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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09 00:32
인간이 불행해지는 이유(창 2:16-17)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990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것이 본래 좋았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가운데 나쁜 것이 없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도 디모데전서 4장 4절에서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있어서는 안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 그리고 각종 사고와 범죄와 질병으로 만연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그 원인일까요? 보기 좋았던 세상이 보기 흉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이 혼탁하고, 인간이 불행해 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을 바탕으로 오늘은 인간이 불행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무책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어진 약속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선악과를 먹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책임은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의 책임은 인간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 명령이나 훈계로 나타난 것입니다. 십계명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 결정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약속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계약자의 입장에서 살아갑니다. 루소는 인간 사회를 계약사회라고 말했고, 실제로 우리 인간은 법이든 관습이든 약속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먼 옛날 아담이 하나님과 선악과를 놓고 서약을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후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은 침례 때에 하나님과 교인들 앞에서 서약을 합니다. 부부는 결혼식 때에 하나님과 친지들 앞에서 서약을 합니다. 국민은 태어나면서부터 국가와 약속관계를 맺습니다. 국가의 법은 국가와 국민 사이의 합의한 약속입니다.

약속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십계명과 같은 법을 주신 것은 약속관계를 지속시키고, 자유를 제한하며, 책임을 지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약속을 지키고, 주어진 자유를 제한하며, 책임 있게 살아가는 길목마다 에는 선악과가 열려 있습니다. 이 선악과는 창세기 3장 6절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런" 열매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관심을 끌고, 본능을 자극하며, 사람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열매였습니다. 이 열매는 세 가지 유혹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의 유혹, 둘째 눈으로 보는 것들의 유혹, 셋째 머리로 생각하는 것들의 유혹입니다. "먹음직도 하고"라는 말씀은 먹거리 종류의 유혹거리를 말합니다. 의식주와 같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보암직도 하고"라는 말씀은 볼거리 종류를 통한 유혹거리를 말합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문화적인 욕구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는 말씀은 두뇌를 통해서 나오는 유혹거리를 말합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남을 짓밟고 일어서기 위한 사악한 두뇌플레이가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이런 유혹에 아담과 이브가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넘어졌습니다. 우리 자신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판도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판도라는 제우스로부터 에피메테우스와 살도록 인간세계에 보내어진 여인입니다. 판도라는 '모두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제우스는 정말 모두의 선물이 될 만큼 멋진 여인을 에피메테우스에게 선물했습니다. 두 사람은 행복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판도라는 제우스한테 받은 상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절대로 그 상자를 열어보아서는 안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상자를 열어 보는 순간에 모든 행복은 끝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판도라는 아무래도 그 상자 속이 궁금했습니다. "그 속에 무엇이 있을까? 왜 열어 보아서는 안될까? 살짝만 열어본다면 별 탈 없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판도라는 무심결에 상자의 뚜껑을 열고 말았습니다. 아뿔싸, 판도라가 상자의 뚜껑을 열자마자, 상자 속에 있던 괴상한 형체들이 순식간에 밖으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놀란 판도라가 엉겁결에 뚜껑을 닫았을 때에는 하나만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나머지는 다 날아가 버리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상자 속에서 날아 나온 것들은 온갖 질병과 죄악들, 전쟁과 재해, 폭력과 살인 등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상자 속에 남은 것은 오직 한가지 희망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때부터 불행에 몸을 맡기고 희망에 의지하여 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선악과와 판도라의 상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책임감을 가지고 약속을 지키면 행복할 수 있고, 무책임하게 약속을 저버리면 불행하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행복한 가정, 성숙한 사회, 살기 좋은 나라는 약속이 지켜지고 책임이 완수되는 곳입니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면, 약속과 책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약속은 지킬 필요 없다. 약속을 저버리면 더 멋지고 더 재미있고 더 신나게 살 수 있다." 학생의 신분은 열심히 공부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공부할 필요 없다. 공부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 이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런" 유혹들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이런 유혹들을 믿음으로 이기는 책임감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둘째로 방종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모든 만물보다 뛰어난 동물로 만드셨습니다. 동물하고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인간을 기계처럼 운전자에 의해서 작동되도록 만들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발적으로 활동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조작 당하는 기계처럼 살게 하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행동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책임의 중요성과 자유의 한계선을 그어 주셨고, 인간의 행동에 따라 상도 주고 벌도 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으로 믿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심판이 있어야 정의롭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심판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인간답게 살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사회를 보더라도 재판관이 있고, 각종 시합 때마다 심판을 세워 공정한 시합이 되도록 애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세상에서의 심판과 상벌제도는 반드시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경고의 표시입니다. 인간세계의 심판은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살아 생전에 우리 인간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상을 받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합니다. 어떤 건축가가 튼튼하고 보기 좋은 건물을 짓고 부와 명성을 얻었다면, 그 건축가는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입니다. 또 어떤 건축가가 부실공사로 인해서 자신이 건축한 건물이 붕괴되었다면, 그는 이미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잃게 될 것입니다. 교통법규를 지키고 조심운전을 하는 사람은 안전을 보상으로 받지만, 교통법규를 무시하고 과속운전을 일삼는 사람은 남에게 해를 가할 뿐아니라, 자신도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됩니다.

인간은 발달된 언어나 첨단 기구를 이용할 만큼 고등한 동물입니다. 인간은 기계과학문명과 도시문명을 이루었으며, 법을 제정하고 집행할 수 있는 사회제도를 만들만큼 고등한 동물입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있고, 감정을 자제하여 미술이나 음악, 연극이나 춤과 같은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본능적인 충동을 억제할 수 있는 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추궁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동물이나 기계 같으면 책임추궁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동물처럼 본능에 사로잡혀 살게 하거나 기계처럼 조작 당하며 살도록 만들지 아니하시고 가장 자유롭고 가장 지능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에게 책임을 물어 심판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9장 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셨고 또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또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선악과는 본래 좋은 과일이 였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약속의 증표가 되었을 때에,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그 과실을 먹었을 때에, 그 선악과는 인간에게 더 이상 유익한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선악과라는 나무의 열매가 나빴던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인간이 나빴던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을 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상당 부분은 하나님이 주신 재료들을 이용하여 인간들이 만든 것들입니다. 주택이나 칼이나 자동차나 술과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심판이 있다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악용하였고, 자유를 남용하였으며, 지능을 악한 데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태초에 인간은 바위나 돌을 깨뜨려 도끼나 화살촉과 같은 기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사용되었고, 그래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 한계선을 넘어선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이나 바위를 무기로 주신 것이 아니라, 삶의 편리함을 위한 도구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물건들도 백퍼센트 인간에게 유익하다거나 백퍼센트 인간에게 해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칼이 요리사의 손에 잡혔을 때에는 훌륭한 도구가 되지만, 살인자의 손에 잡히면 무서운 흉기가 됩니다. 누구의 손에 들리느냐에 따라서 칼은 훌륭한 도구가 되기도 하고, 무서운 흉기가 되기도 합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자동차는 편리한 운송수단이 되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대전교도소에 수감된 3600여명 가운데 60-70퍼센트가 교통사범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드신 모든 것을 인간에게 맡기시고 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만해져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악한데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책임감을 버리고 자유의 한계선을 넘나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조차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노아의 때에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심판에 대해서 경고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때에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심판에 대해서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다가 멸망을 자초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있지도 않으며 있다해도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이성적인 행동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이란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선천적인 것이기보다는 문화적이고, 후천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이란 것을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양심이란 것은 국가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양심에 찔리는 일이 였지만, 헬라인들에게는 전혀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았습니다. 부모에게 도둑질을 배운 아이는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전혀 나쁘게 생각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둑질하지 말라'고 배운 아이는 남의 것을 훔친 후에 양심이 찔려 자신의 행동을 이내 후회하고 맙니다. 중세기 테쩰과 같은 신부는 신앙인들을 속여 면죄부를 팔았지만, 전혀 양심에 가책이 없었고, 마르틴 루터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씩 고해성사를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믿는 양심을 가진 사람이 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무려 여섯 시간 동안이나 죄를 고백할 정도였으니까요. 수도사가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이란 것도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사회가 타락하고 악해질수록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은 비례적으로 타락해지고 악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대중의 정서나 뜻이라는 것이 어느 때인가는 소돔성이나 노아의 때의 사람들과 같이 파멸로 몰아가는 날이 멀지 않다고 봅니다. 인간은 이미 타락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결코 스스로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가 주는 교훈은 인간은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이 혼탁하고 인간이 불행해지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성서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무책임한 행동과 방종을 일삼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침례 때에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행했던 믿음의 서약은 지켜져야 합니다. 혼인 서약도 충실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국가의 법도 지켜져야 합니다. 법은 약속입니다. 그 약속들은 지켜져야 합니다. 약속을 어기는 것은 방종이요,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건축법이 무시될 때,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사고가 발생됩니다. 가스 안전취급법이 무시될 때, 아현동 가스폭발과 같은 사고가 발생됩니다. 교통안전법이 무시될 때, 충돌사고는 끊임없이 발생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 제한된 자유를 누리며 약속을 이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은 삶 속에서 맛보아질 수 있고 경험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책임을 다하고 약속을 지키는 사람의 노력 속에서 발견이 되고 경험되어집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에덴동산은 책임을 다하고 약속을 지키는 사람의 노력 속에서 경험되어집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갖는 자율권을 제한하시고 목숨을 내놓고 책임을 다하셨을 때에 온 인류에게 구원의 희망이 주어졌습니다. 이 경험들이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