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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5 23:23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명 뿐이라[고전15:19-20]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706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 말씀은 바울이 주후 56년경에 그리스에 있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주후 52년경에 바울이 동역자인 디모데와 실라, 그리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협동으로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 일행은 이 교회에서 일년 육개월간 머물렀습니다. 그 후 바울 일행은 터키에 있는 에베소로 이주해서 교회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로부터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 교회 안에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둘러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 서신의 일부가 오늘 읽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1995년 워싱톤 포스트지 송년호에 세인의 관심을 끄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지난 일천년간 인류사회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선별해서 발표했던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악한 사람으로 히틀러와 찰스 다윈이 뽑혔습니다. 다윈이 발표한 진화론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또는 힘에 의한 권력을 합리화시켰고, 신의 존재와 영의 세계 또는 사후의 세계를 부정하였으며, 인간을 영혼 없는 동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공산주의 혁명과 히틀러에 의한 600만 유대인 학살과 세계 제1,2차 대전과 같은 엄청난 폭력과 만행이 저질러지게 되었습니다.
18세기의 자연신론과 계몽주의, 19세기의 진화론과 무신론, 20세기의 세속인문주의가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준 무서운 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이생뿐이다. 죽으면 그만이다."였습니다. 이와 같은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바탕을 둔 근대산업사회가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을 갖게 해주었는지 짐작이 되십니까? "돈이면 최고다. 멋지게 한탕 하자. 진탕 먹고 마시자."였습니다.
먼 옛날 바울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한결같이 동일합니다. "내세는 없다." "이생뿐이다." "죽으면 그만이다." "먹고 마시자."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이다'는 생각은 그것에 걸맞은 생활방식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 생활방식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서 명확하게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먹고 마시자 하리라." 바울은 '이생뿐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일'에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삶은 오직 이 세상의 향락, 눈에 보이는 물질뿐이라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바울 시대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 시대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구약성서 이사야 22장 12절 이하에도 이와 유사한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날은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통곡하고 슬피 울라고 하셨다. 머리털을 밀고 상복을 몸에 두르라고 하셨다. 그런데 너희가 어떻게 하였느냐? 너희는 오히려 흥청망청 소를 잡고 양을 잡고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자'하였다." '먹고 마시자'라는 이 표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생활 태도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와 같은 삶의 태도를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고전15:14)고 반박하고, 우리의 삶이 만일 이생뿐이라면 우리는 가장 비참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피력했습니다(15:19).
만일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라면 실제로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생 외에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는 속은 것이 되고, 이생뿐임을 전제하고 살아온 사람들에 비해 우리는 마음껏 먹고 마시며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고 싶을 때마다 정작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면서 숱한 세월을 머뭇 머뭇거리며 주저하거나 죄의식을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생뿐이라면, '이생뿐이다' 라고 외치며 살았던 사람들이 결국 옳았던 것이 되고, 기독교인은 패배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고전15:17-18).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생뿐임'을 강조하는 철학이나 사상에 맞서 싸우면서 그들의 주장에 대해 강력하게 '아니오'를 외치며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생뿐임'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먹고 마시자'는 삶의 태도를 거부하고 그것들과 맞서 싸워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이생뿐이다'는 사상에 맞서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자신이 '이생뿐이다'는 사상에 세뇌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보이는 이생이 전부다'는 사상에 깊이 침투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뜻깊은 부활절 예배에 즈음해서 각자의 세계관을 점검해 보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사상은 부활이오 생명이지만, 이생뿐임을 고집 하는 사람들의 사상은 죽음이오 절망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이생뿐임을 고집 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이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아끼는 것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또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키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주는 단절의 위협을 부정하거나 그것에 분노를 느끼거나 그것과 타협하거나 그것을 수용하는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반응을 보이지만 단절 그 자체를 극복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과의 통합과 가까운 이웃과의 통합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또 다른 진정한 삶과의 통합의 시점으로 여깁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정복될 수밖에 없는 최후의 원수일 뿐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을 이길 수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망을 이길 수 있도록 축복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생 외의 다른 생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 세계관과 인생관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저 생을 전제하면서 먹고 마시는 데 열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생 외의 다른 생은 어떠한 삶일까요? 죽은 자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사는 것일까요? 바울은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다고" 말하고 나서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 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 .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전 15:40-44) 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리라고 강조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에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는 다른 상태로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와 함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자신들의 동행자가 예수인 것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예수께서 부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 현재의 모습으로 계속 사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기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현재의 모습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느냐에 좌우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측면을 떠나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생각의 패턴이나 삶의 모습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생이 전부가 아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생 이후에도 다른 모습으로 산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점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잊고 저 세상만을 바라보도록 해주기 때문은 아닙니다. 저 세상만을 강조하는 것은 이 세상만을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이행치 않고 저 세상만 바라보는 것은 직무 유기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저 세상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저 세상을 통해서 이 세상을 조명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세상이 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삶과 저 세상이 없다고 믿고 살아가는 삶은 엄청나게 차이가 있습니다. 저 세상이 없을 때에는 자신이 삶의 주인으로 인식되지만 저 세상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저 세상을 믿는 사람의 삶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에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자'는 슬로건에 자신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순간의 만족을 위해서 영생을 내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도록 해 주기 때문에 기쁜 사건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보다 고귀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기 때문에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죽으면 그만 이라는 체념과 실의 속에서 그날그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소망을 주기 때문에 뜻깊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을 이겼기 때문에 기억될 만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삶이 쓸데없는 일시적인 것들 또는 보이는 것들에다 최고의 가치를 둔 채, '죽으면 그만이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슷하게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에 귀중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의 빛으로 이 세상의 어둠의 삶을 비추어 주고, "겉 사람은 늙어가나, 속 사람은 날로 젊어지는"(고후 4:16) 축복을 경험하게 하는 복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심어준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부활의 사건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를 생산적으로, 창조적으로,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시인 구상의 [부활송]을 읽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죽어 썩은 것 같던 매화의 옛 등걸에 승리의 화관인 듯 꽃이 눈부시다. 당신 안에 생명을 둔 만물이 저렇듯 죽어도 죽지 않고 또다시 소생하고 변신함을 보느니, 당신이 몸소 부활로 증거한 우리의 부활이야 의심할 바 있으랴!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니다. 봄의 행진이 아롱진 지구의 어느 변두리에서 나는 우리의 부활로써 성취될 그날의 누리를 그리며 황홀에 취해 있다."(서중석,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라면," {기독교사상} 1996년 4월호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