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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4 17:17
기쁜 소식으로 오신 예수[롬1:16]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257  
성탄절이 한 주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12월을 대강절이란 이름으로 예수의 오심을 준비합니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예수의 오심에 대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의미를 되새겨 보게되는데 해마다 찾아오는 성탄절에 늘 새롭고 신선한 의미를 찾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새롭고 신선한 의미를 찾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되새기는 것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잘 알고 있는 것이라도 늘 기억하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매년 축일을 정해두고 그 날을 축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일날에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목적이라든지 의미를 골똘히 생각하기보다는 생일날 받게 될 선물이나 파티에 더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성탄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탄절이 소비문화와 타락문화에 멍들고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가 빛바랜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성탄절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교회에 파고드는 것 같습니다. 12월 25일이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도 아닌데 성탄절을 지킬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성탄절 되살리기 운동이 일각에서 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탄절은 인류에게 가장 기쁜 소식을 가져다 준 날이기 때문에 추리도 꾸미고 선물도 교환하고 카드도 주고받고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요즘 분위기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분위기보다는 그냥 하루 놀고 즐기는 날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그림이나 글이 쓰여진 쓸만한 카드 한 장 사기도 어려운 형편이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입니다. 웬일인지 한국 땅에서는 기독교 문화가 잘 형성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을 앞두고 선물이나 즐겁게 노는 일을 우선 생각하기보다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깊은 뜻을 명상하고 마음에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은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일이 우리 인류에게 어떤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는지를 한가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이 땅에 가져오신 분이 예수입니다. 기쁜 소식이란 선물이 따로 마련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분이 곧 복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그것이 곧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셨기 때문에 지상에서 최고로 기쁜 일이며, 누가복음 7장 22절의 말씀처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에 지상에서 최고로 기쁜 소식이 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찾아오신 것도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난 사람마다 변화를 겪습니다.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를 만났을 때 병고침의 기쁨을, 삭개오와 같은 세무공무원이 예수를 만났을 때,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변화의 기쁨을,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예수를 만났을 때, 새 출발의 기쁨을, 다섯 명의 남편을 두었던 여인이 예수를 만났을 때, 생수의 기쁨을, 어부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 사람을 낚는 어부 됨의 기쁨을 맛보았으며, 니고데모가 예수를 만났을 때,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신 예수를 만나고서도 구원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디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이미 오셨습니다. 또 지속적으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언제나 다시 찾아오십니다. 이 예수를 만나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기쁨을 찾지 못한 사람은 아직 진정으로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 치고 변화를 겪지 아니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사람을 치유하고 고치고 변화시키며 새 사람이 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증거는 도처에 있습니다. 그 많은 증거들 가운데서 홍유한이란 사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8-9세에 사서삼경과 여러 학자들의 저서에 통달하여 신동이란 칭찬을 들었고, 열 여섯 살 때 {성호서설}을 쓴 이익 선생의 문하생이었습니다.
홍유한은 광암 이 벽,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이승훈, 김범우 등이 이 땅에 처음 가정교회를 시작한 때보다 30년 먼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린 사람입니다.
열 여섯 살부터 이익선생 밑에서 {천주실의}, {칠극}, {직방외기}와 같은 서학 관련 한학서를 접하기 시작한 홍유한은 나이 스물 다섯 살에 가서는 스스로 기독교의 복음을 깨닫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물론 예배하는 방법도 몰랐고, 본 일도 없었으며, 세례도 받지 못한 채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홍유한은 국내에 거주하는 조선 사람으로는 최초로 주일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는 7일마다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 고부터는 매월 7일과 14일, 21일과 28일을 주일날로 정하여 일상적인 일을 전폐하고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를 온전히 보냈고, 계명을 지키며, 절제와 금욕을 몸소 실천한 경건한 신앙인 이었습니다.
홍유한에게 서학을 접하게 해준 이익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일생을 학문에 전념한 조선 중엽의 실학자입니다. 스물 네 살 때 과거에 낙방했고, 그 이듬해에 형이 장희빈을 두둔하다가 당쟁의 제물로 죽자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파묻혀 마침내 천문학, 지리학, 수학, 의학에 이르기까지 두루 능통했고, 서학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학자입니다.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서설}에서 비교적 편견없이 서학과 천주학을 소개한 사람입니다.
홍유한은 50세 때에 소백산 기슭로 옮겨 살았습니다. 이 때가 1775년이었는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다음에야 우리 나라 천주교 신앙을 싹트게 한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회란 모임이 권철신과 그의 제자들을 비롯한 유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과 이 벽에 의해서 최초의 가정교회가 시작된 때보다 30년 일찍부터 홍유한이 실천한 믿음의 생활은 기독교 복음이 갖는 변화의 능력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입증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홍유한이 하루는 말을 타고 길을 가는데 어느 노인이 무거운 짐을 지고 걷고 있었습니다. 노인이 가는 목적지는 험한 산을 넘는 백리 길이었습니다. 그는 얼른 말에서 내려 그 노인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묻고는 자기 대신 말에 탈것을 권했습니다. 평민출신의 그 노인은 양반인 홍유한의 호의에 대해 처음에는 장난기로 받아들였으나 이내 진심임을 알고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말에 올라탔습니다.
홍유한은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걸으면서 그 노인에게 자신의 수덕생활에 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노인은 연신 고개를 끄떡이면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목적지에 닿은 후 노인은 그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에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 홍유한이 아닌 신앙인 홍유한의 이웃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습니다.
홍유한이 살았던 시대는 신분제도가 엄격한 유교사회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진리를 깨달은 홍유한은 신분이 천한 사람으로부터 절을 받을 때, 같이 허리를 숙여 답례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동등한 존재임을 생활에 옮겼습니다.
홍유한은 자기가 판 밭이 산사태로 못쓰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그 밭을 산 사람에게 받은 돈을 되돌려보내기도 했습니다.
홍유한은 집안 살림이 넉넉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가난하여 혼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곤궁하여 자립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들은 모두가 다 그를 변화시킨 복음의 위대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홍유한의 뛰어난 인품과 진실한 신앙생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대의 대학자이며 초기 신앙인의 한 사람인 권철신은 홍유한을 흠모하고 존경하였고, 홍유한의 누님 후손인 남이관 역시 성장하면서 외가댁의 영향을 받아 열 여덟 살 때 기독교인 처녀 조증이와 결혼한 후 교회 일에 열심하다가 순교했습니다. 홍유한의 칠촌 조카인 홍낙민도 홍유한의 영향을 받아 40세 때에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자신과 아들인 홍재영, 손자인 봉주, 병주, 영주와 함께 순교 당했습니다. 이와 같이 홍유한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받아 순교한 교인은 모두 13명에 달했습니다.
홍유한의 이런 신앙적인 삶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가져다주신 복음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비록 목사도 없었고, 교회도 없었고, 예배도 없었던 때인지라, 기독교 서적 몇 권 읽고나서 개인적으로 또는 이성적으로 예수를 만난 홍유한은 큰 변화를 겪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기독교 복음이 갖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신약성서는 복음의 능력과 율법, 그리고 예수와 모세를 끊임없이 유형적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전반부 12장까지에 나오는 일곱 개의 기적과 다섯 개의 설교입니다. 이 기적과 설교는 모세가 이집트를 향해서 베푼 열 개의 재앙들과 유대인들이 최고의 성경으로 인정하는 모세오경을 유형적으로 비교한 내용입니다.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준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참 자유를 억압하는 부정적인 기능을 하고 있으나, 예수가 복음서에 남긴 말씀은 사람을 살리고 용서하고 치유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또 모세가 이집트에서 행한 열 개의 재앙들은 사람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부정적인 것인 반면, 요한복음에 실린 예수께서 행한 일곱 개의 기적들은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는 긍정적인 것들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개구리, 이, 파리 재앙이 신약시대의 완전 수인 칠에 맞추기 위해서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일곱 개의 모세의 재앙은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들과 유형적으로 비교될 수 있도록 일곱 개만 선별해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모세가 물을 피로 바꾸어 놓았다면,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무거웠던 잔칫집 분위기를 기쁨이 넘치는 분위기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둘째, 모세가 이집트인들의 모든 가축을 죽게 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면, 예수는 백부장의 아들을 살림으로써 근심 걱정에 쌓인 백부장에게 큰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셋째, 모세가 이집트인들의 몸에 독종이 나게 하여 몹시 괴롭게 하였다면, 예수는 38년 된 병자를 치유함으로써 큰 기쁨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넷째, 모세가 우박을 내리게 하여 식물에 큰 피해를 입혔다면, 예수는 풍랑을 만나 위기에 처한 제자들을 구출함으로써 큰 기쁨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다섯째, 모세가 메뚜기 떼로 식물에 큰 피해를 주었다면, 예수는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수많은 민중을 먹임으로써 큰 기쁨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모세가 흑암의 재앙을 베풀었다면, 예수는 오히려 장님의 눈을 치유함으로써 세상을 밝히 볼 수 있는 넘치는 기쁨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모세가 이집트인들의 모든 장자를 죽게 하는 재앙을 내리게 함으로써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면, 예수는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림으로써 나사로는 물론이고 온 가족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세의 율법은 억압과 정죄와 심판을 가져오지만, 예수의 말씀은 기쁨과 치유와 위로를 가져옵니다. 모세의 기적은 재앙을 가져오지만, 예수의 기적은 은혜를 가져옵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우리에게 엄청난 기쁨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져다줍니다.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이런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이런 예수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기쁨의 소식으로 오신 예수를 진심으로 맞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