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난 믿음(막 9:22-23)
마가복음 9장 22-23절을 보면, 심한 간질을 앓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엇을 할 수 있거든(But if you can do anything),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고 하셨다.
여기서 간질 환자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한 말, “무엇을 할 수 있거든(But if you can do anything)”은 임마누엘 칸트의 말을 빌리면, 가언적(hypothetic) 믿음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는 정언적(categorical) 믿음이다.
가언적 믿음이란 가상적이고 가정적이며 조건적이고 계산적인 믿음이다. “... 하면, ~ 하겠다”는 믿음은, 칸트의 말을 빌리면, 타율적인 믿음이다. 동기가 불순한 믿음이다. 결과(공리)를 따지는 믿음, 계산적인 믿음은 동기에 문제가 있다.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믿음은 결과(공리)에 지배를 받거나 조종당하기 때문에 타율적이다. 믿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못하고,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정언적 믿음은 무조건적인 믿음, 절대적인 믿음이다. 이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믿음이, 칸트의 말을 빌리면, 자율적인 믿음이다. 순수이성에서 나온 믿음이다. 본래적이고 순수한 믿음이다. 결과에 상관없이 믿음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수 신앙이다. 이 신앙은 성령에 의한 믿음, 성령으로 난 믿음, 믿어지는 믿음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성령의 법을 자율로 율법을 타율로 보았다. 성령의 법을 따르는 것은 이미 받은 것을 감사하여 본래적 목적인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으려 하기 때문에 동기가 순수하지만, 율법을 따르는 것은 아직 받지 못한 것을 받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적이고 계산적이므로 동기가 불순하다. 동기가 순수한 것이 자율적인 것이고, 동기가 불순한 것이 타율적이다. 만일 우리 기독교인들이 본래적 신앙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거나 하나님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거나 이웃을 섬김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이익의 도구로 삼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성질에 따라 타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믿음으로 회복한 영적 본래성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본래성마저 상실하게 된다. 결국 자유를 잃고 공허한 성공주의의 속박에 묶여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믿음이 그 동기가 순수하고, 성령에 의한, 성령으로 난, 믿어지는 믿음, 즉 자율적 믿음을 갖는다면, 우리의 삶에서 이미 일어난 기적들, 또는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을 보고 듣는 영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것이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던 환자를 예수님이 고칠 수 있었던 이유가 단순히 그분의 신적 권능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율적인 믿음 즉 성령으로 난 믿음에 큰 몫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