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02-09-14 17:15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오신 예수[요14:6]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596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자기 정체성을 밝히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란 말씀은 그 뒤에 이어지는 후반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씀으로 보아서 예수는 인류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 하나님을 아는 진리요,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난 것은 다 사명이 있고, 목적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것은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낸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는 그 누구보다도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낸 분과 또 그분이 자기에게 맡겨준 사명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보내신(sent)"이란 말이 예수에 의해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들 말씀들을 보면, 예수는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낸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철저하게 이행코자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 했고, 5장 30절에서는 자기 원대로 일하지 않고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대로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낸 하나님의 뜻이 자기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구원을 받고(3:17), 또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기 위한 것(6:39, 44)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는 자기를 믿는 것은 곧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12:44)이며, 자기를 보는 자는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을 보는 것(12:45)이며, 자기를 영접하는 자는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13:20)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4장 6절을 통해서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주 많다고 하지만, 예수께서 먼저 걸어가신 길, 예수께서 닦아놓으신 길, 예수께서 지시하는 길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 사는 길이요, 영생하는 길이요, 밝은 길이요, 진리의 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1절에서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들"은 유대인들이 바라는 것들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찾고 있었고,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메시아가 나타나서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언자들이나 제사장들, 심지어는 천사들로부터 하나님께 나아가는 해답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the new and living way, 히 10:20)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또 "보지 못하는 것들"은 헬라인들이 보기를 원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입니다. 이 당시 헬라인들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은 하늘 위의 영원한 세계에 있는 이상적인 형상의 불완전한 모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 보이는 세계를 그림자의 세계로 구분하였습니다. 그리고 헬라인들은 이 보이는 그림자의 세계 즉 불완전한 세계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이데아의 세계 즉 참 실재의 세계로 옮겨갈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철학자들로부터 참 실재에로 나아가는 해답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실재에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만이 영생에로 인도하는 참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는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멸망으로 가는 길이 있는가하면, 영생으로 가는 길이 있고, 죽는 길이 있는가 하면, 사는 길이 있고, 어둠의 길이 있는가하면, 빛의 길이 있고, 불의한 길이 있는가하면, 의로운 길이 있고, 잘못된 길이 있는가하면, 옳은 길이 있고, 거짓된 길이 있는가하면, 진실한 길이 있습니다. 예수가 인도하는 길은 영생으로 이어지는 길이요, 빛의 길이요, 사는 길이요, 진리의 길입니다.
예수께서 인도하는 길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 내어 광야로 인도한 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길입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모세가 주는 물을 마셨어도 다시 목말랐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하셨습니다. 또 조상들이 광야에서 모세가 준 떡을 먹고도 죽었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58). 또 예수는 무리를 하나님께 인도하는 선한 목자로써 무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요 10:15). 이런 점에서 예수는 자기를 희생시켜 영생으로 가는 길이 되셨습니다.
둘째, 예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진리로 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리의 상대성과 다중 진리를 말하지만, 예수가 믿고 따랐던 진리, 예수가 밝혀준 진리를 믿고 따라야 생명을 얻고, 빛을 얻고, 자유를 얻고,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 때에 바리새인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율법의 멍에에 짓눌려 빛을 보지 못했고, 자유를 누리지 못했으며, 참 생명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께서 찾아가셔서 빛을 보게 하셨고, 자유를 누리게 하셨으며,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22절의 말씀처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죽음 속에 살고, 어둠 속에 헤매며, 자유를 속박 당한 채 살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거짓 진리에 빠져든 사람들입니다. 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차이점이 살림의 일과 죽임의 일의 차이였듯이, 참 진리와 거짓 진리와의 차이점도 살림의 일과 죽임의 일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진리는 살림의 일을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참 진리인 것은 창조주 하나님처럼 어둠에 눌린 사람에게 빛을 주셨고, 병들어 혼돈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고쳐 온전한 새 질서를 주셨고, 죽어 무덤 속에 있는 자를 살려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예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진리는 살림의 일을 합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진리는 죽임의 일을 합니다.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괴롭게 하고, 병들게 하고, 자유를 속박합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으로는 진리처럼 보이나 속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시체 썩어 가는 냄새로 악취가 가득합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은 모두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진리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報告書)라는 글을 보면, 예수 당시 유대교의 최고 권력자인 대제사장의 거동은 엄숙했지만, 외식에 가득 찬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벼슬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위해서라면 그들의 어머니라도 배신할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젊은 청년은 고귀한 열정으로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새로운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빌라도는 머지않아 로마의 종교는 예수의 종교로 대치될 것이며, 이 숭고한 관용의 종교가 로마제국을 허망하게 붕괴시킬 것 같다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친견했을 때 빌라도의 몸은 얼어붙었고, 사지는 떨렸으며, 존경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반면에 예수는 권위가 있었으며, 그의 설교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을 능가하는 단순하고도 장엄한 것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빌라도는 예수께서 분명히 아무런 죄도 없이 처형되었으며, 처형된 이후 다시 살아나 그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는 살아생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들 수 있었고, 성난 바다를 잠재울 수 있었고, 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은전을 얻어낼 수 있었던 분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백부장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자기는 진실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예수의 가르침은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고 권세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 그의 가르침과 행하시는 일을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7절을 보면,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설익고 다 된 줄로 착각하는 교만한 공대 4학년생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대는 모든 것을 아는가?"고 물었더니, "조금은 안다"고 했습니다. "10%를 아는가?"고 물었더니, "100만 분지 1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럼 그대가 모르는 99%속에 하나님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는가?"고 물었더니, 그 다음에는 "존재하는지 않는지 그것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럼 그 모른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고 물었더니, "그것도 모르겠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 우주 공간과 모든 시간과 모든 존재를 다 뒤져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철학 속에서, 비교종교 속에서, 역사 속에서, 이성과 양심 속에서, 실험관 속에서, 자연 속에서 찾아봐도 확실한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가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알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말씀과 행동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는 진리로 오셨습니다.
셋째, 예수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처럼 말하지만, 예수가 누렸던 생명, 예수가 주시는 생명을 받아 누려야 참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는 죽음을 이긴 정복자였습니다. 예수는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주(主)였습니다. 예수는 죄로 죽었든지, 병으로 죽었던지 혹은 그렇게 죽어 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는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요 1:4). 예수는 생명의 떡이었습니다(요 6:48). 예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었습니다(요 6:51). 또 예수는 생명의 빛이었습니다(요 8:12).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이자 경남 합천 해인사 방장스님인 성철 큰스님이 93년 11월 4일 오전 7시30분 방장처인 해인사 퇴설당에서 세수 81세로 임종하셨습니다. 그분이 임종 직전에 읊조렸다는 열반송을 보면,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관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이 한 마디가 바로 1944년부터 8년간 `장좌불와' 즉 잠을 잘 때도 눕지 않는 불교의 독특한 수행방법으로 고행을 했고, 1955년부터 10년 동안 대구 팔공산 성전암 토굴에서 수행하였던 놀라운 집념의 성철 큰스님이 마지막 남긴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예수의 말씀 따라 하나님을 잘 믿고 살아왔던 사도 바울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이제 이후로는 내게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도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확신에 찬 고백입니까? 이점이 바로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일 것이며, 인생을 무상하게 본 석가와 "다 이루었다"고 대 선언을 하고 죽은 예수의 차이점일 것입니다. 영원한 무의 무념에 들어간 석가와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 예수의 차이점일 것입니다.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죽기 직전에 명령을 내려 관 양쪽에 구멍을 뚫어 양손을 밖으로 내 놓게 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손을 보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했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가졌던 엄청난 소유물은 저 세상에 가면서 모두 남기고 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걸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영원한 나라를 향한 다리를 놓고 산다고 합니다. 우리는 왜 이 땅에 보내어졌습니까?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땅에 무엇을 남길 것입니까? 또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까? 금년 크리스마스에는 우리 자신의 삶의 의미를 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