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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1-22 10:50
1세기 교회질서27: 복음을 위한 고난(8)(딤후 3:1-7)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7  

1세기 교회질서27: 복음을 위한 고난(8)(딤후 3:1-7)

“너는 이것을 알라”

바울은 자기 시대를 “말세”로 인식하였다. 디모데후서 3장 1절에 쓰인 “말세”는 ‘마지막 날들’(eschatais hemerais)이란 뜻이다. 그리고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는 견디기 힘든 환난이 올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은 영적으로 하늘 가나안땅에서 누릴 안식을 말한다. 그렇더라도 현실 세계를 무시하거나 곧 망할 세상인 것처럼 처신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한 주장을 말세론 또는 시한부 종말론이라고 하는데,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했거나 왜곡한 데서 생긴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세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살기를 바라서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구원을 주시고 성령님을 선물로 붙이셔서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힘입어 인간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불의하고 불평등한 인간의 나라를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로 바꿔가도록 하신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의 삶을 종국적이고 영원한 삶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다 더 궁극적이고 영원한 가치, ‘장차올 더 좋은 것’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하고 추구하는 ‘장차올 더 좋은 것’은 영원하고 참되며 세계적인 것인데 반해, 유대인들이 희망하는 ‘올람하바’(다가올 세계)는 현세적이고 일시적이며 민족적이다.

유대인들의 ‘말세’ 또는 ‘종말’에 관한 생각은 시기별로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는 구약성경이 문자적인 글이기 때문에 ‘말세’나 ‘주의 날’은 나라가 멸망하여 바벨론에 유배를 당한 것과 같은 위기가 닥치는 때를 말하였다. 이스라엘 국가나 이웃 나라들의 멸망과 개인의 육체적 물질적 심적 정신적 고통의 때를 말하지만, 우주의 종말을 말한 것은 아니다. 보통 예언자들이 ‘말세’나 ‘주의 날’을 외친 때는 위기의 때로써 회개하지 않으면, 재앙 곧 나라가 망하는 마지막 때에 직면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둘째는 바벨론 유배이후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주권과 명예회복과 관련해서 제2모세를 기대하고 선포하였는데, 그가 메시아이다. 메시아가 오시는 때가 ‘말세’ 곧 ‘마지막 때’인데, 이는 2천 6백년도 더 된 오랜 ‘그 희망’(Ha-Tikvah)이 성취되는 때를 말한다. 유대교인들은 지금이 바로 말세라고 말하고 있는데, “모쉬아크가 오고 계시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쉬아크’는 유대교인들이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메시아’와 차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다. 유대교의 메시아에 관한 희망이 그리스도교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셋째는 페르시아제국말까지 쓰인 구약성경에는 없고, 신구약 중간기인 헬라제국 때부터 발전된 사상에 따르면, 유대교인들은 모쉬아크가 오셔서 회복시킬 ‘올람하바’(Olam Ha-Ba) 곧 장차 올 이스라엘 나라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낙원과 다르고, 계시록 21장 1절과 베드로후서 3장 13절에 언급된 신천신지에 다소 가깝지만 유대인만을 위한 나라(사 65:17, 66:22), 곧 ‘에덴동산’(Gan Eden)을 말하고, 지옥도 ‘게힌놈’(Gehinnom) 곧 ‘힌놈의 골짜기’를 말하는데, 심판의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을 말한다. ‘게힌놈’은 가톨릭의 연옥과 같은 곳으로써 ‘다가올 세상’이 도래하기 전까지만 존재하며, ‘게힌놈’에서 머무는 기간도 최장 12개월로 한정된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다가올 세상’에 들어가지 못한다. 죽은 자의 부활신앙도 헬라제국 때 추가되었는데, 메시아 신앙과 맞물려 있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은 부활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또 누가 부활하게 될지를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어떤 유대교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모쉬아크 시대에, 또 다른 유대인들은 모쉬아크 시대가 끝나고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또 어떤 유대인들은 의로운 자들만이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가하면, 다른 유대인들은 모든 유대인들이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다.

“말세”란 메시아의 때, 곧 더 좋은 새 천년시대를 눈앞에 둔 시점이란 뜻이다. 히브리인들이 출애굽이후의 시대, 곧 우상숭배의 나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후 시내산에서 옛 언약을 맺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새 천년시대였듯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내다봤던 새 천년시대는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신앙(언약의 내용)을 고백하고, 침례(그리스도의 피 뿌림)를 받아 하늘 가나안땅의 시민이 되는 교회시대를 말한다. 종교개혁가들이었던 16세기의 마르틴 루터, 츠빙글리, 칼뱅, 19세기의 알렉산더 캠벨, 발톤 스톤 등도 새 천년시대를 바라본, 즉 자기 시대를 말세로 본 자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멸망을 바란 말세론자들이 아니라 변화된 세상을 바란 종말론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득권세력으로부터 핍박과 환난을 감수하며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고통 하는 때”요 어려운 때였다. 그 어려움을 딛고 넘어섰을 때 그들 앞에 새천년시대가 열렸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가나안땅시대라는 새천년시대를 열기 위해서 여호수아와 히브리인들은 가나안땅의 여러 부족들과 힘겨운 싸움을 펼쳐야했다. 당연히 “고통 하는 때”요 어려운 때였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하늘 가나안땅시대 곧 교회시대라는 새천년시대를 열기 위해서 핍박과 환난 속에서 영적 전쟁을 펼쳐야했다. 당연히 “고통 하는 때”요 어려운 때였다. 이점에 있어서는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이나 재침례파나 신약성경그리스도교운동을 펼친 19세기 환원운동가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끝내기 위해서 투쟁한 것이 아니라 개혁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

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에서 “경건의 모양”은 외형적이고 가식적인 것을 말한 것인데, 2-4절에 언급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돈과 쾌락을 더 사랑하고, 교만, 신성모독, 불효, 불평, 불경, 무정, 한 맺힘, 비방, 방탕, 난폭, 호악, 배신, 무모, 자만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명예와 권세와 재물을 얻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고, 헌신과 인내와 수고와 희생을 거부하는 것이며, 병듦과 가난과 고난을 저주로 아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은 구약성경적이고 유대교적이며 에비온파적인 것이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민족과 나라의 출범과 이동과 발전과 멸망과 희망에 관한 글들이고, 지상 가나안땅에서의 안식과 다산과 장수와 번영에 관한 글이다. 반면에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 십자가에 가시밭길에 헌신에 인내에 수고에 희생에 세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능력과 구원의 지혜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경건의 능력이다. 이런 것은 신약 성경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이며 복음적인 것이다.  

6절에서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간 자들”과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에비온파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어리석은 여자”는 누구인가? 그녀들은 “여러 가지 정욕에 이끌려 죄에 짓눌려 있는”(새번역), “늘 배우기는 하지만”(새번역)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는 못할 신자들이다. 왜냐하면, 7절의 “항상 배우는”에서 이 여성들이 배운 것은 복음의 진리가 아니라, 에비온파로부터 배운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 상태라면, 그들은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죄”와 “욕심”은 남녀사이의 불륜이 아니라, 2-4절에 언급된 것들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