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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0 14:59
헌신과 사랑(1) [빌립보서 2장 1-8절]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154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한다. 사랑은 기독교의 상표와 같은 것이다. 사랑 중에서도 아가페의 사랑이 기독교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이다. 아가페의 사랑은 헌신적인 사랑, 조건 없는 사랑, 먼저 사랑, 또는 내리 사랑을 말한다.
사랑에는 적어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사랑은 '만약에' 사랑이다. 이 사랑은 조건부 사랑을 말한다. "내 소원을 다 들어주신다면 당신을 위해 몸바쳐 헌신하겠습니다." "혼수품이나 지참금을 많이 가져와야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학벌이 높고 재산이 많다면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이런 조건부적인 사랑이 아마 가장 흔한 사랑일 것이다. 조건 없이 먼저 주는 사랑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보고 나서 또는 받고 나서 주겠다는 식의 사랑이다.
두 번째 사랑은 '때문에'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기의 사랑을 주고자 하는 사람의 인물, 직업, 학벌, 또는 재산 때문에 주는 사랑이다. "그가 멋지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녀가 미인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가 잘해 주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런 보답적인 사랑 역시 흔해 빠진 사랑이다. 조건 없이 먼저 주는 사랑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받았기 때문에 준다는 식의 사랑이다. 사람들은 주는데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려 하기보다는 받음으로써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려 든다.
세 번째 사랑은 '불구하고' 사랑이다. 이 사랑은 '만약에' 식의 사랑이나 '때문에' 식의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불구하고'의 사랑은 어떤 조건이나 보답으로 주는 사랑이 아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인물, 직업, 학벌, 또는 재산에 관계없이 먼저 주는 사랑이다. 이 사랑이 헌신적인 사랑, 조건 없는 사랑, 먼저 사랑, 또는 내리 사랑이다. 이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끊임없는 배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못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구하고' 식의 사랑이다.
그런데 이 조건 없는 사랑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은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다. 성경말씀에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요 15:13)고 하셨다. 이 사랑 즉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바로 헌신이다. 헌신이란 '몸을 바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서 조건 없이 목숨을 바친 분이 계신다. 우리의 끊임없는 배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못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분이 계신다. 그분이 바로 예수이시다.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그분이 우리를 헌신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으시면서 까지 죽어야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셨다. 엄청난 아픔과 희생을 치르면서 저주받아야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셨다. 로마서 5장 8절처럼 우리를 대신해서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이 하나님의 삶의 방식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헌신적인 사랑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인간으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의 방식을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인간들에게 보여 주셨다.
참 사랑은 헌신적인 사랑이다. 헌신 없는 사랑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참 사랑은 희생과 아픔과 수고를 동반한다. 하나님은 조건없이 우리의 죄와 배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짐을 외아들 예수에게 지우시고 우리가 매달려야 할 죽음의 형틀에 매달리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반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축복과 생명을 주셨고, 아무 죄 없는 외아들 예수에게는 저주와 버림을 당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저주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축복과 생명을 주시고, 외아들을 저주받아 죽게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몫을 자기가 취하는 대신 자기의 몫, 곧 축복과 생명을 인간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심으로 인간을 높이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신이다. 예수의 희생과 죽음 때문에 우리는 살고 새 소망을 얻었다.
빌립보서 2장 1-8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인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헌신적인 사랑의 방법을 가장 잘 요약해 주고 있다.
빌립보서 2장 6-7절은 예수의 포기에 대해서 8절은 예수의 낮추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랑은 무엇인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대의 명분을 위해서 포기하는 것이며, 높은 신분을 버리고 보통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기 낮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셨던 예수는 자신의 신분과 자율성 그리고 특권을 모두 버리고 인간이 되었다. 예수는 또한 죄인과 창녀의 친구로써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하셨다. 예수께서 포기하셨던 것들을 정리해 보겠다.
첫째, 예수는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신분을 버리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되었다."고 성서는 말한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되기를 포기하시고, 오히려 종의 신분으로 자신을 비우셨다. 그는 세상에 수난의 종으로 내려 오셨다(마 20: 28). 그는 사랑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 사랑을 십자가의 형틀에서 승화시켰다.
자신의 신분을 버리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되셨다. 인간이 되신 예수는 선생으로서 신분도 포기한 채 그의 제자들에게 섬기는 종으로서의 모범을 보이셨다. 잡히시기 전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하셨다. 이 때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셨다."고 성서는 말한다(요 13:4-5).
이는 겸손한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일이다. 예수는 겸손의 본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우리가 피차 겸손하기를 힘쓴다면, 서로를 존경할 수가 있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겸손에서 시작된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낮추는 일은 몸을 바치는 일과 같기 때문에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빌립보서 2장 1-4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둘째, 예수는 자신의 자율성을 포기하셨다. 예수는 자신의 가진 선택권도 포기하셨다. 무슨 일이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면서도 겸손히 기도하시기를,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라고 하셨다. 스스로 피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쓰디쓴 고난의 잔을 택하시고 도살자 앞에 어린양같이 잠잠히 순종하셨다. 이사야서 53장 7-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러 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러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이는 오직 순종의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일이다. 예수의 순종은 전 인류를 구원하기에 족한 은혜를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에게 가져다 주셨다. 성서는 말하기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하였다. 또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롬 5:17)라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예수의 순종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가 서로 순종하기를 힘쓴다면, 우리는 보다 유쾌하고 화목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순종에서 성장된다. 자기를 죽이고 남에게 순종하는 일은 몸을 바치는 일과 같기 때문에 헌신이다.
셋째, 예수는 그의 특권을 버리셨다. 예수는 우리 인간들이 당하는 인생고를 친히 체험하시기 위해서 사탄의 시험도 받으시고 죽음도 맛보셨다. 성서는 예수를 잠깐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고 하였고, " . . .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히 2:14-15) 주시려 함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히 2:18)고 하셨다.
이는 예수의 협동과 참여의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다. 예수는 우리들에게 협동과 참여의 정신을 보여 주셨다. 무엇보다도 낮은 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셨고, 그들의 어려움에 동참하셨다. 예수는 당대의 지도층과 친분을 맺기보다는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멸시 당하는 자들을 돌보셨다. 그들의 삶에 협동하셨고 그들의 고난에 참여하셨다. 심지어 인간들이 겪는 죽음의 고통에까지 참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사랑은 협동과 참여를 통해서 열매를 맺는다. 자기의 특권을 포기하고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멸시 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협동하며 그들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은 몸을 바치는 것과 같기 때문에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이와 같이 자신을 포기하고 남과 동등 됨을 스스로 취하는 것이며, 겸손과 순종의 마음으로 남의 일에 참여하고 협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사랑은 헌신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헌신을 요구하고, 헌신은 사랑을 불러 드린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고, 먹고 입고 쓰는 일에 지극히 검소했으며, 가난한 이웃과 자선기관을 돕는 일에 후덕했으며, 지극히 평범한 이웃으로 살다가 1995년 10월에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아그네스 플럼브란 할머니가 계셨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800억 원의 유산을 남기고 죽었다면 어떤가? 그것도 740억 원은 장애인과 빈곤 어린이들을 위해서 써달라고 의과대학과 자선 및 의료기관에 기부했고, 나머지 60억 원은 그 동안 할머니를 보살펴준 이웃의 4가족에게 15억씩 나누어주었다. 할머니는 아침식사용 시리얼을 만드는 켈로그사의 주식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던 것이다. 이 엄청난 재산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평생동안 이웃과 지극히 평범하게 살면서 신분도 버렸고, 특권도 버렸고, 재산도 버렸다. 아무도 그녀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지 못했다. 그녀의 이웃에 대한 지극한 배려와 관심을 두고 헌신적인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이웃들도 마찬가지이다. 의지할 곳 없는 이웃의 한 평범한 할머니에게 베풀었던 그들의 작은 희생적인 사랑이 값지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그들의 선행 때문에 뜻하지 않은 큰돈을 소유하게 되었다.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란 책에서 행복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헌신을 촉구했다. 헌신은 노력과 수고가 따른다. 바울 사도도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사랑의 수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4장 7-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나신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수고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본을 보이신 헌신적인 사랑의 표본이었다. 헌신적인 사랑은 자기를 포기하고 남과 동등 됨을 취하는 것이며, 겸손과 순종과 협동과 참여의 정신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는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