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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6-22 00:48
전환기를 맞는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마 5:13-16)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148  
우리가 쓰고 있는 일상용어 가운데 '지구촌'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문화, 통신, 교통, 무역 등의 발달로 인해서 세계 모든 나라들이 더 이상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한 마을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는 뜻일 것입니다. 뉴욕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동시에 동경과 서울과 파리에서도 상영되는가 하면, 미국에서 유행하는 노래가 동시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유행한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통신의 발달로 국제간의 통화는 이웃 집에 전화하듯 쉽게 할 수가 있고, 교통의 발달은 세계를 일일 생활권에 들게 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비행기로 김포를 떠나 일본에 도착해서 일을 마치고 저녁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 올 수가 있습니다. 무역의 발달은 식품에서 공산품에 이르기까지 국산품과 외제에 구분없이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상품의 국제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외국산 제품들과 국적 미상의 외래문화가 우리 생활 깊숙히 파고 들고 있어서 민족의 산업과 문화전통이 붕괴되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의 세계적인 추세는 더 이상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폐쇄성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권만 있으면 비자없이도 여행할 수 있는 나라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 나고 있고, 국제간에 보호무역의 장벽은 점차적으로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유럽공동체와 북미주의 카나다, 미국, 멕시코가 경제블럭을 형성하였는가하면, 유럽공동체에서는 화폐통합까지도 꿈꾸고 있습니다. UR협상타결로 인해서 공산품은 물론이고, 쌀과 같은 농산품, 교육, 금융,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1차, 2차, 3차산업에 구분없이 각종 분야에서 개방의 압력을 받고 있고, 또 실제로 개방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제는 '국산품 애용'이란 단어마져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고, 다국적기업과 외국의 자본이 축적된 노하우와 서비스를 바탕으로 모든 분야에서 사업에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외제선호사상을 버리지 않은한 외국기업과 자본의 점유률은 높아만 갈 것이고, 결국은 그들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빚게 될 것입니다.

21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개방의 폭이 크고 빠르게 진행되리라 봅니다. 빠른 개방의 물결로 그동안 통제되었던 퇴폐성 외래문화가 범람하게 될 것입니다. 퇴폐성 세속문화의 침투는 감수성이 강한 젊은이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들은 민족정신이라든지, 민족의 문화전통, 혹은 건전한 기독교문화전통과 점차적으로 격리되면서 정체성을 잃고 가치관의 혼돈속에서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쌀'을 지키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우리 농산물 보호에 벌리는 켐페인 만큼이나 개방의 물결을 따라 급속히 침투하는 세속문화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속문화와 함께 성공주의, 물량주의, 배금주의, 퇴폐성 향락문화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성공주의는 70년대 이후 군사문화와 함께 발전된 것으로서 성공의 과정과 수단과 방법에 관계없이 결과가 성공적이면 악랄한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되는 왜곡된 삶의 형태입니다. 성공은 선이고, 실패는 악이 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삶의 형태는 성서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유대주의가 그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주의 사상은 가난이나 질병 또는 천한 신분을 하나님의 저주로, 부와 건강 또는 높은 지위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매우 유감입니다. 일단 성공하게되면, 성공하기까지의 잘못된 수단과 방법들이 정당화되고, 합리화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성공은 진리가 되고, 실패는 비진리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가치가 반드시 성공이나, 물질이나, 금전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생활을 사치하고 편리하게는 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행복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가치관을 바로 확립해야 하며, 퇴폐한 악순환을 멈추게 해야 합니다.

다원화된 사회, 다중가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 보다도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자기 것없이 남의 것에 파묻혀서 그것이 마치 자기 것인양 착각 속에서 살게되는 경향을 보게 되는데 이런 때 일수록 자기의 것을 찾고 그 소중함을 알아서 보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범람하는 퇴폐성 외래문화의 홍수 속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전통을 보수하고, 건전한 기독교 문화전통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해야 합니다. (교회 입장에서 볼 때, 교회도 각자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질에 관계없이 크고 값 비싼 것을 선호하고 있고 특히 외제를 좋아하는데, 이런 사대주의적 근성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 열등의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열등의식 때문에 크고 값 비싼 것이나 외제를 선호하고 또한 그것들을 소유함으로서 자신 속에 숨겨진 열등감을 해소시키려는 심리가 있습니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일 수록 자기의 것을 얕보고 남의 것을 선망하고 선호합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밥보다는 햄버거나 피자를 더 좋아 한다는 신문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한국에서의 햄버거나 피자는 결코 싼 음식이 아닙니다. 이런 음식을 미국 사람들은 '쓰레기 음식'(junk foods)이라고 부릅니다. 햄버거는 훼스트 푸드(fast foods)라고 해서 말 그대로 값이 싸고 빨리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햄버거가 결코 싼 음식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보다도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그들이 먹는 음식을 먹음으로서 잠시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우월감에 도취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열등감에서 나온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교회의 실정과 관계없이 무작정 대형교회를 모방함으로써 교회성장을 꾀한다면, 그것도 열등감에서 나온 것입니다.)

몇 해 전 일제시대에 일본인 작가가 한국 예술의 아름다음을 전문가 이상의 안목으로 저술한 책을 읽고서 우리 조상들이 서구 유럽처럼 웅대한 관광자원은 많이 남기지 않았다 할지라도 섬세하고 가냘픈 선의 예술과 조형미를 우리에게 많이 남겼다는 사실을 새 삼 깨우쳤고 우리 것을 너무 열등하게 생각해 온 나머지 우리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부끄럼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것을 사랑하고 우리 것을 지킬줄 알고 우리 것을 발전시켜 가려는 의식의 전환이 없이는 결코 자기 발전을 꾀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대우에서 선전하는 탱크주의니, 삼성 이건희 회장이 주장하는 신사고 경영이니 하는 것들은 실리보다는 형식을 중요시하는 우리 민족성을 깨보자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개인의 능력보다는 학력 같은 외적인 요소를 중요시하는 성향, 자기의 불행을 주변환경이나 재수가 없는 탓으로 돌리려는 성향, 환상적인 상향의식속에서 살아가는 고질적인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탈피하여 형식보다는 실리를, 외형보다는 질을 높여 보자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와 같이 기업들도 치열한 무역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상보다는 현실에서 출발하고자 합니다.

한국인은 환상적인 상향의식 때문에 자기 일에 충실하지 못하고, 자기의 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직업의식이 낮고 불친절한 이유가 바로 이 환상적인 상향의식때문입니다. 환상적 상향의식이란, 예를 들면, 날품을 팔고 살아도 하수구만은 치지 않겠다든지, 백정노릇은 해도 개백정 노릇만은 않겠다든지, 변소치고 살망정 과부집 변소는 치지 않겠다든지, 또 송장을 염하고 살망정 처녀 총각의 염은 하지 않겠다고 거절하는 것같이 실제적 자신을 고귀한 환상적 자신으로 변신시키는 의식의 이중구조를 말합니다. 이러한 의식구조때문에, 한국인은 자기 일에 만족하지 않고, 긍지와 자부심을 갖지 않습니다. 한국인은 자기의 것을 높이지 못하고 언제나 깎아 내립니다. 우리 가운데 만일 자신은 000학교(교회)의 학생(교인)이 아닌 것처럼 말과 행동을 한다면, 한번쯤 자신의 의식구조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자기의 것을 사랑하고, 자기의 것에 만족하며, 자기의 것을 지켜 갈줄 아는 의식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교회는 과연 어느 만큼 그리스도의 교회다운지, 성서적인 교회 전통에 서있는지 점검해 본다면, 발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인격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대중 매체나 교육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속인문주의자들에 의해서 장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전에 국민일보에 보도된 바 있습니다만, 창조론을 미신으로 간주해서 교과서에서 삭제시킨다든지, 교내 방송으로 낭독한 짧은 기도문 때문에 학교장을 해임한다든지 하는 일들이 이제는 더 이상 외국에서만 발생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국에서도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안방에 앉아서 듣고 보고 읽고 하는 신문이나, TV나, 라디오 방송들을 통해서 얼마나 일방적이고 왜곡된 의식교육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너무나 순진한 나머지 신문이나 TV나 라디오 방송에서 읽고 보고 듣고하는 모든 것을 비평없이 그대로 받아 드리고 맙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중매체의 사상적 노예가 되고 맙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이제라도 대중 매체의 체바퀴속에서 벗어나서 성서에 바탕을 둔 기독교 정신의 잣대로 세상을 저울질해 볼 수 있어야 겠습니다. 퇴폐성 세속문화의 범람과 외래문화의 홍수속에 함께 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기독교 정신과 민족의 문화전통의 입장에 서서 세상의 혼탁함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정신이란 성서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정신을 말합니다. 기독교 정신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여기에서는 타락한 인류 문화에 대한 기독교 정신에 대해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실 성서는 타락에서 출발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실 때에 이미 그곳에는 혼돈과 흑암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혼돈과 흑암의 표현 속에 이미 타락한 전생이 있었고, 성경 창세기 1장 1절 이하의 말씀은 재창조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기독교 신앙에는 재창조의 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혼돈과 흑암의 상태에서 빛과 질서의 상태로,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이 존재하는 현실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삶의 존재방식이요, 이 창조적 삶의 방식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신앙인들의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정신은 퇴폐성 세속문화에 접해서 막연히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이를 재창조하여 건전한 기독교 문화로 전환시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이 더럽다고 물없이 살 수 있습니까? 그 반대로 물없이 살 수 없다고 오염된 물을 마실 수가 있습니까? 살아 남는 길은 수질을 보호하고, 오염된 물을 정화시키는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아무리 더럽다 해도 세상을 등지고 살수 없고, 또 그 더러운 세상과 짝하여 살수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보호하고, 기독교 정신과 문화의 바탕에서 세상을 정화시키는 일에 앞장을 서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함에 있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남을 정죄하는 자세를 갖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먹물이라면, 세상속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어떤 상태로든지 먹물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타락한 이 우주를 멸하여 없애 버리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재창조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시고 계신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타락한 인류의 구원의 방법에서 여러 형태와 모양으로 이를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불과 유향으로 단숨에 멸하여 버리지 아니 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또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까지라도 타락한 인류를 대신해서 죽게 하심으로써 새로운 피조물로 빚으시는 놀라운 구원의 사역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한 인간이라도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 주십니다.

예수의 부활속에서도 우리는 기독교 정신의 재창조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이란 죽음의 상태에서 재생하였음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활의 정신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이 정신이 재창조의 정신이요, 새로운 피조물의 정신입니다. 창조이전의 혼돈과 흑암의 상태나, 부활의 이전의 죽음의 상태가 모두 현세의 어두운 면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 생명체로 바꾸어 놓으신 것처럼, 생명이 없는 인간의 삶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활력을 불어 넣는 것이 부활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임마누엘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퇴폐성 세속문화를 걱정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세상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기만 합니다. 이런 현실속에서도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오늘도 우리의 삶속에 개입하신다는 확고한 신앙이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또 하나님이 없고, 있다해도 침묵하시는 것 같은 현실에서 하나님이 함께하는 능력의 삶을 체험하며 누리며 맛보며 사는 신앙이 임마누엘의 신앙입니다. 이 임마누엘의 신앙이 기독교 정신이요, 재창조나 부활이나, 새로운 피조물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혼돈된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도 분명한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같은 이 현실을 하나님이 계신 현실로, 지옥과 같은 현실을 하나님의 나라의 현실로 바꾸어 갈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맛을 잃은 세상에 맛을 내고, 빛이 없는 세상에 빛이 되는 빛과 소금이 되어 이 땅 위에 건전한 기독교 문화가 확산되도록 노력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