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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9-15 07:55
1세기 교회질서06: 믿음의 선한 싸움(6)(딤전 2:1-4)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1  

1세기 교회질서06: 믿음의 선한 싸움(6)(딤전 2:1-4)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1).

왕(황제)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동시대의 인물들 가운데 시행한 사례가 있는가를 찾아보았다. 1세기 후반기 로마교회의 감독이었던 클레멘트(AD 101 사망)에게서 비슷한 기도문을 찾을 수 있었다.

.... 당신의 종들의 모든 죄를 헤아리지 말아주시고, 말끔히 씻는 당신의 진리로 우리를 씻어주소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셔서 거룩함과 의로움과 마음의 순결함으로 걷게 하시고, 선한 일들과 당신의 눈과 통치자들의 눈에 흡족할만한 일들을 하게하소서. 진실로 주님,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당신의 용안이 우리한테서 평화롭게 빛나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가 당신의 강한 손에 보호받게 하시고, 당신의 뻗은 팔로 모든 죄에서 구원받게 하소서. 또 우리를 부당하게 미워하는 자들로부터 구원하소서.

우리와 지구상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치(harmony)와 평화(peace)를 주소서. 우리 조상들이 믿음과 신뢰로 당신께 경건히 청할 때 당신께서 그들에게 일치와 평화를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그리하소서.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게 하소서. 우리가 전능하고 가장 뛰어난 당신의 이름에 복종하는 동안 그리하소서. 또 우리를 다스리는 지구상의 통치자들과 지배자들에게도 일치와 평화를 주소서.  

로마황제들은 신성을 참칭한 자들이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냐, 그리스도숭배냐를 놓고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숭배를 우상숭배로 알고 이를 거부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내놓아야했다. 신사참배를 강요받던 조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믿었던 일제는 천황과 예수님을 대립시켜 조선 그리스도인들에게 “천황이 높으냐? 예수가 높으냐?”는 물음으로 압박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1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탄압을 받았고, 그들 중 50여명이 순교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만일 황제와 황실의 유력한 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상황이 확 바뀔 수 있었다. 그러므로 통치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예수님 믿고 새 사람이 되어 구원받도록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바울도 황실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에 개종한 사례들을 언급한바가 있다.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빌 4:22) 그리스도를 믿었고, “적지 않은 귀부인도”(행 17:4) 그리스도를 믿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2).

주후 30년 그리스도교가 출범하고 처음 300여 년 동안 전 로마제국에 걸친 대박해가 10여 차례나 있었다. 그 박해에 마침표를 찍은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요,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만든 황제가 테오도시우스 대제이다. 그로부터 로마의 황제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당시 통용되는 주화들에 자신들의 얼굴을 새기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새겨 넣기도 하고, “만왕의 왕,” “승리자” 또는 십자가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글자를 써넣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인 황제들은 세상을 바꿔놓았다. 3만이 넘던 그리스 신들이 사라졌고, 그들을 섬기던 신전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예배당으로 바뀌거나 폐허로 변했다.

가톨릭교회의 예수회는 스페인 사람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및 다른 5명의 동료에 의해서 1534년 8월 15일 창설되었다. 1517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17년 후의 일이었다. 예수회는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해외선교에 나섰다. 그들은 시대흐름, 현지문화, 생활방식 등에 민감하게 적응했을 뿐 아니라, 파격적이고 진보적이어서 그리스도(개신)교가 막 종교개혁에 피치를 올리고 있을 무렵인 1500년대 중반부터 인도(1541년), 일본(1549년), 중국(1583년), 중남미 대륙(1492년 신대륙발견이후)을 복음으로 휩쓸었다.

그들은 수도복도 입지 않았다. 1583년 10월에 마테오리치가 중국 광동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릴 때 승복으로 갈아입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나중에 그는 사대부를 공략하기 위해서 사대부 복장으로 전도하였다. 상류지식층에서 하류층으로 복음이 전도되게 하려는 방식을 취했던 것인데 성공적이었다. 예수회는 중국 곳곳에 대학을 세우고 한문으로 서적들을 출판하였다. 그 영향이 고스란히 우리나라 조선왕국에 파급되었다. 조선에서도 젊은 엘리트들이 먼저 가톨릭신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는데, 불행히도 그들 대부분은 정치기반이 약한 남인 시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집권세력인 북인 벽파들은 남인 시파의 씨를 말리려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묵인한 정조가 승화한 이듬해 신유년(1801)에 박해를 단행했고, 기해년(1839)에도 같은 이유로 박해를 일으켰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자 네로의 부인 폽페아(Poppaea)가 하나님 경외자(theosebes)였듯이, 흥선대원군의 부인 여흥부대부인도 조선가톨릭신자였다. 1860년 베이징조약체결의 결과로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였고, 1864년에는 함경도 경흥지방 관청(경흥부)을 찾아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 통상요구로 대원군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은 러시아의 남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3).

이에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에게 사람을 보내 러시아의 남진을 막아주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러시아와는 나라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기 때문에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그 후 베르뇌와 다블뤼 신부가 한양에 입성하였으나 이미 상황이 바뀐 뒤였다. 우려했던 러시아의 남진은 없었고, 베이징조약으로 영국에게 홍콩을 빼앗겼고,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넘겼으며, 프랑스에게 가톨릭선교를 허락한 청나라가 도리어 가톨릭을 탄압하는 쪽으로 선회하자 조선조정의 안팎에서도 가톨릭을 탄압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대원군은 1866년 봄에 박해를 재가하였고, 이 박해를 빌미로 늦가을에 프랑스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일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한층 강하였고, 병인박해(1866)를 시작으로 기묘박해(1879) 때까지 거의 1만여 명을 용산 새남터와 양화진 잠두봉에서 참수케 하여 한강을 피로 물들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대원군은 가톨릭신앙을 묵인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인과 부인의 하녀들 가운데 몇이 가톨릭신자였다. 만일 대원군이 가톨릭신앙을 받아드리는 상황이 벌어졌더라면 역사는 달리 쓰였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은 1-4절에서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다. 만일 통치자들이 예수님을 믿거나 믿지 않더라도 그리스도교에 포용적이라면, 실로 그리스도인들은 경건함과 단정함과 고요함으로 평안한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하나님은 전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통치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예수님 믿고 새 사람이 되어 구원받도록, 현명하고 의롭도록, 공정하고, 불의와 부정을 멀리하도록, 사리와 사욕을 버리고 국가와 백성의 안녕과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기도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