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끈25:
희망이신 예수님의 신분 공개(7)(막
8:1-13)
이방인 구원의 표적
칠병이어
1절의 “그
무렵”은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치실 때를 말한다. 이때는 두로와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에 머물고 계셨던 때이다. 두로와 시돈은 지금의 레바논에
해당되는 지중해 바닷가에 위치한 이방인 도시들이고, 데가볼리는 갈릴리 호수 남동편과 요단강 동편의 이방인 지역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신 것,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것, 사천 명을 먹이신 것은 모두 이방인 지역에서 이방인들에게 베풀어진 기적들이었다. 이 기적들은 유대인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위해서 베풀어졌던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의 치유,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과 이방인지역 사역을 끝내고 벳새다에 가셔서
장님을 고치신 기적의 짝들로써 이방인 지역에서 이방인을 위해서 베풀어진 것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놓고 2절에서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양식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뜻이다. 또 예수님은 3절에서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고 하셨다. 영적으로 볼 때,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굶주려있었다는 내용이다. 오병이어 표적 때 단
하루 낮 시간동안 이방인들보다 더 많은 유대인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 가까운 곳에 마을들이 있었지만, 이방인들은 3일 밤낮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광야였기 때문에 음식을 살만한 마을이 가까운 곳에 없었다. 그만큼 영적으로 갈급하고 빈곤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떡(덩어리 빵) 다섯 개는 유대인들의
토라 곧 모세오경을 상징한 것일 수 있다. 오경은 하나님의 613개 계명이 담긴 생명의 말씀이요, 생명의 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떡(덩어리
빵) 일곱 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한 것일 수 있다. 신약성서는 유대인들이 좋아한 숫자 다섯(5), 열(10) 또는 열둘(12)보다는 숫자
둘(2), 셋(3), 일곱(7) 혹은 여덟(8)을 선호하였다. 특히 일곱을 완전수로 여겨 선호하였다. 숫자 오천(5x1000)은 오경(토라)의
아들들로서 이스라엘을 상징한 것일 수 있다. 반면에 숫자 사천(4x1000)은 사방 또는 열방을 상징한 것일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던(6:34) 반면, 이방인을 생명의 양식이 없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8:2-3). 먹고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kophinos)는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일곱 광주리(spyridas)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한 것일 수 있다. 실제적
사건들을 상징으로 푸는 것이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함축된 의미는 중요한 해석의 열쇠일 수 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예수님이 삭막한 유대사막에서 받은 마귀의 시험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게 바란 세 가지 희망 곧 빵문제 해결, 추락한 이스라엘의 명예, 주권의 회복이었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마귀의 요구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자격으로 내세운 첫 번째 조건이었다. 제2출애굽사건을 주도할 그리스도는 모세가 제1출애굽사건에서 보여준 것처럼 민중에게
만나를 내려 먹게 할 수 있어야 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과 사천 명을 먹이신 표적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민중은 예수님을 붙잡아 자신들의 왕으로 삼아 혁명을 꾀하려고 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반역자로 몰아 죽이려고 하였다. 예수님이 이 두 개의 급식표적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때, 당신의 사명을 이루실 때,
대속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할 때, 부활 승천하여 하늘보좌영광을 받으실 때가 임박하였기 때문이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명백히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힌 표적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모두가 요구하는 세 가지 희망, 곧
언젠가는 다시금 깨지고 낡아지고 무너지고 말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빵문제 해결, 이스라엘의 추락한 명예와 주권의 회복을 위한 세속적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셨다.
예수님에게 그토록 열광했던 민중조차
불과 수개월 뒤에 그리스도를 제거하려는 악한 자들의 편에 선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세속적 희망을 거부하셨기 때문이다. 11절에서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는 말씀은 마귀가 예수님을 힐난하며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한
것과 동일하고, 12절에서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하신 것과 같다.
마가복음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이미 두
번에 걸쳐 급식기적을 펼쳐 보이신 후에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는 말씀을 배치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참 그리스도를 기다렸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민중의 선동가요 혁명을 기획한 반역자로 몰아서 죽이려한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 12:39,
16: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보이시지 않고, 13절에서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셨다.”
고독한
싸움
침례 요한으로 대표되는 유대교 신(神)의 이미지는 아버지였다.
그것은 마치 메마른 사막에서 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고 외친 것처럼,
율법적이고 준엄한 엄부(嚴父)의 이미지였다. 반면에 예수님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신의 이미지는 어머니였다. 고단한 민중에게 필요한 것은 사해
언덕의 유대사막과 같은 삭막함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 언덕의 푸름과 같은 것이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3-4).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민중에게 들려준 말씀들은 어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와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이 갈등했던 싸움은 세속적
욕망과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이겨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예수님의 노력은 끊임없는 기도로 나타났다. 예수님은 민중이 끈질기게 자기를 찾는
것이 세속적 욕망 때문이란 것을 아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랑의 신을 깨우쳐 주려했지만, 결국 그들은 배신하였다. 복음서는 민중이 예수님한테서
사랑의 중요성을 배우려하기보다는 표적만을 구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슬픔에 빠지게 했다고 전한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
사랑의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현실에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사랑은 대개의 경우 현실에 무력하고 직접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상처
입은 민중은 현실에 쓸모 있는 것만을 원했다. 사랑보다는 현실적인 것만을 원했다. 병든 자들은 병 낫기만을 바랐고, 굶주린 자들은 먹을 것만을
바랐고, 억압에 눌린 자들은 해방만을 바랐다. 민중이 바란 것은 기적뿐이었다.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는 복음서 기록의 이면을 잘
살펴보면, 슬픔과 질병과 굶주림의 고통 속에 있는 민중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위로하신 반면, 기적을 구하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자들과는
대립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현실에 필요한
기적만을 구하지만, 정작 그들이 겪는 가장 큰 불행은 기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을 베풀자가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밝힌 것처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지 기적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당하셨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셨으며, 최후에는 그들의 대속(代贖)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