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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7-26 00:26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1) [요3:16]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204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특히 하나님의 생긴 모습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물질세계에 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에 사는 하나님에 관해서 설명하기란 마치 코끼리 다리를 만져본 장님이 코끼리에 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과 같다. 코끼리는 그나마 만져볼 수 있고, 소리를 들어볼 수 있고, 냄새를 맡아볼 수 있어서, 비록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느낌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우에는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없고, 소리도 없기 때문에, 인간으로써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설사 본다해도 인식할 수조차 없다.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인식을 못할 수도 있고, 너무나 작기 때문에 인식을 못할 수도 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을 보고 나서 살아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데 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사물을 자연 연소시킬 수 있는 뜨거운 열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신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삶은 인간에 대한 눈물겨운 배려와 사랑과 희생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사랑과 희생의 하나님에 관해서 몇 가지로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하나님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큰사랑과 희생 때문이다.
하나님을 보고서 살아남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면서도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게 존재하신다. 또 하나님을 보고 살면서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아마 없을 것이다. 만일에 모든 인간이 서로의 생각이나 마음속을 꿰뚫어 본다든지, 멀리 있는 사람의 행동거지를 다 살필 수 있다든지 하면, 얼마나 거북하겠는가? 만일에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자녀들이나 학생들의 생각을 꿰뚫어 본다든지, 또는 부부사이에 서로의 생각을 꿰뚫어 본다든지,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모든 행동거지를 낱낱이 살필 수 있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는가? 서로를 감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면, 아마 좋은 점보다는 불편한 점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다 알고 또 살피고 계시면서도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하신 채, 참고 기다리면서 인간들의 회개와 거듭 태어난 삶을 촉구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마치 바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바람이 없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사람 같으며, 산소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산소가 없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사람 같으며, 태양광선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자외선이나 적외선이 없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사람 같아서,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마지막 날에 저주와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에 관해서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그림자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성경도 이 세상을 하나님의 그림자의 세계라고 말한다. 희미한 달빛 속에서 물체를 인식하듯이, 자연세계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희미하나마 분명한 도구이다.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생긴 모습을 알 수 없다고는 하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란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영으로 만나 주신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체험적 고백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비록 하나님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그분이 어떤 분이며, 그분의 뜻이 무엇이며,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가를 알 수 있다. 그 한 예로, 요한복음 3장 16-17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오,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는 분이요, 외아들로 우리를 대신해서 사형을 받게 하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는 희생적인 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이 세상에 죄와 고통과 죽음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사랑과 희생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다. 인간도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 마음대로 인간을 노예나 기계처럼 부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노예나 기계처럼 만들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결정할 수 있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주셨다. 말하자면, 자율권을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관리하고 돌볼 수 있는 만물의 으뜸이 되었다. 인간이 피조물로써 만물의 으뜸이 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게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당신의 권한을 희생시켜, 그 몫을 인간에게 주신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악한데 사용하기를 즐겨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며 심지어 반역까지 하면서 죄를 밥먹듯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배반자들로부터 권한을 빼앗고 처벌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를 우리 인간들을 대신해서 죽게 하실 정도로 희생적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이 범한 죄를 떠 안듯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죄값을 대신 받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 십자가형까지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창조자의 권한을 제한하시고, 당신의 몫을 인간에게 주신 것은 실로 엄청난 희생이며, 위대한 사랑이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이 세상에 죄악과 고통과 죽음이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의 엄청난 희생과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몫인 구원과 축복과 생명을 인간에게 주셨고, 인간의 몫인 버림과 저주와 죽음을 대신 받으셨다.
셋째, 재림을 연기하시며 심판을 보류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배반자 인간을 내버려두지 않고 찾으신다. 찾아서 용서하시고 새로운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새로운 관계를 맺는데는 무조건적이다. 인간에게 무슨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희생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절대자의 특권을 제한하시고, 생명까지 버리신 반면, 우리 인간들은 책임을 저버리거나 떠넘기기 바빴고, 하나님을 배반했으며, 하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는 엄청난 죄를 범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어 놓고, 대문 밖을 서성이며 애간장을 태우는 부모처럼, 돌아온 자녀들이 살게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마련하시고, 계획하신 구원받을 모든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천년이고 이천 년이고 끝까지 인내하시며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이 기다림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할 수 있으며, 약속 받을 수 있겠는가? 만일에 예수의 재림이 우리 모두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하였을 것이고,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의 나라에 들어갈 약속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기다림, 예수의 더디 오심이 있었기에 자격도 없고,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우리에게까지 영생의 나라가 주어지게 되었다. 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이며 희생인가?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신 인류를 위해서 정한 기한이 지나면 현 우주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세계로 재창조하기로 계획하시고 그 계획을 선지자들에게 알리셨다. 그리고 그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을 불러모으시기 위해서 이 지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성령을 통해서 구원사업을 수행토록 하셨다. 하나님은 이 일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작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뜻을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들만을 위한 나라로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류를 위한 제사장의 나라로 세우셨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적자라는 우월감에 빠져 세계선교라는 과업을 수행치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극약처방으로 이 세상에 외아들 예수를 보내셨고, 교회를 세우셨으며, 하나님을 믿는 각 사람에게 성령까지 선물로 주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충만한 수를 채우도록 하셨다. 로마서 11장 25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우리 모두를 포함한 숫자이다. 그 숫자가 얼마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행한 것은 우리가 이 숫자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가?
사랑이 많으시고, 또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시는 하나님은 신세계에 살게될 사람의 수를 몇몇 사람이나 혹은 이스라엘과 같은 소수의 나라에 국한하지 않으시고, 많은 사람과 많은 나라들에 개방코자 그 숫자를 크게 늘려 잡으신 것 같다. 그렸기에 우리 같이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이 큰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예수의 더디 오심은 결국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과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의 재림도 마찬가지이다. 재림을 뜻하는 헬라어는 파루시아(        )이다. 이 말의 기본적인 의미는 '임재' 혹은 '존재'를 뜻한다(빌 2:12). 이 말은 좁은 의미에서 여행자의 '도착'을 의미하기도 한다(고후 7:6). 헬라어 파피루스에 의하면, 이 말은 고위층 인사들, 특히 왕이나 황제가 자기 지방을 공식적으로 방문할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방문이 있을 때에는 소요되는 경비와 오신 왕에게 씌울 관을 마련키 위해서 선택받은 그 도시나 지역의 주민들이 그 비용을 부담하게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랑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관을 씌워 주시려고 다시 강림하실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자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2:19; 딤후 4:8). 중요한 것은, 세상적인 원리로 볼 때,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 믿는 사람들이 돈을 거두어 영광의 면류관을 만들어 그분에게 씌워 주어야 할 것이나, 이 천년 전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들을 구원코자 했던 하나님이 이제 또 예수를 이 땅에 다시 보내어 충실한 종처럼 신앙을 잘 지킨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면류관을 씌우시기 위해서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희생이다. 하나님이 받아 써야할 승리의 월계관을 사양하시고, 오히려 아무런 자격 없는 우리들에게 씌워주시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큰사랑이요 희생인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게 존재하시는 것이나 침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희생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성과 자유의지를 주신 것, 또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죄와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조차도 절대적인 주권을 제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들의 끊임없는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으시고 재계약을 체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재림을 미루시며 심판을 보류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다시 오시면, 끝까지 잘 참고 믿음생활에 승리한 신앙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큰상을 베풀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된다. 고난을 당한다고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하나님께 불평해서는 안 된다. 예수가 더디 온다고 재림이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나 자주 침묵하시는 것이나 죄와 죽음이 존재하는 것이나 재림의 지연이나 이 모든 것들이 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희생 때문이란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