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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7-26 00:59
새 시대를 위한 복음적 사고[요 5:1-18]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932  

요한복음 5장 1-18절의 말씀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기적이야기입니다. '베데스다'란 말은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거기에 뜨거운 태양 볕과 비를 피할 수 있는 행각이 다섯 개가 있었는데, 병낫기를 바라는 많은 환자들이 그곳에 모여서 물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이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고침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병에 걸린 지 38년이나 된 환자가 애처롭게 누워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의 눈에 특별히 띤 것을 보면, 그의 형편이 매우 나빴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예, 고침 받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물이 움직일 때 저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자 그 사람은 즉시로 고침을 받고 건강을 되찾아 자기 짐을 챙겨들고 그곳을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정한 율법에는 안식일에 짐을 운반하거나 900미터 이상 걷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짐을 메고 길을 떠나는 것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중대한 범죄였습니다.
예수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자기도 안식일 법을 어길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안식일 법을 어기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길 뿐 아니라,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함으로써 신성모독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율법적 사고(思考)와 예수의 복음적 사고의 큰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옛 시대의 산물인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사고에 도전장을 내고, 새 시대에 필요한 복음적 사고를 끌어들이는 예수의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새 시대를 위한 복음적 사고'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복음'에 반대되는 말이 '율법'입니다. 복음과 율법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사고(思考) 혹은 생각의 차이 또는 사상(思想) 혹은 정신(精神)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율법은 마치 예루살렘에 있었던 여러 성문들 가운데 하나인 양문 곁에 있었던 베데스다 연못과 그 주위에 세워졌던 다섯 개의 행각과 같습니다. 이들 행각에는 38년 된 병자를 비롯해서 온갖 종류의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환자들로 가득했습니다. 고침을 받아야 할 환자는 많았지만, 어쩌다 한번 끓어오르는 물에 애써 달려들어가 봤자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먼저 들어간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까, 고침을 받아야할 많은 사람들이, 38년 된 병자에게서 보듯이,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 기다려도 고침을 받을 수 없었고, 특히 노약자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율법은 사람들에게 잘못에 대한 죄의식과 벌에 대한 심적 부담만 주었지 그들을 고치거나 구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행한 재앙가운데 사람의 몸에 독종이 나게 한 표적(출 9:8-12)이 있었습니다. 이 표적은 모세가 사람의 몸에 고통을 준 최초의 재앙이었습니다. 모세의 이 재앙은 예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표적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표적이 예수께서 개인의 고통을 직접 고쳐준 첫 번째 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적인 사고의 대표인 모세의 경우는 인간의 정상적인 육신을 병들게 만들었지만, 복음적인 사고의 대표인 예수의 경우에는 병든 육신을 고쳤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가 병을 들게 했거나 예수가 병을 고친 데에는 그들의 사고(思考)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듯이 보여도 실제로는 그들의 사고와 중요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이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9절의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위급한 일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될 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안식일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또 유대인들의 미움과 질타를 받아가면서까지 또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병을 고치셨습니다.
3,000년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말이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라는 말입니다.
한메디지털대백과사전에 의하면, 패러다임은 본래 영문법에서 명사나 동사의 어형변화표를 뜻하였지만, 1962년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구조}에서 과학의 역사와 구조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개념을 도입한 뒤 최근들어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은 어떤 과학영역의 학자들을 지배하고 있고 또 그들 사이에 공유되는 사물을 보는 방법, 문제를 삼는 방법, 그리고 문제를 푸는 방법을 통틀어 말합니다. 또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김영사)을 쓴 스티븐 코비( Stephen R. Covey)에 의하면, '패러다임'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즉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주변에 널려 있는 사물을 보고 나서 지각하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고대 이집트의 천문학자 프톨레미(Ptolemy)는 우주의 중심을 지구라고 주장했고, 그것이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시대의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는 이런 고정관념에 도전하여 우주의 중심이 태양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우주중심에 관한 고정관념을 바꿈으로써 코페르니쿠스는 사고의 전환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이를 일컬어 '사고(思考)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형태의 패러다임이든지 간에, 그것이 기독교신앙이든지, 기업경영이든지, 자연환경이든지 간에, 패러다임의 전환에는 기존의 전통, 낡은 사고방식, 그리고 낡은 패러다임을 부정하는 고통스러운 과거부정과 자기혁신의 노력이 요구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과거부정과 자기혁신은 사건이나 사물을 지각하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새로운 사고의 틀을 요구합니다. 이런 새로운 패러다임의 하나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쓴 스티븐 코비가 지적한 것이 행동 패러다임입니다. 남에게 친절하고, 예의를 지키고, 약속을 지키고, 기대를 충족시켜 주고, 자리에 없는 사람에게 믿음과 의리를 지키고, 잘못을 사과하면 내 삶 속에 성공이 들어와 쌓이고, 이것을 은행에서 예금이 입금되는 것에 비교하여 '예입'이라 하였습니다. 또 남에게 불친절하고, 무례하게 행동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기대를 저버리고, 자리에 없는 사람에게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고, 자만하면 내 삶 속에서 성공이 빠져나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은행에서 예금이 빠져나가는 것에 비교하여 '인출'이라 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 스티븐 코비가 지적한 것이 성숙 패러다임입니다. '당신이 나를 돌봐줘야 한다.'는 의존적 단계에서 '나는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독립적 단계로,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상호 의존적 단계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발전할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38년 된 병자는 '당신이 나를 돌봐줘야 한다.'는 의존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38년 동안 전혀 의식의 전환 없이 살아왔습니다. 남이 도와주기만을 바라고 38년을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방법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율법적 사고의 희생자였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너더러 자리를 들고 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12절)고 따져 물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과 전통에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옛 시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생명력을 상실한 율법의 형식과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온 그들은 실로 이 환자를 38년 동안이나 질병의 고통에서 살도록 묶어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에게는 현실을 개혁하고 새 것을 추구하려는 의지보다는 현실에 순응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태도가 더 지배적입니다.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낡은 틀과 형식을 벗어버려야 하는데도 오히려 그 낡은 것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낡은 모습, 낡은 생각, 낡은 관습을 벗어버려야 하는데도 오히려 눈에 보이는 물질과 돈과 육신의 자랑거리만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예수는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낡은 율법의 형식주의를 타파하시고, 인간에게 참된 자유와 새 생명을 주는 새 시대를 이 땅에 시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쯤해서 예수의 사고 패러다임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예수는 복음적 사고를 하셨습니다. 예수의 복음적 사고는 믿음의 사고, 유신론적 사고, 창조적 사고, 하면 된다는 사고, 할 수 있다는 사고, 살림의 사고, 열림의 사고, 영적인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음적 사고에 반대되는 사고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고들은 자연주의적 사고, 즉 자연법칙만 믿고 행동하려는 사고, 무신론적 사고, 파괴적 사고, 해도 안 된다는 사고, 할 수 없다는 사고, 죽임의 사고, 닫힘의 사고, 세상적 사고들입니다. 이런 율법적인 사고를 버리고 복음적 사고를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새 시대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생활방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생활태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의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생각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행동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둘째, 예수는 혁신적인 사고를 하셨습니다. 잘못을 고치는 개혁정신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지 말라'보다는 '~하라'의 사고를 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보다는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의 사고를 하셨습니다. '원수를 갚으라.'보다는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 5:39)의 사고를 하셨습니다. 부정적이고 외적인 율법의 형식에 치우치지 아니하시고, 긍정적이고 내적인 율법의 정신을 따라 생각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이나 전통을 지켜가기 보다는 새로운 습관을 키우고 새로운 전통을 새우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얼마나 엄격하게 지켰는지에 대해서는 '바리새인들의 39가지 안식일 금지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금지법은 가장 일상적이고 필수적인 일조차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된다고 적고 있습니다. '반죽하거나 굽지 말 것,' '털 깍지 말 것,' '빨래하지 말 것,' '바늘로 두 번 깁지 말 것,' '두 글자 이상 쓰거나 지우지 말 것,' '불을 끄거나 켜지 말 것,' '물건을 옮기지 말 것,' '빗질하지 말 것' 등이 안식일 법에 실린 내용입니다.
이런 엄격한 안식일 법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고 하셨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마 12:8)고까지 하셨습니다. 매우 혁신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혁신적인 선언에 근거해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서 결국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옳고 정당한 일을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셋째, 예수는 '살림'의 사고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 법을 어기고 병을 고치는 것을 보고 따져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마 12:10). 그 때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고 되물으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마 12:11-2)고 하셨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라."(눅 13:14)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러면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15-16)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는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요 7:22-23)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을 지키는 것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는 38년 된 병자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병 낫기를 원하느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예, 고침 받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자 그 사람은 즉시로 고침을 받고 건강을 되찾아 자기 짐을 챙겨들고 걸어갔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예수의 복음적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의 혁신적인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의 살림의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정관념의 타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믿음의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신론적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조적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살림의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열림의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영적인 사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런 사고 패러다임이 있는 곳에 새 시대가 열립니다. 믿음과 새 생명의 역사가 열립니다.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성도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