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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0 15:12
말씀의 하나님[히브리서 1장 1-2절]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328  
성서에 나타난 유대교나 기독교가 세상의 다른 많은 종교들과 다른 점이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눈으로 보는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으로 듣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권의 종교들에는 신화도 있고, 여신도 있고, 우상이나 형상이 있어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도 보고, 엎드려 절도하고, 제사도 드릴 수가 있다. 그러나 성서 속에 나타난 유대교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와 같은 것들이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모습이 없다. 보이지도 않는다. 볼 수도 없다. 이런 점이 종종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특히 눈으로 보는 하나님을 찾는 이들에게 신앙적인 갈등과 혼란을 가져다주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
기독교는 눈으로 보는 감각적인 종교가 아니라 말씀의 종교이다. 성서 속에 나타난 유대교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다른 많은 종교들과 달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성서를 통해서 또는 주의 종들의 설교를 통해서 또는 고요한 마음의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1장 1절과 2절에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적고 있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말씀의 기초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다.
다른 문화권의 종교들이 사람이 만들어 낸 신화와 여신과 우상이나 형상을 가진 눈으로 보는 종교인데 반해서, 성서 속에 나타난 믿음의 조상들의 유대교나 기독교는 귀로 듣는 종교였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이런 점을 보면 성서시대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거나 볼 수가 없었던 것 같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현실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나무나 돌로 새긴 우상을 만들거나 금과 은을 입힌 송아지와 같은 동물의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절도하고 빌기도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유혹을 많이 받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어 섬겼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마음속에 들려 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시간과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다. 눈으로 보는 것에 훨씬 많은 유혹을 받는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금과 은으로 된 물질의 우상 앞에 노예가 되거나 대중문화에 쉽게 굴복되고 만다.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택했습니다}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대중문화에 침투한 사탄의 마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책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지금 사탄의 마법인 대중문화의 덫에 걸려 있어 하나님의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능력이 많고 자비하신 하나님이라도 설자리를 잃게 된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직면한 문제가 산더미처럼 크게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요즘 청소년들이 아주 사소한 일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신이상을 가져온다든지 쉽게 자살을 택하는 이유도 사탄의 마법에 걸려 있거나 내면세계가 공허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하나님과 핫라인이 설치되어 있어서 통화훈련이 되지 못한 사람, 또 평소에 하나님과의 접속을 전혀 시도하지 않는 사람은 어려운 일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모습이 보이고, 어둡고 암담한 자신의 현실만이 짚더미처럼 크게 부각되어서 해결의 의지를 상실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의혹과 회의에 자주 빠지는 신앙인은 자신의 하나님이 눈으로 보는 하나님인지, 마음의 귀로 듣는 하나님인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성서를 위대한 신앙인들의 생생한 삶의 고백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위대한 것은 그들의 신앙이 언제나 극한 환난과 고난 속에서 또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믿음의 싹을 내고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라는 말을 전 현대 그룹 회장 정주영씨가 했는데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로 이런 신념 속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다.
신구약 성경말씀을 구성하는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가 고난과 구원, 시련과 극복, 십자가와 부활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예생활과 탈출, 그리고 가나안 입성에 관한 이야기, 바벨론제국에 의한 유대왕국의 멸망과 재건, 그리고 포로 됨과 해방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사건은 성서 66권을 구성하는 세 개의 기둥들이다. 이들 사건은 모두가 절망과 파멸과 수치와 죽음의 극한 상황에 관한 내용들이다. 노예생활과 포로생활 그리고 십자가의 못 박힘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잔인한 압제자, 이집트 제국의 군대와 삶의 터전을 철저하게 파괴하며 하나님의 법궤를 안치한 예루살렘 성전까지도 약탈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바벨론 제국의 군대와 무력한 인민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잔악한 로마제국의 군대만이 보이는 암담한 현실이었다.
인간들의 전쟁은 자기 부족이나 민족 공동체가 믿는 신과 신의 전쟁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신이 참 신이요 다른 신들보다 더 강한 신으로 믿어졌다. 점령국의 신은 피점령국의 신보다 강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쓰러짐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이 쓰러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노예로서의 삶과 전쟁포로, 더욱이 성전까지 무너지고 약탈당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점령국의 태양신이나 마르뚝이나 바알과 같은 이방나라의 신들만이 크게 보이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신앙인의 좌절과 절망은 더욱 커진다. 자기가 믿었던 신이 자신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절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감속에서도 믿음의 조상들은 끝까지 야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그들의 고난과 수치스런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믿음으로 해석하고 고백했다. 여기에 이들 신앙인의 위대함이 있다. 그들은 강대한 제국의 신들의 우상 앞에서도, 그들보다 훨씬 앞선 찬란한 문화와 문명의 발달 앞에서도, 노예와 포로와 속국민의 비애와 통한 속에서도, 고문과 투옥과 죽음 앞에서도 변치 않는 신앙심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구원의 섭리를 믿었다. 그 결과 어린 소년 다윗이 구척 장신의 거구 골리앗을 무너뜨리듯 역사의 현장 속에서 그들은 기적을 창출해 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에 나타났던 강대국들의 신은 다 그들 나라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아주 작은 약소국인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지금 전 세계의 대다수 인구가 믿고 있는 신으로, 유대교, 기독교, 천주교, 또 이슬람교의 하나님으로 섬김을 받고 있다.
성경은 절망적이고 소망 없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 결국 그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를 거둔 믿음의 조상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그들의 신앙고백은 실로 우리들에게 감동적인 은혜를 준다. 그들은 성서 여기 저기에서 하나님은 절망한 이들에게 말씀의 소리로 찾아오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몇 가지 사례들을 성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람을 죽인 후 이집트에서 도망한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란 세월을 갈등과 절망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모세는 호렙산의 떨기나무에 불꽃은 있으나 나무가 타지 않는 것을 보았다. 신기하고 놀라왔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을 본 것은 아니다. 모세는 불꽃 가운데서 들려 오는 세미한 소리를 들었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1-6).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모세는 새로운 힘과 비죤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노예생활에서 그들을 구출해 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야훼종교 말살정책과 바알숭배 정책에 외롭게 대항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선지자였다. 그는 비가 내리지 아니 하는 삼 년 육 개월 동안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으로 근근히 목숨을 이어갔고, 과부의 집에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몇 방울의 기름으로 연명했다.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려 냄으로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갈멜산 정상에서 바알신과 아세라신의 선지자 850인을 상대로 외로운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보이지 아니 하고, 오히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생존에 쫓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허탈과 좌절감에 빠져 로뎀나무 아래서 단식하며 스스로 죽기를 자청했다. 그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광야로 몰아 호렙산으로 가게 하셨고, 그곳에서 비로소 엘리야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엘리야가 하나님을 본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였으나 강풍 가운데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으나 지진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었으나 불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지난 후에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를 부르셨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 11-14).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엘리야는 새 힘과 용기를 얻고 다시금 일어섰다.
욥은 재산과 가족을 다 잃고, 몸에 난 악창으로 잿더미에 나 앉아 기와로 자신의 몸을 긁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도 그를 배신했다. 그의 친구들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며 욥의 숨겨진 죄악을 추궁하며 그의 불행의 원인을 캐고자 했다. 이 때 욥은 몹시 참담함을 느꼈다.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회의로 가득 찼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냥꾼에게 쫓기는 짐승처럼 함정으로 몰아간다고 원망했다(욥 10:16). 욥은 그가 하나님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앞에 다가서서 왜 악한 자가 세상에서 잘 살며 불의와 부정함이 세상에서 승리를 거두는지를 물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 하시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 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라며 탄식했다. 이 때 하나님은 폭풍 속에서 욥에게 나타나셨다. 물론 욥이 하나님을 본 것은 아니다. 욥은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하라"(욥 38:1-3).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욥은 새 힘과 용기를 얻어 새로운 출발을 했고 전에 가진 재산의 두 배를 모으는 거부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그 분을 만나 볼 수가 있고, 믿음의 귀로 그 분의 정다운 음성을 들을 수가 있다. 우리가 그 분을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분은 멀리 계시지 않다. 그 분은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계신다. 단지 그 분은 우리 뒤에 계실 뿐이다. 그 분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람은 그 분과 사귈 수가 있고, 그 분의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다. 믿음으로 우리는 성서에 나타난 믿음의 조상들처럼 성공적인 삶을 살수가 있다.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를 홀로 어려움을 겪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 분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며 인도해 주신다. '발자국'이란 저자 미상의 영문으로 된 시가 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나는 한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해변을 따라 걷고 있었고, 나의 생애에 대한 장면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번뜩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 장면마다, 나는 모래 위에 새겨진 두 사람의 발자국들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나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나의 생애에 대한 마지막 장면들이 나의 앞에 번뜩이었을 때, 나는 모래 위에 새겨진 발자국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지나온 생애의 발자취에서 여러 차례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또 그와 같은 일이 나의 생애에 몹시 지치고 슬픈 때에 일어났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일이 나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점에 대해서 주님에게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일단 결심하면, 끝까지 나와 함께 걷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생애에 가장 힘들었던 때에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할 그 때에, 왜 당신은 저를 떠나야 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자녀여, 나는 너를 사랑하며, 너의 시련과 고난의 때에 결단코 너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네가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을 본 그 때에 나는 너를 안아서 운반하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