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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5 23:21
그분이 홀로 서 가듯[마16:21-28]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348  
17세기 말엽 영국 국교에 맞서 설교 하다가 체포되어 12년간 토굴 속에 갇혔던 침례교 목사 죤 번연은 부인이 결혼할 때 가져온 성경책과 죠지 폭스가 쓴 {순교자}라는 책을 읽고 유명한 {천로역정}이란 신앙서적을 썼습니다. {천로역정}(天路歷程)이란 말은 '순례자의 여정'이란 뜻을 가진 Pilgrim's Progress를 한자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란 뜻입니다. {천로역정}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책이라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 책을 읽어 보셨거나 들어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고종 32년인 1895년 영국 선교사 게일 부부가 순 한글로 번역하면서부터 입니다.
이 책은 꿈 이야기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신앙 체험을 우화로서 그린 신앙서적입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소돔과 고모라성처럼 장차 망하게 될 도시를 떠나서 하늘나라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죄짐 이였습니다. 그는 이 짐을 길가에 세워진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가뿐한 몸으로 하늘나라를 향해서 걸어갔습니다. 어느 날 그리스도인은 허영의 도시에 접어들었습니다. 이 도시에서는 연중 하루도 빼지 않고 장이 섭니다. 이 장의 이름도 역시 허영입니다. 이 시장에 나오는 상품 가운데 인기 있는 품목들이 바로 돈, 지위, 명예, 권력, 승진, 색욕, 쾌락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이 시장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허영의 시장을 별탈없이 지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이 허영의 시장에서 발목이 붙잡혀 순례를 포기하는 신앙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허영의 시장을 겨우 빠져 나온 그리스도인이 이 번에는 길을 잘못 접어들어 거인 절망이 사는 의심의 성에서 사로잡혀 어둡고 악취 나는 토굴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거인 절망은 그리스도인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고 또 몹시 때렸습니다. 거인 절망은 그리스도인에게 절망적인 이야기만을 들려주었습니다. 의심의 성은 견고해서 탈출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인을 도와줄 자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토굴 속에서의 생활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차라리 목숨을 끊고 죽어 버리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정말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절망감에 빠져서 거의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에 동반자였던 희망이 그에게 이전에 거두었던 많은 승리들을 생각나게 해주었습니다. 희망이 솟았습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토요일 자정 경에 철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품속에 약속이라 부르는 열쇠가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 약속은 의심의 성에 있는 모든 문을 열고 빠져 나올 수 있는 마스터키였던 것입니다.
죤 번연의 이 이야기는 허영심과 의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근신하여 기도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누가도 죤 번연과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줍니다. 그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행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누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은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후 예수는 소외당하고 가난한 주변부 민중의 삶의 터전인 갈릴리 지방을 떠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시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여행이 세상의 명예나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붙잡혀 고문당하시고 십자가에 죽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옛적에 우리 선비들이 입신출세하기 위해서 과거길에 올랐던 그러한 여행과는 판이하게 다른 여행 이였습니다. 직업을 얻고 돈을 벌기 위한 여행이 아니 였습니다. 명예를 얻고 권세를 누리기 위한 여행이 아니 였습니다. 오히려 이 여행은 정치와 종교 지도자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 위한 것이 였습니다. 죄를 진 사람도 벌받기가 무서워 도망을 하거나 잘못이 없다고 발뺌을 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죄도 없으시고, 오히려 가난한 자를 돌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버림당한 자들의 친구가 되시며,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듣지 못했던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들려 주셨던 분인데도 불구하고 벌을 받고 죽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예수를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바라고 원했던 예수는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분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 되시는 분 이였습니다. 갈릴리 지역에서 명성을 얻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진출하시겠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의 마음은 들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머지 않아 장관이 되고 도지사가 되고 시장이 될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깊은 수심에 쌓여 걷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예루살렘을 향한 이 여행은 정말 외롭고 고독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과 군중이 함께 동행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예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명예와 지위와 권세에 눈이 어두워 들뜬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예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세 번씩이나 고난 당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시고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세 차례나 첫째 예수의 수난 예고, 둘째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 셋째 예수의 제자직에 관한 말씀이 순서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기록된 순서로 보았을 적에는 수난예고가 먼저 나오고 제자들의 무지한 행동이 뒤따라 나오지만, 사실은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수난을 예고하시고 제자직에 관한 말씀을 주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1차 수난 예고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수난을 예고하셨을 적에 베드로는 정색을 하며 그럴 수 없다고 예수의 수난을 말리다가 사단이란 책망을 듣게 됩니다. 이어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예수의 2차 수난 예고 때도 보면,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가는 길에서 누가 더 높으냐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예수께서 왕이 된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진 자리다툼이었던 것입니다. 이 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막 9:35).
예수의 3차 수난 예고 때는 더 노골적으로 높은 자리를 요구하고 나서는 제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총리와 부총리의 자리를 요구하고 나셨던 것입니다.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분통을 터뜨린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막 10:42-45).
제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출세와 성공의 장소로 생각했던 예루살렘에서,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왜 예수는 죽음을 예측하셨을까요? 왜 죽음의 길을 걸어 가셨을까요? 왜 예수께서는 성공한 갈릴리 지역과 그를 환영하고 인정해준 민중을 버리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택했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보이는 세상에 삶의 목표를 두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는 참 예루살렘 즉 새 예루살렘의 환상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인 세상의 명예나  욕망에 삶의 목표를 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 후에 오는 무한한 영광과 축복을 꿈꾸셨던 것입니다. 보이는 예루살렘에 뜻을 두지 아니하시고 영원한 예루살렘에 뜻을 두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예수와 제자들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보이는 예루살렘에 삶의 목표를 세웠고, 개인의 출세와 성공 그리고 명예와 권력에다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개인의 성공과 출세보다는 소외당하고 고통 당하는 민중들의 아픔과 상처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민중들의 구원과 행복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확신이 섰을 적에 예수는 죽음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길이 예수께서 가신 길이였습니다. 그 분이 향하여 올라가신 예루살렘은 결코 출세의 장소가 아니 였습니다. 성공의 장소도 아니 였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의 제물을 바쳐야 할 성스런 제단이었던 것입니다.
한 분 예수께서 큰 뜻을 품었을 적에 그리고 그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온 몸을 바쳐 희생하였을 적에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지난 이 천년의 기독교 역사가 웅변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큰 뜻이 실현되기까지에는 많은 유혹과 어려움이 없지 않았습니다. 제자들과 민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유혹이 있었고, 사탄의 유혹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자들과 민중을 통해서 나타나는 사탄의 유혹은 부와 명예와 권세였습니다. 민중의 뜻은 예수가 왕이 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예수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화목제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궁전에 있었고, 민중의 마음은 해방에 있었지만, 예수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세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을 했을 것입니다. 일본인 엔도 슈샤꾸가 {예수의 생애}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뜻인 사랑의 실천을 놓고 갈등하는 고뇌에찬 나이 보다 다소 늙어 보이는 젊은 청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보아집니다.
예수는 이런 엄청난 유혹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누가는 예수께서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세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큰 구원의 뜻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이 예수의 기도생활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단에게 강력한 도전을 받고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사십일 금식기도 때문이었습니다(눅 4:1-13). 예수의 수난을 말리던 베드로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따로 기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눅 9:18). 잡히시기 전 날 밤 끈질긴 삶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눅 22:41-44).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살점을 찢는 채찍을 맞으심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극복하시고 온 인류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복된 삶을 찾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은 이 천년 전 예수께서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지 아니하고, 온 인류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이 천년 전 예수의 제자들처럼 부와 명예와 권세욕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성공주의와 물량주의 같은 기복신앙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복을 기원하는 신앙으로 잘못 알고 있다면, 예수는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까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막 9:35).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막 10:43-45).
우리는 예수처럼 높은 곳에 우리의 뜻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삶의 목표를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처럼 기도로서 모든 의심과 허영과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세욕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출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받으시는 헌신의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신의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천년 전 그 때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예수는 오늘 이 시간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롭고 고독하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상 시인의 시 가운데 1974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에 발표한 [그분이 홀로서 가듯]이란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이 시를 읽어 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