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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9-16 23:12
최순국 목사(2022.12.29 새로작성)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4,333  

최순국 목사(1933.02.08-2002.09.16)

미국 텍사스 주 포트워스 시에 소재한 브라이트신학대학원(Brite Divinity School)의 이상훈 박사의 ‘우리의 대선배 최순국 목사’, ‘최순국’, ‘북미주태평양아시아인제자들의 약사’에 의하면, 최순국 목사는 1933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교신자였고, 모친은 불교신자였다. 그러나 그는 중학교 1학년 담임교사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담임교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손톱이 모두 뽑히는 고문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사실에 최순국은 깊은 감명을 받았고, 기독교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부모의 종교들은 정의와 평화를 갈망하는 그에게 그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못하였지만, 기독교는 그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최순국은 독립심과 의지가 강하고, 종종 별난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인정이 많았다. 이런 성품 때문에 6.25전쟁 중에는 공산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재일본 한인 34명으로 구성된 학도의용군에 자원입대하여 전투에 참여하였고, 생존자 3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Timothy Lee, “Soongook Choi: Our taesonbae,” Fall/Winter 2002-03 Bulletin(Vol. 72, No 2) of the Disciples Divinity House of the University of Chicago, http://kccs.info/Choi DDH bio.pdf: 3; Timothy S. Lee, “J. Soongook Choi,” http://kccs.info/BIO-Soongook Choi.pdf; Timothy S. Lee, ‘최순국 장학금,’ http://kccs.info/2011 Kagiwada Memorial Sunday.pdf: 10>.

이 일이 있고나서 최순국은 존 J. 힐(John J. Hill) 선교사가 운영한 서울성서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결혼식 주례도 김은석 목사가 맡았다. 이 때문에 김은석 목사의 성경통독메모(1953-58)에 ‘최순국’이란 이름이 몇 차례 나온다. 그는 1953년 8월 4일 존 힐 선교사의 통역으로 창현 함태영 목사가 세운 충남 논산면 신교리교회와 복음중학교를 방문하였고[조동호, <한국의 바울 김은석 목사>(시시울, 2020: 250], 테일러 선교사가 발행한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7년 6월호에 의하면, 최순국은 군입대를 꼭 한 달 앞둔 시점에서 테일러와 함께 1957년 3월 19일 밤기차로 부산에 내려가 이튿날 방송국 설립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알렉스 빌즈(Alex Bills) 가족을 만나 환담을 나눴고, 울산을 거쳐 영양, 삼척, 강릉, 주문진, 38선 이북 고성까지 돌아 26일 화요일 밤에 서울로 돌아온 교회순방 일정을 소화하였다<“To the Uttermost Parts,” For Christ in Korea(FCK), 1957년 6월호>. 1958년 3월 30일 주일에는 리처드 래쉬(Richard Lash) 선교사의 통역으로 김은석 목사가 시무하는 충남 부강교회를 방문하였다[<한국의 바울 김은석 목사>: 228]. 버트 엘리스와 조 세걸키의 1959년 7월 부산방송선교서신에 의하면, 최순국은 해롤드 태일러(Harold Taylor)의 통역관이기도 했다<Bert Ellis and Joe Seggelke, Kilocycles: Korean Broadcasting Mission, July 1959: 2>.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최순국은 6.25전쟁 직후 서울성서신학교에 다니며 그리스도(인)의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테일러의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7년 2월호 내용에 비춰볼 때, 존 힐의 사모 에스더 비반즈(Esther Evelyn Beavans Hill)의 비행 사건으로 선교사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고, 그로 인해 1954년 6월 25일 신학교가 휴교하는 사태에 이른[성낙소, “제21장 두 선교사 귀국과 신학교 휴교와 유무악기파 합동 건,” <기독의 교회와 성낙소와의 관계>, 김종기, 조동호 편집(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2010)] 어느 시점에 최순국은 부모님이 계신 일본으로 건너가 요츠야선교부의 동경성서신학교(1948년 4월 10일 개교, “Bible College Opens in April,” Tokyo Christian, March-April 1948: 1)를 다니던 중에 테일러 선교사 가족이 송월동 기독교회선교부를 맡아 1955년 11월에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테일러를 찾아가 선교부 상황을 설명해 주었으며, 본인도 1955년 12월 31일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테일러에게 신실한 협력자가 절실히 필요했던 시점에 맞춰 최순국이 찾아왔고, 테일러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며 선교사를 도운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Chueh Soog Gook,” FCK, 1957년 2월호>.

테일러는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7년 6월호에서 최순국이 4월 20일에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서 한국군에 입대하였다고 전하면서 자신들이 1955년 11월에 입국해서 직면했던 난관들을 놀랍도록 지혜롭게 처리해준 23살의 젊은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채이스 선교사가 20대 후반의 박판조에게 보인 애정이 훌륭한 미래 그리스도(인)의교회들의 지도자감이란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테일러 선교사가 20대 초반의 최순국에게 보인 애정은 그가 입증한 지혜와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최순국은 이미 서울성서신학교의 학생신분으로서 힐 선교사의 통역을 맡아 일을 했던 경력자였고, 기독교회선교부가 분열에 휩싸였을 때 그 싸움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이었으며, 젊지만 지혜가 많고 테일러에게 헌신적이어서 분열에 휩싸였던 기독교회선교부에 평온을 되찾게 하고, 내국인 목회자들이 자신의 리더십아래서 연합할 수 있도록 도운 공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테일러는 최순국이 1955년 12월 31일에 일본에서 돌아와 자신을 찾아온 일을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섭리하신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To the Army,” FCK, 1957년 6월호>. 테일러 선교사는 1958년 2월호에서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최순국은 미국에 유학하게 될 것이고, 아무 때라도 제대할 수 있다고 소개하였다. 실제로 최순국은 이 무렵에 제대한 것으로 추정된다<“‘Futures’ for the Work,” FCK, 1958년 2월호>.

6.25동란 때 학도의용군이었던 최순국은 미군부대에 편입되어 미 공군사병이었던 데일 브라운(Dale Brown)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최순국이 1959년에 미국에 유학할 수 있었던 데는 데일의 도움이 컸다. 이후 데일은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Disciples of Christ)에서 목회하였다<참고: “Chueh Soog Gook,” FCK, 1957년 2월호에 테일러는 Dale Brown를 Irwin Brown으로 잘못 표기하였다.>. 첨부한 칼라 사진 두 장(이상훈 박사 제공)은 데일 브라운 목사가 촬영한 것들로써 가족사진은 1960년대 초에, 독사진은 1950년대 중반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족사진은 최순국 목사 가족과 데일 브라운 목사 가족이 함께 찍은 것이다.

최순국은 1959년 가을학기부터 시작하여<"The Seminary," FCK, 1959년 5월호: 2> 1961년에 링컨기독대학(현 Lincoln Christian University)에서 문학사(A.B), 1962년에 신약신학을 전공하여 문학석사학위(MA)를 받고, 동년에 목사안수도 받았다. 이어 1965년에 밴더빌트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B.D. 오늘날의 M.Div)를 받고<“Soongook Choi: Our taesonbae,” Ibid.; “J. Soongook Choi,” Ibid.; ‘최순국 장학금,’ Ibid.>, 1966년 8월 1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나서 동년 9월 1일경에 부산에 도착하였다<“Letter 1: Dear Friends in Christ,” Dong’ Yuk, March 29, 1966>. 귀국하여 1969년까지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시무하면서<Korea Evangelistic Mission(KEM) News: “A Letter to Adelphos Christou,” January 1971: 2> 대한기독교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의 설립협의회 회장과 교수 및 제2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최순국은 1964년 8월 26일 조직된 대한기독교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 설립협의회(Korea Christian College Planning Association)의 회장직을 맡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대한기독교신학교는 최윤권 목사의 리더십으로 최순국, 안재관과 같은 링컨기독대학 출신 또는 재학생이 중심이 되어 1965년 3월에 설립되었다. 상임위원에는 안재관, 최윤권(실무 학장), 장성만, 조충연, 최순국, 최요한, 이종만, 임명진, 강병천, 김현숙, 김진문(설립협의회 서기 겸 교무처장), 김규상, 김태수, 구광서(설립협의회 총무), 오현팔, 심영진, 성수경, 양해문이었고, 미국인 고문에 단 드웰트(Don DeWelt), W. L. 제섭(Jessup), 빌 전킨즈(Bill Junkins), 존 피얼스(John R. Pierce), 아이러 리드(Ira B. Read)였다. 대학설립과 동시에 <환원>지도 발간되었다<Soongook Choi, “Reports - Plans Interpretation” of the Korea Christian College Planning Association, 20 November 1965; Leaflets of the Korea Christian College Planning Association, November 1965>.

최순국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복음전도협의회(Korea Evangelistic Association)를 만들었고, 1960년대 동안 격월 선교지 ‘동역’(Dong’ Yuk)를 후원자들에게 발송하였다. 1971년 1월부터는 ‘한국복음전도협의회’를 ‘한국복음선교회’(Korea Evangelistic Mission, KEM)로 이름을 바꾸고, 월간 선교지 ‘한국복음선교회 소식지’(KEM NEWS)를 발송하였다. 최순국은 이 선교회를 기반으로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교수와 목회자와 방송선교사로 왕성하게 사역하였다. 1968년부터 라디오 기독교 방송국의 시간을 사서 최윤권, 김일엽(KEM 라디오방송 담당자)과 함께 방송설교와 ‘이형과 더불어’라는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설교는 서울, 대구, 부산, 이리, 광주에서 주일 오후 5시에, 서울을 제외한 대구, 부산, 이리, 광주에서는 주일 오전 8:30에도 방송이 나갔다. ‘이형과 더불어’는 CBS에서 매주 2회 10분간 방송되었다. 1970년에 송출된 방송결과를 보면, 청취자들로부터 2,729통(평균 매주 52통)의 편지를 받았고, 182통의 전화를 받았으며, 26번 개최된 모임에 297명이 참석하였다. 그 결과 243명이 생애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고, 172명이 침례를 받았다<Korea Evangelistic Mission(KEM) News: “A Letter to Adelphos Christou,” January 1971: 2>.

최순국은 1974년 미국 시카고로 이민하여 10월 20일에 시카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23년간 은퇴할 때까지 섬겼다<“Chicago Christian Church (Korean),” KEM NEWS, vol. 10, no, 3, September 1974: 1-2>. 이 교회도 다른 한인 그리스도(인)의교회들처럼 중도에 그리스도의 제자들 교단에 가입하였다. 유근희 박사(태평양아시아인 사역 실행목사), 노동국 목사(제자들신학원 동문, 일리노이 주 알링턴 하이츠에 소재한 그리스도의 제자들 소속 에버그린 그리스도의 교회 개척 목회자), 이상훈 박사(텍사스 주 포트워스 시 소재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등이 최순국 목사의 영향을 받은 미국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지도자들이다<“Soongook Choi: Our taesonbae,” Ibid.>.

최순국은 1989년 노트르담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시카고 파크릿지(Park Ridge)에 소재한 루터교종합병원(Lutheran General Hospital)의 정규직 원목으로도 사역하였다<“J. Soongook Choi,” Ibid.; “Soongook Choi: Our taesonbae,” Ibid.>.

최순국은 일본에서 당한 인종차별, 한반도에서 겪은 동족상잔의 뼈저린 경험을 거울삼아 일찍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룰 수 있는 인종화합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민족들 간의 분쟁의 아픔을 겪으면서 타민족 공동체들 사이의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최순국은 “이웃을 섬기고, 그들에게 사랑으로 감동을 주며, 평화롭게 하고, 용서를 실천하며, 화해를 도출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나의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신념으로 최순국은 ‘한인제자들교회협회’(Korean Disciples Convocation)를 설립하였고, ‘제자들교회신학원’(Disciples Divinity House)의 동문들인 데이비드 가기와다(David Kagiwada), 조 앤 가기와다(Jo Anne Kagiwada) 등과 합력하여 현재 80여개 교회들이 가입해 있는 ‘북미주태평양아시아인제자들’(North American Pacific/Asian Disciples, NAPAD)을 조직하였다“<“J. Soongook Choi,” Ibid.; “Soongook Choi: Our taesonbae,” Ibid.; Timothy Lee, “In View of Existing Conditions: A Brief History of the North American Pacific/Asian Disciples, 1891-2010,” Discipliana, Spring 2012: 6, http://kccs.info/The History of NAPAD TSL.pdf>.

최순국은 그리스도(인)의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 교단의 총괄 이사회의 회원을 역임하였고, ‘제자들교회신학원’의 이사를 1989-97년에 역임하였다. 그는 또 미국 인디아나 주 인디애나폴리스 시 파티마 연수원(Fatima Retreat)에서 1984년 7월 31일부터 8월 2일까지 개최된 미국 그리스도(인)의교회(Disciples of Christ) 산하 아시아계 미국인 제자들(American-Asian Disciples, AAD)의 제3차 회의 때 회장(소집자)으로 선출되어 아시아계 미국인 교회들을 이끌었다. 또 최순국은 1993년에 결성된 ‘그리스도의 제자들 한국인 목회자회’(Disciples of Christ Korean Fellowship)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봉사하였다. 2000년에는 이 친목회가 ‘한국인제자들교회협회’로 발전되었다.

최순국은 1990년에 찾아온 뇌졸중에도 불구하고 중단하지 않던 사역을 내려놓고 1997년 3월에 은퇴하였다. 은퇴식은 그가 23년간 섬겼고, 한인 교회들에 지도력을 제공했던 시카고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Chicago 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북미주태평양아시아인제자들’(NAPAD)로부터 감사패를 증정 받았으며, 그의 삶과 사역을 기념하기 위해서 '국내사역국'(Division of Homeland Ministries, DHM)에 '최순국장학기금’이 설립되었다. ‘북미주태평양아시아인제자들’(NAPAD) 사역에 소속된 학생들이 정규 신학대학원에서 정식학생으로 등록한 경우에 이 기금을 신청할 수 있다. 최순국은 또 2000년 그리스도(인)의교회 교단에서 평가한 지난 1백년간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36명의 사역자 중에서 아시안 남성으로는 유일하게 선발되었고, 지난 20세기 그리스도의 제자들 100대 목사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시카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창립자이자 대학기독교신학교의 공동설립자인 최순국 목사는 2002년 4월 14일 알링톤 하이츠 소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서울기독대학교로부터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점을 감안하여 서울기독대학교 이강평 총장이 직접 시카고를 방문하여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조동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2016): 250-58].

이상훈 박사는 ‘가기와다 주일, 의장의 메시지’(“Kagiwada Sunday, Moderator’s Message”)이란 글에서 “슬프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성도들의 사랑을 받고 교단의 존경을 받는 한 목사는 60대에 뇌졸중을 일으켜 반쯤 마비되었습니다. 입원한 그는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매일 고통스러운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어느 날 그 병원의 같은 층에 또 다른 남자가 도착했는데, 역시 반쯤 마비되었지만 훨씬 더 젊은, 아마도 40대였을 것입니다. 그 남자는 희망을 포기하고 물리치료를 거부하면서 의기소침해하였습니다. 그 젊은 남자에 대해 알게 된 목사님은 그에게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를 만난 목사님은 자신과 같은 나이 든 남자도 포기를 거부하고 있는데 젊은이가 너무 쉽게 포기한다고 꾸짖었습니다. 며칠 후, 그 젊은 남자는 물리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다리 운동을 하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불굴의 정신을 발휘한 사람은 다름 아닌 최순국 목사였습니다”<Timothy Lee, “Kagiwada Sunday, Moderator’s Message,” Tell It, August 2011; http://kccs.info/2011 Kagiwada Memorial Sunday.pdf: 1>.

최순국 목사는 2002년 9월 16일 별세 하였다. 사모 손명희로부터 미동과 데이비드(선동) 두 아들을 두었다<“Soongook Choi: Our taesonbae,”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