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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09 00:36
자기 십자가[눅 9:23]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813  
십자가는 본래 수치와 고난과 죽음의 표지입니다. 그러나 이 시련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십자가, 은총의 십자가, 혹은 승리의 십자가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희롱을 당하시고 살점을 떼어내는 날카로운 채찍을 맞으신 후에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음의 장소 골고다까지 힘겹게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대못에 박혀 십자가 위에서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십자가가 우리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감당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제자가 되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묵묵히 지시고 감당하신 것처럼 그를 따르는 우리도 우리 자신의 각자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감당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을 하라고 권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배교의 위협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박해로 인해서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실로 수치와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였습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예수를 섬길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신앙 그 자체가 많은 사람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날카로운 채찍과 몽둥이로 심한 매를 맞게 되고, 사나운 짐승의 사냥거리가 되기도 하고, 십자가에 처형되기도 하는 무서운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져버리게 되였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교회들에게 "처음행위를 가지라"(2:5), "죽도록 충성하라"(2:10), "회개하라"(2:16)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배교행위에서 돌이키라는 뜻입니다. 또 "굳게 잡으라"(2:25),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3:3), "네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3:11), "네가 열심을 내라"(3:19)는 말씀들로 권면하고 있는데, 이 점이 복음서 기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강조한 한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를 진 후에는 반드시 승리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다 당하신 후에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모든 사람의 주로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그 분은 장차 만 왕의 왕으로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며, 온 세상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8:17-18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 켠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또 8:37에서 바울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침례를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가 침례의식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침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합하여 물 속에 나의  모든 과거를 묻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합하여 영광의 삶, 행복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다시 태어남을 뜻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합하여 날마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갈 5:24) 자신을 부인함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박차고 부활하신 것처럼, 그리고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가신 길을 쫓아가는 사람들은 죽어도 다시 살며,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수치와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는 은총과 구원과 승리와 영광의 십자가로 부활하게 됩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였습니다. 끝까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2:7),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주겠다"(2:17), "새벽별을 주리라"(2:28), "이기는 자는 . . .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3:5),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3:12),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는 계시록의 말씀들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이 '자기 십자가'를 강조하는 방법은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에 "자기의 십자가"(19:17)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특별히 성도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마 16:24; 막 8:34; 눅 9:23)를 강조하고 있는 데, 누가는 여기에 "날마다"라는 낱말을 덧붙여 쓰고 있고, 마가는 초대교회 성도의 한 사람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 당시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서 기자들이 강조했던 십자가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억지로라도 짊어져야 할 자기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여 가신 것처럼,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해골의 언덕으로 올라간 것처럼, 예수신앙 자체가 죽음을 의미했던 당시의 신자들에게 복음서 기자들은 과감하게 이 수치와 죽음의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짊어지도록 설교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이 십자가에 대한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신앙생활 자체가 감당하기 힘든 자기 십자가 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신앙의 자기 십자가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신앙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요 승리의 지도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결국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만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하며, 신앙의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짊어져야 합니다.

둘째, 사람에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육적인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삶 자체가 십자가입니다. 생로병사가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부모가 없는 것, 가난한 것, 많이 배우지 못한 것, 인물이 잘나지 못한 것, 질병을 앓고 있는 것도 자기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자기 십자가 없는 부자가 없고, 자기 십자가 없는 학자가 없고, 자기 십자가 없는 미남 미녀가 없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키만 커다란 못생긴 사람이었고, 나폴레옹은 키가 작은 차돌맹이었고, 히틀러는 성불구자였고, 알렉산더 대왕, 한니발, 그리고 시져는 간질환자였습니다. 결국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열등감의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기 십자가는(콤플렉스) 장애물이긴 하지만, 더 많은 노력을 촉구하는 자극제이기도 합니다. 자기 십자가 즉 열등감을 건강한 쪽으로,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 열등감을 자기 향상, 성취 그리고 보상의 방향으로 밀고 나가지만, 이 열등감을 병적으로, 부정적으로, 소극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인격장애를 가져옵니다. 선의의 경쟁을 피하거나 그 반대로 지나치게 경쟁적이 되거나 공격적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어진 것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활용하느냐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닙니다.

여러분, 이 지구가 얼마나 못생겼는지 아십니까? 에베레스트 산과 같이 높은 곳은 거의 9KM나 되고, 깊은 곳은 무려 해저 11KM나 됩니다. 따라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깊은 곳이 무려 20KM나 됩니다. 이 얼마나 일그러진 모습입니까? 그러나 이 지구는 질량에 의해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높다고 무게가 더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낮다고 무게가 덜 나가는 게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다 같은 질량의 무게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정주영씨 넷째 아들이 돈이 없어 자살을 했습니까? 말린 몬로가 인물이 없어 불행한 삶을 마쳤습니까? 영국 왕실의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명성이 없어 수차례씩 자살을 시도했겠습니까? 마이클 잭슨을 보십시오. 그는 명성도 인기도 돈도 세계에서 제일 많이 누리고 삽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수 차례의 성형수술과 희게 하려는 욕심으로 독한 표백제를 얼굴에 투입해 왔기 때문에 아직도 젊은 나이인 잭슨의 얼굴은 일그러져 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마이클 잭슨은 무대 위가 아니면 절대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려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인 사도 바울은 신앙의 십자가와 자기 열등감의 십자가를 가장 잘 짊어진 사람이라고 보아집니다. 바울은 예수신앙을 위해서 옥에도 많이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유대인들에게 39대의 곤장을 다섯 번 이상이나 맞았고, 태장을 세 번 이상 맞고, 세 번 이상 파선 당하여 물귀신이 될 뻔했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으며 살다가 결국에는 사형을 당하여 죽었습니다(고후 11:23-27). 그러나 그는 그의 생애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딤후 4:7) 승리의 삶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탄의 사자" 또는 "육체의 가시"라고 말한 결정적인 신체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외모에도 볼품이 없었습니다. 작은 체구, 맞닿은 양미간, 매부리 코, 대머리에 휜 다리를 가진 사람 이였습니다. 바울은 말주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약점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애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기독교를 바울의 종교라고 말할 정도로 로마제국의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그의 선교에 의해서 뿌리를 내렸고 열매를 맺었으며 종국에는 전 로마제국을 복음화하고 말았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눅 9:23)는 제자직에 관한 이 말씀을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의 수난예고 다음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 제자의 길에 대한 설명을 위한 의도된 배치일 것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 .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막 8:31) 다시 살아나신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을 고백하고 주의 가신 길을 따르겠다고 침례까지 받은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심과 함께 먼저 '자기 십자가'를 진 후에 라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함께 승리하게 될 것을 의도한 것입니다. 바울의 말씀과 같이 시련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우리의 꿈을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롬 5:3-4).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나가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감당하시고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