형으로 죽거나 화살에 맞아 죽거나 옥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자들은 우물에 빠뜨려 죽이는 경우가 많았고, 손을 뒤로 묶고, 얼굴에 물을 묻힌 한지를 얼굴에 몇 겹으로 발라 질식시키는 가혹한 도모지 방법으로 처형된 사람들이 있었다. 전주천변에 있는 초록바위터에서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와 홍낙민의 손자 홍봉주의 아들이 15세 때에 수장되었다.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는 전라감사로부터 "너마저 죽으면 집안의 대가 끊기니 배교하라"는 권고를 받을 때마다 "하나님은 천지의 대군주이시고 대부모이신데 어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고 대답했다고 한다.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1801년 10월 24일 46세의 유항검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육시형을 당했다. 육시형이란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는 최대 극형으로서, 죄인을 일단 처형한 후에 그 시신을 머리, 왼팔, 오른팔, 왼다리, 오른다리, 몸통의 순서로 여섯 토막을 내어 전국 각지로 보내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형벌이다.

황사영은 백서사건으로 체포되어 나이 27세 때에 사지를 찢기는 능지처참형을 받아 죽었다. 해미 여숫골에서는 많은 신앙인들이 한꺼번에 생매장 당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유해가 하나같이 선 채로 발견되었다. 홍주관아에서 원시장은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한 후에 결박된 채로 물세례를 흠뻑 받고 성 밖에 내버려져 얼어 죽었다. 충청북도 연풍에서는 원추형 돌구멍에 밧줄 올가미를 만들어 넣어 기독교인의 머리를 반대쪽에서 잡아당겨 머리가 돌구멍에 끼여 죽게 하였다.

1866년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를 당한 프랑스 신부 다블뤼 주교의 증언에 의하면, 젖먹이가 딸린 여인들이며 노인과 처녀들이 말씀을 듣고 주의만찬에 참례하기 위해서 조그만 선물을 손에 들고 다블뤼 주교가 거주했던 충남 합덕에서 가까운 신리교회로 3일, 6일 또는 8일씩 걸어서 찾아갔다. 그들은 잡히면 죽게 될 죽음을 무릅쓰고, 머나 먼 산길을 발이 붓고 피부가 벗겨져 피가 나는 것과 혹심한 추위와 눈보라를 무릅쓰고 찾아갔다. 가서는 밤이 맞도록 설교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성경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죽음과 수치를 의미했다. 그리스도교는 사교로 단정되었고, 국가정책은 사교를 말살하고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 때문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믿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했던 믿음의 조상들은 단 한 번의 예배를 위해서 수 백리 산길을 남몰래 걸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견디기 어려운 불같은 시험들을 참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게 했던 것일까? 그들이 당한 고통과 죽음은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나 시련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무엇이 목숨보다 그토록 더 소중했던 것일까? 그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믿음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했던 것이다. 값진 진주를 발견하거나 값진 보화를 발견한 후에는 전 재산을 팔아 그것을 산다는 예수님의 비유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었고, 믿음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그것에 목숨을 걸 수 있었던 선배들의 신앙과 정신이 우리 후배들의 신앙과 정신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