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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7-08 11:15
김은석 목사 - 자료모음코너
 글쓴이 : 조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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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의 김은석 목사

전술한바와 같이 1955년에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65개였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가 324쪽에서 인용한 <기독교 연감(1957)>에 의하면, 1956년 충청이남지역인 충북에 13개, 충남에 6개, 전남에 17개, 총 36개의 교회가 있었다. 힐 요한은 1972년에 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약사”에서 1949년 필운동교회에서 수업이 이뤄진 한국기독성서신학교의 학생이 70여명에 이르렀고, 이후에 교회들이 “우이동, 김포, 미아리, 신탄진, 부강, 심지어는 광주, 목포, 부산에까지 세워졌다. 김은석 목사는 나중에 세워진 이들 교회들 가운데 상당수를 세우는데 공헌하였고, 미 공군 군목, 할 마르틴을 통해서도 교육과 계몽이 상당히 이루어졌다.”고 회고하였다. 이는 김포(최춘선,1950년대), 신탄진(정찬성,1948), 부강(김은석,1946), 광주(최요한,1948;함태영,1951), 목포(최요한,1957)에 세워진 교회들이 김은석의 공헌으로 세워졌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김은석이 미국 공군 군종 할 마르틴(Hal Martin)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게 되었다는 증언이 있으나 가능성이 낮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는 “김은석 목사와 충청 이남의 자생적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324-5쪽의 글에서 1946년부터 63년 1월까지 17년간 이뤄진 김은석의 활동의 산물로써 충청이남지역의 교회들이, <기독교 연감(1965)>을 인용하여, “1964년 충북에 16개 교회, 충남에 19개 교회, 소계 35개 교회, 전남에 24개 교회, 전북에 1개 교회, 소계 25개 교회, 도합 60개 교회”였다고 적고 있다. 1956년에 36개였던 것이, 힐 요한에 의해서 대전시 서구 가장동 21-5번지에 최초의 한국성서신학교 교사가 지어지던 1964년까지 만 8년 만에 24개가 더 늘어나 60개가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0년 후, 김찬영에 의해서 한국성서신학교가 한성신학교로 개편된 지 만 4년이 지나고, 협의회와 총회로 나눠지기 만 5년 전인 1985년에 발행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 교역자 수첩>을 인용하여, “충북에 31개 교회, 충남에 38개 교회, 소계 69개 교회, 전남에 58개 교회, 전북에 13개 교회, 소계 71개 교회, 도합 140개 교회”였다고 적고 있다. 20년 만에 충청이남지역에서만 80개가 더 늘어난 숫자이다. 이 괄목할만한 발전은, 다수의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교적을 타 교단으로 옮겨간 점을 고려해 볼 때, 실제로 세워진 교회들은 이보다 월등하게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충청이남지역에서 이뤄진 괄목할만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발전은 1946년에 환원하여 1963년 1월 21일 소천 때까지 17년을 섬긴 김은석의 공로가 가장 크다. 여러 증언과 정황으로 볼 때, 김은석이 김교인 장로의 초청으로 부강 오데골 장로교회로 부임한 것은 해방직후인 1945년 가을이었다. 김은석은 부임하자마자 100일 집회를 개최하였고, 이때 성령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으며, 노회의 자제하라는 권고를 무시함으로써 제명되었다. 1801년 미국 켄터키 주 케인 리지(Cane Ridge)에서 대부흥회를 주도하였다가 노회로부터 제명당하여 1804년에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한 장로교 목사 발톤 스톤에게 닥친 동일한 상황이 한국의 발톤 스톤이라 부를 수 있는 김은석에게 닥친 것이었다. 박점상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1946년에 김은석은 박점상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여, 동년에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시작하였다. 이때로부터 한국의 사도 바울 김은석은, 마치 바울이 주후 46년부터 63년까지 선교여행을 통해서 키프로스, 터키, 그리스,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세운 후 장로를 택하여 목회자로 삼은 것처럼, 1946년부터 63년까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와 한국성서신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육하여 파송함으로써 충청이남지역에 수많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세워지도록 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는 충청이남지역 최초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요람이요, 이동 신학교였다.

1)신화신학 성경연구회

박점상 목사에 의하면, 1946년에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가 시작되었다. 김은석은 부강에서 병원을 개업한 신현창 장로와 더불어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개설하였다. 박점상은 1946년에 김은석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지만, 이듬해인 1947년에야 부강으로 내려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일하면서 부강교회 건축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정찬성 목사는 1946년에 공부한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제1기생으로 알려져 있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310쪽에 실린 “신화신학과 제자 양육”에 의하면,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는 처음에 ‘경천학’이라 불렸다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의 장이라는 의미”로 신화신학으로 개명하였다. 김은석이 ‘경천’이란 용어를 즐겨 사용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그가 10여년 후인 1957년 8월 26일(월)자 성서통독메모에서 “바울이 경천애인 생활한 것을 보고” 자신이 실천한 경천애인의 삶의 고달픔을 위로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에 최춘선, 김영원, 김영숙, 이종만, 설하운, 태일러, 박은병이 집에 왔고, 김은영, 최근수, 이신, 김윤구, 김영애, 고광석, 임온년이 다녀갔는데, 이들 동료들을 접대해야 했던 사모 김완례의 불만이 여간 크지 않았다. 이 딱한 사정에 대해서 김은석은 고린도전서를 읽던 중에 “내가 크게 각성을 가지게 된 것은 4장 9절과 4장 11절 이하 바울이 경천애인 생활한 것을 보고 위안 받음. 지금 날마다 집에 당함은 생활난입니다.”라고 적었다.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초기에 공부했던 목회자들은 정찬성, 장주열, 김명석, 김재순, 최요한, 김상호, 구광서, 박점상, 김정만, 창현 함태영, 김동열, 이원노 등이었다. 10여년이 지난 1955년 4월 12일(화)자 성서통독메모에 의하면, 소수교회당에서 진행된 백일성경연구집회에 참석하여 당일 4시까지 공부한 사람들 중에는 “유경히, 곡봉예, 전도희, 최옥순, 이혜순, 정히순, 김옥히”(이상 여자), “이원노, 박장봉, 차대훈, 나연찬, 김명석, 김웅석”(이상 남자)이었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 의하면, 성경연구집회들에 참석한 인원이 평일 10-20명, 주말 수십여 명에 달했다.

이밖에 김교인 장로의 아들 김태수, 김철수, 김명석의 아들이자, 김은석의 양아들 김성철 등이 부강교회 출신이자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한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들이며, 이신(이만수)도 6.25때 광주에서 김은석의 설교를 듣고 감리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한 목회자였다. 이처럼 수많은 인재들이 김은석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여 목회자와 교회개척자로서 고난의 길을 걸었다.

2)신화신학 성경연구회의 특징

첫 번째 특징은 백일성경연구집회였다. 김은석은 기회와 시간이 주어지면, 일일, 열흘, 한 달 혹은 한 달 반 등 제한 없이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백일집회를 선호하였다. 그가 1945년 가을에 부강 오데골 장로교회에 부임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백일집회였다. 이런 집회가 일 년에도 몇 차례씩 진행되었기 때문에 김은석은 일 년의 대부분을 집을 떠나 타지에서 동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가족을 거의 돌보지 못했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1953년 8월초 전남 강진군 금동면 연화동 그리스도의 교회 집회소에서 연합성경사경회를 9월 15일까지 개최하다.

(2)1954년 6월 14일부터 전남 목포시 죽교동 391번지 2통 4반 해병대 앞 유달 교회당에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처’라는 간판붙이고 백일성경연구집회 인도하다.(유달 교회는 최요한이 1953년 4월 8일 광주에서 개최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 무렵에 이적하여 세운 순복음교회였다.)

(3)1955년 2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 교회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 인도하다.

(4)1월 1일부터 3월말까지 공부하는 기간에 봉독함. (이것은 1957년 3월 6일 수요일 메모로써 1957년 1월 1일부터 3월말까지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 교회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를 인도하고 있다는 뜻이다.)

(5)1957년 8월 31일(토) 아침은 또한 목포성경연구소에서 7:5-8장까지 봉독함... 김재순, 임남규, 이신, 김은석 4인이 결의 부강서 9월 17일부터 성경공부 시작하기로 함.” (최요한은 8월과 9월에 이 목포에서 속개된 성경연구집회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복귀키로 마음을 확정하고 목포시 대안동 11번지 자택에서 9월말부터 기도회 모임을 시작하여 10월 1일에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담임하던 목포 복음교회는 10월 5일 정식으로 사임하였다.)

이밖에도 1955년 10월 15일부터 전남 함평읍 함평면 석성리 신생동 교회당에서 연말까지 성경공부가 있었다. 김규상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1951년경 영광에서 100일 집회가 개최되었다.

김은석 목사는 1958년 5월 5일에 집중강의 일정을 학생들에게 통보하고 있는데, 이 통보를 받은 이들 가운데는 지철휘(충남 금산군 추부면 성당리 벧엘교회), 김교인(전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 장로), 임춘봉(한국성서신학교 교수, 교가작사자), 김용순(신탄진교회), 설하운(부평보육원 원장 및 부평 그리스도의 교회), 최요열(최요한의 동생, 전 한국성서신학교 교수, 조동호의 소년시절 담임목사), 장주열(최요한의 큰 동서), 최춘선(김포교회, 사회사업가. 소천 전 30년을 맨발로 거리와 지하철에서 전도), 이종만(인천고아원), 김명석(김성철의 친부), 이신(미국 밴더빌트대 신학박사), 김정만(정찬성과 김은석의 제자), 김태수(김교인의 아들), 김동열(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 강순명(광주 천혜경로원) 등이었으며, 총 65명이었다. 또 1958년 7월 10일부터 소년성경학이 개설된다는 것과 8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성경공부가 있다는 통신을 총 54명과 6곳의 교회에 보내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이동 신학교였다. 김은석은 자신의 동료들과 더불어 해마다 지역을 바꿔가면서 성경연구집회를 개최하였다. 집회 장소들로는 부강, 광주, 목포, 해남, 함평, 부여, 오창, 괴산, 충주, 대구 등지였다.

(1)6.25전쟁 중이던 1951년에는 광주에서 있었다. 이때 교수는 김은석, 이신, 창현 함태영 등이었다.

(2)1952년에 광주에서 운영되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이신이 시무하던 부여 합송리 그리스도의 교회로 옮겼다. 합송은 정찬성이 1951년 5월 15일 개척하여 10월까지 시무하였다.

(3)1953년 8월초에서 9월 15일까지 개최된 연합성경사경회는 전남 강진군 금동면 연화동 집회소에서 열렸다.

(4)1954년 5월 25일에 백호리 교회에서... 공부하였다. (이 메모는 전남 해남군에서 성경연구집회가 열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5)1954년 6월 1일(화)부터 10(목)일까지 대구 동인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김은석은 10일간 부흥회 겸 성경공부를 인도하였다.

(6)1954년 6월 14일부터는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처’라는 간판붙이고 최요한 목사가 시무하던 목포 유달 순복음교회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가 운영되었다.

(7)1955년 2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개최된 백일성경연구집회는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교회에서 인도되었다.

(8)1955년 10월 15일부터 1956년 1월까지 전남 함평읍 함평면 석성리 신생동 교회당과 청학동 교회당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가 있었다.

(9)1957년 1월 1일부터 3월말까지와 9월 17일부터 시작된 백일성경연구집회는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교회에서 인도되었다.

세 번째 특징은 성서통독강의였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1954년 4월 21일(수)... 모여든 여러분과 같이 사도행전 5-6장 공부함.

(2)1954년 4월 23일(금)... 저녁에 부강교회에서 여러 곳에서 공부 오신 분들과 같이 돌려 봉독하야 사도행전 8장 공부함.

(3)1954년 4월 30일(금)... 명(明) 5월 1일부터는 에스겔을 공부하기로 함.

(4)1955년 4월 16일(토)...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교회에서 2월 25일부터 시작한 백일집회에 이 다니엘서를 공부하는바 4월 16일은 수십 명이 공부하였다.

(5)1955년 5월 19일(목)자 메모에 의하면, 2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교회에서 진행된 백일성경연구집회에서는 로마서를 공부하였다.

(6)1955년 5월 24일(화)부터 26일(목)까지 남녀 16-18명이 모여 출애굽기를 공부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김은석의 학업방식은 성서통독강의였다. 백일성경연구와 집중공부에 대한 어려움에 대해서 김은석은 1955년 5월 19일(목)자 메모에서 “금(今)번 이 공부 중에는 천신만고에 난관이 있었다.”고 적고 있고, 동년 10월 20일(목)자 메모에서는 “의외(意外)에 이 신생동에 성경 공부한다는 시작이 되여 일기가 치귀서(차가서) 고생이다.”고 하였다. 신생동이란 전남 함평읍 함평면 석성리 신생동을 말하며, 12월 16일(금)자 메모에서는 “금일 아침은 크게 추웠음(今朝는 大寒이 되엿슴).”이라고 적었다. 김은석과 그의 동료들이 겪었던 고충은 대개가 배고픔과 추위와 더위 또는 가족을 돌보지 못한데서 오는 가족들의 불만이었다.

네 번째 특징은 성령 충만이었다. 김은석이 1945년 가을에 부강 오데골 장로교회에 부임하자마자 100일 집회를 개최하여 성령님의 역사를 크게 일으킨 것을 문제 삼아 노회로부터 제명된 것에서 보듯이 김은석 사역의 특징은 성령 충만이었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307쪽에 의하면, “그 당시 함께 성령을 받은 사람은 구봉례 집사, 김규상(목사), 김교인 장로, 윤정렬 사모, 김철수(목사), 오연우 장로, 전도희 집사, 황 집사, 김복수 집사와 그의 딸 김은영, 박오덕, 장 집사, 전도 부인 민명옥 등 70여 명으로 추산된다.”고 하였다. 이들 가운데 김철수, 김복수는 김교인 장로의 자녀들이고, 구봉례 집사는 김규상의 모친이다. 여기서만 목회자가 세 사람이 나왔는데,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김규상 목사, 김철수 목사, 전도희 전도사이다. 김교인 장로의 또 다른 두 아들인 김재순과 김태수도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가 되었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에 의하면, 김은석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된 사람들이 장주열과 최요한이다(315쪽). 김규상은 1951년경 영광에서 개최된 100일 집회에 참석하여 김동열과 함께 큰 은혜를 받고, 동년에 16살의 나이로 충곡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임하였다고 한다(320-321쪽). 이신도 감리교신학교를 마치고 1950년에 전의 감리교회에서 목회하다가 6.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하던 중 1951년 김은석이 인도하는 광주집회에 참석하여 김은석의 성령 역사에 크게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322쪽).

다섯 번째 특징은 전도실습이었다. 1955년에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교회에서 개최된 백일성경연구집회 때인 5월의 성서통독메모를 보면, 24일(화)부터 26일(목)까지 남녀 16-18명이 모여 출애굽기를 공부하였고, 27일 금요일에는 동리에 나가서 축호전도를 하였다. 1957년 9월 6일 금요일에는 몇몇 전도자들을 각기 다른 지역교회로 집회가게한 후에 본인도 하이도행 외령호를 타고 석양(夕陽)에 무안군 하의면 하태에서 개척하는 임혜숙 전도사를 위로 방문하여 주일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함께 심방하고 전도하였다.

3)한국의 바울 김은석 목사(1902.05.14음력-1963.01.21)

김은석은 황해도 평산군 당구리(속칭 붉은 바위 마을)에서 1902년 5월 14일(음력)에 태어났으며, 1963년 1월 20일 충곡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주일 저녁 집회를 인도하고, 밤 10시가 넘어서 찐 고구마와 날고구마를 먹고 탈장이 되었다. 소천하기 3년 전에 위 수술을 받았던 터라 그게 원인이 되어 복통을 일으켜 앓다가 다음 날 월요일(21일)에 충남 논산군 부적면 충곡 2구 최봉석 장로댁(고 명달재 목사 장인)에서 소천하여 충곡 2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최봉석은 김성철에게 김은석 목사의 유언과 유품을 전하였다. 김은석은 양아들 김성철이 대를 이어 꼭 목사가 되길 바랐다. 그가 그에게 남긴 것은 헐렁한 가방 하나였는데, 그 초라하고 낡은 가방 속에는 구리돈, 납 돈 몇 푼과 가방만큼이나 낡은 성경책 한 권만이 달랑 들어 있었다. 그 성경이 46년 만에 김성철 목사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에 맡겨졌으나 연구소가 각고 끝에 펴낸 <한국의 바울 김은석 목사>를 읽은 김은석의 양녀 김명순의 후손이 찾아와 가져가 버렸다.

김은석 목사는 함께 찍은 사진으로 볼 때, 박점상 목사보다는 작고, 심영진 목사보다는 키가 컸다. 몸도 가날 퍼서 체중이 그다지 많이 나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키 170센티미터 이상에 체중 70킬로그램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철 목사의 자서전, <삶이란, 감사하면 그것으로 O.K다>에 의하면, 김은석은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16살 때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여인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우울증을 앓던 가운데 살림집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집이 몰락해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하였고, 재혼하여 아들까지 얻었으나 아들이 세 살 때 죽고, 연이어 부인도 죽었다.

김은석은 일본으로 건너가 전도인의 삶을 살았다. 박점상에 의하면, 그의 일본 이름은 간다긴세기 신전 은석이었고, 별명은 합바지(무명바지) 조사(전도사)였으며, 시모노새끼(하관), 아사(김성철의 친부 김명석 거주), 덕산(박점상 거주), 동경지방 등 전국을 돌며 복음을 전하였다. 일본에서 만나 세 번째로 재혼한 사모 김완례(재혼)는 경성신학교를 나와 일본에서 전도부인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교우들이 접대로 떠준 얼음물을 마시고 냉병에 걸려, 자녀를 갖지 못하였다.

김은석은 해방직전에 한국에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급전을 받고 귀국하여 전도생활에 전념하면서 서울 역전의 빨간 색 벽돌(세브란스) 빌딩을 빌려 ‘백만 귀환동포 영접위원회’라는 것을 운영하면서 큰 솥을 걸고 교회에서 쌀을 공급받아 오가는 사람을 먹이고 재우면서 귀환 동포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당시에는 여관도 없던 때라 일본 중국으로부터 밀려오는 귀환 동포들의 수용소 역할을 하였다. 강신명 목사, 한경직 목사도 그 때 함께 활동하였다. 또 구국위원회의 위원으로서 애국활동을 하였다.

4)신약성서교회들의 개척자

김은석의 충실한 동료들은 목사 이신(13회), 김재순(24회), 전도사 김명석(26회), 김은영(22회), 고광석(12회), 임남규(10회), 전도희(23회), 자매 강신규(26회), 이혜순(9회), 김숙명(12회), 박종예 등이었다. 이들은 김은석의 동료들일 뿐 아니라, 순회여행을 함께한 동행자들이기도 하였다. 이름 옆의 가로 속 횟수는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서 이름이 적힌 빈도수이다. 이 성서통독메모에 적힌 목회자, 전도사, 장로, 집사, 성도들의 이름만 하여도 220여명이나 된다.

김은석이 개입한 교회들은 70여 곳에 이른다.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교회들이지만, 타 교단의 교회들도 섞여 있다. 타 교단들의 교회 방문은 대개가 부흥회 인도 때문이었다. 김은석의 주 활동무대는 충청도와 전남이었다. 이곳에 그의 영향으로 세워진 교회들이 많았다. 그가 ‘백일집중성경연구회’를 주도한 지역들도 이들 지역이었다. 김은석은 제자양육을 위해서 집을 떠나 이들 지역들에 장기간 머물렀고, 특별한 일이 아니면 집엘 다녀오지 않았다. 김은석은 이들 기간에 지역교회들을 순방하며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인근에 가정교회들을 세웠으며, 목회자를 임명하여 세웠다.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를 키워 임명하는 것은 사도 바울 선교의 특징적인 활동이었다. 김은석 목사는 바울과 동일한 수고를 남녀 동료들과 함께 수행하였다. 김은석이 성경에 삽입시킨 주소록에 적힌 교회들로는 경기 2, 경남 3, 경북 4, 서울 7, 전남 29(30), 충남 10, 충북 14, 장소 미확인 2, 도합 72곳이었다. 이 가운데 타 교단이 6곳 정도였다.

  • 경기도 서정리(평택) 교회
  •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 1구 1통 30반 천막교회(*이곳이 혹시 1952년 10월 3일 개척된 신갈 그리스도의 교회일는지 모른다.)
  • 경남 진주 칠암동 318 교회(김은석 목사 동생 김경원 목사 시무)
  • 경남 통영군 도산면 도선리 1구 그리스도의 교회
  •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 교회
  • 경북 금능군(김천시) 개령면 대광동 2구 대보 그리스도의 교회(장성우 목사 장모 김묘암 권사 설립)
  • 경북 대구 신천동 그리스도의 교회
  • 경북 대구시 동인동 교회
  • 경북 청도군 금천면 명포교회
  • 서울 마포구 아현동 교회
  • 서울 이태원 순복음교회(최요열 목사)
  • 서울시 도원동 교회
  •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54번지 70호 성결교회
  • 서울시 서대문구 평동 16의 23호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
  • 서울시 성동구 청량리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
  • 서울시 중구 도동 2가 5번 그리스도의회 대한 감리회 감남교회
  • 양동교회(?광주광역시 서구 양동)
  • 전남 강진군 군동면 삼신리 연화동 교회
  • 전남 강진군 작천면 작천 교회
  • 전남 강진읍 기룡리 용동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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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 목포 유달순복음교회 (최요한 목사,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처가 이 교회당에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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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청원군 남일면 방서리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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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청원군 북이면 송정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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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성 교회
  • 화동 교회

김은석은 자신이 직접 1946년에 부강교회(충북 청원군 부용면)와 1951년 늦은 가을에 선화교회(대전시 선화동 2구 315번)를 설립하고 건축하였다. 김은석은 힐 요한이 1959년부터 대전에 정착하는 것을 도왔을 뿐 아니라, 동년 12월 1일 심영진 목사가 시무하던 대전 도마리 성화교회에서 시작한 한국성서신학교의 교수로 섬겼다. 이때의 교수진은 힐 요한 부부, 김은석, 심영진, 김태수(통역)였고, 이듬해인 1960년에 부산에서 이신이 교수진에 합류하면서 학교를 자신이 세운 선화교회로 옮겼다. 대전시 서구 가장동 21-5번지 캠퍼스부지에 건물이 들어서기까지 수업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5)김은석의 박애정신

김은석의 박애(博愛) 정신을 볼 수 있는 사례들은 많다. 그의 성서통독메모들(1953-58)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 특히 교회와 전도자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의 경비를 써가며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첫째, 김은석은 1957년 3월 23일부터 24일까지 부모 잃은 고아들을 보육원에 위탁하기 위해서 이종만 목사가 운영하던 인천시 학익동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을 오양균, 김규제, 김규성 세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하고 있다. 3월 23일 토요일 아침에 수원 동생네 집에 들러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인 후 오후에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런 일이 아닐지라도 김은석은 수시로 충남 부여군 합송리 구애보육원, 판암동 애생원, 인천 학익동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 인천시 부평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 청주시 영운동 박인회 양로원 등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성경을 봉독하고 말씀을 전하였다.

둘째, 김은석은 1955년 7월 29일 금요일 아침에 충북 청주 예배당 구입 문제로 이한상 형제의 부탁을 받고 서울 선교부에 올라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일을 하루에 처리하지 못해서 오던 길 밤에 천안의 황해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묵어야했다.

셋째, 김은석은 1956년 7월 10일 화요일 새벽 2시경에 대전 은행동 자택에서 성경 요한복음을 봉독한 후에 새벽 4시 31분발 서울행 제6열 급행열차를 타고 선교부에 갔다. 선교부 방문의 목적은 김명석 전도사 사모에게 급하게 도와야할 일이 생겨서 도와줄 방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뿐만 아니라, 가좌교회의 일과 또 다른 일들도 함께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1955년 12월 27일자 메모에서 김은석은 가좌교회를 “핍박이 심한 개척이다.”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김은석은 가좌교회에서 힘겹게 분투하는 전도희 전도사를 자주 위로 방문하였고, 동료들을 불러 모아 그곳에서 성경연구집회를 갖곤 하였다. 또 김은석은 1957년 9월 6일 금요일에 몇몇 전도자들을 각기 다른 지역교회로 집회가게한 후에 본인은 하이도행 외령호를 타고 석양(夕陽)에 무안군 하의면 하태에서 개척하는 임혜숙 전도사를 위로 방문하여 주일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함께 심방하고 전도하였다. 월요일 그곳을 떠날 때 느낀 점을 이렇게 적었다. “오늘 하의에서 떠날 때 임혜숙 자매에 외로와함 보면서 동정심이 심하였다.” 주의 일을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주의 일군들, 특히 여성사역자들의 노고에 대해서 김은석은 깊은 동정심을 가졌던 것 같다. 공부할 때나 전도할 때나 항상 그의 곁에는 남성 동료들과 제자들에 못지않게 헌신적인 많은 여성 동료들과 제자들이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넷째, 김은석은 병석에 누운 동료들을 찾아 위문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1955년 8월 16일자에는 병원에 입원한 고광석 전도사와 판암동 애생원을 김옥여, 이원노, 강신규, 김완례 사모 등과 함께 위로 방문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김은석은 자주 병이 나는 사모 김완례의 병간호에도 힘쓰고 있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볼 수 있다.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많아도 김은석은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돌보는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6)김은석의 하나님과의 관계

김은석은 ‘하나님’이란 단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창세기에 실린 ‘하나님’이란 단어에 일일이 체크를 해놓고 그 사용빈도수를 209회로 체크했던 그는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이란 단어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사용빈도수를 112회로 체크하였고(성경 66권 전체에 쓰인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주란 단어에 동그라미 마크를 해놓았다), 총 1134절로 되어 있음을 적고 있다. 이는 그의 생각이 온통 하나님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은석은 등불과 관련된 생각이 많았다. 등불은 말씀(계시)의 불, 기도의 불, 성령의 불을 상징할 수 있다. 출애굽기 27장 21절에서 “燈天恒常(등천항상)”, 즉 ‘하나님 앞에 항상 등불을 밝힘’이라 적고 있고, 헌금관련 성구를 적은 메모지 옆에 열왕기하 8장 19절을 근거하여 “恒常一燈(항상일등) 주심,” 즉 ‘항상 한 등불을 주심’이라고 적고 있다. 또 출애굽기 29장 39절에서는 “朝夕(조석)으로 獻燈(헌등),” 즉 ‘아침저녁으로 등불을 밝힘’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그가 말씀과 기도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얼마나 희구(希求)하며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김은석의 성서통독에는 한 가지 특이한 원칙이 있다.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읽을 때에는 구약의 책은 장(章)의 순서대로 읽고, 신약의 책은 장(章)의 역순으로 끝장에서 시작하여 첫 장을 향해서 읽곤 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읽을 때에는 언제나 이 원칙을 취하고 있다.

김은석은 가정보다는 교회와 복음전도에 최우선순위를 두었다. 예를 들어, 그는 출애굽기를 통독했던 1955년 1-2월 중에서 대전 자택에 머문 날은 단 하룻밤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광주 집회소(김재순)에 있다가 대전 선화동교회로 바로 갔고, 다시 경북 금능군(김천시) 대보교회(장성우 목사의 사모 김순옥의 모친 김묘암이 설립)를 거쳐 충북 괴산군 소수면의 수리교회(장천호)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6일을 머문 후에 대전의 집에 와서는 단 하루 밤만 지내고 다시 논산 충곡교회(안영천)로 옮겨 가서 5일 이상을 그곳에서 머물다가 전남 영광으로 떠나 그곳에서 출애굽기 통독을 마치고 있다. 1954년 2월 2일에도 해남군에서 영산포행 차를 기다리는 중에 출애굽기 통독을 마치고 있고, 1956년 1월 19일에는 목포에서 출애굽기 통독을 마치고 있다. 출애굽기 통독을 마친 54, 55, 56, 57년의 시점이 모두 1-2월경이고, 57년만 부강교회이며, 나머지 세 번은 전남의 끝자락이어서 김은석 목사는 가정보다는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전도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살았던 분으로 여겨진다. 또 이런 남편과 아버지를 이해하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사모 김완례와 양녀 명순, 양자 성철, 양녀 순희 자녀들의 희생은 김은석 목사에 못지않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7)김은석의 성서통독과 전도활동

김은석은 성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교회들과 성도들의 집에서 읽었고, 버스와 기차와 배 안에서 읽었으며, 대중식당에서도 읽었고, 기차역에서도 읽었으며, 병석에서도 그날 분량을 반드시 읽었다. 그는 “일 년 동안 매일 3장씩이면 1095장 봉독. 구약 939장, 신약 260장, 신구약 합계 1199장. 성경보감 311 페이지 참고”라고 적고 있는데, 그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서를 읽었다. 김은석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매 장마다 언제 어디서 어디를 읽었는지를 메모해 놓았다.

김은석 목사가 전도하는 날은 365일 매일이었다. “1955년 3월 3일 목요일 마음에 감화되어 전도하는바 매일 일인씩 할 작정”이라고 적고 이어서 한 폐이지 촘촘하게 전도한 일자와 장소와 대상자의 성별, 이름, 나이를 적고 있다. 그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가 남긴 성서의 한 페이지, 모세오경이 끝나는 신명기와 여호수아 사이의 빈 공간에 3월 3일부터 10월 말일까지 매일 일인 이상씩 전도하였다. 일일 단위로 전도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를 빼곡히 적고 있다. 그는 심지어 주일에도 전도를 빼놓지 않았다. 한번 마음에 결정한 것을 실천에 옮기데 그것을 끝까지 이루고 마는 김은석의 의지력과 실천력은 가히 놀랄만한 것이었다. 10월 26일자에 더 이상 글씨를 쓸 공간이 없어서 아주 작은 깨알 같은 글씨로 이렇게 적고 있다. “26일부터 29일까지는 우연이 耳痛症(이통증)이 생기여서 外出不能(외출불능)으로 젼도 못함.” 병이 들어 외출을 하지 못할 경우가 아니면, 비록 그날이 주일이든, 생일날이든, 추석 같은 무슨 특별한 날일지라도 전도를 빼놓지 않았다.

김은석의 전도대상은 남녀노소 군인 경찰 교사부인 등, 구분이 전혀 없었다. 4월 17일 주일날에는 “校先妻(학교 선생의 처) 一人게 젼도”라고 적기도 하였다. 10월 22일 날에는 “목포 평화하숙 주인에게”라고 적고 있다.

김은석의 전도 장소는 부강, 대전, 연산, 소태, 충주, 서울, 강진, 상월, 목포 등 대한민국 구석구석이었다. 김은석은 이동이 잦았기 때문에 성서통독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와 기차를 이용하여 이동 중일 때에도 전도하였고, 출발지와 도착지에서도 전도하였다. 전도를 하지 못한 날은 “불젼인” 혹은 “젼불인”이라고 적고 있는데, 그 숫자가 일 년을 통틀어 몇 번 되지 않는다. 특히 8월 20일자에서는 “주님 앞에 죄송함. 금일은 불젼인”이라고 적었다.

김은석의 교회순방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집회를 포함한 전도활동과 성서강의였다. 그의 메모는 주로 성서를 어느 장소 누구의 집에서 몇 장까지를 읽었는가에 제한되기 때문에 어느 장소 어느 교회에 왜 갔었는지에 대해서는 혼인, 모친방문, 병석 등 특별한 경우들을 빼놓고서는 자세히 적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간다고만 하면 섭섭해 하니 답답함”이라고 적어놓은 것은 교회나 성도들이 그의 설교나 강의를 더 많이 듣지 못하는 데서 오는 서운함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에서는 항상 크고 작은 집회들이 열렸을 것으로 보인다. 목포교회 제2대 학생회장(1960년) 출신으로 1959년 12월 1일에 개교되어 54년만인 2013년 8월 31일에 폐교된 한성신학교에서 가장 오랜 40여 년을 가르쳤던 최용호 교수와 전남 해남군 화산면 방축리 교회 출신인 사모 박정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은석 목사가 지방에 도착하면 그날로부터 일주일에서 열흘씩 밤낮없이 집회가 지속되었고, 매번의 집회마다 시간제한 없이 수 시간씩 사경회가 지속되었다.

8)성서낙서를 통해서 본 김은석의 신학

김은석이 유품으로 남긴 성경책은 1920-30년대에 출판된 조선어와 한문이 혼합된 선한문(鮮漢文) 관주로써 너덜너덜해져서 김은석 목사가 손수 수차례 제본을 다시 하였는데, 책의 앞뒤페이지들은 떨어져 나가고 없고, 신약성서를 욥기와 시편 사이에 끼어 넣었으며, 메모를 위해서 간지들을 책들 사이에 끼어 넣고 꿰매어 성경의 일부처럼 만들었으며, 많은 낙서들을 남겨놓았다. 그의 성경책은 그의 손에서 떠난 지 46년 9개월여 만에 필자에게 전해져 필요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성경책은 온통 낙서투성이다. 가죽커버를 열면, 첫 페이지에 ‘大慰之聖句 詩 九四 18-19’라고 큰 글씨로 적혀 있다. 가장 크게 위로를 받는 성경말씀이 시편 94편 18-19절이란 뜻이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편 150편 끝 여백에 남긴 메모에서 시편의 말씀에서 받은 은혜를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1954년 7월 25일 주일에 본 시편 94편 9-150편까지 봉독하며 은혜 받음. 할렐루야! 성도의 노래 이 시편을 이와갓치 부족한 자 깃붐으로 봉독함은 진실노 주님의 은혜로다.”

김은석 목사는 요한계시록을 자주 읽었다. 천년왕국에 관련된 성구를 적어놓은 것을 보면, 그가 전 천년설을 믿었던 것 같다. 전 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천년왕국이 문자적으로 이뤄진다는 설로써 삶이 피곤하고 곤궁했던 시절에는 대부분 이 전 천년설이 유행하였다.

헌금(왕하 12:14-15, 22:7)과 헌물(출 36:3-7)과 헌납물(대상 29:8-14)에 대한 성구도 적어두었다. 특히 헌금은 계수하지 않는다고 적어 놓았다. 이들 성구들을 통해서 볼 때, 김은석은 사례금에 대해서 정산하지 않았으며, 헌금과 헌물은 풍족하고 넘치게 하되, 자발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할 것을 가르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이와 비슷한 신념을 가졌던 목회자들이 교단 구별 없이 일부 있었는데, 궁핍해서 헌금조차 할 수 없었던 50년대의 일이었다. 그런데 교회와 경제가 동반 성장하던 1970-80년대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어서 교회에 부담을 준 사례들이 종종 있었다.

구약성서목록이 적힌 곳에 종(縱)으로 “1917년에 중국에서 느진비 성신이 임하야 참 예수교회 났타났씀.”이라고 써놓고 있는데, 1917년은 김은석 목사가 첫 부인을 맞이했던 때이다. ‘참예수교회’란 1917년 중국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목표아래 산동성 출신의 장로교회 집사들이었던 안식일준수를 주장한 장빈, 침수세례를 주장한 은파, 방언은사를 주장한 장 바나바 세 사람이 창설한 ‘진야소교회’(True Jesus Church)를 두고 말한 것이다. 김은석이 참예수교회를 언제부터 알았는지, 참예수교회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또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참예수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달리, 제칠 안식일(토요일) 준수와 방언 말함을 성령세례 받은 것으로 각별히 강조한다는 점을 뺀 나머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과 침례와 매주 성만찬에 있어서는 매우 유사하다(참고: http://tjc.or.kr). 특히 김은석이 성령의 은사에 관한 정통보수주의 견해와는 달리 성령체험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던 점에서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주장하는 참예수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김은석이 제칠 안식일 준수를 주장했거나 그날을 지켜 예배를 드렸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그가 남긴 성서통독메모들은 그가 주일을 철저히 지켰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은석은 교황의 호칭인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Vicarius Filii Dei)를 666으로 믿으면서 천주교가 “십계명을 곳친 사실. 요리강령 28페이지에 참고, 안식일을 일료일노 변한 것. 364년 7월에 나오데게아 총회에서 선언함, 천주교 대요리 문답 제2편 81-83폐이지 참고, 개신교에서도 1554년 일료일을 안식일노 변함. 넷재 게명이 인침 밧는 것시다.”고 적은 것을 보면, 잠시나마 참예수교회의 안식일준수 주장에 공감했거나 그 쪽의 주장을 참고할 자료로 적어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김은석의 강의내용 속에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관련된 침례와 매주일 주의 만찬뿐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와 교회명칭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있었다.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의 간지에 교회의 명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메모를 남겨놓고 있다.

교회명칭을 명시함

  • (1)광야교회라. 이는 구약시대(행 7:38)
  • (2)하나님의 교회라(행 20:28, 고젼 1:2, 갈1:13, 고후 1:1)
  • (3)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라(마 16:18)
  • (4)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라(롬 16:16,
  • (5)하나님 교회라(고전 11:16)
  • (6)모든 성도의 교회(고전 14:33)
  • (7)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딤전 3:15)

이후에 낫타난 교회말고도 만코만치만 이외는 지명을 따라 말한 것과 또 장소명에 따라서 있는대,

  • (1)아모개집에 있는 교회 예를 들면(몬 1:2)
  • (2)아모대 사람의 교회 예를 들면(살젼 1:1, 살후 1:1)에 말씀 갓튼 것인대 이를 드러라 말하자면 모도가 다 한분 하나님의 교회라든지 그리스도의 교회는 것인대 지금 이 교회명칭에 대하야 신중이 생각할 바 잇는 이유는 지금 현세에 잇서서 인위적이며 인본주의의 행동을 함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갑주시고 사신 것이라고 행 20:28에 말삼되엿고 고젼 14:33에도 하나님은 어지로운 일에 하나님이 아니시오 화평한 일에 하나님이시라 하며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그러하시다 하엿스니 우리 모든 신도는 잇태에 교회를 좀 잘 신중이 생각할 것시다.

9)김은석의 인간관계

김은석의 성공적인 사역의 배후에는 인간관계가 있다. 한 인간의 성공과 실패의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관계가 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크고 작은 공과(功過)가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관계가 좋았을 경우에는 과(過)보다는 공(功)이 앞세워지게 된다. 뛰어난 하나님의 일군들에게도 크고 작은 실수가 없지 않다. 이 점은 김은석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후대에까지 존경을 받는 것은 공(功)이 과(過)보다 크고 인간관계가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은석의 좋은 인간관계를 말해주는 증거들은 많다. 먼저, 그가 관계한 혼인의 일만 보더라도 중국에서 2쌍, 일본에서 8쌍, 본국에서 60쌍, 총 70쌍이나 된다. 이들 중에는 지철휘, 문원섭, 이원노, 김태수, 최요열, 김은성, 김규상, 박점상, 최순국, 김은영 등이 포함되어 있다. 61세의 짧은 일생을 마친 김은석 목사로서 70쌍 이상의 혼인에 관계하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는가를 말해준다.

김은석 목사가 1960년에 연하장을 보낸 곳은 개인 38명, 교회 31곳이었다. 또 양녀 김명순의 결혼통첩을 개인 37명, 교회 25곳에 보내었다. 연하장을 보낸 곳과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이름들도 꽤 발견되었다. 이뿐 아니라, 김은석은 별세자들의 명단까지 적어두었는데, 여기에는 정찬성(1957년 4월 25일), 김재순(1958년 2월 26일), 강순명(1959년 3월 12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이신의 부친(1954년 6월 16일)과 이종만의 모친(1957년 8월 14일) 별세 일자까지 적어놓았다. 이것은 동료의 기일까지 챙기는 그의 인간적인 면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믿어진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전도사역은 성공적일 수밖에 없었고 동료들이 늘 곁에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김은석 목사가 1960년에 발송한 연하장과 양녀의 결혼통첩이 생각보다 숫자가 많지 않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추측컨대 이때는 루머에 연루되어 얼마동안 칩거했다가 세상에 나온 터라 자신을 이해해줄 동료들이거나 꼭 받아야할 사람들에게만 선별해서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10)김은석의 세상사

김은석은 주의 일로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의 삶에 잇대어 험한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는 교파교단의 비난과 핍박과 가난함과 곤고함과 싸웠다. 김은석에게 갈등과 시련은 늘 있었으나 그 때마다 성경봉독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새 힘을 얻곤 하였다.

김은석은 세상 즐거움을 완전히 끊어버린 사람이었다. 그의 일상은 기도하고 성경 읽고 전도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었고 교회순방을 위해서 기차타고, 버스타고, 배타고 이동하는 것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시간만 나면 성경을 읽었다. 교회당에서, 강단 앞에서, 강단 옆에서, 강단 뒤에서, 교회의 골방에서, 목회자의 방에서, 자택의 방에서, 다락방에서, 심방한 성도의 방에서, 식사하던 식당에서, 기차에서, 버스에서, 배에서, 정류장에서, 터미널에서, 누구와 있든지, 누구와 동행하든지 상관없이,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어디로 향하든지 상관없이, 시간만 나면 성경을 읽었다. 매일 그렇게 읽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읽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반 전에, 조반 후에, 오후에, 늦은 밤에, 새벽에 읽었다.

김은석은 사생활이 없었다. 일 년이면 거의 대부분을 남의 교회와 남의 집에 머물렀고, 그것조차도 동료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었다. 그가 어쩌다 자택을 찾는 경우에도 동료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마 12:50)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김은석도 함께한 주의 일군들이 그의 형제요 자매였다. 김은석은 자기보다 어린 동료들까지도 자주 ‘형’(兄)이라 썼고, ‘형제’라 호칭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김재순, 김명석, 이신, 최요한 등이 있었다. 진성구, 김교인 장로들을 호칭할 때는 항상 ‘님’를 붙여 썼다. 동료들이 여성인 경우에도 ‘님’자를 붙여, 박종예 자매님, 이원화 자매님, 전도희 자매님 하는 식으로 깍듯하게 불렀다.

김은석에게 세상일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그는 양아들 김성철이 자신의 대를 이어서 목사가 되어주기를 바랐으나 평소 세상공부는 필요치 않다며 학교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김성철 목사가 충남상고와 충남대를 졸업한 것은 순전히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김성철의 친부인 김명석(김주일) 목사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김은석을 일본에 있을 때부터 추종하였으므로 그 역시 처자식들을 돌보지 못하였다. 처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책망 받을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마 10:34-39).

1954년 4월 첫 주말에 전남교회(최요한)를 다녀온 김은석은 다음날인 4월 6일 화요일 아침에 사무엘상 9:9-12:25까지를 대전시 선화동 2구 315번지 교회에서 읽었는데, 마음에 무슨 변화가 일었는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런 중에 특별한 일리 엇슴은 나는 금일부터는 가족을 아주 떠나는 것을 선언.” 또 같은 날 부강교회로 옮겨서 저녁에 강단 앞에서 사무엘상 13-14장을 읽고는 “사랑받으며 봉독함”이라고 적고 있다. 다음 날인 7일 수요일에도 아침부터 밤까지 사무엘상을 읽었다. 그리고 10일 토요일 주일예배 참석차 대전에 왔고, 주일인 11일에는 교회를 사임하고 유호성 전도사에게 전임시키고 있다. 그리고 다음날 12일 월요일 아침에 평소 습관대로 성경을 읽고 조반 후에 부강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부인 김완례 사모가 병이 났고, 병자를 두고 떠날 수 없게 된 상황이 벌어졌다. 할 수 없이 그는 13일 화요일까지 남아서 병상을 지키다가 14일 수요일 부강으로 떠나고 있다. 그러나 김완례의 병은 그 주간 내내 완쾌되지 못했고, 김은석은 16일 금요일에 돌아와 병든 사모 곁에서 성서를 읽고 있다. 그리고 18일 주일을 지킨 후 19일 월요일에 대전시 은행동 2구 1번지 10통 41반으로 이사하였다. 대전 선화동 교회는 김은석이 구호물품의 잉여물자를 알뜰히 모아 팔아서 마련한 땅에 건물을 짓고 시작한 자기 교회였다. 그러나 사임을 했으니 집을 비어줘야 했을 것이고, 사모는 이 갑작스런 결정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을 것이다.

이 사건이 있었던 1954년 4월은 김은석의 심경에 어떤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이 기간에 그는 영적으로 심적으로 상당히 고무된 상태였으며, 성경을 읽는 시간도 아침에 국한되지 않고, 늦은 밤이나 한 밤중까지 계속되곤 하였다. 그러나 1958년까지의 행적을 볼 때, 그가 가족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은 부흥집회와 성서연구집회에 전념하겠다는 뜻이었지, 가족을 버리겠다는 뜻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떻든 그의 출가선언은 가족에게 적지 아니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렇듯 김은석은 주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가족은 물론 재산까지도 포기할 수 있었던 희생적인 신앙인이었다.

김은석에게 설날과 추석 혹은 생일과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은 그의 인생에 전혀 의미가 없었다. 명절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거나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앉아 명절을 맞는 일이 적어도 그의 성서메모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다. 1954년 2월 3일(수)부터 5일(금)까지가 설 명절이었는데도 그는 집엘 가지 않고 교회를 예방하는 요무(要務)로 2일(화) 전남 해남군 성전시장에서 대전행 차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영산포행 차를 기다렸고, 기다리는 중에서도 출애굽기를 읽고 있었다. 1955년은 1월 23일(일)부터 25일(화)까지가 설 명절이었는데 그는 22-23일(토-일)에 광주 집회소에 있었고, 24일 월요일 설날에서야 대전 선화동에 도착하여 25일까지 이틀 밤을 묵고, 26일(수)에는 다시 경북 금능군(김천시) 개령면 대광동 2구 대보 그리스도의 교회(장성우 목사의 사모 김순옥의 모친 김묘암이 설립)에 갔다가 27일(목)에 수리교회로 올라갔다. 1956년은 2월 11일(토)-13일(월)까지가 설 명절이었는데, 집에서 가까운 부강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지 않고 교회에 남아 성경을 읽고 있었다. 1957년에는 1월 30일(목)부터 2월 1일(금)까지가 설 명절이었다. 그는 이때에도 부강교회당 골방에 머물며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읽었다.

김은석 목사는 기도의 용사였다. 그는 성경을 읽을 때 대부분 강단 앞과 강단 옆과 강단 뒤에서 읽었던 만큼 기도를 겸하였을 것이다. 그는 가끔씩 금식 중에 성서를 읽었다. 1955년 3월 16일 수리교회에서, 19일 부강교회에서 금식 중에 성서를 읽고 있다.

김은석의 삶은 하나님사랑, 인간사랑, 특히 인간의 영혼을 사랑한 삶이었다. 따라서 그의 삶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경을 읽었고, 인간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전국 각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으며,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말씀 충만, 기도 충만, 성령 충만을 추구한 삶이었다. 그의 굵고 짧은 삶은 오늘 우리에게 “춘몽 같은 인생, 무엇을 하며,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