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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30 11:10
대중문화와 그리스도인[마태복음 5장 13-16절]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499  

 사막 한 복판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나무 밑에는 샘물이 솟고 있었다. 뜨거운 사막 한 복판에 있는 그 샘물은 말 그대로 생명수였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나무 아래에 와서 쉬면서 샘물로 목을 축이곤 했다. 그런데 그 샘물은 돈을 받고 샘물을 파는 임자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샘터를 돌아보던 주인은 그 커다란 나무가 물을 흠뻑 머금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슬인 줄 모르는 주인은 생각했다. '만약 나무를 없애 버린다면, 나무가 머금고 있는 물도 모두 샘에 고일 것이고 그러면 장사도 그만큼 잘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주인은 나무를 베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그 샘물은 며칠 지나지 않아 말라 버리고 말았다. 햇볕을 가려 주고 모래바람을 막아 주던 나무가 없어진 샘에서 물이 솟을 까닭이 없었다. 더 많은 물과 더 많은 돈을 욕심 냈던 것이 결국 모두를 잃게 하고 만 것이다.
오늘의 대중문화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것이 사막 같은 인간의 삶 속에서 그늘이 되고 피난처가 되신 하나님을 제거해 버린 대중문화의 현주소가 아닐까?
인간은 동물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인간에게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사회성이 있다. 짐승이라고 해서 지능이 없거나 감정이 없거나 의지가 없거나 사회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동물에게는 인간에게 있는 이성이나 지성의 산물인 학문이나 과학의 발전이 없고, 감성의 산물인 고차원의 종교나 예술의 표현이 없다. 이성에 통제된 또는 절제된 의지도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인간의 사회활동의 산물인 독특한 문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많은 동물들은 선천적으로 사회성을 갖고 있다. 나면서부터 소속 공동체의 사회환경에 예속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고, 그 속에서 배우고, 그 속에서 일하고, 그 속에서 죽는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살면서 그들 나름의 질서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동물에게는 문화라는 것이 없다. 오직 인간만이 문화를 형성하고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문화에는 배움과 축적과 전승의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모든 문화는 이 세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진행이 된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문화를 배우고, 배운 것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것을 가미하여 축적하고, 축적한 것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다. 이와 같은 과정은 다른 동물에서도 어느 정도 발견이 된다. 그러나 타고난 본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결과를 문화라고 하지는 않는다. 창조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독특한 지성과 감성과 의지, 특히 문화를 창조하고, 또 그것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성은 하나님께서 오직 인간에게만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선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도 동물적인 본능이 동전의 다른 면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그렇다고 동물적인 본능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본능은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선물이오,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는 이 본능을 통제할 수 있는 이성이 있다는 점인데, 이성조차도 올바른 교양을 쌓지 못하면 오히려 저질 문화, 타락문화를 양성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만찬'을 제작하면서 많은 고심을 했다.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예수와 가롯 유다의 모델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수의 모델로 피에트로 반디네리라는 한 성가대원을 발견해 작품을 시작했다. 피에트로는 예수의 모델이 된 후, 로마로 음악 공부를 하러가서 나쁜 친구의 꼬임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편 예수의 모델을 구해 작품 완성에 큰 성과를 보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마지막 단계에 들어 장벽에 부딪쳤다.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의 얼굴을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다빈치는 마침내 모델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모델은 다름 아닌 예수의 모델이 되었던 피에트로였다. 같은 인간이면서도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예수도 되고 유다도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도 교양의 정도에 따라서 짐승 같은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천사 같은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이성이란 선천적인 인간본질의 덕성이기보다는 후천적인 교육에 의해서 교육된다고 볼 때, 18세기에 시작된 자연신론과 계몽주의, 19세기의 진화론, 20세기의 실용주의 철학과 세속인문주의가 주도한 대중문화와 학교교육은 실로 오늘의 문화를 저질문화로 이끌어온 맥이오 정신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들 정신이 지난 200여 년을 주도해온 교육계의 정신이다.
신상언의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 라는 책의 내용을 빌리지 않더라도, 대중문화의 타락상이나 그 위력에 대해서는 대부분 감지하고 있는 줄 안다. "사탄이 대중문화 속에 죽음의 메시지를 집어넣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어둠의 세계로 몰아간다"는 증거는 도처에 깔려 있다. 록음악 속에도 있고, 음란소설이나 만화 속에도 있고, 영화와 비디오 테이프 속에도 있다.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오락물을 비롯해서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향락문화 속에 타락을 재촉하는 메시지들이 넘쳐나게 담겨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신상언의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여기서의 주제는 타락문화의 내용을 소개하는데 있지 아니하고, 이런 대중문화를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인가?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적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동지로 보아야 할 것인가? 구제 불가능한 환자로 보아야 할 것인가, 치료 가능한 환자로 보아야 할 것인가?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느끼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기운 속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없는 대중문화 과연 구원의 대상인가, 소돔과 고모라성처럼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할 대상인가?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표현양식" 이라고 말했다. 우리 문화 역시 종교의 표현양식을 빌어 축적되어 왔고, 무교와 불교 그리고 유교가 우리 문화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 우리 문화는 무교문화 위에 불교와 유교문화가 오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습득되고 축적되어 전승된 혼합문화를 이루고 있다. 이 문화적 텃밭에 이미 200여 년 전부터 기독교의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가꾸어져 왔다. 그런데 이 복음의 씨가 성장은 쑥쑥 잘되고 있는데, 알곡보다는 쭉정이가 많아 결실이 많지 않다. 오랜 역사 속에서 축적된 전통문화 위에서 기독교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독특한 기독교문화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가 짧아서인지, 아니면 복음이 왜곡 되이 전달되어서 인지는 몰라도 우리 나라에는 아직도 이렇다할 기독교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 기독교의 복음이 한국의 문화 속에 깊숙이 침투되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기독교인 인구는 많아도 기독교 문화, 기독교 정신, 기독교 복음이 사회 속에 침투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기독교인들이 기복신앙이나 물량주의에 치우쳐 복음의 깊은 뜻과 정신을 습득하지 못하고 이를 또 축적시키지 못하고 전달하지 못한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이다.
문화신학자인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는 "하나님은 문화를 초월한 존재이시나 문화를 자기와 인간 상호관계의 매개체로 사용하고 계신 분"으로 이해했다. 이 말은 창조신앙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신앙인들은 세속문화의 어두운 부분을 밝은 빛에로 이끌어내고, 혼돈된 부분을 바로 잡아 주고, 죽어 있거나 죽어 가는 부분을 삶의 부분으로 또는 생명에로 이끌어 내는 즉 그것을 정죄하기 보다는 창조적으로 변혁시켜 가는 주역들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재창조의 정신이 강조될 때이다. 하나님은 혼돈과 흑암에 쌓인 세계를 빛과 질서의 세계로 창조하셨고, 멀지 않은 장래에 현재의 타락한 세계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우리 죽을 목숨도, 죄로 인해서 타락해 버린 우리의 몸도, 새롭고 영화로운 몸으로 덧입혀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새롭게 하셨고 거듭나게 하셨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이 추하고 더러운 세상에 보내셨다. 하나님의 삶의 방식은 버리거나 정죄하거나 징계하거나 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고, 고치게 하시는 창조적 삶의 방식이다.
니버는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저술에서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정리하였다.
첫째, 문화에 대한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태도이다. 세속문화를 기독교의 적으로 생각하는 태도이다. 둘째, 서구문화를 기독교문화와 동일시하는 태도이다. 서구문화를 기독교문화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자연법을 통하여 문화를 창달하고 발전시켜 간다는 유토피아적인 태도이다. 넷째, 기독교와 문화를 대립 또는 긴장관계로 보는 태도이다. 다섯째, 복음으로 문화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태도이다.
문화에 대한 이런 다양한 입장과 태도 가운데 가장 성서적인 태도가 무엇일까? 아마도 다섯 번째인 복음으로 문화를 변혁시켜 나가야 한다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은, 그것이 비록 현재는 타락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잘못된 것을 징계하거나 멸망시키지 않고, 새롭게 고쳐 나가기를 원하신다. 흑암을 빛으로, 혼돈을 질서로, 죽음을 생명에로 바꾸어 나가기를 원하신다. 타락을 회복으로, 죄를 용서로, 멸망을 구원으로 바꾸어 놓기를 원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태도에서 볼 때, 비록 세상문화가 타락문화라 할지라도, 이를 적대적인 감정으로 보거나, 기독교문화로 착각하거나, 대립관계로 보기보다는 부패된 곳에 소금을 뿌려주고, 음침한 곳에 빛을 비추어 줌으로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로 잡아가는 자세가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일 것이다. 세속문화를 정죄하기 보다는 창조적으로 변혁시켜 가는 재창조의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될 때이다. 복음의 씨란 결국 대중문화가 됐던 타락문화가 됐던 문화라는 텃밭에 뿌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적이 될 수도 그렇다고 동반자도 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