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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5 23:16
삶의 용기[롬6:4]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723  
문학가들이 생각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견해를 잠시 살펴보겠다. 영국의 작가 사뮤엘 버틀러(1835-1902)는 편지 중에서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라고 말하면서 죽음보다는 삶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는 {겉과 속}에서 "삶에 대한 절망이 없으면 삶에 대한 애정도 없다"고 하면서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은 가치가 있다. 삶은 사랑 받아야 한다. 또한 삶에 대한 절망이 없이는 삶에 대한 희망도 없다."고 하였다. 스위스의 작가 야콥 보스할트도 일기에서 "죽음이 없다면 삶을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탈리아의 극작가 비트리오 알피에리는 "대부분의 경우 죽으려고 노력하는 쪽보다 살려고 노력하는 쪽이 훨씬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 검은 양떼가 거닐고 있는 얕은 돌산이 있다고 한다. 이 돌산을 `배신자(背信者)의 동산'이라 부르는데, 이 동산에 돌무더기에 묻혀 썩어 가는 한 그루의 올리브 고목(古木)이 서 있다고 한다. 스승인 예수를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인 은 삼십에 판 유다가 목매 죽었다는 나무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당해보았을 유다 콤플렉스란 게 있다. 양심(良心)을 버리고라도 현실에 야합해서 잘 사느냐, 양심을 지키며 어렵게 사느냐의 갈등이 그것이다.
유다는 머리회전이 빠르고 계산에 밝은 사람이었다. 3년 남짓 예수를 따라 다녀보았지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 즈음에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자주 말씀하셨다. 최후의 만찬 때, 유다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고, 어차피 죽을 분이라면 예수를 팔아서 돈이라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수도 유다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시고 그가 할 일을 빨리 하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유다가 최후의 만찬장을 빠져 나온 때가 어두운 밤이라고 했다. 이 어둠은 밤의 어둠 일뿐 아니라 유다가 빠져든 양심의 어둠이기도 했다. 이 어둠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는 예수의 얼굴을 올려 볼 때까지 가룟 유다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겪은 육체적 고통보다 몇 곱절 컸을지도 모른다. 결국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넣고 성밖으로 나가 목을 맸다. 비트리오 알피에리의 말대로 유다는 살려고 노력하는 쪽의 용기가 죽으려고 노력하는 쪽보다 훨씬 약했던 것이다. 삶의 용기가 약했기 때문에 스승을 배신한 것이고, 삶의 용기가 약했기 때문에 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노인과 바다}로 유명한 소설가 헤밍웨이(1899-1961)는 사나이다움의 상징으로 불릴 만큼 남자답게 살았다. 남자답게 보이기 위해서 수염을 무성하게 길렀고, 스페인에서는 투우사가 되기도 했다. 1918년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구급차운전병을 자원하였고, 1919-22년 그리스 터키전쟁 중에는 종군기자로 일했다. 스페인 내전에도 참전했고, 아프리카에서는 사자와 코끼리를 사냥했으며, 쿠바에서는 바다낚시를 즐겼고, 권투와 같은 남성적 운동을 즐겼다. 그리고 62세 때인 1961년 미국 아이다호주 농장에서 사냥총으로 자살을 했다.
헤밍웨이도 살려고 노력하는 쪽의 용기가 죽으려고 노력하는 쪽보다 훨씬 약했다. 삶의 용기가 약했기 때문에 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헤밍웨이의 친구이자, 헤밍웨이 전문가인 호세 루이스 카스티요 푸체에 의하면, 헤밍웨이는 1954년 노벨 문학상까지 받고, 소설 같은 삶을 살다 갔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는 항상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고 한다. 평생 불을 환히 밝히지 않고서는 잠들지 못할 만큼 두려움이 많았고, 연약한 측면이 많았는데, 도전과 모험에 남달리 집착한 것이나 작품 속의 모험들을 실제로 시도했던 것은 죽음의 공포와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려는 일종의 몸부림이었다. 헤밍웨이는 위험한 일을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했고, 치명적인 사고로 죽기를 바랬지만, 결국 자살로써 생을 마감했다. 삶에 대한 진정한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재환이란 사람은 경기도 강화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나 네 살 때 6.25사변을 만났다. 아버지는 월북을 했고, 어머니는 빨갱이의 아내라고 맞아 죽었다. 이 때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가 네 살 짜리 재환을 데리고 산 속으로 피신을 했기 때문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밤마다 마을로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주어다가 손자를 먹여 살렸다. 그러던 할아버지마저 그해 겨울에 동사하고 말았다. 네 살 짜리 재환은 고아가 됐다. 그 뒤 재환은 저 스스로 동네에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지며 목숨을 이어갔다.
그러던 재환이가 일곱 살 되던 해, 바닷가에 나가서 놀다가 번쩍번쩍 빛나는 물건을 보게 되었다. 재환은 그것이 보물단지인줄 알았다. 그것을 꺼내어 죽을힘을 다해 열어 보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재환은 옆에 있는 돌을 치켜들고 있는 힘을 다해 내리쳤다. 그 순간 펑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포탄의 뇌관을 내리친 것이었다.
며칠 후에 깨어 보니 미군 야전병원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사고 현장을 날던 미군 헬리콥터가 피투성이가 된 재환을 구했던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두 눈을 잃었고, 오른팔은 반 토막만 남았다.
이게 무슨 끔찍한 비극인가? 재환은 죽으려고 몇 번이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번번이 그의 목숨은 살아 남았다. 그 뒤 그는 대구에 있는 고아원에 후송되었다. 그곳에서도 재환은 천덕꾸러기였다. 그는 매일 울었다. 하루는 울고 있는 재환에게 원장이 다가왔다. "재환아,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님을 믿으면 눈이 보이나요 뭐." "아암, 믿으면 보이지." 예수를 믿으면 눈이 보인다는 원장의 말에 어린 재환은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안 보이는 눈을 보이게 할 욕심으로 열심히 다녔다. 그사이에 재환의 마음은 안정을 찾았고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았고, 잘려 나간 팔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그는 왼손이 멀쩡함을 발견했고, 자신의 고운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특송을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피아노 앞에 안내된 그는 왼손으로 건반을 두드리며 찬양하기 시작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내가 걱정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내가 천성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 집에 가 쉴맘 있도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예수라.
재환은 청아한 목소리로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원장님 말씀대로 저의 육신의 눈은 떠지지 않았지만, 저는 영(靈)의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저는 이 목숨 다하도록 하나님을 노래할 것입니다."
그는 그 후로 대구에서 음악교사를 하면서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불구자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피아노뿐 아니라, 트럼펫까지 한 손으로 연주한다고 한다. 삶이 징그럽도록 싫어서 늘 죽음을 생각했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는 죽으려고 하는 노력 쪽보다 살려고 하는 노력 쪽의 용기가 더 강해져서, 비록 두 눈이 없고 한 팔이 없는 불구자이지만, 새로운 인생을 얻게 되었고, 세계 방방곡곡을 비행기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서 6장 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고 한 말씀처럼 재환은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죽음만을 생각하던 옛 사람을 묻어버렸고, 예수의 부활하심과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여 삶의 용기를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켈은 "인간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삶의 가치를 상실한 절망이다"고 했다.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순간 사람들은 제 몸을 망가뜨리며 끝없이 방황하게 된다.
빅토르 프랑켈 부부가 나치 독일에 체포되어 각기 다른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짐승 같은 취급을 받고 죽어갔다. 그 곳에서 그는 인생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하루 세끼 먹기 위해서 아귀다툼을 해야하고 짐승 취급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면 네 인생은 제로가 된다. 가치를 붙잡고 살아야 한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겠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포로수용소에서는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다시 만나 그 동안 못 다한 사랑을 다 해주는데서 삶의 가치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포로수용소에서 살아 나가야 했다. 살아남아야 할 삶의 가치를 갖게되자, 빅토르 프랑켈은 그 후로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에서 풀려난 그는 곧장 아내를 찾아 나섰으나 그의 아내는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이미 죽고 없었다고 한다.
비록 프랑켈이 당시에는 예수를 믿지 않아 보다 차원 높은 삶의 가치를 세우지는 못했지만, 아내를 다시 만나야한다는 살아야 할 가치를 찾았을 때, 제 2의 인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삶의 용기는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한 유태인이 고명한 라비(聖職者)를 찾아갔다. "매사에 뜻대로 되는 것이 절반도 되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지혜를 좀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한참 생각 끝에 라비는 {뉴욕타임스 연감(年鑑)} 1970년 판 930쪽을 찾아보면 지혜가 적혀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집에 돌아와 허겁지겁 연감을 구해서 찾아보니 유명한 야구 선수들의 타율이 나열돼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고민을 타개해 줄 지혜가 되는지 알 수가 없어 다시 찾아가 물었다. 라비는 역대 최고의 강타자들의 타율을 보라고 했다. "타이컵브, 3할 6푼 7리로 나와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세계 최강의 타자도 3타석 1안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일마다 자기 뜻의 절반 가까이 성취된다면, 당신은 5할 대의 타자가 아닙니까? 만약 모든 선수들의 타율이 10할 대라면 무슨 재미로 야구를 하며, 또 야구 구경을 하겠습니까? 인생도 야구와 같은 것입니다. 모자람이 있어야 세상사는 의욕과 재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고 라비가 그 유태인에게 충고했다고 한다.
과거시험에 일곱 번씩이나 거듭 떨어진 나이 많은 서생(老書生)이 중국에 있었다. 자신보다 글이 짧고 노력도 덜하는 사람들은 급제하는데, 자신만 거듭 낙방하는 것은 이 세상이 불공평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읽던 책들을 팽개치고 옥황상제를 찾아가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할 수가 있습니까?"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상제는 운명의 신과 노력의 신을 불러놓고 나이 많은 서생이 보는 앞에서 술시합을 시켰다. 노력의 신은 석 잔만에 쓰러져 버리고, 운명의 신은 일곱 잔만에 쓰러져 버렸다. 상제는 서생에게 말했습니다. "보았느냐? 인생의 일이란 십중삼(十中三)은 노력에 지배되고, 십중칠(十中七)은 운명에 지배되는 법이다. 다만 십중삼을 다한 후에야 십중칠이 찾아오는 법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서생은 집에 돌아와 팽개친 책들을 다시 챙겨 과거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인생이 타자라면, 운명은 투수라고 한다. 아무렇게나 휘둘러댄다고 운이 와서 맞아주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치는 사람도 3할 7푼 대를 못 넘기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공 열 개중에 세 개만 쳐도 최고의 타자로 대우받는다. 그만큼 야구에서는 3할 대를 내기가 어렵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은 법이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은 법이다.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많은 법이다. 그러나 살아야 할 삶의 가치를 세우고 노력한다면, 삶에 필요한 큰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푸슈킨의 시어(詩語)처럼 아무리 삶이 고달프고 슬프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삶의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