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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6-09-27 07:49
출애굽기1801: 광야 연단과 원시 국가체제(1)(출 18:1-12)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746  

1801. 광야 연단과 원시 국가체제(1)(18:1-12)

야훼 하나님에 대해서 초보자였던 히브리민족은 출애굽사건과 광야생활을 통해서 야훼에 대해서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있었던 열 가지 재앙과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야훼가 유일신이신 것을 알았고, 홍해사건을 통해서 그 유일신 야훼께 자기 민족이 선택된 것을 의식했으며, 쓴물을 단물로 바꾼 마라에서는 야훼가 치료의 하나님이신 것을 배웠다(15). 신 광야에서 시작된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과(16) 반석에서 생수가 터진 므리바 사건을(17) 통해서 인간의 생사문제가 야훼께 달려있음을 알았고, 아말렉과의 전쟁을 통해서 야훼가 구원의 성채이시요 승리의 깃발이신 것을 깨달았다. 야훼께 대한 신실한 믿음과 끈질긴 인내만이 살길임을 점차 알아나갔다. 히브리인들은, 비록 육체로는 노예상태에서 벗어났지만, 정신으로는 여전히 노예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홍해를 걸어서 건넌 사건이 족쇄를 풀고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다는 출발신호였다면, 그들이 광야에서 펼친 기나긴 고난의 행군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보듯이, 동굴 속 흑암에 갇힌 상태에서 벗어나 점점 밝아오는 동굴 바깥 빛의 세계를 향해서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는 영적 순례였다.

회고해보면, 우리 자신의 살아온 삶이 거의 이와 같았다.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이란 양파 속 같은 무명(無明)의 비늘을 한 꺼풀씩 양파 벗기듯이 벗겨나가는 순례과정이다. 영의 눈을 뜨는 과정이다. 영의 귀를 여는 과정이다. 우리는 여전히 현실에 통하는 것, 세상에서 통하는 것, 유용성과 실용성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구미가 당기는 것만 보기를 원하고 귀에 솔깃한 것만 듣기를 원한다. 우리는 여전히 공리주의 실용주의 성공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둠의 족쇄에서 풀려나 빛의 세계를 향해서 걸음을 옮기고는 있지만, 그 발걸음이 너무 무겁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강렬한 빛이 주는 아픔이 너무 싫고, 달콤함에 익숙해진 귀는 쓴 소리가 듣기 싫고, 취향에 익숙해진 혓바닥은 입맛에 맞지 않는 것들을 거부한다. 이런 우리의 태도 때문에 아픔과 고통은 우리 곁을 맴돌며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듯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행군은 더디기만 하고, 우리가 푯대삼은 가나안땅이 아득히 멀기만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히브리민족은 짧게는 일주일, 길게 잡아 2-3개월이면 도달할 오랜 희망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 가나안땅을 40년이나 걸려 도달하였다.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의 거리가 대략 370킬로미터이고, 히브리인들이 실제로 행군한 거리는 대략 640킬로미터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의 현주소일는지 모른다. 넘어지고 깨지고 피 흘리고 불에 타면서 넘어지면 일어서고 깨지면 붙이고 피 흘리면 지혈시키면서 불에 타버리면 남은 것 가지고 오뚝이처럼 칠전팔기하며 주저앉아버리지 않고 중단해버리지 않고 지치면 쉬었다가 또 출발하는 인생, 이것이 우리네 인생살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시인 김남조는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처럼 온다고 했고, 우리가 바라는 희망은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고 노래했는지 모른다. 비록 우리네 인생살이가 풍성했던 잎사귀들이 다 떨어져 나간 한파의 면도날에 살이 깎이는 겨울나무처럼 처참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그 처절한 겨울나무조차도 다시금 불을 지필 충전 부싯돌임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고 노래하였다.

시인 김남조는 또 겨울나무와 바람의 관계가, 특히 겨울나무의 입장에 보면, 매서운 바람이 원수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조차도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로써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설일’(雪日)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노래하였다. 인생살이란 것은 힘든 돌층계를 오르는 것과 같고, 사랑이란 것도 걷기 힘든 자갈밭과 같지만, 우리가 오른 돌계단의 어느 지점, 우리가 걸어온 자갈밭 어느 지점, 거기까지 오르고 걸어온 인생살이가 뒤돌아보면 다 은총이요 섭리라는 것이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은총과 섭리로 홍해를 건넜고, 만나를 먹고 있고, 반석에서 솟아닌 생수도 마셨고, 아말렉과 싸워 이겼다.

서울대 배철현 교수는 국민일보 칼럼, “당신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알고 있습니까?”<국민일보 2018-02-15> 혹은 저서 <심연>(21세기북스, 2016)에서 <신곡>을 언급한 바가 있다. <신곡>는 국외추방과 소외와 혼돈한 미로에 갇힌 단테 자신의 생지옥 체험기로써 우리네 인생살이의 여정을 은유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곡> ‘지옥편첫 부분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우리 인생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나를 위한 최선의 길이 숨겨져 있다.” 


스위스 출신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66)는 한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고, 참혹한 제2차 세계대전까지 겪으면서 산다는 것이 참으로 허망하고 덧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고된 운명과 오랜 외로움과 궁핍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좌절을 딛고 일어서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그 후 자코메티는 작품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Pointing Man, 1947, 낙찰가 1500억원)걸어가는 사람’(Walking Man, 낙찰가 1200억원)을 만들어 현실의 고통에 좌절하고 절망하여 주저앉고 싶었던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자기가 가고자하는 길과 다시 일어나 그 길을 걸어갈 힘과 용기를 주고 있다.

출애굽기 181-12절은 모세가 험난한 인생여정에서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던 사랑하는 가족과 만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장인이자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가 모세와 히브리민족이 이집트와 광야에서 겪은 모든 환란과 야훼께서 행하신 큰일들에 대해서 듣고 기쁜 마음으로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모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야훼께 찬송하고 제사를 바친 후에 친교를 나눴다. 이것은 믿음의 영웅 모세에게 주어진 큰 보상이었다. 인생살이가 늘 고달픈 것만은 아니다. 

야훼께서 히브리 민족을 광야로 이끌어내어 훈련하신 것은 그들을 괴롭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땅을 주어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다. 이 땅과 나라는 아브라함 이후 무려 430년에서 645년이나 오래된 그들의 한 맺힌 희망 곧 하티크바(Ha-Tikvah)였다. 값지고 좋은 것일수록 손에 넣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를 원하는 선수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훈련일지라도 참고 견딜 것이다. 감독의 조련은 선수가 미워서가 아니라, 선수가 꾸는 그 꿈을 실현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피차 상관없는 관계라면 아무도 욕먹을 일에 나서려하지 않겠지만, 선수를 사랑하고 그의 장래를 염려하는 감독이라면, 선수에게 혹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면, 욥의 시련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겪는 시련에 마냥 주저앉아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뽑힌 자가 아니면 선수촌에 들어갈 수 없듯이, 하나님께 선택된 자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연단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찬송가 487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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