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유월절
예식과 마지막 재앙(출
12:1-51)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유월절은 우리 민족의 8.15와
같다.
차이가
있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 자기 나라가 아닌 이집트에서 해방을 맞았고,
해방을
맞이할 당시 자기 나라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있었고,
우리나라에서
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해방과 동시에 주권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해방을 맞고도 나라가 한 동안 없었고,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에도 아주 오랜 기간 유배생활을 했으며,
주후
70년
이후에는 1878년간이나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 남의 나라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유월절 절기가 갖는 의미가 단순히 해방을 기념하는 예식이 아니고,
희망을
노래하는 예식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과거 이집트에서 해방되었던 때의 사건을 기념하면서 현재의 유배생활이 머지않은 장래에 끝나고 자기 나라에서 유월절을 먹게 되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을 희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매년 춘분이 지나고 보름달이 뜨는 유월절 밤이면,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이렇게 희망을 노래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여기 타향에 살아도 내년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지금은
노예이지만 내년에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
그들은
멀리 남의 나라에 살지만 언제나 그들의 눈을 동쪽 끝자락 시온에로 향하게 하고,
시온과
예루살렘의 땅에서 유대인들 자신의 땅에서 자유민이 될 것이라는 하티크바(Ha-Tikvah)
곧
희망을 노래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보다 축복받은 민족이다.
비록
우리가 해방이후 남북으로 갈라졌고,
마음대로
서로 왕래조차 할 수 없는 단절의 아픔을 겪고는 있지만,
중동에서와
같은 전쟁과 민족 간 혹은 종교 간의 갈등을 겪지는 않는다.
출애굽기 12장에서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인 장자들의 죽음이 있고,
재앙
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대탈출이 있게 된 것을 계기로 유월절 명절이 제정되고 있다.
이
유월절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에서 뿐 아니라,
신구약성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성서는
흑암과 혼돈과 죽음에서 시작되듯이 그 흑암이 빛이 되고,
그
혼돈이 질서가 되고,
그
죽음이 생명이 되는 이야기로 66권
전체가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옛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연관된 사건 가운데 출애굽 사건이 가장 큰 사건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사건이고,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를 형성한 사건이고,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건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흑암이 빛이 되고,
혼돈이
질서가 되고,
죽음이
생명이 된 사건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구약성서 전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사건이다.
또 이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예표적(豫表的)인
사건이다.
유월절
사건에 대한 이해 없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서의 저자와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유월절 사건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모형(模型)과
예표(豫表)로써
철저하게 설명하고 있다.
3절의
유월절의 어린양은 십자가에 못 박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예표이며,
3절과
6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할 유월절 어린양을 사흘 전인 아빕월 곧 니산월 10일에
미리 지정해 두게 하신 것은 창세전에 인류의 대속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미리 지정해 두신 것에 대한 모형과 예표이며,
5절에서
어린양에게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흠이 있을 경우 하나님이 받지 않아(레
22:17-25)
대속적인
구속사역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인류속죄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그리스도께서 흠이 없으실 것에 대한 모형과
예표이며,
6절에서
어린 숫양이 죽임을 당한 것은 유월절 어린양이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죽음에서 건지고 생명을 보존케 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고 죽은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임을 당하실 것에 대한 모형과 예표이다.

또 46절에서
뼈를 꺾지 않게 하신 것은 유월절 어린양이 온전한 대속제물이 되게 한 것인데,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상에서 뼈가 꺾이지 않으셨다.
대신에
창 찔림을 당하셨다.
7절에서
피가 뿌려져야 한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속이 이뤄질 것에 대한 모형과 예표이다.
또
8절에서
고기를 불에 구워 먹게 한 것을 유대교인들은 생명의 상징인 피를 먹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불을 고난의 상징으로 보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적으로 먹고 마심으로써 영생을 얻게 될 것에 대한 모형과 예표로 이해한다.
7절,
8절,
13절에서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른 집 안에 머물고 집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장자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교회 안에 머물
때 죄를 사함 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며,
8절에서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한다는 것은 인류의 대속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주의 만찬을 통해서 먹어야
영적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심판과
고난을 상징하는 불에서 온전히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과 고난을 당하셨다는 뜻이며,
죄악의
상징인 누룩이 들지 아니한 빵을 먹는 것은 죄의 청산을,
쓴
나물을 먹는 것은 지난날의 사단의 권세아래 놓여 살았던 쓰디쓴 죄악의 삶을 청산하라는 뜻이다.
11절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신 것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자들의 신앙순례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 정붙이고 오래오래 살려는 태도가 아니라,
늘 떠날
채비를 갖추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유월절은 춘분이 지난 보름날부터 8일간
진행되는 봄의 축제이다.
봄은
만물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희망의 계절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런 중요한 시기에 해방을 맞았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나라를 잃고 살았던 유대인들은 이때만 되면 해방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고,
무언가
모를 힘에 이끌려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연중 혁명이 발생할 가장 위험한 시기가 바로 유월절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발생한 유월절혁명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참혹했던 것이 주후 66-70(73)년에
있었던 유대전쟁이었다.
예루살렘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유월절 때 성문을 걸어 닫고 혁명을 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인명피해도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전쟁패배로 성전이 붕괴되고,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와 금고가 약탈되고,
예루살렘
성이 붕괴되었으며,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지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예수님이 유월절 시기에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것도 유대인들의 하티크바(Ha-Tikvah)
곧
그들의 희망과 무관하지 않다.
혁명가로서의
역할을 예수님에게서 잔뜩 기대했던 열심당원들은 그 실망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으로 화풀이를 했고,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지목했던 통치자들은 예기치 않았던 열심당원들의 협조까지 얻어 손쉽게 예수님을 처단할 수 있었다.
장자의 죽음과 관련된 요한복음의 마지막 표적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낸 것이다.
비록
모세가 장자의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지만,
많은
인명의 피해를 피하지는 못하였다.
누군가가
희생되고서야 자기를 보존하는 율법적인 구원이었던 것이다.
모세의
열 가지 재앙에 하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또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기 위한 부득이한 징계였지만,
우리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들에 비교해 볼 때,
굳이
비교하자면,
모세는
죽임과 파괴의 일을 했는데,
예수님은
살림과 건설의 일을 하셨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이다.
율법은 모세로부터 주어졌고,
복음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율법이
‘너 죽고
나 살자’는
것이라면,
복음은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로 인해 주어진 옛 것은 흠이 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새 것은 온전하다.
그래서
옛 것은 모형이고 예표이지만,
새 것은
참 된 것이고 원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은 생명을 얻고 영생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