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02-08-09 00:23
가치관이 변해야 산다[빌3:18-19]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247  
요즘 학계와 정·재계에서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말이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라는 용어입니다. '패러다임'이란 말은 1962년 T. S. 쿤이 {과학혁명구조}에서 과학의 역사와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처음 도입했는데요, 이 말은 '사물을 보는 방법', '문제를 삼는 방법', '문제를 푸는 방법'을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말이 오늘날에 와서 자주 쓰이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사고(思考)의 변화 즉 생각의 변화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관이든, 가치관이든, 세계관이든 바꾸지 않으면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지구까지도 존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패러다임 즉 '사물을 보는 방법', '문제를 삼는 방법', '문제를 푸는 방법'에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각계에서는 지식혁명이니, 정보통신혁명이니, 과학기술혁명이니, 정의·평화·창조보존이니(JPIC), 다원주의니 하면서 마인드(mind) 즉 생각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권력의 이동}(Power Shift)에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마인드(mind)의 시대라고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환경마인드이나 기업경영마인드와 같은 말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어려운 말들이 갖는 핵심은 한 마디로 '가치관'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가치관만큼 중요한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치관의 변화야말로 일 개인은 물론이고, 교회나 기업이나 국가가 성장하고 발전하느냐 아니면 쇠퇴하고 해체되느냐의 중대한 열쇠인 것입니다. 
지식혁명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정보통신혁명과 과학기술혁명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정의·평화·창조보존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다원주의는 왜 주장되어지는 것입니까? 이들 물음에 답을 얻으려면 먼저 이 모든 것들의 정신이 무엇인가부터 물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우리에게 지식혁명이 필요하고, 정보통신혁명이 필요하고, 과학기술혁명이 필요한지, 왜 우리가 정의·평화·창조보존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지, 다원주의마인드니, 환경마인드니, 기업경영마인드와 같은 정신이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잠시만 생각해본다면, 이 모든 것들의 정신은 다름 아닌 인류의 행복이란 가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높은 차원의 가치, 그 가치는 다름 아닌 자기 중심사고에서 벗어나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고, 이웃과 환경을 먼저 생각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패러다임 쉬프트는 다름 아닌 가치관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가 모두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이타중심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어려운 말들을 쏟아 붓고 있는 것입니다. 21세기에는 인류의 질적인 삶의 향상과 남을 배려하는 정신에 바탕을 두지 아니하면, 개인은 개인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가치관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하루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서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는 소문을 듣고,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와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마 22:34~40)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차원의 가치는, 첫째,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이 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는 뜻은 이 보다 더 크고 귀한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가치관이요, 온 인류가 회복해야할 고귀한 가치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빌립보서 3장 18~19절에 의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다는 것이요, 배를 신으로 삼고, 땅의 일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천년 전에도 그랬겠지만,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자연보존이나 이웃을 위한 봉사보다는 부와 명예와 권세와 쾌락과 학벌과 직업과 가족을 가장 가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도 자연스럽게 그런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결과가 멸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이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것이 지식인들의 한결같은 탄식이자 외침이며, 그 탄식과 외침이 바로 '패러다임 쉬프트'나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말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제일계명으로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 이외의 것을 신성시하지 말고, 그것들에 가치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긴 우상이나 형상에 절하지 않더라도 부나 명예나 권세나 쾌락이나 학벌이나 직업이나 가족을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긴다면, 그것은 명백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상숭배를 그냥 눈감아 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주 야훼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 신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그들이 살아 있는 신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쾌락의 신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며, 고린도교회 성도 몇 명이 아프로디테 신 앞에 무릎을 꿇은 것도 그들이 살아 있는 신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쾌락의 신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서운 불과 연기와 유황의 심판이란 것은 소돔성의 저주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 후 40년의 광야생활 끝에 사막의 끝자락 모압평지 싯딤에서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이스라엘 민족은 큰 저주를 받습니다(민 25:1-5; 신 4:3; 시 106:28; 호 9:10). 광야생활은 가난과 신앙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싯딤은 농경문화가 시작되는 곳이라 부와 쾌락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알브올에 속하여 모압 사람의 딸들과 음행을 하고, 모압 사람의 딸들이 자기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에 참석하여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 신들에게 머리를 숙인 것은 황금과 쾌락의 신을 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가난과 야훼신앙에 가치를 두기보다는 풍요의 신 바알신앙에 더 큰 가치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이만 사천 명이 염병으로 죽는 중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시날 땅 들판에서 흙벽돌을 구어 바벨탑을 쌓고 도시를 건설했다가 피차에 말이 통하지 않아 온 땅으로 흩어졌던 것도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문명과 과학을 신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가치관이 잘못되면 쇠퇴하고 해체되는 것입니다. 일본인 이케하라 하모루가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에서, 한국을 무법천지의 나라, 한국인을 염치없는 국민이라고 꼬집고 있는데, 그런 평가를 받게된 이유가 한국인의 잘못된 가치관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웃중심보다는 제 식구, 제 자식만 위하는 자기 중심적이어서 인성이나 인간 됨보다는 출세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고, 가정교육보다는 입시교육에 더 치중하게 되며, 그 결과 국민은 염치가 없고, 아이들은 망나니로 커가고 있으며, 국민은 통치자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잘못된 가치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위대한 민족이 되기를 원한다면, 가치관의 변화 또는 가치중심의 이동이 필요합니다. 개인은 자기 중심에서 이웃중심으로, 개인소유개념에서 공공소유개념으로, 학교는 교사중심에서 학생중심으로, 기업은 고용주나 고용인중심에서 고객중심으로, 국가는 공무원중심에서 국민중심으로, 환경은 개발개념에서 보존개념으로 바뀌어 가야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 민족이 삽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독일인 의사요, 신학자요, 사상가요, 오르간 연주자요, 아프리카 선교사요, 노벨평화상의 수상자입니다. 그가 쓴 에세이집, {물과 원시림사이에서}를 보면, 알버트 슈바이처는 독일 슈트라부르크에서 목사와 신학강사와 문필가와 오르간 연주자를 지내가다 의학을 배워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이유를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저질러진 백인들의 죄과를 속죄하고 배상하는데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유럽을 부자로, 식민지에 살고 있는 아프리카 흑인들을 나사로로 생각하였고, 문명인으로서 유색인종에 대하여 지고 있는 책임을 인식하고 이행하기 위해서 삼십 세의 나이에 의학을 배워 의사가 되었고, 부인은 간호학을 이수하였습니다. 그리고 뇌염이 창궐하는 오고웨 강 유역 람바레네에서 의료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훌륭한 것은 그의 가치관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비록 아프리카 흑인이지만 슈바이처는 그들을 하나님이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생명으로 생각했던 것이며,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그들은 구원받을만한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달라야 합니다. 이랜드의 박성수 사장은 예수 믿고 겪은 가장 큰 변화를 세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첫째, 자신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자기 자신이 좌표(座標)의 원점인 절대적 존재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다음부터는 자신이 상대적 존재인 피조물이란 점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에로 가치 중심의 이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다음부터는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게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가치관의 변화였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큰 것이 좋고 작은 것은 나쁘고, 높은 것이 좋고 낮은 것은 나쁘고, 부(富)는 좋고 가난은 나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높아지고, 이기고, 크게 되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부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나서는, 이 가치관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부정직한 대통령보다 정직한 청소부가 더 위대하게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현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미래가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물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영적인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외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내적인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셋째,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무목적(無目的), 무방향(無方向)의 삶을, 단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이제는 어디로 가야할 지, 몇 시까지 가야할 지, 어떻게 가야할 지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왜곡된 가치관입니다. 사람들은 돈 되는 것이 가치 있고, 명예 있는 것이 가치 있고, 권세 있는 것이 가치 있고, 재미있는 것이 가치 있고, 인기 있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와 같은 것들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을 해치고, 환경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믿음과 의리를 버립니다. 그러나 참된 가치는 무슨 직업에 종사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에 있고, 얼마를 소유했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에 있으며,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생활에 있고, 육신보다는 영혼이 잘 되는 것에 있습니다.
타민족은 모두 이방인이며, 하나님이 약속한 팔레스타인은 어느 다른 민족과도 공유할 수 없는 신성한 땅이라고 믿는 배타적 선민의식과 독점적 영토주의에 사로잡힌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으뜸가는 계명이라고. 오늘날까지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배타적 선민의식과 독점적 영토주의에 사로잡혀 혈연과 지연의 벽을 넘지 못하고 타민족을 무참히 학살 또는 인종청소를 자행하는 현대판 바리새파 민족들이나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할거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민족이나 사람들에게 예수는 오늘도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와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이 말씀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복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변해야 여러분이 살고, 내가 살고, 우리 모두가 삽니다. 옳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하실 때에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