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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1-27 08:55
토마스 힛치 선교사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616  

힛치 Hitch, Thomas G. 캐나다 침례교회의 선교사, 호주 그리스도의교회 선교사.

영국인으로 캐나다 침례교회의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티베트 국경지대에서 다년간 사역하고, 일본에서도 7년간 사역했다. 티베트에서 아들과 딸을 잃고 신경쇠약증에 걸린 이후, 남은 딸들의 교육을 위해 호주로 건너가 8년간 거주했다.

힛치는 윌리엄 D. 커닝햄(William D. Cunningham)의 오랜 지인으로 그의 가족은 호주 멜버른 에센돈(Essendon) 그리스도의교회(Church of Christ)의 교인으로, 동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일본 요츠야선교부의 임시직원으로 오게 되었다. 딸 애니(Annie)와 함께 1936년 3월 3일 일본에 도착했고, 도착 직후 3월 19일부터 커닝햄과 함께 선교부의 한국 교회들을 순방하였다.

요츠야선교부에 부임한지 3달 후, 커닝햄의 사망으로 선교부의 일을 떠 맡게되어, 1937년까지 월간 선교소식지 「도쿄 그리스도인」(Tokyo Christian)의 편집과 선교부의 회계를 맡고, 1936년 10월 한국을 방문하여 선교부의 교회들을 시찰하였다.

힛치 부인(Mrs. Emilie Hitch)과 딸 앨리스(Alice)는, 막내 딸 룻(Ruth)이 호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1937년 3월 2일 일본 사역에 합류하고, 큰 딸 에밀리(Miss Emilie A. G.)가 그해 12월 15일 호주를 떠나 일본에 도착하였다. 애니와 앨리스는 선교부 사무실을 도와주고, 성경반을 가르치고, 일본어를 배웠다. 힛치 가족은 찬양을 잘해서 가끔 교회의 초대를 받아 특송을 하였다.

이즈음 요츠야선교부의 한국 사역이 크게 성장하여, 서신 연락과 선교사의 간헐적 방문보다 더 확실한 감독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에 선교부의 선교사들과 일본인 목회자들이 힛치 가족의 한국 파송을 결정하고, 선교부 자문위원회 다수가 찬성하여, 한국 교회 유급 사역자 13명이 힛치 가족을 한국 선교사로 초청했다. 이 초청에 응하여 힛치는 1938년 2월 18일 거주할 집을 마련하고, 서울 제1교회(아현동)가 개설한 성서훈련학교(Bible Training School)의 확장계획을 담임 사역자 이인범과 함께 세우기 위해, 한국으로 먼저 왔고, 부인과 가족은 3월 24일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고베(神戶)로 가는 기차를 탔다.

서울에 거주하는 동안 힛치는 5월 초 북쪽 지방의 선교부 교회들을 순방하고, 7월 교외의 외곽 지역에 있는 선교기지 성경학교를 방문했다. 또 성서훈련학교의 교장이 되어, 학교를 제1교회에서 그의 임대 주택으로 옮겼다가, 다시 여름 방학 후 9월 아현동 임대 건물 2층으로 옮겼다. 당시 주간반 학생이 남자 7명, 여자 5명, 야간반 학생이 남자 11명, 여자 2명이었다. 학생 중에는 현직 목회자와 여전도자들이 다수였으며,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재학 중 혹은 졸업 후에 파송을 받았다. 이인범과 힛치 부부, 딸 에밀리가 가르쳤고, 홍종숙 목사가 교수와 직원으로 합류하였다.

힛치가 선교부 사역을 본격적으로 수행한 1938년 말 한국에는 14개 교회(서울 4개, 인천 3개, 한강 이북 5개, 한강 이남 2개), 사역자가 지도하는 7개 모임(서울 2개, 인천 2개, 신의주 3개), 사역자가 없는 소규모 모임들이 있었다.

1939년 4월 에밀리는 당시 요츠야선교부가 겪고 있는 재정난을 의식하고 선교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사역을 중단하고 귀국을 결정했다. 몇 달 후 힛치 또한 그의 건강 때문에  한국 사역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티베트 국경지대에서 사역할 때 아들과 딸을 잃고 그 때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고, 그 일 이후로 두 세 차례 신경쇠약으로 고생을 했었다. 또 한국에서의 사역이 너무 과중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어서 또 다른 신경쇠약으로 쓰러질 것 같은 위험을 느꼈었다. 힛치 부부는 1939년 여름 화진포에서 존 T. 채이스(John T. Chase) 가족, 존 J. 힐(John Jesse Hill) 가족, 일본에 건너온 다수의 선교사들과 함께 휴가를 보낸 후, 요츠야선교부를 사임하고, 8월 말 호주로 떠났다.

힛치가 떠난 이후 성서훈련학교는 이인범, 홍종숙, 신신근(제물포 제1교회 담임 사역자)이 가르치고 운영했다. 성서훈련학교는 정규학교가 아닌 성서훈련반으로 다수의 목회자들과 여전도사들을 배출하고 파송하였지만, 요츠야선교부의 재정 지원이 중단된 1941년 3월 이후 문을 닫았다. 힛치의 다른 딸 앨리스는 호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남아 사역(영어성경반 지도)을 계속했다. 그러나 영국 시민이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의 자국민 철수 권유가 있자, 사역을 포기하고, 1940년 10월 30일 호주로 떠났다. 가족으로는 독일 태생 부인(Mrs. Emilie Hitch)과 딸 에밀리(Miss Emilie A. G.), 애니(Annie), 앨리스(Alice M.), 룻(Ruth)이 있었다.

[주요저술]

[참고문헌] "Enlarged Program for Korea", TC vol.ⅩⅩ? no.10, Aug. 1933; “About People", vol.XXXV no.4, Feb. 1936; “About People", TC XXXV no.6, Apr. 1936; “Miscellaneous”, TC vol.XXXVI no.3, Jan. 1937; "Our Opportunity in Korea", TC vol.37 no.3, Jan. 1938; "Mission News", TC vol.37 no.4, Feb. 1938; “Into Korea”, TC vol.37 no.5, Mar. 1938; “Into Korea”, TC vol.37 no.5, Mar. 1938; "Picture of Yotsuya Missionaries", TC vol.37 no.6, Apr. 1938; "Yotsuya Mission Calendar", Apr. 1938; "The Hitches Go To Korea", TC vol.37 no.7, May 1938; Annie Hitch, "Visit To A Korean Out-Station Bible School", TC vol.37 no.9, Jul. 1938; T.G. Hitch, "Progress And Need In Korea", TC vol.37 no.10, Aug. 1938; Emilie Hitch, “The Bible Training School in Korea”, TC vol.38 no.2, Dec. 1938; "A Visit to Jinsen", "New of the Work", "How the New Church Was Built", TC vol.38 no.4, Feb. 1939; "Opportunity Book of Yotsuya Mission" “Yotsuya Mission‘s Yearly Report", TC vol.38 no.6, Apr. 1939; “Workers Leaving”, TC vol.38 no.11, Sep. 1939; “Special Letter to You", TC vol.39 no.1, Dec. 1939; “Korean Training School”, TC  vol.39 no.12, Nov. 1940; 백종구, 조동호, 『한국 그리스도의교회의 역사』 , 쿰란, 2018.

TC: Tokyo Christian

백종구(전 서울기독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