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위해 싸우라02: 단번에 주신 믿음(유 1:3-4)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1)
3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방어하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다.”에서 “일반으로 받은 구원”은
우리가 받은 구원을 ‘차별 없이 함께 나눈 구원’으로 설명한 것이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은 믿음을 ‘단번에 결정적으로 전해진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차별이 없기 때문에 은혜요, 값이 없기 때문에 은혜이며, 조건이 없기 때문에 은혜이다.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단 한 번에 결정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소중한 믿음과 구원을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고 있다. 밝혀진
유다서의 기록목적은 이 구원과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서 힘써 싸우라고 권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회 안에 몰래 침투한 이단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방어하라)”는 권면은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권면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와 맥을 같이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의 도구로써 “믿음과 착한 양심,” “간구와 기도와 도고(중보)와 감사,” 남자들은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하는) 기도,‘ 여자들은 “단정”함, “소박함,”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 “선행,” “순종,” “조용”(공적
예배질서) 및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함 그리고 리더십으로서 장로(감독자, 목양자)와 집사(봉사자)를 거론하였다. 특히 장로
리더십에 관해서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8-35절에서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으로 교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나운 이리들로부터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고 양떼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이 구절 곧 그리스도교 믿음에 대해서 자신의 주석 <매일의 성경
연구>(Daily Study Bible)에서 몇 가지 매우 유익한 사실을 설명하였다.
첫째, 믿음은 우리에게 전달된 어떤 것이다. 그리스도교 믿음의 사실들은 우리가 자력으로 발견한 어떤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단어의 참된
의미로 볼 때 그 사실들은 전승(전통)이요, 그 전승이 우리에게 도달하기까지 대대로 전수되어져온 어떤 것이다. 그 사실들의 끊기지 아니한
사슬(전승)의 첫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2)
여기에 추가로 언급될 어떤 것이 있다. 믿음의 사실들은 진실로 우리가 자력으로 발견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전승의 사실은 체온을 느낄 수 없는 인쇄된 책들로 전해져온 어떤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세대들을 거쳐서 사람이
사람에게로 지속적으로 전해진 어떤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승의 사슬은 일종의 산(living) 사슬이다. 그 사슬의 고리들은 그 사실들의
경이로움을 경험한 남녀 사람들이다.
둘째, 그리스도교 믿음은 우리에게 단번에(한 번에 모든 것이) 전달된 어떤 것이다. 그것 속에는 일종의 불변의 특성이 있다. 그것은 각
시대가 그리스도교 믿음을 재발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속에 변하지 않는 핵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영구적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해 사시다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교 믿음은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에게 맡겨진 어떤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믿음이 어느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교회의 소유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전수되어지고, 교회 안에서 보존되며, 교회 안에서 이해되어진다.
넷째, 그리스도교 믿음은 옹호되어야할 어떤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것의 옹호자임이 틀림없다. 만약 그리스도교 전승이 세대를 거쳐
전해져온다면, 각 세대는 그것을 부패되지 않고, 변개되지 않은 상태로 전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웠던 시기들이 있다. 유다가 “싸우라”에
사용한 헬라어 단어는 ’epagonizesthai‘로써 그 어근은 ’고통‘(agony)이란 뜻이다. 믿음을 방어(옹호)하는 일은 희생이 따르는
일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방어는 교회의 모든 세대가 감당해야할 의무이다.
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에서 “가만히 들어온 사람은” 방탕한
영지주의 경향의 유대인 에비온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단자들로서 한편으로는 육체적인 것을 죄악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4절에 언급된 이단자들의 특징은 네 가지이다. 첫째로 그들은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둘째로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었다. 셋째로 그들은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들이었다. 넷째로 그들은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첫째,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 지역교회의 등록교인들이 아니라 교회들을 순회하는 거짓 교사들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유대인들로서 안디옥, 갈라디아, 에베소, 고린도 등 지중해 연안의 1세기 이방인 교회들에 침투하여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2장 1절에서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2장 4절에서 “... 그들이 가만히(몰래)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다.”고 했고, 고린도후서 11장 4절과 갈라디아서 1장 6-9절에서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참 교사와 거짓 교사,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는 받은 것(1:20-21)과 만든 것(1:16, 20, 2;3)의 차이이다. ‘받은
것’이란 성경의 예언들을 말하고, 예언자들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며, 그들이 말한 예언들은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을
뜻한다. 또 윌리엄 바클레이의 말대로, 대대로 전승되어진 믿음,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전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말한다. 반면에 ‘만든 것’이란 “교묘히 만든 이야기들”(1:16), 성경의 예언들을 “사사로이”(자의적으로) 푼
해석들(1:20),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이 “탐심으로 지어낸 말들”(2:3), 곧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과는 한참 동떨어진 거짓
가르침들을 말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9-20절에서 하나님의 권속 곧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자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했고, 그 터의 모퉁잇돌이 그리스도 예수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