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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7-26 01:01
새 시대를 위한 예수 영접[요 6:16-21]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141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벳새다 광야에서 많은 사람을 먹이신 예수는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고, 제자들은 예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날이 저물자 호수로 내려가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날은 이미 어두웠고, 예수도 계시지 아니한데, 갑자기 큰바람이 불며 파도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가버나움이 있는 북서방향으로 해안을 따라 노를 젓고 있었기 때문에 심한 파도와 어둠에도 불구하고 방향을 잃지 않고 5킬로미터 정도를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호수위로 걸어 오셨고, 배에 가까이 다가오셨을 때에 제자들이 처음에는 유령인줄 알고 두려워했지만 나중에 예수인 것을 알고 기쁨으로 영접하여 배에 태웠습니다. 그랬더니 배는 곧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에 다섯 번째로 실린 이 이야기는 앞서 우리가 살펴본 다른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생명'이 주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영접'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폭풍이 몰아치는 죽음의 위기에서라도 건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화가 헌트 윌리암 홀만(Hunt William Holman)이 그린 '세상의 빛'이란 명화가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집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는데, 문을 열 수 있는 손잡이가 없고, 또 담쟁이 넝쿨이 문을 휘감고 있고 불이 꺼져 있어서 집안에 있는 사람은 아마도 오랫동안 사람들과 교제를 끊고 외롭게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출입문밖에서 예수는 왼손에 초롱불을 들고 오른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집주인이 문을 열고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온 집안이 빛으로 밝아질 것이고, 그는 예수와 더불어 먹고 교제하며 새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고, 11장 25-26절에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넓은 곳이 10킬로미터나 되는 큰 호수입니다. 북서쪽에는 레바논 산맥과 그 산맥을 마주보고 서있는 높은 헬몬산이 자리잡고 있어서 강우량이 많은데다가 갈릴리 호수가 해면보다 210미터나 낮은 곳에 있어서 호수로 흘러드는 물의 양이 많고, 또 이들 양대 산맥에서 형성된 거센 돌풍이 계곡을 타고 내려와 호수 위를 지나갈 때면 작은 배들을 파선시킬 수 있는 큰 파도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가 놓인 특이한 지형 때문에 이런 돌풍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와 제자들은 배를 이용해서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혹은 저편에서 이편으로 자주 이동을 했기 때문에 이런 돌풍을 종종 만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런 폭풍 중에서 물위를 걸어와 목숨을 건져준 예수의 능력을 경험했을 것이고, 이런 특이한 경험을 바탕으로 후에 여러 가지 신학적인 깨달음도 얻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간이 예수처럼 물위를 걷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까요? 몇 년 전에 할아버지 한 분이 튜브로 만든 장화를 신고, 튜브로 만든 지팡이에 의지해서 한강에서 걷는 시범을 보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빨리만 걸을 수 있다면 물위를 기구 없이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수상스키를 잘하는 분들 가운데는 스키 없이 맨발로 묘기를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매끈한 돌을 골라서 물 수면위로 낮게 던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던진 돌이 여러 차례 물위를 차고 나가는 모습은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중앙아메리카에는 우스꽝스런 동작으로 물위를 달리는 바실리스크란 도마뱀이 있다고 합니다. 이 도마뱀은 어렸을 적에는 재빨리 이동하기 위해서 연못이나 호수 위를 질주합니다. 하지만 좀 커서 어른이 되면 일상적으로 물위를 걷는 게 아니라, 놀랐을 때만 물위를 달린다고 합니다. 미국의 월간 과학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97년 9월 호에는 도마뱀이 어떻게 물위를 질주하는지를 밝혀낸 하버드대 엔지니어링 및 응용과학부 제임스 글래신과 토마스 맥마흔 교수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들은 코스타리카 열대우림에서 채집한 바실리스크 도마뱀 7마리를 비디오로 촬영한 뒤 역학 모형을 만들어, 이들이 물위를 걷는데 어떻게 물리학을 이용하는지 분석했습니다. 도마뱀이 물위를 걷는 비결에 대한 그들의 설명을 여기에 다 옮길 수는 없고요, 다만 중간 크기의 도마뱀이 물위에서 하는 발걸음질이 1초에 20번 정도라는 것만 말씀드립니다. 만일 사람이 도마뱀처럼 물위를 걸으려고 한다면, 80㎏ 무게의 사람이라면 초속 30m 즉 시속 1백㎞로 달릴 수 있어야 하고, 보통 사람의 근육이 내는 힘보다 15배나 강한 에너지를 써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물위를 걷는 행동들은 다 물이 잔잔할 때의 일이고요 파도가 높을 때는 또 다르리라 봅니다.
하와이섬에 사는 젊은이들은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누구나 파도타기를 즐깁니다. 높은 파도를 타고 파도의 경사면을 설프보드(surfboard)로 활강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한 폭의 멋진 그림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설프보드도 없이 강풍이 불고 높은 파도가 이는 호수를 걸어서 배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예수께서 배에 오르셨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 자신을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작은 배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 가정을 혹은 우리 교회를 혹은 우리가 속한 회사를 바다를 항해하는 배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때때로 거친 풍랑과 파도를 만나 어찌할 바를 전혀 못을 때가 있을 것이고 또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전혀 다른 방법이 없을 때 말입니다. 그 때가 바로 예수를 영접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는 우리 인간들의 사정을 다 지켜보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억울함을 다 듣고 또 알고 계십니다. 또 예수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현장에 직접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찾아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를 영접하고 신뢰할 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병들어 죽어가던 왕의 신하의 아들이 회복되고, 병들어 38년간 일어서지 못했던 병자가 자리를 들고일어나 걷고,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수천 수 만개의 보리떡과 생선이 되고, 성난 폭풍과 파도가 변하여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가 됩니다.
요한복음에 다섯 번째로 실린 이 바다기적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다른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새 시대'가 주제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수 천명을 먹인 빈들에서 일어난 기적이 예수가 가져올 새 시대를 위한 것이었다면, 폭풍 중에서 제자들을 건져준 갈릴리 호수에서 일어난 기적 또한 예수가 가져올 새 시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새 시대를 위한 생명의 떡' 사건이 새 시대인 교회시대의 성만찬과 관련이 있다면, '새 시대를 위한 예수영접' 사건은 새 시대인 교회시대의 침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넌 후에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처럼, 비록 순서가 뒤바뀌기는 했지만, 제자들이 예수의 인도로 갈릴리 호수를 무사히 건넌 것과 빈들에서 오 천명을 먹이신 사건이 매우 닮아 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에 내린 재앙 가운데 뇌성과 우박의 재앙(출 9:13-35)이 있습니다. 그 때 모세는 우박을 동반한 폭풍을 통해서 파괴를 초래하였지만, 예수는 폭풍을 진압하여 고요와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모세는 사람들에게 자연적인 재해를 가져다주었지만, 예수는 자연적 재해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주셨습니다. 모세시대 즉 옛 시대에 속한 히브리인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지만, 예수시대 즉 새 시대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4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바울이 모세와 히브리공동체를 예수와 교회공동체의 모형으로 본데서 나온 말씀입니다.
히브리민족은 모세의 인도로 옛 시대인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홍해를 건넌 후에 새 시대를 광야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이 광야시대는 가나안 땅을 목표로 하는 임시생활 또는 텐트생활이었기 때문에 또 다른 새 시대를 위한 나그네 생활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이 광야시대에 하늘로써 내리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40년의 광야생활을 끝낸 후에는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요단강을 건너 새로운 가나안 정착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곳 가나안 정착시대를 영구한 시대로 생각하였고, 또 다른 새 시대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비록 메시아 시대를 간절히 바랐고, 기대하였지만,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 시대란 것도 가나안 정착시대의 연장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끊임없는 외침과 피압박의 설음을 면치 못했고, 그나마도 주후 70년 이후로 1948년까지는 나라조차도 없이 남의 나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기간동안 무려 1200만 명이 학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율법시대인 옛 시대를 끝내고 복음시대인 새 시대를 시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사탄에 메어 죄의 종으로 살았던 옛 시대를 청산하고,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아 새 시대인 교회시대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히브리민족은 만나를 먹고도 죽었으나 예수께서 주시는 복음의 말씀은 영생하는 생명의 떡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시대 역시도 영원한 시대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임시생활이자 나그네의 생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은 갈릴리 호수를 배경으로 옛 시대와 새 시대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옮겨가는 장면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했던 역사적 사실일 뿐 아니라, 후에 신학적으로 이해되어진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런 신학적 설명에서는 호수 이편이 떠나야할 옛 시대가 되고, 호수 저편이 꿈이 있고, 행복이 있는 새 시대가 됩니다. 이편인 옛 시대를 떠나 저편인 새 시대를 향해 가는 데에는 히브리민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난의 세월을 보냈던 것처럼, 혹은 이집트에서 참혹한 노예의 삶을 보냈던 것처럼, 폭풍을 만나기도 하고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결코 폭풍에 좌절되거나 폭풍에 삼킨바되지 않고, 오히려 폭풍을 이기고 목표인 저편에 무사히 닿게됩니다.
기독교가 지난 2천년간 수많은 박해를 받고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아니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새 시대에 대한 기대와 준비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 뿐 아니라, 신약성경을 쓴 모든 저자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의 시대를 새 시대로 이해했습니다. 옛 시대를 율법시대로, 그리고 새 시대를 성령의 능력으로 경험되는 복음시대, 교회시대, 성령시대, 혹은 종말시대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이 새 시대를 또 다른 영원한 새 시대를 바라보고 경험하고 맛보는 시대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시대를 영원한 새 시대를 하나님으로부터 약속 받고, 성령으로 그 약정서에 도장찍음 받고, 성령으로 선수금을 받고, 그 새 시대를 성령의 도움으로 맛보고 경험하는 시대로 이해했습니다. 또 성령의 인도로 영원한 새 시대를 향해서 나아가는 시대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난의 교회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고, 감사할 수 있었고, 희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변화가 바로 예수를 영접할 때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병들어 죽어가던 왕의 신하의 아들이 회복되고, 병들어 38년간 일어서지 못했던 병자가 자리를 들고일어나 걷고,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수천 수 만개의 보리떡과 생선이 되고, 또 광풍과 풍랑이 변하여 고요하고 잔잔하게 되듯이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고,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는 새 시대의 복된 삶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대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앞에 전개될 새 시대를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새 시대는 예수를 통해서 옵니다. 밤중에 몰래 예수를 찾아온 율법학자 니고데모처럼,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처럼 진정으로 자기 삶에 어떤 변화가 찾아오기를 기대하십니까?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왕의 신하처럼 자기 아들의 병이 낳기를 원하고, 38년 된 병자처럼 자리를 차고 일어나 걷기를 원하고, 목자 없는 양같이 빈들을 헤매는 민중처럼 인도자를 원하고, 폭풍을 만난 제자들처럼 구원자를 원하시거든 예수를 영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