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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7-01 11:20
창세기 024: 하나님의 횃불언약(창 15:1-21)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7,265  
창세기 024: 하나님의 횃불언약(창 15:1-21)

창세기 15장의 내용은 네 개의 단원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5절은 후사에 대한 약속이고, 6-11절은 언약체결을 위한 준비이며, 12-16절은 아브람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고, 17-21절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가나안 영토에 대한 예언입니다.
첫째, 후사에 대한 약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였는데, 여기서 ‘이상’(異像, vision)이란 ‘환상’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것인데, 꿈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나 꿈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낮에 보이는 하나님의 계시사건을 말합니다. 꿈이 수면상태라면, 이상은 일종의 황홀상태로써 사도행전에서는 이를 ‘비몽사몽’(행 10:10, 22:17)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꿈인지 생시인지’란 표현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상 중에서 아브람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 쪽에서 하나님께 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시는 말씀으로써는 파격적인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이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고, 꼭 들어야할 말씀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가나안 땅과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신 데에 따른 아브람의 불안과 초조함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몸은 늙어가고 자손은 없고 약속이 이뤄질 희망은 보이지 않고, 아브람의 불안은 가중되었을 것입니다. 2-3절은 그의 불안한 심리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제게 주시렵니까? 저는 무자식이오니, 저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 3절에서 ”주께서 제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양육된 자가 저의 후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아브람의 심리를 아시는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란 말씀은 아무리 큰 환난이나 위험이나 백발백중의 불화살이나 뚫지 못할 것이 없고, 베이지 아니할 것이 없는 창검이라도 온 몸으로 막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표현한 말씀입니다. 정상적이라면 아브람이 하나님께 해야 할 고백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는 말씀은 “내가 바로 너의 상급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축복의 근원이시며,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분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시오, 우리의 상급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아브람의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은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충실하고 신실한 종으로써 훗날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하란으로 보냄을 받고 사명을 잘 감당했던 늙은 종입니다. 이토록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강한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4-5절에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또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했을 때, 의심치 않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어찌 보면 어수룩한 것 같은 믿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어수룩한 믿음을 6절에서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여러 차례 아브람이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브람의 어수룩한 믿음이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됩니다.
여기까지가 후사에 대한 약속입니다. 후사에 대한 약속을 믿었던 아브람이 의로 여김을 받은 것처럼, 내세에 대한 약속을 믿는 우리 또한 의로 여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언약체결을 위한 준비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이 반드시 이룰 축복인 것을 아브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으로써 일명 ‘횃불언약’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7절에서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다.”고 했을 때, 아브람은 8절에서,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고 증표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준비하라고 일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짐승들의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한 채 마주보게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솔개가 채가지 못하도록 지켰습니다.
창세기 15장의 횃불언약은 고대근동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언약체결방식과 연관성을 갖습니다. 주전 3,000년 중반의 수메르(Sumer) 문서와 마리(Mari)문서, 고대 아카드어 문서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언약체결방식으로써 보통은 쌍무계약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언약을 맺고 그것을 확증하는 의미로 짐승을 쪼개어 놓고 쌍방이 그 사이로 지나가는 의식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쌍방 중 한 편이 언약을 위반했을 경우 그는 짐승이 피를 흘리며 쪼개지는 것과 같은 참혹한 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5장에서의 횃불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내리사랑에 기초한 편무계약으로써 고대근동지방의 쌍무계약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주목해야할 부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횃불’만이 쪼개어진 짐승 사이를 지나갔다는 점입니다. 이는 쌍방이 쪼개어진 짐승 사이를 지나가는 고대근동지방의 계약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언약체결의식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이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불변의 약속이란 점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가신 것은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일방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일컬어 편무계약이라 부릅니다. 언약의 성격은 쌍방적인 것이지만, 피조물인 사람은 그 언약을 이행할 능력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언약의 성격상 쌍방의 합의가 필요한 것이지만, 창세기 15장의 언약은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킬 것이라는 자기선언의 성격이 강한 것입니다. 이것은 불완전한 인간을 사랑하시며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놓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훈계의지와는 달리, 그 당시 아브람에게 필요했던 것은 언약의 이행여부에 대한 가부결정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 체결된 언약과 표징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들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이 소박하고 어수룩한 믿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셋째, 아브람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게 될 것과 그 기간이 사대 사백년이 될 것이란 예언은 해석이 두 가지로 나뉘는 부분입니다. 출애굽기 6장 16-20절에 의하면, 아브람의 증손 레위가 1세대, 레위의 아들 고핫이 2세대, 고핫의 아들 아므람이 3세대, 그리고 아므람의 아들 모세가 제4세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족장들의 시대라 하더라도 한 세대를 100년으로 보기에는 성서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아브람이 가나안에 입국한 때로부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때까지를 대략 400년 또는 430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것입니다. 이 견해대로라면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기간을 215년으로 줄일 수가 있습니다. 이 견해는 이미 2천 년 전 예수님 때부터 있었던 것이고, 지금 이스라엘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입장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람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한 가나안 영토는 상당히 넓은 지역으로써 다윗과 솔로몬 때에 가서야 겨우 약속하신 경계에까지 육박하는 땅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주어진 땅의 경계는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해야할 이상적인 영토의 범위가 됩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끝없는 전쟁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 아브람이 받은 약속의 땅을 모두 차지하겠다는 영토주의와 선민의식에서 나타나는 배타주의로 인해서 빚어지고 있는 불행한 일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인, 기독교인, 유대교인 모두가 성지로 여기는 곳이어서 이스라엘로써는 추호도 양보할 수 없는 곳이고, 이슬람교도들이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 역시 자치지역을 아무리 넓게 갖는다하더라도 동예루살렘을 갖지 못한다면, 큰 의미가 없다고 보는 입장이어서 양국간에 평화협정이 난항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들을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해야 바른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하나님의 약속을 목숨을 주고서라도 쟁취하겠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토지에 대한 집념만은 대단하고, 그것은 수천 년 동안 나라 없이 살아야했던 고달픈 민족의 처절한 투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5장에서 기억해야할 부분은 하나님의 자기 선언적인 횃불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내리사랑의 언약이야말로 우리 인류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님과 그분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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