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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7-08 11:16
김교인(1890-1970) 장로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340  
김교인 장로(1890-1970)

김교인(金敎人)은 김은석 목사를 모셨던 부강 오데골 장로교회의 장로였다. 민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한문성경을 읽고 깨우친 후에 전도인 활동을 하고 선교사로부터 생활비보조금을 받다가 1936년에 부강으로 이사하여 양약방을 열었다. 오데골에는 김교인 장로가족과 김규상의 모친 구봉례 집사와 작은 어머니 정도가 모이는 장로교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를 끌고 나갔다.

1944년 집안에 어려움이 있어 부인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노회가 열려 참석하였다가 김은석을 소개받아 1945년 가을에 담임목사로 모시게 되었다. 김은석은 부임하자마자 100회 집회를 선언하고 시행하여 큰 부흥을 일으켰는데, 노회로부터 자제하라는 명령이 시달되었다. 이에 굴복하지 않자, 노회는 김은석을 제명하였다. 이 일로 김교인은 김은석, 정찬성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고, 1946년에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대전 성화교회 오재건 장로의 <신앙체험기>에 의하면, 김교인은 대지 500평을 하나님께 바쳐 부강교회를 짓게 하였으나 후대의 목회자들이 교회대지를 여러 명목으로 조금씩 매도하여 1976년경에는 147평만이 남았다고 한다. 이 대지를 김태수 목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오재건 장로에게 관리를 위임하였고, 오재건은 관리에 어려움을 느껴 크리스천 미션 재단에 넘겨 관리하게 하였다.

김교인은 1956-57년경에 순복음교회로 이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에 김교인은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김교인은 최요한이 1946년 10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주포리에 개척하였다가 그 이듬해인 1947년에 함평면 석성리 청학동으로 옮겨 김교인 앞으로 등기된 땅 위에 세운 석성 그리스도의 교회를 순복음교회로 이적 시켰고, 추후 이 교회에 700평 땅을 바쳐 50평 예배당을 짓게 하였다. 이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서 1956년 12월 13일 이후에 김교인과 석성리 청학동 그리스도인 집회소와 신생동 교회, 그리고 이들 교회들을 인도했던 노의수 집사(전도사)에 대한 언급이 모두 끊겠다.

순복음교회로 이적할 당시 김교인은 이미 서울로 거주지를 옮긴 상태였다. 김은석의 1956년 7월 16일(월)자 메모에 의하면, 김교인은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산18번지에 살고 있었다. 서울에서 그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섬겼으며, 1970년에 숙한으로 신촌교회에서 소천 하였다. 사모 김정렬로부터 김재순 목사, 김태수 목사, 김철수 목사, 김복수 집사, 외손자 엄규석 목사 등을 두었다.

큰 아들 김재순(1922-1958) 목사는 해남, 영광, 함평, 금동(광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김은석 목사의 기록에 의하면, 1958년 2월 26일 광주에서 소천 하였다. 김태수 목사는 김은석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고, 1955년 3월 3일 힐 요한이 교장으로 있던 서울성서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으며, 50년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와 60년대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교수(통역)를 역임하였다. 70년대 중반에 미국에 이민하여 LA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겼다. 김철수 목사, 엄규석 목사도 LA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겼다.


김교인(1890-1970) 장로

김교인(金敎人)장로는 김은석 목사를 부강교회로 초빙했던 분으로 충북 청원군 사주면 농촌리 217번지에 출생하였다.

부친이 술로 가산을 세 번이나 탕진하고 있던 차에 민선교사라는 분이 찾아와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였다. 그 때 부친께서 묻기를, "예수를 믿으면 술을 끊을 수 있는가?"고 하였다. 선교사가 그렇다고 하자 즉시로 부친이 믿겠다고 결심하였고, 아버지와 김교인, 그리고 세 동생이 모두 상투머리를 자르고 그 자리에서 술독을 깨쳐 버리고 담배대를 아궁이에 던져 버리고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문중에서는 난리가 났다. 김교인의 집이 종가집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중에서 재산을 다 빼앗아 버려 김교인과 동생들은 금전품을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민선교사가 사람을 보내어 김교인을 불렀다. 그는 김교인에게 전도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김교인이 "내가 무엇을 알아야 전도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니까, 성경책을 내놓으면서 이렇게 저렇게 전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 성경책은 국문으로 된 사복음서였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어서 한문으로 된 성경이 있으면 달라고 하여 한문성경을 읽게 되니,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후 전도를 하고 선교사로부터 생활비를 받게 되었다.

전도인이 되어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 오록골에 교회를 세웠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 1936년에 부강으로 이사를 하였다. 부강에서 양약방을 열었는데, 그렇게 잘될 수가 없었다. 그곳 오데골에 5-6명(김교인 장로가족, 김규상 목사 모친 구 집사, 작은 어머니)정도 모이는 장로교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를 끌고 나갔다.

1944년 집안에 어려움이 있어 부인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노회가 열려 노회에 참석하였더니, 광고시간에 서울에서 훌륭한 목사님이 오셨는데, 모실 교회는 모시라고 하였다. 집에 돌아와 사모와 의논하고 결정하여 1945년 가을에 목사님을 모시게 되니, 그분이 바로 김은석 목사였다.

김은석 목사는 부임 첫날부터 부흥집회를 열었는데, 그 날부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교회가 놀랍도록 부흥하였다. 그러나 부흥회 일로 김은석 목사가 노회로부터 파면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김은석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100회 집회를 선언하고 시행하여 큰 부흥을 일으켰는데, 노회로부터 자제하라는 명령이 시달되었다. 이에 굴복하지 않자, 노회는 김은석 목사를 제명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김교인은 김은석과 함께 나와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다. 사모인 김정렬은 손 대접하기를 수도없이 하였는데, 부강교회를 다녀간 사람치고 그분의 대접을 받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갖은 헌신을 다한 분이었다. 김교인 장로는 1970년 숙한으로 신촌교회에서 소천하였다.

자녀로는 김재순 목사, 김태수 목사, 김철수 목사, 김복수 집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