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05-07-08 11:20
최요한(1923.1.20-1998.03.28) 목사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364  

최요한(용환) 목사(1923.01.20-1998.03.28)

최요한은 전남 함평군 대동면 용성리에서 장로교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고종황제시절부터 친가와 외가 모두가 3대에 걸쳐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1944년 1월 20일 역시 장로교인인 김정녀와 목포장로교회에서 결혼하였다. 세례교인이었지만, 1947년 7월 중에 전남 영광지역을 순회하던 중에 침례가 성서적임을 깨닫고 김은석 목사에게 침수세례를 받았다.

(1)자생적 신약성서교회 활동

최요한은 재건파와 고려파 신앙과 맥이 같이 하였다. 최요한이 김은석을 처음 만난 것은 큰 동서인 전남 함평군 엄다면 영흥장로교회 장주열 집사가 우연히 김은석의 순회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큰 은혜를 받았고, 김은석을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자고 교회 장로를 설득하여, 그 날짜를 1946년 2월초로 잡았다. 장주열은 부인과 함께 은혜를 사모하는 손아래 동서 최요한 부부를 찾아가 부흥회 소식을 알리고 참석을 권유하였다.

부흥회 다섯째 날에 진리의 영이 최요한에게 임하였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370쪽에 의하면, 최요한은 이날 자기 마음에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분쟁은 죄다.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니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한 음성을 듣는 것 같았다고 한다. 참석한 100여명의 신도들에게도 큰 은혜가 임하였다. 그로 인해 일주일 하려 했던 부흥회가 열흘로 연장되었다. 이 부흥회 기간에 최요한, 김정녀 부부는 김은석을 집으로 초청하여 성경강의를 들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최요한은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리 자택에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는 최요한이 김은석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자택에서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한 것은 김은석의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보다 7개월이나 앞서는 것이고, 충청이남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자생적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김은석이 김교인 장로의 초청으로 부강 오데골 장로교회에 부임한 것은 해방직후인 1945년 가을이었다는 전통적인 주장에 반해, 김규상 목사의 증언에 의존하여 그보다 일 년이 늦은 1946년 가을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최요한은 1946년 2월 영흥장로교회 부흥회 때 혹은 자신의 집에 성경을 공부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듣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만 목사는 1945년 12월 하순경에 정찬성과 김은석으로부터 침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김정만은 1946년 반능교회를 섬기던 중에 담임 정찬성의 권유로 부강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고, 1946년 가을에는 정찬성, 김은석 두 목사들과 함께 서울 필운동교회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가르치는 성낙소, 최상현와 성령론에 관한 논쟁이 있음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였다. 이 증언은 김은석이 1945년 가을에 부강장로교회에 부임하였다가 1946년 어느 때에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또 박점상 목사는 1946년에 김은석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고 진술하였고, 정찬성 목사는 1946년에 공부한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제1기생으로 알려져 있다. 정찬성은 김은석에게 오데골 장로교회를 나온 후 새로 시작한 부강교회의 이름을 로마서 16장 16절을 들어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로 부를 것을 권하였다는 김정만 목사의 증언이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이러한 자료들은 김은석이 부강장로교회에 부임한 것이 1945년 가을이었고,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가 1946년 어느 시점에 시작되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만일 목포교회의 주장처럼, 1946년에 시작된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존재여부를, 다만 몇 개월간이라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된 교회들이라면, 성낙소에 의해서 1927년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2구 290번지 사랑채에 세워진 ‘기독지교회’(基督之敎會)에 이어 충청이남지역에 자생적으로 생긴 신약성서교회 운동이 될 것이다.

최요한은 1946년 4월에 시작한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가 10월에 50여명에 이르자 김재순에게 위임하였다. 그리고 10월초에 전남 함평군 손불면 주포리 동네 창고를 대여 받아 두 번째 교회를 개척하였다가 석성리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예배당을 짓고, 이름을 ‘석성리 그리스도의 교회’로 정하였다. 1950년대 중반에는 이 교회의 창립멤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노의수 집사가 석성리 신생동 교회와 청학동 그리스도인 집회소를 인도하였으나 발전하지 못하다가 김재순이 석성리 청학동으로 옮겨와서 신앙촌을 만들어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교회 터가 김재순의 부친 김교인 장로 앞으로 등기되어 있었는데, 이 무렵에 김교인은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석성리 그리스도의 교회를 순복음교회로 이적 시켰고, 700평 땅을 기증하여 50평 예배당을 짓게 하였다.

김교인은 1956-57년경에 순복음교회로 이적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김교인이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서 1957년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김은석의 1954-56년 성서통독메모에 의하면,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청학동 그리스도인 집회소’와 ‘신생동 교회’가 여전히 노의수 집사(전도사)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었고, 김은석이 내려와 이 두 교회에서 백일 성경연구회를 개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은석의 1954년 6월 14일(월) 성서통독메모에 의하면, 김은석이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김교인의 집에 잠시 들리고 있고, 8월 8일(일)자 성서통독메모에 의하면, 김은석이 오전에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김교인 장로댁에서 아가서 4장을 읽고, 오후에는 손불면 신흥교회 주택에서 아가서 4-6장을 읽고 있다. 1956년 7월 16일(월)자 언급에 의하면, 김은석이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산18번지 김교인 장로댁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1956년 12월 13일(목)에는 김은석이 김교인과 함께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신생교회 노의수의 객실에 머물렀다.

김은석은 1955년 10월 15일부터 1956년 (2월까지 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1월까지 이 두 교회당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를 열어 노의수 집사 등을 헌신적으로 가르쳤다. 이 백일성경연구집회 때는 유난히 추웠는지, 10월 20일(목)에 일기가 차서 고생이라고 하였고, 12월 16일(금)은 크게 추웠다 (“今朝는 大寒이 되엿슴)고 적었다. 이날 아침 김은석은 대전에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간다고만 하면 섭섭해 하니 답답함.”이라고 적었다. 김은석의 이런 헌신에도 불구하고, 청학동 그리스도인 집회소에 대한 언급은 백일성경연구집회 중이었던 1955년 10월 21일(금) 이후에, 신생동 교회는 1956년 12월 13일 이후에 끊겠다. 김교인과 노의수에 관한 언급도 끊겠다.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김은석의 헌신적인 수고에도 불구하고, 순복음교회로 이적한 김교인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다음은 김은석이 남긴 1956년 12월 13일자 성서통독메모이다.

    1956년 12월 13일 새벽(목) 2시부터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신생교회 노의수 형제 객실에서 김교인 장로님과 임남규 형제와 동숙하던 중, 起坐禱하다가 나의 사명인 주님이 맥기신 일을 하는바 앞흐로 서울성경신학교로 간다고 한말을 대답한 후 또한 들이난 일리 있슴으로 그만 둘 것을 다시 思에 작뎡하고 김재순 목사게 편지하고서 지금 이 신생동서 1월시까지 공부한다고 광고하야 사람들리 오난 일과 여러 가지로 생각 중에 엇지할가 하다가 성경 빌서를 보난 중 1장 27-2:1-2,14을 생각하는 중에서 지금 갓치 하는 일은 마음을 갖치 하는 일리 되지 못하고 원망과 시기와 분쟁이 표현하는 것을 보아 아무리 생각하여보아도 나는 갓치하지 못하고 따로 떠러저서 내게 맥기신 주님 명령을 실행하여야 갯다는 생각이다. 내가 기도드리다가 성경 보면서 생각하야 이 일을 기록하는 시간은 3시 20분이엿다. 신생동 노의수 집사댁 객실에서 記함. 김은석 止.

(2)1946-50년 기간에 세워진 교회들

최요한은 1946년 4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리에 그리스도의 교회, 동년 10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주포리(석성리 청학동으로 이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운 후, 이듬해인 1947년 1월초에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박점상의 처가 마을, 1951년 음력 8월 13일부터 이곳에 거주한 박점상은 자신이 건축하여 개척하였다고 증언함) 김광음(정귀남의 모친) 집사 집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평산리 교회에 관한 언급은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임춘봉, 박점상, 지철희 등이 목회하였고, 정귀남(지철희의 장인, 정일홍 목사의 부친) 집사(전도사)가 예배를 인도하던 중에 갈라져 오늘에는 무안 현경현화 그리스도님의 교회로 이어가고 있다.

참고로 성낙소 목사는 단기 4286(1953)년 7월 3일에 <신약교회 목회학>를 발행한바 있다. 이 귀한 책을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가 지철희 목사로부터 기증받아 매우 어렵게 편집한바가 있다. 지철희는 이 책을 정귀남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책 뒷장 겉표지에는 “평산 그리스도의 교회 1958년 2월 10일 구입 지철휘”라고 적혀 있다.

최요한은 1947년 7월에 영광 무영교회 임장로 가정과 김집사 가정을 환원시켜 영광 무영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김재순에게 위임하였다. 임장로의 딸은 그 후에 김재순의 제수가 되었고, 건축업자였던 임장로가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최요한은 1948년 3월초에 광주 사동에 김윤선 집사의 소를 팔아 2층집을 세내어 광주 사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 무렵 최요한, 장주열, 김재순, 김동열 등은 광주에서 노방전도에 전념하였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 광주 사동 교회는 1954년 9월 한 달 동안만 언급되었으며, 주소는 광주시 남구 사동 22번지였다. 이후 김동열이 광주 금동 그리스도님의 교회로 명칭을 바꿔 이어가고 있다.

1951년 늦봄에는 광주에서 최초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가 조직되었고, 초대회장에 김은석이 선출되었으며, 김은석의 주례로 최요한, 장주열, 김재순, 창현 함태영, 이신(이만수), 김동열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추측컨대 안수 장소는 사동교회가 아니라, 함태영이 1951년 5월에 광주 사직동공원 및 방송국 입구에 사재를 처분한 돈과 부친의 지원금과 영광 무영의 임장로의 헌금으로 구입한 일본 적산가옥 2층이었을 것이다. 이 건물은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 겸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에 강순명이 1952년 7월 13일에 천혜 경로원을 설립하였다.

최요한은 1950년에 전북 고창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김윤선 집사와 김남수 집사가 영광무영교회가 너무 멀어서 고향인 고창 김윤선 집사 집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6.25전쟁 중에 8명의 순교자를 낸 곳이다.

이상 언급된 6곳의 교회들은 최요한이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세운 교회들이며, 오늘까지 남아 있는 곳은 김동열 계열의 무안 현경현화 그리스도님의 교회와 광주 금동(사동) 그리스도님의 교회뿐이다.

(3)1951-55년에 세워진 교회들

최요한은 1951년 봄에 목사안수를 받고나서 장성기도원을 맡아 8개월간 시무하면서 침례와 성만찬예배를 드리며, 200여명이 함께 먹고 자며 기도하는 은혜의 동산을 만들었지만, 조순례 원장이 환생론을 주장하기 시작하자 1952년 1월초에 기도원을 박차고 나와 기도하던 중에 목포시 남교동 큰 시장 골목상가 2층을 전세 내어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최요한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1953년 4월 8일 광주에서 개최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 때 (추측컨대 정찬성, 김상호와 함께, 김교인은 그보다 3-4년 후에) 이적하여 1953년 초에 전남 목포시 죽교동 391번지에 목포 유달 교회(순복음)를 개척하였다. 이곳은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 진성구 장로가 구입한 건물의 2층이었다. 그러나 최요한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성찬예배에 대한 신념도 확고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 김은석은 성서통독메모에서 1954년 6월 14일부터 전남 목포시 죽교동 39번지 2통 4반 해병대 앞 유달 교회당에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처’라는 간판을 붙이고 백일성경연구집회 등을 인도한 것으로 적고 있기 때문이다.

1955년 9월 25일에는 김사라 집사가 개척한 목포 복음교회를 시무하였다. 교회가 크게 성장하여 기공예배를 드리고 예배당 건축이 된 상황에서 교회명칭에 대해 고민하던 중 최요한은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로 정하기를 원했고, 제직자들의 투표에서도 그렇게 결정되었으나 창립자인 김사라 집사 측과 교회명칭으로 인해서 갈등이 커지자 1957년 10월 5일에 사임하였다. 그러나 이 교회는 지금도 침례와 주의 만찬을 소중히 여기는 대형 독립교회로 남아있다.

(4)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최요한은 1957년 8-9월의 집회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복귀하기로 마음을 확정하고 10월 5일 목포 복음교회를 사임하기 직전에 목포시 대안동 11번지에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포교회는 당회를 통해서 창립연월을 일 년 앞당겨 1956년 10월 1일로 확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최요한 목사가 장성기도원을 박차고 나온 후, 1953년 초 목포시 죽교동 391번지에 유달 교회(순복음)를 개척할 때까지, 1952년 1월초에 목포시 남교동 큰 시장 골목상가 2층을 전세 내어 1년 정도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한바가 있어서 이점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는 1957년 9월말부터 사택에서 20여 가정이 모여 기도에 전념하면서부터 잉태되었다. 진성구 장로가 큰 힘이 되어 오늘의 목포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는 장로교회에서 장로안수를 받은 이로서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중에 최요한을 만나 1952년에 상월리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켰고, 1953년에는 자신의 건물 2층을 유달 교회당으로 쓸 수 있도록 하였으며, 1957년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가 개척될 때에는 창립멤버로 전 가족이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1968년에 목포 복음교회로 이적하였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듬해인 1958년에 적산가옥을 개조하여 예배당 16평, 사택 10평을 마련하였다. 이 가옥은 크기가 200평이나 되는 건물로써 교회가 차지한 공간은 왼쪽 가장자리 26평이었다. 1961년에 이 가옥 뒤편 24평을 구매하였다. 이에 최요한은 50평 크기의 석재건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반대하여 1968년에 진성구 협동장로, 1969년에 세 명의 장로들이 목포복음교회로 이적하였다. 최요한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50평 석재 본관건축을 착공하였다.

1971년 말에 1층 50평, 이어서 이층 25평의 석재 예배당의 공사를 완료되었다. 1972년 4월에는 현관을 아치형으로 개조하였고, 1977년 3월부터 3층 25평 증축공사를 시작하여, 총 건평 100평이 완공되었다. 1984년 11월 11일에 26평 아파트 한 채를 목사관으로 구입하였다. 1989년 10월부터 시작하여 교육관 50평을 확장하였다. 1995년 2월 27일에는 산정동 1112-3 대지 1500평을 매입하였고, 1995년 11월 6일에 착공하여 4층 720평의 예배당 건축을 완료하였으며, 1997년 11월 27일에 헌당예배를 드렸다. 1967년에는 고하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고하도 교회 옆 자리에 1971년 감람산 기도원이 설립되었다.

최요한은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목회자3, 장로2(교수1), 사모1, 집사2(안과의사1)>. 동생 최요열은 순복음신학교(현 한세대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한국성서신학교 초창기에 교수와 원룸강의실 겸 예배당이었던 가장동 그리스도의 교회의 담임목사로 있다가 순복음교회로 옮겨가 부천시에 위치한 새소망교회를 맡아 성장시켰다.

최요한은 1992년 12월 29일 은퇴 후 1998년 3월 28일(토)에 소천 하였다.

(5)최요한의 신학적 신념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333-359쪽에 의하면, 최요한은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40여년을 섬기는 동안 줄곧 3생명, 즉 말씀의 생명, 성령의 생명, 성찬의 생명을 선포하였다. 이는 말씀 속에 성령님의 능력이 더해지고, 속죄와 구속을 상징하는 주의 만찬이 더해져야 비로소 생명의 완전성이 확보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믿음을 떠받치기 위해서 최요한은 1년에 몇 차례씩 주일 대예배 때 구약의 성막도를 강단 벽에 걸어놓고 지성소의 언약궤는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고, 그 속에 들어있던 돌비들은 말씀의 생명을,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성령의 생명을, 항아리에 담긴 만나는 성찬의 생명을 예표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생명은 상징이나 기념 또는 형식 그 이상의 것, 즉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이며, 구원과 직결되는 생명이다. 따라서 신약성서교회처럼 기도에 전념하는 동시에 신령의 예배, 진리의 예배, 진정의 예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이 되게 하는 예배를 드릴 것을 강조하였다.

(6)최요한 목사와 전남지역 그리스도의 교회들

1950년대 충청이남지역에서 김은석 목사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1960년대는 힐 요한 선교사와 대전에 세워진 한국성서신학교의 영향력이 상당하였다. 힐의 영향력은 충청권에서 김은석의 것에 못지않았지만, 전남에서는 김은석만큼 크지 못하였다. 반면에 목포교회 최요한 목사의 영향력이 전남에서 점차 커져갔다. 힐 선교사가 은퇴하고 30대 중반의 김찬영 목사가 한국성서신학교의 교장이 된 1970년대부터는 김찬영과 한국성서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전북을 포함한 충청권과 최요한과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전남권의 영향력이 점차 양분되어졌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548-550쪽에 의하면, 최요한 목사는 1946년 4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리(궁산리)에 그리스도의 교회, 동년 10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주포리(석성리 청학동으로 이전)에 그리스도의 교회, 이듬해인 1947년 1월초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에 그리스도의 교회, 1947년 7월에 전남 영광군에 무영 그리스도의 교회, 1948년 3월초 광주 사동에 그리스도의 교회, 1950년에 전북 고창에 그리스도의 교회, 1952년 1월초에 전남 목포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총 7개 교회를 개척하였다.

5년 후인 1957년 10월 1일에 오늘의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 무렵에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 교회를 환원시켰고, 이어서 진도 군내 그리스도의 교회, 신안 매화 그리스도의 교회, 여수 백초 그리스도의 교회도 환원시켜 총 4개 교회를 환원시켰다. 이후 1963년에 목포 고하도 그리스도의 교회, 1969년 해남 상공 그리스도의 교회, 1970년 목포 외달도 그리스도의 교회, 1973년 목포 달리 그리스도의 교회, 그밖에 여수 화정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 충남 금화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총 6개 교회를 개척하였다. 1972년 최수신 전도사의 광주 발산 그리스도의 교회, 1981년 광주 무등산 그리스도의 교회, 1986년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 이상 3곳은 최요한 목사의 지원에 의해서 개척되었고, 새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목포 죽교동 그리스도의 교회, 목포 형제 그리스도의 교회, 이상 3곳은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가 모태가 되어 개척되었다.

이밖에도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 그리스도의 교회, 해남군 화산면 마명리(화산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 해남군 화산면 사포리(화산 반석) 그리스도의 교회, 해남읍 부호리 그리스도의 교회, 신안 압해면 고이 그리스도의 교회, 목포 서남 그리스도의 교회, 영암군 영암읍 평리 그리스도의 교회, 이상 7곳이 최요한 목사의 영향을 받아 환원한 교회 또는 개척된 교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