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06-03-13 14:02
출애굽기01: 민족을 살린 산파의 믿음(출 1:1-22)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535  

1. 민족을 살린 산파의 믿음(1:1-22)

출애굽기 11-5절은 애굽에 이주한 야곱의 후손들의 이름을 상기시켜줌으로써 창세기가 출애굽기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6절은 이들 주인공들이 애굽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7절은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복을 받았는지를 압축해서 말해 주고 있다.

창세기가 족장중심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술했다면, 출애굽기는 선민중심, 또는 민족중심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믿음의 족장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진 족장중심의 구원의 역사가 창세기의 핵심이라면, 야곱의 열두 아들들로 시작된 열 두 부족들의 형성과 또 이들 부족들의 연합으로 형성된 이스라엘 민족중심의 구원의 역사가 출애굽기의 핵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 개인에서 출발하여 가족으로 확대되고, 더 나아가 민족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장차 온 인류에로 확대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개인의 야훼신앙이 가족과 부족의 신앙으로 발전되고, 더 나아가서는 유대교라는 독특한 민족 또는 국가의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이 점차 확대되고 발전되어 기독교라는 전 인류의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주후 392년부터는 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우리의 신앙은 미미하지만, 나중은 창대하게 될 것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비전이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출애굽기 1장 8-14절은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급증하게 되자, 이를 두려워한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과 또 이를 시기하고 두려워하는 무리로부터 탄압을 당하는 이중적인 면을 보게 된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영적인 싸움인지도 모른다. 이런 싸움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황해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궁극적인 승리에서 보듯이 이 싸움의 결국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과 그의 백성들의 승리로 결판이 나있기 때문이다. 잠시 잠깐의 고난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 자격 또한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될 때일수록 더욱 조심하고 몸을 낮춰 불필요한 오해나 고난을 겪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 115-22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수적인 증가를 막기 위한 가혹한 노동 착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번성하자,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더욱 악랄한 정책을 펼침으로써 악마의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바로는 중노동을 통한 출산억제정책이 실패하자, 산파를 통한 이스라엘 신생 남아들의 살해를 꾀한 것이다(15-16). 그러나 그 계획마저 바로 왕보다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 산파들의 불복종으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가자(17-21), 바로는 애굽 전역에 걸친 공개적이고도 무자비한 히브리인 신생 남아 살육정책을 펼친다. 이 같이 악랄한 바로의 학대정치 하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좌절하고 낙담하며 고통 중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었으며, 오직 한 가닥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만 기대할 뿐이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 중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낼 인도자를 세우셨다. 이 분이 그 위대한 모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반드시 알아야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멀지 아니한 것처럼, 고통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멀지 않다는 사실이다. 고난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긴장도가 높아지고, 나타나는 권능의 역사도 놀랍도록 큰 법이다.

출애굽기 1장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한 가지는 히브리 산파들의 용기이다. 그들은 하늘을 찌르는 준엄한 바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 신생 남아들을 죽이지 아니하고 살려줬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후손이 끊어지는 민족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 산파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크게 복을 받을 수 있었다.

1900년대 전반에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로 인해서 크게 고통을 받을 때 유관순을 비롯한 많은 여성들이 용기 있는 행동으로 바닥으로 떨어진 한민족의 자존심을 높여 놓은 것처럼, 히브리 산파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 때문에 십브라와 부아인 그들의 이름이 출애굽기에 남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십브라와 부아는 히브리인 산파들을 통솔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후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길이 칭송받을만한 일이었으며, 본받을만한 일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한양심을 소유했다. 그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그들은 옳은 판단을 했다. 그들은 정치권에 아부하지 않았다. 이런 점들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것이다. 출애굽기 1장의 히브리인 산파들의 이야기는 기독교윤리학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지는 부분이다. 문제의 핵심은 그들이 국가의 준엄한 명령을 어겼고, 바로를 속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래도 가()한가라는 것이다. 이 히브리인 산파들이 옳았는가, 아니면 크게 잘못했는가를 놓고 윤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의견으로 나뉘고 있다. 그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첫째,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공리주의자들이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 어떠했든지 상관이 없다는 식이다. 이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히브리인 산파들의 거짓말과 행동은 목적이 좋았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1,800만 명을 학살한 스탈린의 행위나 600만 명을 학살한 히틀러의 행위들은 아무리 목적이 좋았다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규범이나 법보다는 사랑이 더 중요한 잣대라고 보는 상황주의자들이다. 본래적으로 선한 것은 사랑뿐이기 때문에 사랑을 위한 행위는 그 어떤 것이라도 선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히브리인 산파들의 거짓말과 행동은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끔찍한 일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안락사나 동반자살과 같은 것이다.

셋째, 어떤 경우에도 법을 어기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절대주의자들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만을 말해야한다는 율법주의자들인 셈이다. 이런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히브리인 산파들을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악의를 품고 있는 살인자나 잔악한 박해자나 적군에게조차 진실만을 말해야한다면, 무고한 생명의 목숨들이 처참하게 아침이슬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상충적 절대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부득이한 경우, 그러니까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덜 나쁜 쪽의 행동을 하되 그 행동이 어떤 행동인가를 반드시 깨닫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부득이한 선택이 과연 죄가 되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차등적 절대주의라는 것이 있다. 높은 차원의 도덕적 의무가 있는가하면, 낮은 차원의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의무란 것이다. 그리고 더 높은 차원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낮은 차원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차등적 절대주의에 입장에서 볼 때, 히브리인 산파들의 행동은 보다 높은 차원의 의무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할 필요가 없음은 물론이고, 20-21절을 보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그들의 집이 왕성케 되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해졌다고 했다.

이 차등적 절대주의 입장을 가장 잘 표현해준 사람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조카이자 우리나라 최초로 기독교변증서인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작성한 정하상이다. 이 사람이 재상에게 적어 바친 <상재상서>에 다음과 같은 신앙이 고백되고 있다.

지위에는 높낮음이 있고 일에는 중하고 가벼운 것이 있으니 집안의 아비가 가장 중하나 집안의 아비보다 높은 이가 나라의 임금이요, 나라 안에서 임금이 가장 중하나 나라의 임금보다 더 높은 이는 천지의 큰 임금입니다. 집안의 아비의 명을 듣고 나라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아니 하면 그 죄가 무겁습니다. 나라 임금의 명령을 듣고 천지대군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면 그 죄는 더욱 커 비할 데가 없다. 그러므로 천주를 받들어 섬김이 임금의 명령을 일부러 어기려는 것이 아니요 부득이 한데서 오는 것인데 이것을 들어 부모와 임금을 업신여긴다 함이 옳은 말이옵니까?

정하상의 이 고백에서 보듯이 나라의 임금보다 더 높은 천지의 큰 임금의 명령을 따른 것이 히브리인 산파들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옳은 판단과 용기 있는 행동이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할 수 있었다.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남녀의 구별을 떠나서, 지식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 외모를 보시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동하는 자들이 복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