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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22 22:28
십자가의 삶의 방식[고린도후서 5장 17-21절]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652  
앞에서 '십자가와 신앙'이란 주제로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십자가와 삶의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우리 인간들이 발전시킨 모든 학문이나 종교는 인간의 문제와 그 원인을 규명하고 또 해답을 찾는 일에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해답을 찾는 방법과 출발점은 비록 다르지만 그 모든 것들이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는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인간의 행복한 삶에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 참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일과 관련된다.
우리가 열거할 수 있는 모든 학문의 분야, 즉 인문, 사회,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모든 분야가 인간의 복된 삶을 약속하는 유토피아 건설과 관련된다고 본다. 분야는 다르지만 종교가 추구하는 역할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삶 자체를 고통이라고 해서 인생팔고(人生八苦)와 백팔번뇌(百八煩惱)를 말한다. 4고(四苦), 즉 생(生)·노(老)·병(病)·사(死)에,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고통인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수와 만나는 고통인 원증회고(怨憎會苦),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고통인 구불득고(求不得苦), 그리고 오온(五蘊), 즉 나를 구성하고 있는 색(色/육체)·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가 너무 치성(熾盛)한 고통인 오온성고(五蘊盛苦) 즉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더하여 8고라고 한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불교가 추구하는 구원일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사람의 온갖 고통과 번뇌의 원인을 욕심과 집착에서 찾는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괴롭고, 삼라현상은 인연으로 모였을 뿐, 헛된 것이며, 만유는 그 실체가 없으므로 무상한 것이요, 온갖 것이 다 헛되어 실재가 없으므로 나와 나의 소유가 없는 이치를 터득하여 욕심을 버릴 때 인간은 비로소 구원된다고 본다.
유교에서는 인간의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에서 찾는다. 이를 칠정이라고 하는 데, 칠정이란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과 수치와 더러움과 욕심을 말한다. 이 칠정을 억제하고 불쌍하고 가련히 여기는 측은지심, 자기의 옳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수오지심, 사양할 줄 아는 사양지심, 그리고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시비지심을 가질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답게 된다라는 사단을 말한다.
공자(孔子)는 어느 날 제자인 자로(子路)가 곁에 있는 줄도 모르고 배고프다는 말을 문득 함으로써 평생을 후회했다고 한다. 도학자(道學子) 김굉필(金宏弼)이 어머니에게 드리고자 정성 들여 말린 굴비를 고양이가 물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 곁에 제자인 조광조(趙光祖)가 있는 줄을 깜박 잊고 화를 내며 고양이를 꾸짖었다. 그 때 조광조(趙光祖)는 성색을 드러낸 스승의 잘못을 직언 했고 김굉필(金宏弼)도 제자에게 그것을 사과하고 있다. 이처럼 유교에서는 배고프다는 기본적인 인간 본능이나 희비애노(喜悲哀怒) 같은 기본적인 인간의 성색마저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다. 인간의 본능이나 욕망이나 성색을 자신의 정신적 역량으로 억제하거나 조절할 수 없는 미숙한 인간에게 그것을 규제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육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고통과 고난의 원인을 죄에서 찾는다. 죄의 원인을 관계의 단절 또는 불편에서 찾는다. 하나님과 인간이 단절되고, 인간과 인간이 단절되고, 인간과 자연이 단절될 때 죄악이 발생된다고 성서는 말한다. 그 반대로 하나님과 인간이,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결속하고 연대할 때 구원의 축복이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연대하고 이웃과 연대하고 자연과 연대하는 관계개선, 관계회복, 또는 해원상생(解寃相生)에서 오는 축복을 두고 말한다. 그러나 이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주권이 확립된 나라에서 누리게 될 미래적인 것이기에 기독교의 선교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혹은 우리의 삶 속에 앞당겨 끌어오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미래에 나타날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말한다. 그러나 이 나라는 교회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미 이 지상에 세워졌고, 불완전하고 미완성이긴 하지만 점차 그 완성을 향해서 한 거름씩 전진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교회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된 삶을 미리 맛보고 체험하고 누리는 신앙 공동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침례 또는 세례의 때에 신앙인의 삶 속에 시작되었고, 체험되고 있으며, 점진적으로 그 완성을 향해서 전진하고 있다.
인간의 조상 아담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함으로서 수치감과 소외감과, 불안과 초조와 죄의식을 경험하게 된다. 또 아담과 이브는 서로 책임을 회피함으로서 서로 불화와 반목하게 된다. 또 자연은 인간들에게 그들의 수탈의 결과로 생명나무 보다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냄으로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불편하게 발전된다.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불화와 반목으로 인한 수치와 소외(疏外)와 거리감(疏遠) 즉 관계의 단절을 말한다. 이를 성서는 "원수"된 관계라고 말하고 있고, 그 반대의 개념인 구원을 "화목"된 관계라고 말한다. 죄는 또한 원수된 관계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죄악들을 말하고, 구원은 화목된 관계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축복과 즐거움을 말한다. 여러 가지 축복이라 함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보호, 나눔과 같은 것을 말하고, 여러 가지 죄악이라 함은 우상숭배, 마술, 음행, 추행, 방탕,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사치와 낭비, 착취, 파괴, 훼손과 같은 것이라고 성서는 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침례 또는 세례서약을 통해서 하나님과 약속관계를 맺게되고, 부부는 결혼서약을 통해서 계약관계를 맺게되고, 자연인으로서 모든 인류는 사회계약을 통해서 인간관계, 국가사회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맺게 된다. 따라서 모든 관계는 신뢰와 책임과 약속의 지킴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렇지 못했을 때에 불행이 찾아온다. 침례 또는 세례서약이 깨지고, 혼인서약이 깨지고, 사회계약도 깨지면 인간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미쳐 돌게 된다. 오늘의 왜곡된 현상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신뢰성과 책임성의 회복 즉 관계성의 회복에서 찾고 있고, 또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이웃과의 관계회복, 자연과의 관계회복은 우리 인간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며, 하나님은 이들 삼각관계의 회복을 해결하는 방안으로서 십자가의 자기부정과 희생의 정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교훈 하셨다.
십자가의 정신은 좁게는 나 자신과 가정의 행복과 넓게는 이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기독교적인 방법을 말한다. 성서는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상태를 원수된 관계라 말하고, 구원받은 인간의 상태를 화목된 관계라고 말한다. 이 원수된 관계를 화목된 관계로 전환시키신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십자가의 방법이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범죄로 인한 진노를 푸시고 원수된 죄인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로 친히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화목제물로 삼으셨다. 화목제물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신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인간이 마련한 희생제물을 뜻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화목제물은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벌하기보다는 오히려 먼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자기부정과 희생의 정신을 말한다.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공동체의 평화, 더 나가서는 모든 인류가 더불어 함께 사는 지구촌의 평화를 앞당겨 올 수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며 누릴 수 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후 5:17-20).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과 병들어 신음하는 자연만물과의 사이에서 이 십자가의 정신 또는 아가폐적인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디딤돌이 되고 빛과 소금이 되는 맡겨진 화목의 직책을 잘 수행해 나갈 때, 하나님이 피조물 안에, 피조물이 하나님 안에 있는 임마누엘의 현실, 즉 하나님이 죽고 없는 것 같은 이 악한 세상에, 하나님이 계신 현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이 뒤집혀진 세상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현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정의의 나라, 의와 평강이 하수같이 흐르는 하나님의 나라를 조금씩 앞당겨 올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람들은 자기 감정의 표출로서 묶은 자가 풀어야 한다는 뜻의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말은 원한을 풀고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는 해원상생(解怨相生)이나 하나님의 삶의 방법인 화목제물에 철저하게 대립되는 용어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인간들에게 보여주신 삶의 자세는 자기 낮춤과 자기 비움의 행위였다. 그분은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어 주기까지 희생하심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보여 주셨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우리 모두의 거듭되는 훈련과 노력으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현실로 나타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세계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정의의 나라이다. 성서는 이 나라가 미래에 나타날 것으로 약속하고 있지만, 이 약속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상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믿음의 소유자는 몹시 불완전한 모습이긴 하지만 자신의 마음과 가정과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간다. 인간은 죄성으로 가득한 육체를 소유하고 살기 때문에 쉽게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날마다 죄성을 죽이고 영성을 살려 가는 노력하는 사람과 가정과 공동체에 하나님의 나라는 가깝게 다가온다. 신학자 몰트만은, 이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 속에 드러나 있고 또 약속되어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에, 이 세계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자신을 언제나 새롭게 변화시키고 변혁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과 변혁의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약속된 미래의 축복은 하루하루의 성실한 삶을 통해서 언제나 미리 맛보아 지고 체험되어 져야 할 것이다. 예수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이와 같이 자기를 비우고 날마다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행실을 따라가는 것이 행복한 삶의 고귀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가르쳐 주신 행복한 삶의 방식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식이다. 이 삶의 방식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아가페의 사랑,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가는 삶의 방식이며, 하나님께서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삶의 방식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