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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5 23:11
오네시모의 위대한 변신[몬 1:10-19]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535  
기독교의 가르침은 흑암에 빛을, 혼돈에 질서를, 죽음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위대한 복음이다. 신약성서 곳곳에 복음의 위대함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빌레몬서이다.
빌레몬서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함께 사도 바울이 주후 60년에서 63년 사이에 로마의 옥중에서 기록한 서신이다. 이 편지를 쓸 당시 바울의 나이는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문 9절과 10절에서 바울은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고 적고 있다.
옥중에서 쓰여진 이 서신은 바울이 개인에게 쓴 유일한 편지로써 노예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편지는 지금의 터키 중서부쪽 브루기아 지방에 사는 빌레몬에게 보내졌다. 빌레몬은 자기 집을 교회로 제공할 만큼 유복하고 독실한 기독교이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다.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에게 상당한 손해를 입히고 로마로 도망쳤다. 본문 18절과 19절에서 바울은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보아서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에게 상당한 피해를 끼치고 두려운 나머지 도망을 친 것 같다.
당시에는 노예가 도망치는 일은 중대한 범죄였다. 도망자는 붙잡히면 도망자(fugitivus)란 단어의 첫 자인 F자를 불에 달군 쇠로 이마에 찍힌 후에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당시에 노예는 말이나 노새와 동일하게 분류되었기 때문에 주인은 노예를 채찍질하거나 투옥시키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죽일 수도 있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고 물건이었던 것이다. 동물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카토(Cato)란 사람은 농장경영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늙은 소는 팔아버리고, 병든 짐승, 쓸모 없는 양털과 가죽, 낡은 짐수레나 농기구들, 그리고 늙고 병든 노예는 없애버리도록 경영주에게 권하고 있다.
바울 당시에 노예의 수는 굉장히 많았다. 대개는 전쟁 노예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예수께서 출생하던 시기에 어떤 사람은 내란으로 재산 손실을 입고서도 여전히 4,160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트리말키오란 사람은 새로 태어나는 노예만도 하루에 남자아이가 30명이고 여자아이가 40명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노예들이 물건처럼 매매 되고 있었다. 팔고자 하는 사람들은 노예를 물건처럼 진열해 놓고 있었고, 사고자 하는 사람들은 벌거벗은 노예를 찔러 보기도 하고, 입을 벌려 보기도 하고, 주위를 걸어 보게 한 후에 값을 흥정해서 구매했다.
노예들은 사소한 잘못에도 잔인한 벌을 받았다. 로마의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길들인 메추라기를 우연히 죽게 한 노예를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했다. 90년 경 사도 요한의 때에 기독교를 박해한 도미티안 황제는 목욕물을 너무 뜨겁게 데웠다고 노예를 화로에 태워 죽었다. 베디우스 폴리오는 수정으로 만든 잔을 떨어뜨려 깨뜨린 노예를 연못에 집어던져 칠성장어에게 산채로 뜯겨 죽게 했다. 먼지 한 점 묻은 것, 은 조각 하나 잘못 닦은 일, 파리를 쫓지 못한 일, 식탁을 바로 놓지 못한 일, 의자를 바로 놓지 못한 일,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재채기하거나 기침하거나 말 한마디 속삭인 일, 술시중이나 목욕물의 온도를 조절하지 못한 일 등으로 노예들은 채찍을 맞거나 매를 맞았다. 여주인들도 자기 하녀들이 시키는 대로 머리를 만져주지 못하면 손톱으로 하녀를 할퀴거나 채찍질했다. 주인이 살해되면 노예들도 처형당했다. 페디아누스 세쿤두스가 살해되었을 때에 처형된 노예가 무려 4백명이 넘었다고 한다.
물론 노예들에게 친절했던 주인들도 있었다. 모든 사람이 형제라고 믿었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노예들과 식탁을 함께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초대교회 당시 플리니는 병든 노예를 치료하기 위해서 이집트에 보내기도 하고, 회복을 위해서 친구의 농장에 보내기도 했다. 그는 노예가 너무 늙기 전에 해방시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또 몇몇 지식인들이 노예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친절이 동정의 범위를 넘는 것은 아니었다. 노예의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더 더욱 아니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바울 당시의 사람들이 노예를 어떤 식으로 취급했는가를 정확히 알면 알수록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취한 태도는 진흙 속에서 빛나는 진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에게 상당한 손해를 입히고 로마로 도망친 죄수였다. 법대로 하자면, 오네시모는 불에 달군 쇠로 이마에 F자를 새기고 채찍을 맞은 후에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다.
그러나 바울의 태도는 달랐다. 바울은 도망자 노예 오네시모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다. 참 자유와 해방은 주인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에 걸맞은 새롭고 변화된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다. 노예 신분의 변화 없이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주인이라 할지라도 노예처럼 비참한 삶이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노예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주인도 노예가 되며, 노예도 형제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여기에 첨가해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친아들처럼 사랑했다.
이때 오네시모는 변화되었다. 오네시모는 '쓸모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전에는 아무 쓸모 없던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진정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 제 이름 값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바울은 새 사람이 된 오네시모를 사랑하였고, 복음의 일군으로 동역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노예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써 영접해 줄 것을 간청했다. 오네시모가 손해 끼친 것이 있다면 자신이 갚겠다고 약속도 했다. 그리고 오네시모가 자기와 함께 일 할 수 있도록 되돌려보내 줄 것도 부탁했다. 바울은 11절에서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다."고 설명하면서, 16절에서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안에서 상관된 네게랴."고 말하면서 더 이상 오네시모를 노예로 받아들이지 말고 노예 이상의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형제로서 영접하라고 간청했다.
우리는 이 짧은 글을 통해서 매우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터득할 수 있다.
첫째, 바울은 흑암같은 감옥에서 빛을 잃고 불행한 삶을 살고있던 오네시모에게 참 빛을 찾아 주었다.
둘째, 기독교의 복음은 혼돈한 삶 속에서 방황하던 오네시모에게 안정된 삶의 목표를 주었다. 그는 쓸모 없는 사람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자신의 이름 값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셋째, 오네시모는 죽음과 같은 노예의 삶에서 생명 있는 형제의 삶에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스도 안에서 오네시모는 천한 노예에서 사랑 받는 형제로 다시 태어났다.
넷째, 오네시모는 천한 노예에서 위대한 감독으로 높은 신분의 상승을 맛보기도 했다.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쳤던 쓸모 없던 노예 출신 오네시모는 바울과 같은 위대한 인물과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쓸모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에베소 교회의 위대한 감독이 되었다.
주후 107년에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바울처럼 로마로 끌려가 화형(이그나티우스는 맹수에 의해서 찢겨 죽게 하는 처형에 대해서 자주 언급함)에 처해졌는데, 잡혀가는 도중에 그는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과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가운데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그들의 감독에 대해서 부탁의 말을 하고 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을 본받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감독으로 모실만한 자격 있는 분들이며, 여러분의 감독이 된 그분은 축복 받은 분이기 때문입니다"(엡 1:1).
이그나티우스가 언급한 그분이 누구일까? 그분은 바로 오네시모였다. 도망자 노예가 에베소 교회의 위대한 감독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신비이다. 기독교가 신비의 종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독교가 변화의 종교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인 디모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같은 속사도들에 의해서 세워지고 섬김을 받은 교회이며, 요한이 말년에 섬긴 교회이기도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에베소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로마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함께 다섯 개의 최고 감독 교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에베소 교회는 지중해 연안의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동서방 교회를 통틀어 다섯 명의 최고 감독직 가운데 한 석을 차지하는 그런 교회였다. 오네시모가 이 교회의 감독이었다는 기록은 실로 엄청난 변신이 아닐 수 없다. 동물처럼 취급받았던 천한 노예 도망자가 감독 중의 감독인 다섯 명의 총감독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위대한 변신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네시모의 위대한 변신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변신들 중의 아주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후에 변화된 위대한 삶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성서 자체가 진리를 발견하고 변화된 사람들의 체험기란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수를 믿고 변화 받아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 이야기가 성서의 이야기이다. 성서는 이제 66권으로 마감이 된지 이 천년이 흘렸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변화된 삶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