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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5 23:06
문제가 없으면 발전도 없다[롬5:3-4]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700  
문명의 발전은 인간이 가진 한계상황을 극복하고자 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의학 등 모든 분야의 발전이 난관에 부딪혔었거나 고통의 경험에서부터 출발되었다. 배고팠기 때문에 농업이 발전되었고, 빨리 그리고 멀리 갈 수 없기 때문에 자동차가 만들어 졌고, 날 수 없기 때문에 비행기가 만들어 졌고, 물위를 걸을 수 없기 때문에 배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 이런 문명의 이기들은 간접적으로는 적국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또는 적국을 정복하기 위해서 만드는 무기생산과 관련해서도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결국 오늘의 과학 문명은 인간에게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에게 문제가 없었다면 아무런 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에도 어려움이 있고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에 더 많은 발전이 있었다. 지난 81년 10년 된 고물 차를 40만원에 사서 86년까지 5년을 타는 동안 셀 수도 없을 만큼 고장이 많았다. 그런데 차가 고장이 날 때마다 고생은 많이 됐지만 자동차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컴퓨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몇 년간은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다가 90년에 286급 컴퓨터를 조립품으로 구입했는데 고장이 잦았고, 93년에 486급 컴퓨터를 메이커 제품으로 구입했는데도 원하는 만큼의 성능을 얻을 수 없어서 예상되는 여러 종류의 문제들을 해결하다 보니까 고생은 많이 됐지만 컴퓨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익힐 수가 있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세계를 만들지 않았을까? 성경은 에덴동산이라는 완벽한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과 호기심에 빠져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문제 많고 불완전한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고, 로마의 신화는 제우스가 에피메데우스의 부인이 된 판도라에게 결혼 선물로 상자 한 개를 주면서 절대로 열어 보지 말라고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판도라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호기심에 이끌려 상자를 열어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완벽한 세계를 줌으로써 무의 도식하는 인간들을 보살피기보다는 문제 많고 불완전한 세계에 살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문제 해결의 과정 속에서 서로 돕고 협력하며 살아가도록 배려하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톨스토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앞일을 아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심어주신 사랑을 가지고 서로 돕고 협력하며 살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인간에게 문제해결에 대한 의지와 문제해결의 보람과 어떤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과 같은 것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다른 짐승의 삶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한 팀의 러시아 과학자들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연구한 일이 있었다. 평안하고 안락한 삶이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지 혹은 단축시키는지, 아니면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지 혹은 침체시키는지를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해 보았다. 그들은 두 그룹의 동물을 선정했다. 한 그룹의 동물들은 아주 이상적인 환경에 두었다. 그들은 상쾌한 공기, 많은 음식, 방해물이 없는 곳에서 놀고먹었다. 또 한 그룹의 동물들에겐 좋고 나쁜 환경을 함께 주었다. 그들은 편히 쉬다가도 적과 맞서기도 하고 음식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다. 그 결과 좋은 환경에 있던 동물들은 나쁜 환경에 처한 동물들보다도 훨씬 빨리 노쇠현상을 보였고, 나쁜 환경에 처한 동물들은 좋은 환경에 있던 동물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왕성한 젊음을 유지했다고 보고하였다.
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과 딸에게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노니는 한 폭의 명화가 그려진 100조각으로 쪼개어진 조각그림 맞추기를 사다 주었다. 아이들은 아주 좋아했다. 아버지가 이 조각그림을 아이들에게 선물로 줄 당시에는 모든 그림이 이미 맞추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아주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가 있었다. 아이들도 이 그림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일러주었다. "너희들이 이 그림을 한 쪽에 잘 놓아두고 보는 한 언제든지 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이 그림을 바닥에 쏟아 버리면 이 그림은 100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져 버리게 되어 너희들은 더 이상 이 그림을 감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주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너희들이 이 그림을 쏟아 놓고 다시 맞출 수만 있다면 너희들은 이 멋진 그림을 다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싸우지 않고 서로 돕고 서로 협력만 한다면 보기보다는 훨씬 쉽고 빠르게 흩어진 모든 조각을 바로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멋진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싫거든 이 그림을 만지지 말고 한 쪽에 잘 놓아두어라." 처음에 아이들은 이 그림을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감상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이 그림을 가만히 놓아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호기심 많은 여동생이 먼저 그림의 조각을 한 쪽씩 떼어서 만져 보고 붙여 보고, 두 쪽을 떼어서 만져 보고 붙여 보고 하다가 성이 차지 않아서 오빠에게 말했다. 오빠, 우리 이 그림 쏟아서 한 번 맞추어 보자.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오빠는 동생의 말에 솔깃했다. 그래서 남매는 그림을 바닥에 쏟아 버렸다. 그리고 장난기가 있는 오빠가 조각그림들을 이리저리 섞어 버리고 말았다. 남매는 그림을 맞추기 시작했다. 갓 자리 그림들은 쉽게 맞출 수가 있었지만 차차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매는 의견의 대립을 보이기도 했고, 그림을 쏟아 놓고 쉽게 맞추지 못하자 아버지에게 혼나지 아니할까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 상황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시간은 걸리고 고생스럽기는 했지만 그림 조각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 들어갈 때마다 그림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색상이며, 그림의 모습이며, 조각난 모습을 보아 가면서 조각의 자리를 찾는데 피차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속도도 빨라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난감해 하던 얼굴에 핏기가 돌면서 기쁨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조각을 열심히 찾다가 발견하면 기뻐하다가도 맞지 않으면 크게 실망하곤 했다. 이 그림이 맞추어지는 동안 아이들의 표정은 무수히 변하고 있었다. 기쁨과 실망과 절망과 안도와 흥분의 표정들이 순간순간 교체되면서 그림은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멀리서 보시고 꾸중을 하시기보다는 흐뭇해하시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그렇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그 아름답고 살기 좋았던 세계가 타락되고 고통스런 곳으로 변했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추호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는 엄청난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좋았던 세상이 인간의 타락으로 망쳐져 버렸고, 지금도 계속해서 망쳐지고 있다는 교훈은 역으로 생각했을 때, 우리가 망쳐진 세상 속에서 혹은 뒤집혀진 세상 속에서 혹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세상 속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로만 산다면, 정직하고 성실하게 믿음으로만 산다면, 완전한 세상을 맛 볼 수도 있고, 성취감을 누릴 수도 있고, 질 높은 삶을 누릴 수도 있다는 교훈이기도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세계가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고통과 아픔과 시련을 주기도 하지만, 인간들은 오히려 그러한 아픔과 시련을 통해서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고, 삶의 보람을 찾고 있고, 성취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간들의 아픔과 시련 속에는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가 담겨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그 고통을 통해서 생각의 발전, 삶의 발전, 학문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고, 고통을 당하는 이웃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들은 봉사와 희생을 통해서 삶의 질을 높이고 만족감과 성취감을 얻을 수가 있다. 더불어 고통을 당하는 사람과 돕는 사람 사이의 인간애는 충천해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고, 부활 후에 승천하시어 하늘 우편 보좌에 앉는 영광을 얻으셨다는 성경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고난 후에 영광이 있다는 말씀이 진리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고생 후에 낙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산 체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에 성경말씀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제와 오늘처럼 내일도 동일하게 이런 저런 인간사를 통해서 시련을 겪게 될 것이고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게 될 것이고, 인내를 통해서 연단을 쌓게 될 것이다. 또 연단을 통해서 성숙한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욥은 그 엄청난 고난과 현실의 괴리에도 불구하고 큰 신앙인이 될 수 있었고 축복도 배로 커졌다. 그가 체험한 하나님은 앞으로 가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않았고, 오른편으로 가면 하나님이 왼편으로 피하셨는지 만날 수가 없었고, 왼편으로 가면 하나님이 오른편으로 피하셨는지 만날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었을 때에 하나님이 잠잠하셨던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실제로는 하나님이 눈여겨보고 계셨지만 말이다. 최종적으로 욥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여 불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쳤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는 길을 아시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단련하신 후에는 순금 같이 값지고 빛나는 자로 뽑아내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칸디나비아에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는 격언이 있다. 바이킹은 9-11세기에 영국과 스페인 연안을 휩쓸고, 독일과 프랑스, 북미와 그린란드까지 진출했다. 세계 최고의 배를 건조했고, 바이킹이란 말을 전진과 모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는 격언은 여러 가지 악조건이 모험과 진출을 탄생시켰다는 뜻이다. 그들은 추운 기후와 거친 땅과 인구과잉이라는 악조건에 굴하지 않았다. 조상을 한탄하거나 자신의 환경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세계 최고의 배를 만들어 전세계를 향하여 전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문제가 없으면 발전도 없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창조적인 신앙이다.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무를 유로, 죽음을 생명으로, 환난을 인내로, 인내를 연단으로, 연단을 소망의 성취로 바꾸는 능력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문제를 발전으로, 시련을 성장으로 바꾸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십자가 후에 영광이 있게 하시는 분이시다. 죽음 후에 부활이 있게 하시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