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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09 00:17
변화의 원리속에 변치않는 로고스[요1:1-3]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914  
지구는 변함없이 팽이처럼 스스로 돌면서 하루를 만들어 내고 태양 주위를 돌면서 일년을 만들어 내면서 태초부터 오늘까지 묵은해를 보내버리고 새해를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지구가 도는 한 시간은 흘러갑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한 모든 것은 변합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1:9)고 했고, 해 아래는 새 것이 없기 때문에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1:2)고 했습니다. 지혜도 헛되고, 즐거움도 헛되고, 슬기도 어리석음도 헛되고, 수고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3:11).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알았다"(3:12)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같기"(3:14) 때문에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라"(5:7)고 일렀습니다.
이 말씀은 끝없이 변하는 무상함 속에서도 영원토록 변치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으로 젊은이들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먹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오기 전에, 그렇게 하여라. 그 때가 되면 너를 보호하는 팔이 떨리고, 정정하던 두 다리가 약해지고, 이는 빠져서 씹지도 못하고, 눈은 침침해져서 보는 것마저 힘겹고, 귀는 먹어 바깥에서 나는 소리도 못 듣고, 맷돌질 소리도 희미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높은 곳에는 무서워서 높이 올라가지도 못하고, 넘어질세라 걷는 것마저도 무서워질 것이다.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고, 원기가 떨어져서 보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영원히 쉴 곳으로 가는 날, 길거리에는 조객들이 오간다. 은 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부서지고, 샘에서 물 뜨는 물동이가 깨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부서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12:1-7)고 하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12:13-14)고 경고하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40?∼?)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끝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물이 얼음이 되듯이 성질은 변하지 않고 형태만 변하는 물리적 변화가 있는가하면, 산소와 수소가 만나서 물이 되는 경우처럼 형태뿐이 아니라, 성질까지 변하는 화학적 변화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변화는 질서에서 무질서의 극대화로 진행되는데, 이 법칙을 엔트로피법칙 또는 제2열역학법칙이라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변화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한 때 유년부, 초등부 학생이었던 여러분이 이제 얼굴에 여드름이 돋는 중 고등부 학생이 되어있는 것을 보아도, 언젠가는 여러분이 노인이 되는 물리적 변화를 거쳐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화학적 변화를 겪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하면서, 흘러가는 강물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도 솔로몬처럼 만물의 끝없는 변화 속에서 인생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를 벗어난 영원토록 불변하는 진리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진리를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말하는 로고스는 우리말로 '법칙' 또는 '도리'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법칙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면서도 스스로는 결코 변화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변증법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해석하면서 변증법적 '도리'나 '법칙'을 뛰어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으며, 만물의 근원이시며, 유한할 뿐 아니라, 끝없이 변하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빛을 주시는 분이라고 밝혀주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Logos)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니, 그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의 안에서 생겨난 것은 생명이었으니,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세월은 가고 변해도 그 변화의 원리 속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로고스, 끝없이 변하는 굴레 속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빛을 주시는 말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올해도 변함없이 믿고 영생을 얻는 우리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솝우화 속에 토끼와 거북이 경주 이야기 있지요? 발발이 토끼와 느린보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나라와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발발이라고 자만하여 도중에 낮잠을 잤다가 느린보 거북이에게 경주에서 진 토끼를 본받지 말고, 느리지만 꾸준히 노력해서 토끼를 이긴 거북이의 성실성을 본받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낮잠을 잔 토끼도 문제지만, 거북이가 토끼를 깨우지 않고 지나친 것은 경쟁의 원칙에 어긋난 불공정 행위이며, 상대의 결점을 악용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은 무효라고 주장합니다. 공정과 경쟁의 원리에 바탕을 둔 미국 사회이기 때문에 수긍은 가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현실과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에서는 절강성(浙江省)의 한 소학교에서 대두된 쟁점으로써 거북이가 잠들어 있는 토끼를 깨워서 사이좋게 진행하지 않은 것은 공산주의가 지향하는 기회의 평등, 분배의 평등, 결과의 평등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거북이를 매도하였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이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에 맞지 않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이미 입증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냉혹한 시장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장기적으로는 성실한 느린 걸음이 게으른 빠른 걸음을 이긴다는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우리 나라는 지난 30여 년간 돌진적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 중요한 교훈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렸기 때문에 그 후유증을 심각하게 앓고 있는 중입니다. 토끼가 낮잠을 잔만큼의 경기후퇴 또는 경제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미국은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는 기회의 나라입니다. 토끼가 경기 도중에 낮잠을 잤다는 것은 휴식을 위한 낮잠의 차원을 넘는 성공의 기회를 빼앗기는 행동입니다. 미국에 건너간 소수민족이 본토인과의 경쟁에서 성공하는 것은 평등한 기회를 성실하게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기회의 평등은 물론 결과까지 평등해야 한다는 이상적인 공산국가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상은 정의와 평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불완전하고 욕심 많고 꾀 많고 죄 많은 인간들이 사는 사회에서는 이런 이상이 개인을 망치고 나라를 망칩니다. 이점은 70년 공산주의 역사에서 이미 입증된 사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토끼보다는 많이 느리고, 타고난 재능은 부족하지만, 성실하게 꾸준히 노력한 거북이가 토끼를 이겼다는 점은 현실사회에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만일에 재능이 좋고 빠른 토끼가 성실하고 꾸준하게 노력한다면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수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모든 거북이가 다 성실한 것이 아니듯이 모든 토끼가 다 성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토끼가 낮잠을 자고 나서도 거북이를 이겼다면, 토끼의 낮잠은 게으름의 낮잠이 아니라, 쉼의 낮잠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토끼의 쉼은 더 빨리 더 멀리 가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 평가되었을 것입니다.
최근에 와서는 어떤 목표를 향해 도중에 한눈을 팔지 않고 최선을 다해 가는 거북이가 옳고, 목표에 이르는 도중을 쉬엄쉬엄 즐기며 가는 토끼는 나쁘다라고 말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현대인들의 삶이 목표를 향해서 쉼 없이 달려가기에는 너무나 힘겹고 고단하기 때문이며, 쉼 없이 목표에 도달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수가 애써 달성한 목표를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고 과로나 병으로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지난 30여 년간 돌진적인 근대화에 힘입어서 부산물로 생긴 것이 소위 한국병이란 것입니다. 한국병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더 중요시하는 폐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총체적 부실과 부정부패로 병들게 한 것이 실용주의적 성공주의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 군대, 등 어느 한 곳 썩지 아니하고 병들지 아니한 곳이 없습니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종교인은 종교인대로, 군인은 군인대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썩고 병들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성공제일주의로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이며, 거북이처럼 목표에 집착하여 좋은 과정을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토끼처럼 자만의 잠에 빠져서도 안되겠지만, 자기성찰의 시간이나 쉼도 없이 거북이처럼 성공제일주의로 앞만 보고 달려가서는 오래 지탱하지 못합니다.
올해가 단기로 4332년, 기묘년(己卯年), 토끼의 해입니다. 토끼의 해, 첫 주일 아침에 토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리가 토끼에게서 한해를 계획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해서 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토끼는 강자를 우롱하고 약자를 돕는 서민의 영웅입니다.
약자를 수탈하는 용왕(龍王)이 병이 들어 영약인 토끼의 간이 필요하게 되자, 자라가 자원하여 토끼 그림을 가지고 육지로 나갑니다. 자라는 동물들의 모임에서 만난 토끼를 꾀어 등에 업고 용궁으로 돌아옵니다. 용왕 앞에 이르러 간을 내놓으라고 하자, 토끼는 속은 것을 알고 꾀를 내어 간을 볕에 말리려고 육지에 꺼내 놓고 왔다고 말합니다. 이에 용왕은 토끼에게 육지에 나가 간을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육지에 이른 토끼는 자라를 조롱하면서 숲 속으로 도망가 버리고, 자라는 빈손으로 용궁에 되돌아갑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많은 짐승들 가운데 약자인 토끼가 가장 강자인 호랑이를 골탕먹이고 있습니다.
길 가던 나그네가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굶주렸던 호랑이는 자기를 구해준 나그네를 잡아먹으려 했습니다. 나그네는 살려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배은망덕(背恩忘德)한 행위라고 말하면서 삼심제(三審制)로 재판을 받아보고 나서 잡아먹혀도 먹히겠다고 했습니다. 1심(審)에서 속까지 검은 까마귀는 호랑이가 옳다고 강자의 손을 들어주었고, 2심(審)에서 교활한 여우도 호랑이가 옳다고 강자의 편을 들었습니다. 상고심(上告審)인 3심(審)을 맡은 토끼는 현장 검증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호랑이로 하여금 함정에 다시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호랑이가 함정에 다시 들어간 다음, 토끼는 나그네에게 그대로 두고 가버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굶주린 호랑이가 숲에 나타나 모든 짐승을 무차별 잡아먹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동물들은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비통한 심정으로 잡아먹힐 순서를 정하였는데, 맨 먼저 잡아먹히겠다고 나선 것이 토끼였습니다. 그는 호랑이 앞에 일부러 늦게 나타나서 하는 말이, 오는 도중에 호랑이를 데려오면 당장에 잡아먹겠다는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짐승을 만나 늦었다고 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호랑이는 결투(決鬪)를 벌릴 속셈으로 토끼를 앞장세우고 그 짐승을 찾아나셨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호랑이를 벼랑 끝으로 유도한 다음 기습적으로 등을 떠밀어 벼랑에 떨어져 죽게 하고는 숲 속의 나약한 짐승들을 구했습니다.
토끼의 임기웅변술이 윤리적으로 정당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끼는 양반과 세도가들에 억눌리고, 유교교리에 짓눌려 살아온 우리 서민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하여 저항해온 영웅이었습니다. 그 강자를 상징하는 호랑이해가 가고 약자를 대변하는 토끼해가 왔습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아 안 솔로몬은 해 아래는 새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습니다. 또 사람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같기 때문에 더 늙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세월은 가고 변해도 그 변화의 원리 속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로고스, 끝없이 변하는 굴레 속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빛을 주시는 말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올해도 변함없이 믿고, 영생을 얻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토끼처럼 좋은 일 많이 하며, 지혜롭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