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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5-03 08:25
[종합]성도의 인내와 믿음(히 10:26-39)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8,072  
성도의 인내와 믿음(히 10:26-39)

히브리서는 장별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1장과 3장에서 각각 천사보다(1장) 또는 모세보다 뛰어난 예수님(3장)을 소개하였고, 이어서 2장부터는 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형님과 오빠이신 예수님’(2장), ‘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4장),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5장), ‘우리를 위해 앞서가신 예수님’(6장), ‘하늘보다 높이 되신 예수님’(7장),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8장)을 소개하였으며, 계속해서 ‘구약예법과 성막’의 한계점과 문제점을 지적한 후에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9장),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여신 예수님’(10장), 그리고 ‘믿음의 실상과 증거이신 예수님’(11장)을 소개하였으며, ‘오름의 행진의 방향’과 ‘장차올 좋은 것’(11장)에 대해서 소개하였다. 그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12장), ‘영원히 한결같으신 예수님’(13:8), ‘성문 밖에서 고난 받으신 예수님’(13:12),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13:20)을 차례로 소개하였다.
이러한 예수님 소개의 배경에는 처음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과 바벨론유배 전후에 예언된 메시아와 신정국가 도래에 대한 오래 묵은 희망이 있다. 유대교인들은 그 희망을 ‘하티크바’(Ha-Tikvah)라 부른다. 그리고 그 희망을 이룰 불세출의 지도자, 제2의 모세를 ‘모쉬아크’(Moshiach)라 부른다. 그리고 그가 장차 예루살렘 시온성에 세울 신정국가를 ‘올람 하바(Olam Ha-Ba)’라 부른다. 유대교인들은 이 때 흩여졌던 모든 유대인들이 본향에 돌아오게 되고, 토라(Torah)와 성전중심의 유대교예배가 재건되며, 유대인들이 그토록 바라던 안식을 얻게 된다고 믿는다.
히브리서는 이런 유대교인들의 숙원을 기독교의 독특한 희망에로 재해석하고 있다. 히브리서 이해의 핵심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실체와 그림자,’ 혹은 ‘원형과 모형’으로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이다. 유대교인들이 바라는 ‘그 희망’의 내용들은 땅의 것이고, 유한한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고, 장차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와 모형에 불과한 것이며, 기독교인들의 희망은 하늘의 것이고, 무한한 것이며, 영원한 것이고, 장차올 좋은 것들의 실체와 원형임을 밝힌다. 이 땅에는 우리가 찾는 진정한 안식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 이 땅에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쟁취해야할 가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우리가 땅의 것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하늘의 것을 바라볼 것인가, 유한한 것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무한한 것을 추구할 것인가, 일시적인 것에 착념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것에 착념할 것인가, 그림자와 모형을 쫓을 것인가, 아니면 실체와 원형을 쫓을 것인가를 바르게 생각하고 선택할 것을 힘줘서 권면한다. 한번 잘못 선택하면 회복할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아울러 강조한다. 그 예로써 에서가 땅의 것, 유한한 것, 일시적인 것의 상징인 팥죽 한 그릇에 하늘의 것, 무한한 것, 영원한 것의 상징인 장자축복의 상속권을 포기한 후에 크게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던 점을 소개한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고, 바벨론유배 전후에 예언자들이 메시아와 신정국가 도래를 예언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진정한 의미와 뜻이 문자적인 가나안 땅, 문자적인 제2의 모세, 문자적인 유대왕국회복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장차올 더 좋은 것, 영적이고 영원한 것, 이 땅의 것보다 더 좋은 저 하늘의 것, 선지자 모세와 엘리야보다 더 뛰어나시고, 다윗과 알렉산더보다 더 훌륭하시고, 아론계열의 대제사장들보다 더 월등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선지자와 만왕의 왕이 되시고, 영원한 멜기세덱계열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하늘의 성막과 하늘의 왕국과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구원받은 이방의 모든 성도들이 다 그의 백성이 되는 것, 유대민족과 유대왕국의 경계를 뛰어넘는 세계적이고 우주적이며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것으로 재해석한다.
유대교인들의 희망, ‘하티크바’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 세 가지 단어들, ‘언약,’ ‘약속,’ ‘예언’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먼저 ‘언약’(covenant)이란 말은 출애굽기 24장에 기록된 ‘시내산 언약’을 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유대교인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토라’(torah)는 시내산 언약의 내용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며, 이 언약을 자기 민족의 판단잣대로 삼아 활동한 예언자들의 글이 예언서들이기 때문에 시내산 언약은 구약성서 39권의 핵심이자 이해의 중심이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이 ‘시내산 언약’을 짐승의 피로 맺은 흠 있는 ‘옛 언약’으로 단정 짓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영원하고 무흠한 ‘새 언약’을 소개한다.
‘약속’(promise)이란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가나안 땅’에 관한 약속을 말한다. 물론 성서에는 가나안 땅에 관한 약속 말고도 다른 약속들이 많지만, 신구약성서이해의 중심을 차지하는 약속개념은 가나안 땅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노예였고, 떠돌이였다는 것과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셨고, 노예와 떠돌이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안식을 얻게 하셨다는 것을 신앙의 내용으로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다.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떠돌이와 유배의 삶은 지금까지도 수천 년에 걸쳐서 지속되고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가나안 땅은 한 맺힌 것이자, 안식의 상징이며, 문자적으로 팔레스타인 땅, 예루살렘 시온에 제한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시온에로 오름’(ascension to Zion)은 지금도 계속 추진되고 있다. 여전히 유대인들의 3분의 2정도가 그들이 ‘유배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땅이 아닌 이국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도 ‘약속’의 개념을 자주 언급하였다. 구원의 내용으로 약속되어지고, 그 약속의 보증금과 인감으로써 성령님을 선물로 주신 ‘기업’(땅)과 ‘후사’(상속자)만 하더라도, 약속의 땅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이 약속의 땅을 팔레스타인 땅, 예루살렘 시온으로 보지 않고, 하늘 가나안 땅, 하늘 예루살렘 시온에로 오름을 강조한다. 지상의 가나안 땅에서는, 비록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지라도, 인간에게 안식과 평강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언’(prophecy)은, 물론 다른 예언들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바벨론 유배이후에 발전된 ‘장차올 메시아’와 ‘장차올 세상’(올람하바) 곧 ‘회복될 이스라엘 나라’에 관한 것이다. 이 시대의 예언자들은 두 가지 내용으로 활동하였다. 첫째가 회개운동이고, 둘째가 회복운동이었다. 예언은 두 번째 회복운동에 관련된 것이고, 이 운동의 내용 속에 메시아가 세울 신정국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은 아직도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았고, 당연히 이 예언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하였고, 근거를 제시하는 방법론에서는 구약성서내용을 신약성서내용의 모형과 그림자로, 신약성서내용을 구약성서내용의 실체와 원형으로 설명하였다. 이상의 차이점들을 구분할 수 있을 때, 히브리서가 구약성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는가를 알 수 있다.
유대교사상 가운데 중요한 테마가 안식이다. 유대교인들에게 안식은 특별한 개념이다. 그들이 그토록 안식일을 엄하게 지킨 이유, 상황에 따라서는 수백 가지가 넘는 상식을 초월한 안식일 법들을 만들어서 지킨 이유가 그들의 오랜 유배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사람, 그 어떤 민족보다도 더 절실하게 안식이 필요했다.
유대교인들이 생각하는 안식의 원형(prototype)은 가나안 땅이다. 아브라함이 오랜 유랑 끝에 안식의 상징인 가나안 땅에 진입한다. 야곱의 후손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가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다. 홍해를 건넌 후 사막에서 40년을 살다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진입한다. 기나긴 세월의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얻게 되는 가나안 땅, 나라 없이 떠돌던 서러움을 한 순간에 씻어버린 가나안 땅의 진입이었다. 따라서 가나안 땅의 진입은 오랜 고난과 시련에 종지부를 찍고 얻는 안식을 상징한다. 오늘날에도 세계 도처에 흩여져 사는 유대인들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 땅은 이방인들의 눈으로 볼 때, 불모지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이 볼 때는 젖과 꿀이 흐를 수 있는 희망(하티크바)의 땅이요, 하나님이 점지하신 땅이요, 약속의 땅이요, 거룩한 땅이요, 영원한 안식처이다. 이 가나안 땅에 오름, 이것은 분명 유대인들의 집단무의식이자 원형이며, 끈질긴 집념이면서 절대 신앙이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의 안식개념은 지나치게 민족적이고, 배타적이며, 땅 중심적이었다. 그것은 또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이었고, 육체노동의 쉼과 모든 창조활동의 중지를 의미하였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의 민족적이고, 배타적이며, 영토중심적인 안식개념을 우주적이고 탈민족적인 포용개념으로 승화시켰고, 유대인들의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안식개념을 내세적이고 영적인 개념으로 승화시켰다. 또 무덤상황 곧 흑암과 혼돈과 죽음의 상황을 박차고 일어나는 부활의 삶을 안식의 개념으로 취했다. 일하지 않는 육체의 쉼보다는 참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쉼을 의미하였다.
인간에게 참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막힌 담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길과 오직 믿음과 은혜로 법적인 속죄는 물론이고 양심까지 깨끗케 사함 받는 길을 열어주셨으며, 육적인 복은 물론, 더 좋은 영적인 복까지 풍성히 채워주신다. 또 예수님은 우리의 형제이시며, 참 안식을 주시며,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다시 나타나실 분이시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장래에 좋은 일들을 엮어 주시는 우리를 위한 우리의 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성도들의 꿈과 희망을 이뤄주실 분은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바라는 것’을 이루는 보장이 되고, 실체가 되고, 실상이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믿는 이들에게 “장차올 것을 보장하는 보증금으로써” 성령님을 선물로 주셨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그것들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그들의 신분이 비록 천할지라도,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모든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것을 이루는 보장이 되고 실상이 된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비록 우리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오르는 무모한 것일지라도, 끝내 이기고 약속의 증거를 손에 넣게 할 것이고, 바라던 것을 이루게 할 능력이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할 지혜이다.
성도들이 나아가 도달할 곳은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성도들의 오름의 행진과 방향은 저 팔레스타인 땅의 시온산과 예루살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또 성도들이 도달할 곳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하나님을 보좌하는 네 케루빔과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과 24장로들과 천군천사들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가 도열하여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을(계 9:12) 쉼 없이 돌려보내는 곳이다. 또 그곳은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를 끝내고, 그곳에 오르는 날,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군천사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승리자로서 월계관을 받아쓰게 될 곳이다.
히브리서는 열일곱 차례나 ‘하자’라는 말을 쓰고 있다. 4장에서 다섯 번 쓰고 있는데,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자(1,11절). 신앙을 굳게 지키자(14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16절).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자(16절)고 했고, 6장에서 한번 초보단계에서 벗어나자(1절)고 권했다. 10장에서 네 번에 걸쳐 하나님께 나아가자(22절). 신앙을 굳게 잡자(23절). 서로 격려하자(24절). 모이기를 힘쓰자(25절)고 했으며, 12장에서도 네 번에 걸쳐 인내로써 경주하자(1절). 예수님을 바라보자(2절). 감사드리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자(28절)고 권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3장에서 세 번 예수님이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자(13절). 찬양의 제사를 드리자. 입술의 열매를 드리자(15절)고 권했다.
히브리서는 믿음과 인내에 관한 글이다. 히브리서 10장 26-39절은 기록목적에 부합한 글이다. 내용은 이렇다. 진리의 지식을 얻은 뒤에 일부러 죄를 지으면, 그 때에는 속죄 제사가 남아 있지 않다. 믿음과 인내를 보이지 못하고 배신했을 때, 남은 것은 무서운 심판과 그들을 삼킬 맹렬한 불뿐이다. 하나님을 처음 믿고, 구원의 빛을 받은 뒤에 그 숫한 고난의 싸움을 견디고 이긴 첫 사랑의 때를 회고해 보라. 그 시절에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고, 동일한 처지에 놓인 교우들의 동반자가 되며,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재산몰수를 당하고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일을 기쁨으로 당하던 시절을 생각해 보라.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에 떠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동이다. 믿음이 있는 행동은 한번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확신을 가지고 참고 인내하며 용기 있게 전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나서, 약속하신 큰 상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수고를 마치고 인내의 결실을 맺을 때가 멀지 않다.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오실 날이 멀지 않다. 그분은 결코 지체치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10:35-37). 우리 성도들이 붙들고 놓지 아니한 그 희망과 믿음의 끈이 결국에는 우리를 인생의 미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에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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