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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1-27 08:56
존 채이스 선교사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496  

채이스 Chase, John Trawick 1905.9.17.-1987.12.13. 미국 그리스도의교회 (Christian Churches and Churches of Christ) 목사, 선교사.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Louisville)에서 로완 F. 채이스(Rowan F. Chase)와 헬렌 R. 채이스(Helen Roberts Chase)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5살에 고아가 되어, 인디애나주 체스터필드(Chesterfield)에 거주하는 감리교인 고모와 함께 살았다. 성년이 되기 전 그리스도의교회 전도자 조지 윈프리(George Winfree)와 이스트린(East Lynn)그리스도의교회 목사 헨리 우드(Henry Wood)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았다.

1926년 존슨성서학원(Johnson Bible Academy, 후에 존슨성서대학)과 신시내티성서신학교(Cincinnati Bible Seminary)를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 루이지애나주 배톤루지(Baton Rouge)에 내려가 목회를 시작하고, 동년 7월 자신보다 1년 먼저 성서신학교를 졸업한 와네타 I. 스미스(Wahneta Irene Smith)와 결혼하였다. 목회하던 중 성서신학교와 도쿄(東京) 요츠야(四谷)선교부 윌리엄 D. 커닝햄(William D. Cunningham)의 초청으로 일본 선교를 결정하였다.

채이스 부부는 1927년 도쿄로 건너가 요츠야선교부에서 월급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1930년 6월 커닝햄이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요츠야선교부를 맡아 월간 선교소식지 『도쿄 그리스도인』(Tokyo Christian)을 편집하고, 선교부 교회들을 정기적으로 순회하며 설교하였다. 일본 사역에서 채이스는 특별히 한국인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요츠야선교부가 도쿄와 요코하마(?浜)에 세운 한국인 교회들을 도왔고, 구세군 사관 출신 성낙소 목사가 사역한 요코하마 한국인 교회를 감독하였다. 요츠야선교부가 1924년부터 시작한 한국 선교 상황을 잘 알았고, 1931년 9월 하순 한국 선교 사역을 시찰하기 위해 직접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일본에서 7년 8개월 동안 사역한 후, 1934년 11월 미국으로 돌아간 채이스는 그리스도의교회 첫 내한 독립선교사 J. 마이클 쉘리(J. Michael Shelley)의 후임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채이스는 미국에서 섬기던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하이츠(Inglewood Heights)그리스도의교회를 1936년 3월 사임하고, 선교기금 모금에 돌입하여, 10월 1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가족이 한국행 배에 승선하였다. 채이스 가족은 1936년 11월 7일 서울에 도착하고, 크리스마스 직전 서대문구 송월동 영국해외성서공회 건물을 임대하여 입주하였다.

채이스는 일본에서의 선교 경험으로 입국 전 이미 커닝햄과 같은 선교방법(독립선교)과 선교정책(자립형 토착교회 설립을 목표로 본토인 설교자를 훈련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1936년 가을 기독교회선교부(Korean Christian Mission)로 알려진 사역을 시작하고, 선교부 본부를 임대한 영국해외성서공회 건물로 정했다. 그리고 사역의 범위를, 당분간 사역 인력이 증가할 때까지, 서울로 제한시켰다. 1937년 초 선교부 본부 건물에서 1명으로 시작한 성경공부반(이후 성서훈련원으로 개칭)은 시간이 가면서, 학생이 증가하고, 교육도 체계를 갖추어 갔다. 성서훈련원은 그리스도의교회가 추구하는 신약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는 한국 목회자가 거쳐야할 필수 코스였다. 타교단 출신 교인이나 목회자는 일정 기간 성서훈련원의 교육을 받아야했다.

채이스는 1937년 5월 선임 선교사 쉘리가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받은 교파명 ‘기독교회’를 인계받았다. 또 1939년 초 영국해외성서공회로부터 송월동 선교부 건물을 매입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매입액의 10%를 지불하고, 잔금은 1940년 5월 말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가, 건축기금을 모금하여 처리하였다. 선교사를 동원하는 일에도 시간을 내어, 1936년 봄 존슨성서대학(Johnson Bible College)을 방문하여 존 J. 힐(John J. Hill)을 한국 선교사로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힐은 갓 결혼한 신부 에스더 비반즈(Esther Beavans)와 함께 1939년 6월 21일 입국하여 기독교회선교부에서 채이스와 공동사역을 시작하였다. 채이스가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힐이 기독교회선교부의 사역을 맡아 잘 관리하였지만, 성서훈련원은 일본 경찰에 의해 폐쇄되었다. 1940년 후반 일제의 기독교 탄압이 심해지면서, 미국 정부는 자국민의 철수를 권고했고, 힐 부부는 1940년 11월 16일 인천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채이스는 미국에서 가끔 한국 교회의 소식을 들었지만, 교회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1941년 2월 24일 서울에 도착하여 선교부 교회들을 차례대로 방문하여,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를 스파이로 의심하는 당국과 일본 형사들의 감시 때문에, 체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서울에서 1달을 머문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즈음 한국 교회들은 일제의 요구(신사참배, 동방요배, 일본기독교조선교단 가입 등)에 불응한 까닭에 폐쇄조치를 당하였고, 선교부 건물은 일제가 몰수하여 한국인에게 매각하였다. 서울 방문 후 채이스는 잉글우드하이츠그리스도의교회로 돌아가 목회사역을 재개하고, 퍼시픽성서신학교(Pacific Bible Seminary)에서 강의하고, 미국 교회들을 순방하며 한국 선교 사역을 보고하고 강연도하며 기금을 모금하였다.

1945년 8월 해방 후, 채이스는 바로 한국 입국을 원하였으나, 정세의 불안정으로, 1947년 초에 겨우 비자를 받아 1월 중순경 입국하였다. 서울에서 머무는 동안 선교부 건물의 회수에 노력을 기울였고 또 선교부 교회들을 방문하여 사역자들과 교인들을 격려하며, 매주 힘닿는 대로 생필품을 공급해 주었다. 전쟁 전 선교부 6개 교회들 중 살아남은 교회는 2개 교회(돈암동교회와 필운동교회)뿐이었다. 채이스는 전후 한국은 복음이 가장 필요한 선교지라고 확신하여, 선교의 범위를 서울 밖으로 확장하고, 전 한국인을 전도의 대상으로 하는 한국복음화프로그램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채이스는 1달 반가량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1947년 3월 1일 인천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 채이스는 10월 17일에, 힐은 가족과 함께 1949년 2월 18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채이스는 이번 한국 방문 때 한국복음화프로그램을 구체화 시켜, 본토인 설교자 훈련·복음전도관 설립·훌륭한 예배당 마련을 목표로 세우고, “[선교사] 설교자” 동원과 “1949년 9월 1일까지 50,000달러 특별기금” 모금을 긴급 사안으로 정했다. 채이스는 성서훈련원을 힐에게 맡기고, 자신은 미국으로 돌아가 「그리스도인 표준」(Christian Standard)과 함께 “한국에 예배당을”(Chapels for Korea) 캠페인을 펼쳤다. 목표액 50,000달러가 모금되면, 채이스 가족은 1949년 9월에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채이스가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힐은 성서훈련원을 한국성서신학교(Korea Bible Seminary)로 개칭하여 재개하였다. 힐이 한국에서 기독교회선교부의 사역을 수행하고, 채이스가 미국에서 한국 예배당 기금의 목표액을 거의 달성할 무렵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힐은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피난하고, 채이스는, 예배당 기금 목표액을 1950년 7월에 달성했으나, 전쟁 때문에 한국 입국을 연기하고, 당분간 캘리포니아주 도우니(Dawney)제일그리스도의교회에서 사역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전쟁은 재산과 인명에 많은 피해를 주어, 1952년 초까지 남한 인구의 절반이 구호를 필요로 하였다. 채이스는 한국인을 위한 구호사업으로 「그리스도인 표준」을 통해 구호품과 구호기금을 호소하고, 확보된 구호품을 한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1954년 9월 하순, 채이스는 동료 선교사 힐의 가정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한국 사역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했다. 한국 선교 외에 채이스는 캘리포니아주 도우니제일그리스도의교회에서 17년간(1951년부터 1968년까지) 시무하고, 은퇴 후 필리핀 체부(Cebu)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전미선교대회(NMC)의 창립멤버와 대회장직을 역임하였다. 또 교회연금제도의 창립이사, 산호세 성서대학(현 William Jessup University)의 이사, 북미주그리스도인대회(NACC)의 유지회원이었다. 채이스는 1987년 12월 23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카운티 실마(Sylmar, Los Angeles County)에서 별세하였다. 유해는 미국 테네시주 설리번 카운티, 파이니 플래츠(Piney Flats, Sullivan County)의 포플러 릿지 묘지공원(Poplar Ridge Cemetery)에 안장되었다.

부인 와네타 아이린 스미스 채이스(Wahneta Irene Smith Chase, 1901-2002)는 미국 초기 환원운동가 라쿤 존 스미스(Raccon John Smith, 1784-1868)의 후손으로, 결혼 후 약 60년 동안 채이스의 든든한 동역자이자 후원자였다. 별세 후 유해는 채이스의 묘지에 합장되었다. 자녀로는 케넷 (Kenneth Chase, 1927년 7월 18일, 일본 출생), 로버트(Robert Chase, 1930년 5월 5일, Tokyo, 일본 출생), 나딘(Nadine Chase, 1933년 3월 15일, 미국 출생), 로이스(Loise Chase, 1938년 1월 28일, 한국 출생)이 있었다. 2002년 10월 30일 서울기독대학교 구내에 채이스기념관 건물이 설립되었다.

[주요저술] "Mr. And Mrs. Chase And The War Situation" (CS 4 Sep. 1937); "Missions In Korea" (CS 2 Apr. 1938); "What We See In Korea" (CS 30 Jul. 1938); "Korean Missionary's Furlough Travels" (CS 24 Aug. 1940); "Movements of the Missionaries" (CS 25 Jan. 1941); "The Situation In Korea" (CS 31 May 1941); "Why the Missionary Exodus?" (CS 14 Jun. 1941); "Missionaries and Missions" (CS 17 Oct. 1942); "Korea Must Be Freed" (CS 20 Feb. 1943); "Post-war Plans Outlined for Evangelism in Korea" (CS 17 Mar. 1945); "The Holy Spirit" (CS 7 Apr. 1945); "Spiritual Gifts in the Early Church" (CS 21 Apr. 1945); "Meaning of Holy Spirit Baptism" (CS 14 Apr. 1945); "Relationship of the Holy Spirit to the Christian" (CS 5 May 1945); "Men Ought to Pray" (CS 22 Dec. 1945); "Korea-"The Land of Morning Calm"" (CS 20 Apr. 1946); "The Korean Christian Mission(In Retrospect)" (KM May 1946); "Open Doors in Japan and Korea" (CS 15 Feb. 1947); "Wanted: Peace" (CS Jun. 1947); "On The Trail of The Missionary" (KM  vol.VI no.11, Jul. 1947); "Christ, the Remedy for Oppression" (CS 17 Apr. 1948); Christ's Ambassadors on the Field" (CS 19 Jun. 1948); "A Proposal to Meet a Need" (CS 15 Apr. 1950); "Witnessing for Christ in Korea" (CS 10 Jun. 1950); "Korean War Brought On From Outside, Says Chase" (CS 22 Jul. 1950); "Missionary Problems and the New Testament Answer" (CS 16 Oct. 1954); "Peter's Broadening Ministry" (CS 5 Dec. 1959); "This Works Well for Us" (CS 14 Jul. 1962).

[참고문헌] CS Sep. 1932~Jul. 1962; TC Apr. 1927-Aug. 1933; KM 1937-1949; “History of the Korean Christian Mission", FCK Oct. 1959; Betty Dornette, "An Hour with John Chase", CS 20 Jan. 1985; Mark Maxey, "Christians in Japan 100 Years(1883-1983)", http://www.bible101.org/japanmissions/page01.htm; Mrs. W. D. Cunningham and Mrs. Owen Still, The Flaming Torch: The Life Story of W. D. Cunningham, Tokyo: The Yotsuya Mission, 1939; “History of the Korean Christian Mission", FCK Oct. 1959; https://www.findagrave.com/memorial/89811653/john-trawick-chase; 김찬영,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 역사』 , 한성신학교, 1991; 백종구, “윌리엄 D. 커닝햄과 한국인 선교-동경 요시야선교회를 중심으로”, 「신학논총」 (2012); 백종구 “도쿄 요츠야선교회와 재일 한국인교회: 미카와시마(三河島)한국기독교회의 개척과 성장 (1901-1947)”, 「한국교회사학회지」53(2019); 백종구, 조동호, 『한국 그리스도의교회의 역사』, 쿰란, 2018; 오수강, 『基督의 敎會와 성낙소와의 관계』, 쿰란, 2007; 조동호, 「조선총독부 기록으로 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2016).

CS: Christian Standard, NMC: National Missionary Convention, NACC: North American Christian Convention, TC: Tokyo Christian, KM: Korean Messenger: Korea For Christ, FCK: For Christ in Korea

백종구(전 서울기독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