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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8-08 23:31
김은석 목사 - 자료모음코너
 글쓴이 : KCCS
조회 : 2,313  
   http://kccs.pe.kr/main05.htm [458]
   http://kccs.pe.kr/main05.htm [408]

11)김은석 목사가 끼친 충격파

김은석은 그의 생애 마지막 17년을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몸 바쳤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해낸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초기 교회에 큰 부흥을 만들어낸 것처럼, 1950년대 김은석과 그를 작은 예수로 생각할 만큼 그를 신뢰하고 따랐던 동료들이 해낸 수고와 헌신은 충청도와 전남에 70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게 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공로가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김은석 목사와 일부 추종자들은,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는 마태복음 10장 37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할 만큼 성서주의로 살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그들의 가족들이 입은 고통이 상당히 컸다.

김은석의 주일날 성서통독은 평일의 성서통독과 그 내용이 달랐다. 그는 주중에 읽던 책을 계속 읽지 않고, 다른 책들(욥, 시편, 잠언, 전도, 아가)을 읽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책이 욥기서였다. 김은석은 1954, 56, 57년에 주일마다 욥기를 읽었다. 이 욥기서 40장의 여백에 이렇게 적었다.

    1955년 4월 17일 주일... 금일도 섭섭한 말을 듣게 되는 것은 김명석 형제 부인이 육적생활 불만으로 나를 원망한다 하며 또 김은성이는 활교회를 못가겠다는 뜻을 말함. 그 안해가 불만 언(言).

이 기록은 출가(出家)를 선언한 김은석 목사와 그의 동료들이 그들의 가족에게 끼친 충격이 얼마나 컸는가를 가늠케 한다. 자녀들은 물론이고 사모들의 원망과 원성이 적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1954년 4월 김은석의 폭탄선언이 김완례 사모를 충격에 앓아눕게 만든 점 등은 당시의 정황을 충분히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김은석 목사를 추종했던 동료들 가운데는 남성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여성들도 꽤나 많았다. 이점에 있어서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루디아, 브리스길라, 뵈뵈와 같은 여성 동료들의 사역은 사도 바울의 선교에 큰 동력이었다. 여성 동료들의 사역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란 점에 있어서는 김은석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김은석 목사가 꽤 많은 여성 동료들의 방에서 성서를 통독하고 있는 점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아마 그들은 김은석의 집회와 성서연구회를 돕고, 성서토론에 참여했거나 식사와 세탁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과의 잦은 접촉은 말 많은 사람들에게 루머의 빌미를 제공한다. 김은석의 몸을 아끼지 아니한 헌신과 희생으로 얻은 대가는 값으로 매길 수 없으며, 헤라클레스처럼 무거운 운명의 짐을 짊어지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성실하게 수행해냈음에도 불구하고, 호사다마란 말이 있듯이, 불행하게도 말년에는 악성루머에 휩싸이게 되었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 ‘강신규’란 여성의 이름이 1954년 5월 1일부터 시작되어 총 26회 등장한다. 강신규는 김은석의 충실한 여성 동료이자 김완례 사모의 올케의 올케 또는 올케의 아들인 김은영 목사의 외숙모였다.

김은석은 말년에 창병(瘡病)으로 고생하였다. 그 때 그는 창병의 치료를 위해서 ‘강신규’의 거처에 머물며 간호를 받게 되었다. 그로인해서 악성루머가 퍼졌고, 루머의 사실여부를 밝히고자하여 모인 50여명의 목회자들 앞에서 김은석은 시인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 성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를 사랑했던 많은 성도들은 이 사건을 연민과 동정으로 받아드렸고, 일생을 가시밭길을 걸으며 복음전파만을 위해서 자기 자신과 가족까지 돌보지 않았던 그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 사건은 김은석 자신에게도 극복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루머는 진실 여부를 떠나서 치명적이기 때문에 악성이다. 예수님도 여러 가지 악성 루머로 인해서 재판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뒤집어쓰신 죄목은 신성을 모독한다는 것과 민중을 선동한다는 것이었으며,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서 세금납부를 거부하고, 신성을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몇 가지 죄목들을 이유로 십자가형에 처해지셨다. 바울도 전염병 같은 자,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는 자,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는 죄목으로 4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였으며, 석방되었다가 4년 후 67년경에 로마의 황제 네로 때에 목 베임을 당하였다.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십자가형만큼은 면했다.

김은석 목사가 창병(瘡病)에 걸렀을 때 자택에 들어가지 아니한 것은 정말 아쉬운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년에 창병으로 고생할 때 집에 들어가 김완례 사모의 돌봄을 받지 않고, 강신규 자매에게 간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째, 김은석은 김완례 사모를 편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성서통독메모에서 김완례 사모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씨’자가 붙어 나타난다. 혹시 연상이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늘 존대하였다.

둘째, 김은석은 사모 김완례와 가족들에게 평생 무거운 짐만 짊어지웠다.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고, 전도 집회와 성서강의로 인해서 한 달에 한 번도 집엘 들어가지 못하였다. 집회와 순방이 많았기 때문이다. 1954년 4월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즉 출가선언, 교회사임, 이사로 인한 김완례 사모와 가족이 받은 충격을 언급하였듯이, 비록 그 후로도 가족관계에는 전혀 문제가 없긴 하였지만, 말년에 창병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김은석으로서는 차마 사모 김완례에게 자신의 병든 몸을 의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모의 건강이 평소 좋지 않았던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셋째, 강신규는 김은석의 집회를 돕기 위해서 자주 동행했던 전도희, 김숙명 등 여러 여성들 가운데 한 명으로서 평생을 주를 위해 헌신봉사하신 존경하는 김은석 목사의 병든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 집으로 모셨던 분일 것이다. 김은석 목사나 강신규 자매 사이에 로맨스를 개입시키는 것은 매우 불경한 일이다. 김은석은 이 때 이미 60세의 나이였고, 일생동안 부부생활을 멀리하고 살았던 분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 에로스의 관계로 보려는 것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라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은석은 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고, 날아드는 루머의 돌 세례를 온몸으로 받았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기정사실처럼 받아드리게 만드는 또 다른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과연 김은석 목사는 자신과 세상과 끝없이 싸우며 괴로운 가시밭길을 걸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지상의 모든 고뇌를, 지상의 모든 수고를 그에게 짐 지웠으나, 저 장렬한 최후의 날까지 그는 이 수고를 훌륭하게 참아내었다. 비록 그는 한 알의 밀알로써 썩어졌지만, 그로 인해서 많은 생명의 열매들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지속적으로 맺히고 있다.

12)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

1945년 오데골 장로교회로부터 제명이 된 후 추종하는 교인들과 함께 이복춘(김규상 목사의 모친) 집사의 디귿자 기와 대청마루로 예배처를 옮겼다. 김은석은 이복춘의 큰방에서 거처하였다. 가족은 서울 북아현동에 머물렀다. 오랜 지기 박점상도 이웃하여 살았는데, 박점상의 증언에 의하면, 김은석은 1946년 박점상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이 무렵 누에를 기르던 잠실터를 매입하여 예배당을 짓고 교회명칭을 고민하던 중,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가 309쪽에 소개한 김정만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정찬성의 제안으로 이름을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로 지었다.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도 1946년에 시작되어 충청이남지역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의 잠실(산실)이 되었다.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는 1946년에 창립되었으며, 제1대 김은석을 시작으로 김상호, 함태영, 김청자, 김재중, 김평수 등으로 이어졌고, 현재는 한명호 목사가 현대식 2층 건물로 옮겨 목회를 하고 있다.

대전 성화교회 오재건 장로의 <신앙체험기>에 의하면, 김교인 장로는 대지 500평을 하나님께 바쳐 부강교회를 짓게 하였으나 후대의 목회자들이 교회대지를 여러 명목으로 조금씩 매도하여 1976-77년경에는 147평만이 남았다고 한다. 이 조차도 노리는 사람이 많아 여러 번 빼앗길 뻔했던 것을 김태수와 오재건의 노력으로 되찾은바 있어서, 김태수 목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이 대지를 오재건 장로에게 관리를 위탁하였으나 오재건은 관리에 어려움이 있음을 알고 재단법인 크리스천 미션에 넘겨 안전하게 관리되도록 하였다.

13)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

1951년 봄에 광주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가 조직되고, 김은석의 주례로 장주열, 최요한, 김재순, 창현 함태영, 이신(이만수), 김동열이 목사안수를 받은 이후 제1회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가 1959년에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 성낙소, 심영진, 장성만, 최요열, 이신 등 다수가 참석하였다. 1961년 8월 17일 부강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가 개최되었으며, 주제는 ‘신약교회로의 환원’이었다. 이 모임에 힐 요한, 장성만, 박재관, 김동열, 이종만, 정인소. 김찬영. 김성철, 심영진, 이신, 장주열, 성낙소, 안일승, 고재윤 등이 참석하였다. 1962년에는 신탄진 천막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가 개최되었고, 60년대 중반에는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가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 딕 래시, 힐 요한, 최용호, 힐 제인, 김중현, 고광석, 천명화, 장주열, 노봉욱, 임춘봉, 장성만, 최요한, 조규석, 이종만, 안일승 등이 참석하였다.

3. 김은석 목사의 동료들

김은석의 동료들은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여기에 다 일일이 거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자료가 가능한 인물들만 선별해서 소개하려고 한다. 이들 가운데는 김명석(김성철 목사의 친부), 박점상, 김교인(1956-57년경에 순복음교회로 이적), 신현창, 김재순, 최춘선<김포교회, 사회사업가. 소천 전 30여년을 맨발로 거리와 지하철에서 전도. 1951년 6월 김은석, 정찬성과 함께 충주시 동양면 조동(동량)교회 설립>, 정찬성(순복음으로 이적), 김상호(순복음으로 이적), 김태수(부강교회 김교인 장로의 아들), 김재순(부강교회 김교인 장로의 아들), 함태영, 이신, 강순명(천혜 경로원), 이원노, 김정만, 심영진, 장주열(최요한의 큰 동서), 최요한, 김동열(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 장성만, 김은영, 고광석, 임남규, 전도희, 등 너무 많아 다 기술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