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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31 01:44
왜, 십자가를?(롬 3:26)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736  
"왜,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셨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 간단한 대답만으로는 모든 의심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 하시며 삼라만상의 온 우주를 지으신 분이 신데, 왜 말씀 한 마디로 인간의 죄를 사하지 않으시고, 독생성자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는가?" 혹은 "죄의 근원이 되는 사탄을 당장에 멸하지 않으시고, 왜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하셨는가?" 아직까지도 이와 같은 질문들은 적절한 해답을 요구하고 있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6절의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십자가의 필요성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인들은 십자가가 죄인을 위해서만 필요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십자가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해결책 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죄인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의 본질을 위해서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두 가지를 성취했습니다. 하나님도 의롭게 하셨고(Just), 예수 믿는 자들도 의롭게 하셨습니다(Justifier). 십자가는 단순히 죄 문제의 해결책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속성과 결부된 심각한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속성은 하나님 당신도 의로우시고, 또한 예수 믿는 자들도 의롭게 하실 이중 해결의 방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두 속성은 어떻게 십자가를 정당화시키는가? 먼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 32장 4절에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또 히브리서 12장 29절에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의 배경에서 볼 때, 하나님의 정의와 의는 반드시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십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김이요, 법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의 본질을 짓밟는 행위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거짓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속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할 수 없으십니다(딛 1:2). 그러므로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법규를 어기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인간의 죄로 인해서 공격을 받거나 모독을 받는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대응하실까? 못 본척 하실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눈을 가리시고 인간의 추악한 죄악을 못 본척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그것을 용납치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죄의 대가를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위반되었을 때에는 그 위반 행위는 반드시 처벌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진실하지 못한 분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를 처벌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죄를 처벌하기 위해서 진노의 불을 달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죄인들 위에 소낙비처럼 쏟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죄로 인해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에 던짐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의 진노는 풀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같은 공의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죄 된 인간을 벌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로 대신 죽게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의 삯을 당신의 독생자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인 사랑 때문이 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누구도 멸망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벧후 3:9; 딤전 2:4).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멸망을 당한다면,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은 만족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만족되지 못합니다. 이런 곤경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도 의로우시고, 또한 하나님을 믿는 자도 의롭다 하실 최선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의 희생 양이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속할 완벽한 제물이 되어 희생하심으로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속성을 동시에 만족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속성은 죄의 징계와 죄의 용서를 동시에 요구하십니다. 이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필요했던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였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어떻게 하나님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합니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십자가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즉 '화목제물'과 '대속(代贖)'의 개념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화목제물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한 희생제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정의롭고 사법적인 의분을 말합니다. 이 의분은 죄가 처벌될 때 풀립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한 화목제물 이였습니다(롬 3:25). 그리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키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위한 것이 였습니다(고전 15:3). 베드로전서 2장 42절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 ."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이 의미를 명확하게 풀어줍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는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인류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는 의미는 그가 우리의 형벌을 친히 대신 받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켜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심으로 하나님은 의롭게 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의롭게 하시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됩니다. 그분은 우리 대신 친히 그 무서운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때문에 저주아래 놓여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푸셨으며, 우리의 대속자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 대신 목숨 바쳐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때문에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칭함을 얻었습니다. 또한 성도라 부름을 입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형벌을 받음으로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서 이제 사그라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죄는 단순히 씻어지거나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당하심으로써 용서되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또한 그를 믿는 자들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또한 그를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전능자가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 하였고, 의롭다고 믿음으로 칭함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이며,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요 3:16).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로움이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짊어지신 죄의 대가가 그분의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고후 5:21).

이 의로움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은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롬 3:27). 칭의의 자유로움은 전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을 바꿔 놓습니다. 우리는 이제 두려움으로서가 아니라, 기쁨과 화평으로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따라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안위와 축복을 주며,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우리가 찾지 못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함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바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차이점이 있다면, 빵을 얻기 위해 수고하는 것과 빵을 식탁에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과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생명의 빵을 얻기 위해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영생의 잔치에 둘러앉아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그것을 피와 땀으로 획득하셨습니다.. 감사함으로 보답할 뿐입니다.

칭의는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그것이 거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값없이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값으로 정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을 외아들을 통해서 치르시었습니다. 이것은 칭의와 죄사함이 결단코 원인이 있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결과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살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죽게 하셨고, 너희 죄를 사하셨다."고 언제나 말씀하실 것입니다. 죄사함은 누워 떡 먹기 식의 값싸고 쉬운 것이 아니라, 의롭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성자의 보혈의 대가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간구한 죄사함이 응답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형벌이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형벌 때문에 우리가 죄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죄사함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합시다. 감사는 행위로서 증명되어야 합니다. 행위는 믿음이 있고, 감사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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