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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31 01:51
오늘도 아기는 오시네(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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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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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진 시인의 시 가운데 [오늘도 아기는 오시네]라는 제목의 성시가 있습니다. 상당히 긴 글이지만 낭송해 드리겠습니다.
오늘도 아기는 오시네. 눈이 내리는 마을에 오시네. 아기가 오시면 마을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하얀 눈이 내리는 마을에는 예쁜 아기가 오시네.
가난하고 허술한 말구유가 있는 마을, 그 망아지가 서서 울던 말외양깐처럼, 외롭고 쓸쓸한, 쓸쓸한 마을의 사람들을 위하여, 외롭고 쓸쓸한 쓸쓸한, 사람들의 마을에 오시네, 눈이 내리는 마을에 오시네.
오늘도 아기는 오시네. 눈이 내리는 마을에 오시네. 굶주리고 헐벗은,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굶주리고 헐벗은, 그러한 사람들의 마을에 오시네. 눈이 내리는 마을에 오시네.
눌리우고 시달린, 서럽고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눈물과 피와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러한 눈물과 피를 흘리시러 오시네. 눈이 내리는 마을에 오시네.
눈이 내리는 가난한, 적은 등불이 켜져 있는 마을에 오시는 아기는 고요히 잠자시는 귀여우신 아기-- 아기의 고운 볼엔, 포근하고 조용한 평화가 깃들고, 따뜻하고 아늑하신 사랑함이 깃들고, 그리고 아기의 보드라운 예쁜 손에는 오, 십자가에 못박히울 십자가의 못자죽, 십자가에 피흘리실 못자죽이 보이네. 예쁘신 아기 얼굴 아기의 이마에는, 찔리어 피흘리실 가시관의 자죽, 자죽마다 피가 솟을 가시관의 자죽이 흔들리는 등불 그늘 등불 빛에 보이시네.
눈이 내리는, 가난하고 쓸쓸한, 적은 마을에 오시는 아기는, 초롱초롱 두 눈엔 호수물이 잠겼네. 눈물과 서러움과 피흘림을 위하여 강같이 흘러내릴 눈물의 원천, 아기의 맑은 눈엔 호수물이 잠겼네.
아기 왕은 아가처럼 두 주먹을 빠시네. 아기의 두 주먹은 죄그마신 주먹 그 어두운, 무겁고 꽝꽝한 돌무덤을 두드려 주검 문을 깨뜨려 닫힌 문을 열으실 아, 아기의 두 주먹은 보드라운 주먹, 아가처럼 아기 왕은 두 주먹을 빠시네.
눈이 내리는, 죄그맣고 가난한 등불이 켜져 있는 오늘도 아기는 눈이 내리는 마을에 오시네. 눈물과 서러움과 쓸쓸함이 가득한, 사악함과 거짓과 배반함이 가득한, 주검들이 덧덮인 이 어두움의 골짜기엔 고우신 아기 예수 아가 왕을 위하여, 아, 이미, 이 세상엔 피에 맺힌 가시관이 마련되어 있네.
피에 젖은 십자가가 마련되어 있네. 고우신 아기 예수 하느님의 아기는 피에 어린 가시관을 쓰시려고 오시네. 피에 어린 가시관을 쓰시려고 오시네.
아, 아기가 오는 밤은 거룩하고 복된 밤, 하이얗게 마을마다 눈이 내리고, 마을마다 눈이 내려 눈이 쌓이고, 어두움에는 빛을, 거짓에는 참을, 미움에는 사랑을, 죽음에는 부활을, 생명으로 죽음들을 이기시기 위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하시기 위하여, 구세주는 오시네, 어둔 땅에 오시네.
--<하늘에는 영광이 . . . . . .땅에는 평화가. . . . . . .>-- 천사들은 노래하며 다가오는데, 목자들 무릎 꿇고, 동방박사 절하고, 마리아는 기도하고, 요셉은 말이 없이 아길 지켜 섰는데, 아기는 아기 왕은 가난한 마을 등불이 켜져 있는 외양깐에 오시네.
오늘도 아기는 오시네. 눈이 내리는 마을에 오시네. 누구나의 기다리는 어디에든지 오시네. 어디에든지 기다리는 누구의 마음에나 오시네. 누구나의 상처 입은 아픈 영혼에 누구나의 갈한 영혼 목마른 영혼에 오시네. 어디에든지 어두운 땅에 참 빛을 밝히시려 누구에든지 바라는 심령에 새 생명을 부으러 오시네. 눈이 내리는 오늘도 여기는 아기가 오시네. 하이얗게 눈이 내리는 어느 마을에든지 오시네.
순진무구한 아기와 눈 내리는 마을은 하나님의 나라의 대표적인 상징인 평화를 나타냅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의 마을,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의 마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 하얀 눈이 내리는 마을에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내립니다. 주님의 위로가 내립니다. 왜냐하면, 눌리고 시달리며 서럽고 약한 사람들, 눈물과 피와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러한 눈물과 피를 흘리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로 이사를 오시기 때문입니다. 어둡고 무거운 무덤의 문을 여시고, 눈물과 서러움과 쓸쓸함과 사악함과 거짓됨과 배반함이 가득한 주검들이 겹겹이 쌓인 어둠의 골짜기에 생명의 혼을 불어넣기 위해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에는 빛을, 거짓에는 참을, 미움에는 사랑을, 죽음에는 부활을 주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 놓기 위해서, 생명으로 죽음을 이기기 위해서 오십니다. 지금도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오십니다. 평화를 바라고 구세주를 기다리는 마음에 오십니다. 어디에든지 기다리는 누구의 마음에나 오시네. 상처 입은 영혼과 목마른 영혼에 오십니다. 외양간처럼 낮은 곳에 오십니다. 말구유처럼 비어있는 자리에 오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오십니다. 겸손 한 곳에 오십니다. 아기처럼 오십니다. 평화를 가지고 오십니다. 이 평화가 성탄절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성탄절의 가장 큰 의미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임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임재'라는 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이 땅으로 또는 우리 마음으로 이사해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정의와 평화가 특징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성서에는 이 하나님의 임재를 설명하는 용어가 세 단어로 나타납니다.
첫째가 에스겔 48장 35절에 나오는 '여호와 삼마'입니다. '여호와 삼마'는 히브리어로써 풀이하면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하나님께서 장차 세우실 '새 마을'의 이름입니다.
에스겔은 유다왕국의 제사장이요, 선지자로써 주전 597년, 바벨론 제국의 제 2차 공격 때에 여호야긴 왕과 유다 민족 만 명과 함께 포로로 끌러간 사람입니다. 유다왕국은 세 차례나 바벨론 제국의 공격을 받았는데, 제 1차 때인 주전 605년에 다니엘을 포함해서 주요 인물들이 포로로 끌러갔고, 제 3차 공격 때인 주전 586년에는 에스겔의 부인이 죽었고, 예루살렘 성전과 유다 전역이 훼파되었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의 특징은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골짜기에 쌓인 마른 뼈들이 생명을 얻고 되살아나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고 새 마을을 세워 그곳에 임재 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서 부서진 성전이 재건되고(겔 40장), 성전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금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겔 43장). 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임하실 뿐아니라, 믿는 자의 마음속에 새 영으로 임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겔 11:19; 36:26). 이 예언 이후에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은 두 차례 더 재건되고 또 망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임한 적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예언이 성취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이 땅으로 이사오신 성탄일입니다. 성탄절의 가장 큰 의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이 땅으로 이사해 오셨다는 점입니다. 하늘의 거처를 땅으로 옮기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 이 땅 위에 거처를 마련하셨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고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서 이 낮은 땅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이 새 땅이 되고, 이 하늘이 새 하늘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신 새 마을의 이름이 바로 '여호와 삼마' 즉 '하나님께서 거기 사심'이 됩니다. 아기 예수를 진심으로 맞이하는 마을, 알렉산더 대왕이나 폼페이나 시져나 한니발이나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이 아니라, 힘없고 나약하지만 순진하고 평화로운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마을, 이 마을 공동체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여호와 삼마,' 새 마을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설명하는 두 번째 단어가 마태복음에 1장 23절에 나오는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의 이름이 '임마누엘'로 되어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히브리어로써 풀이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실 하나님으로 오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에 임재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호와 삼마' 즉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는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하나님의 이 예언을 성령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세 가지 형태로 이미 성취하셨고, 지금도 성취하고 계시고, 앞으로 '재림'을 통해서 완성시킬 것입니다.
'재림'이란 말 역시 '임재'란 뜻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하나님의 임재를 설명하는 단어가 마태복음 24장 3절과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에 나오는 '파루시아'입니다. '파루시아'란 헬라어로써 풀이하면 '임재' 또는 '도착'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성탄절 예수의 오심을 통해서 '임재'의 약속을 지키셨고, 예수는 오순절 성령의 오심을 통해서 '임재'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은 이미 오래 전에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임재의 약속이 과거의 사건에서 머물지 않고, 지금도 교회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성취되고 있고, 최종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통해서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은 오순절 성령의 오심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짐으로써 '새 마을' 즉 '여호와 삼마'가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취되고 있다'는 뜻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교회를 매개체로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인 '여호와 삼마'는 교회를 통해서 완성되어진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져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을 실현하는 도구이지 완성된 기구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임재를 영적으로 체험하고 맛보며 앞으로 예수의 재림을 통해서 이루어질 진실된 '여호와 삼마'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그 약속을 신실하게 바라보고 앞당겨 맛보는 새 언약의 선민 집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 번째 임재의 약속인 '파루시아'를 희망하면서 오늘도 아기로 오시는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를 진실로 환영하고 영접하는 자만이, 또 아기처럼 순진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영접하는 자만이 '파루시아'의 임재를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매년 오는 성탄절은 단지 과거에 오신 예수를 축하하기 위한 축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사람을 기념하는 것은 죽은 자를 추도하고 기념하는 것이지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탄절을 통해서 예수를 추도하거나 기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지금도 우리 안에 오시는 예수를 축하하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독특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오신 예수를 축하하는 예배이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를 인식하는 예배이며, 또 앞으로 오실 완전한 임재를 기원하는 예배인 것입니다.
계시록 21장 3절의 말씀처럼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거처하시는 집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거처하는 집들 가운데에 있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살게 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어 주시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여호와 삼마' 즉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신 즐거운 성탄절을 맞이해서 세상적인 성탄절 문화에 물들지 말고 진실로 겸손히 기쁜 마음으로 오시는 예수를 맞이할 수 있는 뜻깊은 성탄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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