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CCS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
main_5.GIF main_6.GIF main_7.GIF main_8.GIF

 

 

 

 

 

 

 

 

 

 
작성일 : 14-08-08 23:13
이신 목사/신학박사(1927.12.25-1981.12.17)
 글쓴이 : KCCS
조회 : 3,528  

이신 박사 자료모음코너 - http://kccs.pe.kr/main07.htm

이신 목사/신학박사(1927.12.25-1981.12.17)

이신의 자녀들이 펴낸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에 의하면, 이신(李信, 1927-1981)은 전남 돌산 출신으로 그림그리기를 좋아하여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부산 초량상업학교(부산상고)를 나와 은행원으로 일하면서도 예술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서 얻어진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갈구는 마침내 그로 하여금 신학의 길을 걷게 하였다. 1945년에 결혼한 이신은 이듬해 1946년에 미술도구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50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충남 전의에 전도사로 부임하였으나 6․25전쟁으로 고향에 피신했다가 이듬해 1951년 봄에 김은석이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공부와 집회에 참석하여 성령의 역사에 감동을 받았고, 신약성서교회로 돌아가자는 신약성서교회운동과 일치운동에 공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1951년 늦봄에 광주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가 조직되어 김은석이 회장으로 뽑혔고, 목사안수식도 있었다. 이때 이신도 장주열, 최요한, 김재순, 함태영, 김동열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동년 5월에 함태영이 광주 사직동공원 및 방송국 입구에 있던 일본 적산가옥 2층을 매입하여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개교하였는데, 이때 이신은 교수로 섬기는 일을 처음 시작하였다. 또 이때 이신은 받침에 헬라어로 ‘로고스’ 글자를 삽입한 ‘메노라’(일곱 가지 등대) 문양과 교명을 새긴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 현판을 제작하였다. 10여년 후 이신은 대전 가장동의 한국성서신학교의 현판도 동일한 문양으로 제작하였다.

1951년 가을에 함태영목사가 충남 논산군 부적면으로 이사하여 충곡리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교리 그리스도의 교회(현 금성교회)를 개척하였고, 이신 목사도 정찬성이 1951년 5월 15일부터 10월까지 제1대 목회자로 섬긴 합송리 그리스도의 교회<이흥식 전도자, 김확(학)실 자매가 조남철의 가정에서 1950년 3월 19일 개척>로 이주하여 광주에서 운영하던 신학교를 옮겨와 김은석, 함태영과 함께 운영하였고, 환원신학 잡지, <로고스>를 발행하여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배포하였다. 이 무렵에 이름을 이만수(李萬修)에서 이신(李信)으로 고쳤다.

이신이 부여 합송리 교회에서 목회할 때, 타 교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특별한 외적 역사, 즉 사도들과 같은 특정인에게 주어졌던 신유, 예언, 방언 말함과 같은 특별한 은사들이 신약성서의 완성과 신약교회창립이후에도 여전히 특정인에게 주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끊겠는가에 대한 견해차이, 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세례의 본질이 신유, 예언, 방언과 같은 특별한 은사인가, 아니면 구원의 약속을 보증하고 인치시며 인도하시는 성령의 내주 동거하심인가를 놓고 목회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이신을 포함하여 김은석을 추종하던 많은 이들은 전자, 즉 특별한 은사가 지속되고 있다는 성령론을 공유하였으나 선교사들과 성낙소를 비롯한 일부 목회자들은 후자 즉 특별한 은사가 끊겠다는 정통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성령론을 공유하였다. 이 문제는 부여 신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서울 신학교에서도 지속되었다.

이 논쟁으로 인해서 정찬성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탈퇴하여, 1953년 4월 8일 광주에서 개최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 때, 부강 교회를 잠시 맡았던 김상호와 함께 (김교인 장로는 그보다 3-4년 후에) 이적하여 1955년 4월 27일에 목사안수를 받고 기하성의 제1호 목사가 되었다. 이 무렵에 이신 목사도 부여 합송리를 떠났고, 김광수 목사/장로가 1954년 8월 7일 합송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임하여 1956년 12월 30일까지 섬겼다. 최요한 목사도 이때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 1953년 초부터 유달 교회(순복음)를 개척하여 시무하였고, 1957년 9월까지 목포 복음교회를 담임하다가 1957년 10월 1일에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함으로써 다시 환원하였다. 1960년대 초에는 최요한의 동생 최요열(순복음신학교 제1회 졸업)이 순복음교회로 넘어갔다.

이런 일련의 문제로 부여 교회를 사임한 이신은 전남 영암 상월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다시 상경하여 힐 선교사를 만나 신학교를 도와 일하면서 동역하였다. 이신은 1953년 힐과 함께 함태영이 교장 겸 교목을 맡아 옮겨간 경기도 광주 분원 숭실중학교를 격려차 방문하였다. 함태영은 동년 7월 13일에 사모 정용옥과 사별한 후 자신이 설립한 충남 논산 신교리 소재 교회와 복음중학교를 떠나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 후 이신은 충북 괴산에 있는 수리교회로 옮겨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이 무렵의 상황이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 나온다. 이신의 이름은 1954년에 2회, 57년에 11회 나오는데, 이신은 김은석과 함께 목포 유달 교회(순복음)와 본인이 시무하는 수리교회에서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강좌를 열어 가르치고 있었다. 이신과 김은석은 1954년 6월 14일부터 최요한의 목포 유달 교회(순복음) 예배당에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처’라는 현판을 붙어놓고 백일성경연구집회를 시작하였는데, 이틀 뒤 16일(수) 이신의 부친이 별세하였다. 1955년 2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수리교회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가 있었고, 1957년에 8-9월에도 목포 유달 교회(순복음)와 수리교회에서 가르쳤다. 이신과 김은석 등의 헌신적인 노력과 우정으로 9월 집회 후에 최요한 목사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다시 환원하였다.

최요한 목사는 1946년 2월초에 김은석을 만난 이후로 1947년 7월에 영광 무영교회를 환원시키는 등,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리에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 10월초에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에 석성(청학동) 그리스도의 교회(손불면 주포리에 세웠던 것을 이전), 1947년 1월초에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에 평산 그리스도의 교회(1951년 음력 8월 13일부터 거주한 박점상은 자신이 건축하여 개척하였다고 증언함), 1948년 3월초에 광주 사동 그리스도의 교회, 1950년 전북 고창에 고창 그리스도의 교회, 1952년 1월초에 전남 목포시 남교동에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1951년 늦봄에 광주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로부터 동서 장주열, 김재순, 함태영, 이신, 김동열과 함께 목사 안수까지 받았던 최요한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1953년 초에 목포시에 유달 교회(순복음)를 개척하였고, 1955년 9월 25일에는 목포 복음교회를 담임하였다. 그러던 최요한 목사는 1957년 8-9월에 김은석, 이신 등이 인도하는 집회들을 통해서 복귀하기로 마음을 확정하고 10월 1일 전남 목포시 대안동 11번지에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최요한 목사가 돌아와 오늘의 목포교회로 발전시킨 데에는 이신과 김은석 등의 헌신적인 노력과 우정과 신념과 확신의 공유(공감)가 있어서 가능하였을 것이다.

또 이신은 1957-58년에 1951년 광주에서 만나 교제한 함태영이 전주에 개척한 전주 그리스도의 교회와 용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열고 침례를 베풀었다. 함태영의 장손 함동진도 1958년 6월에 이신으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이신은 1959년과 60년 전반기에 부산 문화방송을 통해서 매일 밤 10시에 방송설교를 내보냈다. 이때 행한 설교들을 모아 기독교문사를 통해서 1980년에 펴낸 책이, <산다는 것, 믿는다는 것>이다. 이 무렵 알렉스 빌즈(Alex and Betty Bills) 부부가 부산에서 방송국으로부터 방송시간을 사서 선교방송을 내보고 있었다. 알렉스 빌즈 부부는 1956년에 부산에 입국하여 기독교 라디오 방송국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그를 돕기 위해서 입국한 몇몇 선교사들과 뜻이 맞지 않아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는데 끝내 실패하자 1961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전 부인 에스더 비반즈(Esther Beavans)의 가출로 1955년 한국을 떠났던 힐 요한은 선교사 제인 키넷트와 재혼 후 1959년 여름에 부산으로 입국하였다. 두 달간 알렉스 빌즈 가정에서 머물다가 대전으로 올라와 김은석, 심영진, 김태수 등과 함께 그해 12월 1일에 대전성서신학교를 지금의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당에서 20여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960년에 이신이 부산에서 교수진에 합류하였고, 교통편을 고려하여 학교를 대전역에서 가까운 선화교회로 옮겼다.

이신은 이후 서울 돈암동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였고, 1965년 9월부터는 대한기독교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희랍어를 가르쳤으며, 교회를 사임하고 1966년 9월에 마흔 살의 늦은 나이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림을 그려 학비를 조달하고, 고국에 있는 가족의 생계까지 짊어지는 고학 끝에 1967년 5월에 네브라스카(Nebraska) 기독대학을 졸업하고, 8월에 드레이크(Drake)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드레이크대학교를 한 해 동안 다니다가 1968년 9월 밴더빌트(Vanderbilt)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옮겨 1969년 12월에 신학석사학위, 1971년 5월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귀국직후 삼선동의 서울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임했다가 사임하고 자신이 1958년 6월에 전주 용진교회 부흥회 때 침례를 베푼 창현 함태영의 장손 함동진과 함께 종로2가 한국기원 건물 강당에서 서울기독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혜화동으로 옮겨 1973년까지 지속시켰다. 이때 함동진은 주보발행과 기타 문건을 필경 발행하였다. 이신은 또 월 2회식 회원들이 순차적으로 돌아가며 주제를 발표하고 토의를 하는 ‘포이에티스트’라는 학술모임을 결성하고 이끌었다. 이 모임에 함동진(서기, 일신제강주식회사), 강성기(효광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광주 및 부여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에서 수학), 김소영(시인, 상록서점운영), 김응삼(호남정유주식회사 훈련과장), 김태수(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방하식(홍제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 장로, 중앙일보사 조사부 부장, 미국이민), 안광남(철학인), 안동수(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최승(서울영어학원장), 윤기열(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후일 기독교대한복음교회로 이적), 김송자(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미국이민) 등이 참석하였다.

1975년 여름 명륜동 산동네의 무허가 집이 시에 의해서 헐리자 수리교회로 내려가 1978년까지 목회하다가 서울 원효로의 친척집에 머물렀고, 1981년 열악한 식사와 주거 환경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설교, 강의, 번역 등의 일을 강행하다가 병을 얻어 12월 17일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서 소천 하였다.

이신은 1951년 이후 줄곧 1950년대에 김은석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1960년대 전반기에 한국성서신학교(전 한성신학교)와 대한기독교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에서 가르쳤고, 목회와 방송선교활동을 겸하였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강사(문화신학),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윤리학), 그리스도대학교(히브리어 및 신학), 대한기독교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 조직신학), 순복음신학교 등에서 강의하였고, 윤성범의 ‘한국종교사학회’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방송설교를 묶어 만든 <산다는 것, 믿는다는 것>이 있고, 번역서로는 니콜라이 베르자이예프(N. Berdyeav)의 <노예냐 자유냐>와 소천 후 변선환 박사가 번역을 마무리 짓고 출판한 베르자이예프의 <인간의 운명>이 있으며, 유고집으로는 <이신의 슐리어리즘과 영의 신학>과 <이신 시집: 돌의 소리>가 있다. 이밖에도 1974년 3월 25일자에 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 1980년에 출판된 <기독교대백과사전>에 실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전개,” 순복음교회 청년 선교지 <카리스마>에 기고한 “카리스마적 신학,” “삶과 죽음,” “이단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공직으로는 1972년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 회장, 1979년 한국기독교신학회 회장을 각각 역임하였다.

이신 목사의 업적은 한국적 그리스도의 교회의 설립, 곧 성서가 가르치는 신앙과 교회의 원형태를 회복하여 한국적 토착화 그리스도의 교회를 만들려고 한데 있다. 그는 설교 때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논하였고, 종이에 무언가를 끌쩍일 때면 항상 “근본”이라는 단어를 먼저 적어놓고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서재룡 14-10-06 07:14
답변 삭제  
합송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흥식 전도자가 개척당시 부여교회라고 하였으며, 후에 개칭하였습니다. 합송교회 연혁을 보면

1950, 03, 19: 조남철씨 가정에서 시작(창립교역자: 이흥식, 김학실)
1951, 05, 15: 정찬성 목사(1대)
1951, 11, 00: 이신 목사(2대) 예배당 착공
1954, 07, 26: 김광수 목사(3대) 예배당 완공, 사택착공
1957, 03, 00: 한도석 전도자(4대)
1960, 10, 03: 김재환 전도자(5대)

그리고 김세복 선배의 교회사 101쪽에 "부여 그리스도의 교회"란에도
동일하게 나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