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일치14: 행함이 없는 믿음(2)(약 3:1-8)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야고보서 3장 1-2절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능히 온 몸에 굴레”를 씌워 말에 실수가 없고 온전한 자라야 선생의 자격이 있다는 말씀이다. 또 선생은 말을 많이 하는 자인만큼 실수가 많을
수밖에 없고, 그 책임도 작지 아니하니 선생이 되기를 조심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3장 8-10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다.”고 하였다. 여기에 언급된 랍비, 아버지, 지도자는 모두 선생을 말한다. “랍비”는 히브리어로 선생이란 뜻이고,
“땅에 있는 자”와 “아버지” 역시 선생을 뜻한다. 가톨릭사제를 신부라 부르듯이 일찍이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왕하 2:12, 6:21,
13:1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랍비들을 아버지라 부르곤 하였다. 바울도 디모데, 디도, 오네시모와 같은 제자들을 아들이라고 불렀다(딤전
1:2, 18, 딤후 1:2, 2:1, 딛 1:4, 몬 1:10).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잠 16:5). 교만한 자의 문제점은 오류와 실수를 피할 수 없는 유한한 피조물인 주제에 남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 드는 것이고,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에서 선생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는 충고였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마 23:2)고 하셨는데, 이들이 모세가 전한
율법(Torah)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Rabbi)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할 때 앉았던 의자가 ‘모세의 자리’였다.
회당에서 ‘모세의 자리’는 율법을 담은 법궤가 놓인 서편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는 커튼 앞 회중을 마주보고 앉는 강단(Bema)에 있었다. 이
의자에 앉아서 율법사들이 모세의 권위를 가지고 모세의 성문법(Torah)과 구전법(Mishnah)을 가르쳤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첫 오순절 날 시내산에서 첫 기록 토라를 주셨고,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장로들을
통해서 구전 율법을 주셨다고 믿는다. 이를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면, 출애굽 직후 처음 100년간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 및 장로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그 이후로 주전 200년까지 약 1000년간은 선지자들과 학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으며, 주전 200년부터 예수님 때까지 약
200년간은 학문과 견해에 있어서 쌍벽을 이뤘던 다섯 쌍(Zugot)의 가문들을 통해서, 그리고 주후 첫 200년간은 선생들(Tana’im)을
통해서, 그리고 주후 200-500년까지 약 300년간은 해석자들(Amora’im, 낭송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믿고 있다. 예수님의 직전
세대인 힐렐과 샴마이가 마지막 ‘주고트’이고, 교회가 창립되고 신약성경이 기록된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는 ‘타나임’이라 불린 선생들의 활동
초창기였다.
야고보는 혀를 말과 배와 불에 비유하였다. ‘마력’(馬力)이란 말에서 보듯이, 말은 달리는 힘과 짐을 끄는 힘이 크고, 큰 배는 수송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아무리 말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이 없고, 말을 제어할 기술이 없으면 소용이 없고, 또 배가 아무리
수용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 배를 조종할 작은 키와 기술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고대 헬라 작가들에 따르면, 말에 있어서의 재갈은 연상적으로
배의 키에 비유되곤 하였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3-4절에서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한다.”고 했고, 5-6절에서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난다.”고 하였다.
톨스토이의 민화들 가운데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가 있다. 톨스토이가 말한 불은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미움’이지만,
야고보가 말한 불은 ‘혀’이다. 불이든 혀 놀림이든 놓아두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되고 결국 잿더미만 남게 된다.
“혀는 ...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7절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를
입증하는 동영상이 2020년 9월 초에 나돌았다. 이 동영상에는 당나귀, 젖소, 염소, 사자, 개, 거위, 바다표범, 닭, 고양이, 돼지,
물고기, 칠면조, 코끼리, 송아지, 산양, 말, 고래, 돌고래 등이 사람에게 안기고 애무하며 교감하는 장면들이 차례로 나온다. 또 영화
<아름다운 비행>에서는 인간과 기러기들이 교감하는 장면들이 실화를 바탕으로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이 영화에서 길들여진 기러기들이
모터글라이드와 함께 비행하는 장면은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필자도 소년시절에 때까치 새끼를 잡아 길들였고 성체가 되면 날려 보내곤 했었다.
8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를 입증하는 사례가 인터넷공간에 널려있다.
오늘날에는 사람의 혀를 대신하는 것이 ‘댓글’이다. 선한 댓글이 없지 않지만, 비난과 험담을 일삼는 악성 댓글이 만연(蔓延)하다. 이로 인해서
자살한 젊은 연예인들(설리, 구하라, 유니, 정다빈, 최진실 등)이 많다.
혀가 전혀 길들여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상하부의 본능을 통제할만한 전전두엽(초자아)이 인성교육으로 발달되었다면, 그 사람의 혀는 잘
길들여져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말들을 쏟아낼 것이다. 반면에 인성교육의 결핍으로 전전두엽(초자아)이 발달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의 혀는
사람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는 치명적인 독성을 품어낼 것이다.
하나님의 언어는 긍정의 언어이다. 하나님은 직면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현실 앞에서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빛이
생겼고, 결과도 보시기에 좋았다. 그 이유는 흑암이 변하여 빛이 되었고, 혼돈이 변하여 질서가 되었으며,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생명체에게 절대필수인 ‘빛’의 창조는 살림의 언어, 생명의 언어, 긍정의 언어에서 비롯되었다. 살림의 언어, 생명의 언어, 긍정의 언어에
문제해결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적은 긍정의 언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런
언어습관을 본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