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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9-10 06:40
1세기 교회질서02: 믿음의 선한 싸움(2)(딤전 1:3-4)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1  

1세기 교회질서02: 믿음의 선한 싸움(2)(딤전 1:3-4)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바울선교에 있어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거점은 드로아와 빌립보였다. 드로아에는 가보의 집이 있었고, 빌립보에는 루디아의 집이 있었다. 이들의 집은 가정교회였을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의 대표적인 도시는 에베소였고, 마게도냐의 대표적인 도시는 빌립보였다. 바울은 에베소에 거점을 두고 동역자들을 통해서 아시아 일대에 교회들을 세웠고, 빌립보에 거점을 두고 마게도냐 일대에, 고린도에 거점을 두고 아가야 일대에 교회들을 세웠다.

3절,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는 주후 64년경 상황에 대한 언급으로 추정된다. 바울은 63년경에 로마에서 풀려났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네로의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바울을 기소한 유대인들이 로마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64-5년경에 바울은 재차 체포되었는데, 64년 7월 18일부터 9일간 로마시의 삼분의 일을 태운 대화재사건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방화범의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마게도냐는 빌립보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빌립보에 머물며, 필요하다면, 데살로니가를 거쳐 고린도까지도 갔었을 수 있다. 만일 이 때가 바울이 로마의 셋집에 연금된 상태로 네로의 재판을 기다렸던 이후의 상황이라면, 아마도 바울은 모든 지역의 교회들의 상황을 직접 살펴보고 싶어 했을 것이다. 바울은 주후 57년 에베소에서의 선교를 마지막으로 최소 4년간 영어의 몸이었기 때문에 기존 교회들의 상황이 매우 궁금했을 것이고, 자신을 육신적으로 알지 못하는 신생 교회들 곧 그레데와 같이 새로운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도 방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바울의 공백기가 5년 이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발전하고 있었고, 발전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들도 낳고 있었다. 이단자들의 등장이 그 한 가지요, 리더십의 문제가 또 다른 한 가지였다. 로마에서의 연금에서 풀려난 이후 바울이 쓴 세 개의 편지들, 곧 디모데전서와 후서 및 디도서는 바로 교회 리더십에 관련된 목회서신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1세기 교회들의 질서를 세운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전통들을 읽게 된다. 그리고 이 1세기 교회질서야말로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교회들이 회복해야할 교회의 본래성, 교회의 순수성, 교회의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펼치는 환원운동의 목표가 바로 이것들이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3절은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교회에 남게 한 이유가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저지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게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만일 그들이 잘 몰라서 그랬거나 옳음에 대한 순수한 마음에서 그랬다면, 디모데의 설명과 권유를 받아드렸겠지만, 만일 바울을 대적하고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면, 디모데로서는 그들을 저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디모데는 이미 수년전 고린도에서 바울의 적대자들로부터 쓴 맛을 본적이 있다.

다른 교훈은 앞서 쓰인 바울서신들에서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된바가 있다. 수년전 갈라디아지역 교회들에 바울의 적대자들이 나타나 “다른 복음”(갈 1:6,7,9)을 전하고 있었다. 이 같은 자들이 고린도교회에도 침투했었다. 바울은 그들이 “히브리인”(고후 11:22)들이고, “지극히 큰 사도들”(고후 11:5, 12:11)을 빙자한 “거짓 사도”(고후 11:13)들이며,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고후 11:4)을 전한 자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민족성별 남녀노소의 차별 없이 또 율법에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데서 온다는 바울의 가르침에 반발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삼위일체론을 거부한 단일신론자들로서 예수님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율법의 근본정신을 일깨워준 참교사정도로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 그룹의 지도자로 예수님의 이복형제인 야고보를 꼽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름과 실천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섬김과 예배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들은 새 언약의 일꾼들(그리스도증인들)이 아니라, 옛 언약의 일꾼들(여호와증인들)이었다. 그들은 토라를 엄격히 준수해야 고토회복과 민족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민족성별 빈부귀천 차별 없이 값없이 은혜와 믿음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죄를 회개하고, 증인들 앞에서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고, 하늘 가나안땅의 상속자가 되고, 하나님가족의 식구가 된다는 새 언약의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팬(fan)이었지, 제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율법 교사였지, 구세주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따름과 실천의 대상이었지, 믿음과 예배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배움의 대상이었지, 헌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 예슈아였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장차올 메시아는 십자가에 못 박힐 자가 아니라, 모세처럼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행하여 유대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자였다. 그들에게 장차올 메시아는 죽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할 자가 아니라, 빼앗긴 고토와 주권을 회복시킬 자였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1)

디모데전서는 다른 교훈을 전한 자들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것이 유대인들과 그들의 율법에 관련된 것이었다는 것을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신화’는 그리스 로마신화를 말한 것 같지는 않다. 바울은 이어지는 글에서 율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리를 믿기보다는 율법의 실천을 앞세우는 유대인들에게 신화는 없기 때문이다.

‘족보’는 천상적 존재들의 우열에 관련된 사상으로 누가 더 천상적인 존재에 가까운가 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천상적인 존재들의 우열에 관한 당대 그리스 로마인들의 관심부터 먼저 살펴보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족보 곧 조상들의 뿌리를 그들이 믿었던 신들에게서 찾곤 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제우스의 아들이나 딸이 많은 것도 그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자기 조상들은 신이었거나 신의 아들이나 딸이었다는 식이다. 예를 들면, 크레타의 전설적 왕인 미노스는 제우스가 에우로페(유럽)를 크레타로 납치해서 낳은 아들이다. 결국 미노스 가문의 뿌리는 제우스인 셈이다. 반면에 제우스가 흰 황소로 변신하여 황소성애자인 에우로페로부터 미노스를 낳았기 때문에 미노스는 수간에 의해서 태어난 아들이고, 그레데(크레타)인들은 황소의 자손인 셈이다.

그리스 로마 신들의 족보는 복잡하다. 신들의 숫자가 명사들만큼이나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고, 삼위일체 신앙을 세우기까지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에게는 그들이 믿었던 신들에 대한 통일된 이야기가 없었다. 하나의 신화는 또 다른 신화와 상반되거나 모순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신화는 허탄하고, 허탄한 신화에서 연결점을 찾는 족보는 끝이 없다. 허탄한 신화와 끝없는 족보가 가문의 명성을 높이는 데는 다소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는 전혀 유익이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한 아버지의 형제자매들이다. 신화에서 연결점을 찾았던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의 족보는 복잡한 가짜 신들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족보는 단순하여 참 신이신 야훼와 그리스도에게 바로 연결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기 때문에 세대에 상관없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밑에 같은 라인에 횡으로만 적힌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비록 그들의 족보가 야훼 하나님께 연결되지만, 그들 위로는 수많은 조상들이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이란 말이 그런 뜻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야훼 하나님을 말할 때 “조상들의 하나님”이란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