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만 목사(1) 사춘기에 찾아온 절망… 그리고 한 줄기 빛
[국민일보역경의 열매] [2009.04.05 18:02]
그때 나는 알았다. 죽음의 빛깔은 어쩌면 황토색이며, 생명의 종착역은 흙이라는 것을…. 한 이불을 덮고 자던 아버지를 흙에 묻었다. 다정다감한 목소리도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체취도 사라져버렸다. 너무나 갑자기 닥친 가족의 재앙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모두 잃은 슬픔이었다. 지금껏 가족을 떠받쳐온 견고한 기둥이 쉰을 1년 남긴 채 한 줌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갔다. 중학교 2학년 소년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충격이었다. 1946년 여름. 그해 하늘은 온통 우울한 잿빛이었다. 해방의 기쁨을 송두리째 앗아간 불행한 계절이었다. 당시 전국에 창궐하던 콜레라가 아버지를 급습한 것이다. 아버지는 콜레라를 앓은 지 나흘 만에 하늘로 떠났다. 새로 시작한 사업의 마무리를 눈 앞에 둔 채…. 인생이 뭔가. 사람은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가. 삶은 이토록 허무한 것인가. 가슴 속에 염세주의의 싹이 자라기 시작했다. 소년 가장.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두 누님과 동생 셋. 나는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됐다. 지금껏 경제적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아온 가족에게 혹독한 풍랑이 불어온 것이다.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가족에게 아버지의 존재가 이렇게 대단했던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얼 먹고 살 것인가. 누굴 의지하고 살아야 하나. 이 무거운 인생의 짐을 어찌할 것인가.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한 가정의 장남인 나는 수심(愁心)의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밤, 한 여인의 애끊는 절규를 들었다. 그것은 마치 어느 짐승의 처절한 통곡과도 같았다. 어둠 속에서 꺼이꺼이 흐느끼는 여인의 울음에 귀를 쫑긋 세웠다. "하나님, 우리 성만이가 절망하지 않게 해 주세요. 저 어린 것이 얼마나 상심이 크겠습니까. 성만이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집 가장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성만이의 아버지가 돼주세요." 그것은 할머니의 기도였다. 울음 반, 기도 반의 처절한 절규였다. 할머니는 우리 가문의 아브라함이다. 첫 신자인 것이다. 청상과부(靑孀寡婦)로서 고달프고 외로운 인생을 살아온 여인이었다. 질곡의 인생을 담배연기에 날려 보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던 할머니가 예수를 믿어 초기교회 신자가 된 후, 긴 담뱃대를 부러뜨려 아궁이에 던져버렸다. 할머니의 손에는 담배 대신 성경과 찬송가가 들려졌다. 원래 무학이었으나, 예수를 믿은 후 글눈이 떠져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가족이 모두 교회에 출석한 것은 할머니의 전도 때문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할머니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때 할머니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순간 지금껏 참아왔던 슬픔의 둑이 일시에 붕괴돼 통곡의 강물이 범람했다. 할머니의 품에서 서럽고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열다섯 살 사춘기 소년은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할머니는 손수건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며 한숨처럼 기도했다. "하나님, 성만이에게 용기를 주세요. 우리 성만이…." 얼마나 울었을까. 가슴이 후련해졌다. 그때 할머니가 내 손을 끌며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실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걱정 마라. 이제 찬송을 부르자." 그것은 심야 부흥회였다. "성령이여 강림하사/나를 감화하시고/애통하며 회개한 맘/충만하게 하소서/예수여 비오니/나의 기도 들으사/애통하며 회개한 맘/충만하게 하소서" 나는 절망의 심연에서 한 줄기 강렬한 희망의 빛을 보았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누구인가 △1932년 부산 출생 △미국 미드웨스트대학 신학박사 △동서대·경남정보대·부산디지털대 설립자 △제11, 12대 국회의원 △전 국회 부의장 △그리스도의교회 목사 △대교 그리스도의교회 개척
장성만 목사(2) 신학교 재학중 6·25… 숱한 죽음 목도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2009.04.06 17:48]
아버지는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으로만 알았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가족을 깨우던 우렁찬 음성도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할머니의 기도소리가 그 공백을 메웠다. 할머니는 가족들을 위해 단 하루도 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여섯이나 되는 손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가며 기도했다. 특히 장남에 대한 사랑은 좀 특별했다. 어머니는 딸 둘을 낳은 후, 나를 낳았다. 어머니가 나를 낳고 너무 힘이 들어 가만히 누워 있었더니, 아버지가 "또 딸이야?" 하며 휙 돌아서더란다. 할머니가 "애비야. 아들이다"라고 말하자, 그제야 반색을 하더란다. 내 이름은 셋이나 된다. 할머니 나이 환갑일 때,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장환갑'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고모는 나를 '장복동'이라고 불렀다. 우리 가문에 큰 복을 불러올 아이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장성만'이다. 성스럽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이름을 지었으리라. 나는 할머니 무릎에 앉아 예배를 드리다가 잠이 든 기억이 수없이 많다. 할머니의 기도와 찬송을 들으며 자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나중에야 알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부지런히 교회에 출석한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니었다.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함이었다. 내 또래 아이들에게서 깊은 신앙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를 여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은 삶의 바로 옆동네에 살고 있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러면 인간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분이 누구인가. 사람을 창조한 분이 누구인가. 죽음 후에는 어떤 세상이 존재하는가. 그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공통된 대답은 단 하나였다. 하나님, 바로 그분이었다. "신학을 공부하자. 신학은 철학보다 우위 학문이다. 나의 삶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이 최고의 삶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했다. 물론 할머니의 소박한 신앙과 영감 넘치는 기도에 힘입은 바가 컸다. 당시 부산은 피란민들로 넘쳐났다. 이곳저곳에 판자촌이 들어서고, 판자로 된 예배당도 눈에 띄었다. 마침 서울의 한 신학교가 이곳에 내려와 임시 교사(校舍)를 마련해 수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그 신학교에 입학했다. 아, 내가 기대하던 바로 그 학문이었다. 이제 비로소 신학을 조직적으로 배우게 된 것이다. 나는 지적 호기심이 참 강한 편이었다. 새로운 것이 있으면 항상 꼬치꼬치 묻는 성격이었다. 신학에 한참 재미를 들여갈 무렵, 6·25가 발발했다. "공산당이 지금 낙동강에서 후퇴하고 있다. 모든 젊은이들은 속히 군에 입대하라. 조국을 위해 봉사할 기회다." 나는 군에 입대했다. 미 육군 제2사단에 배치됐다. 후퇴하는 북한군의 뒤를 쫓아가며 수복지구의 치안을 확보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창녕 거창 전주 강경 논산으로 이동했다. 당시 우리는 충분한 군사훈련을 받지 않고 입대했기 때문에 총을 쏘는 법도 잘 몰랐다. 위험한 상황도 많았다. 거창에서 전주로 이동하다가 트럭이 전복되는 큰 사고를 당했다. 한번은 북한군이 숙소를 포위하고 무차별 난사한 일도 있었다. 생쥐도 막장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는가. 도주하는 적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죽음! 나는 또 한 번 그것의 실체를 보았다. 동료들의 죽음을 생생히 목도한 것이다. 그 비참한 전투장에서 나는 신학에 대해 더욱 깊은 애정을 갖게 됐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 1953년 자택 2층에 성도 7명 교회 개척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2009.04.07 17:49]
하나님은 참 오묘하신 분이다.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이다. 때로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통해 역사하신다. 나는 축복받은 모태신앙인이다. 할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항서장로교회에 출석했다. 항서교회 김길창 목사님이 내 돌잔치 예배를 드려줬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할머니의 기도와 신앙 덕분이다. "기도하는 백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기도하는 가정은 망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회사는 쇠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학교는 무너지지 않는다. 6·25의 위험한 상황에서도 번번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할머니의 기도 덕분이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신학교에 복학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아주 혼란스러웠다.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옥고를 치른 성도들이 풀려나오면서 심각한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킨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교단이 설립됐고, 일제에 부역했던 교회들은 더욱 똘똘 뭉쳐 교파를 형성했다. 자유신학과 보수신학의 충돌도 만만치 않았다. 외국에 유학하던 신학자들이 속속 귀국해 새로운 학파를 형성했다. 보수와 진보의 신학논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 논쟁은 곧 교파분열로 이어졌다. 그때 나는 아주 귀한 분을 만나게 됐다. 함경도 북청이 고향인 동석기 목사님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실력 있는 목회자였다. 백발의 노목사가 대교동 미국문화원 강당에서 강연회를 열고 있었다. 그때 처음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일주일 동안 열린 집회에 계속 참석했다. 동 목사님의 메시지는 나의 마음에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성경 이외의 어떤 인위적인 교리나 신조도 거부한다. 우리는 순수한 복음주의로 돌아가야 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파주의를 단호히 배격한다. 우리는 매주 성만찬을 갖는다. 세례 대신 침례를 정례화한다." 동 목사님의 강연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것은 한국교회를 향한 광야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껏 머릿속에 그려온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등록했다. 장로교인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으로 바뀐 것이다. 지금까지는 할머니의 신앙으로 버텨왔으나, 이제는 나의 신앙을 분명하게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신앙의 독립선언이었다. 1953년 1월 1일. 인생 여정의 한 획을 긋는 날이다. 우리집 2층에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했다. 교인은 총 7명. 비록 초라한 예배당이었지만, 말씀을 전하고 성찬식을 베풀었다. 실로 감격적인 예배였다.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는 곧 국제적인 교회로 성장했다. 국내외에 머물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대거 우리 교회를 찾은 것이다. 당시 부산에 머물던 빌스(Bills) 세걸키(Segglki) 엘리스(Ellis)선교사 가족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맥시(Maxey) 데이비드(David) 클라크(Clark) 심스(Sims) 선교사도 교회를 찾아왔다. 우리교회는 갑자기 국제적인 교회로 부상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집결지로 부각된 것이다. 그중에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보내준 귀한 한 분이 있었다. 그분은 내 인생의 설계도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놓았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정성만 목사(4) 美 선교사 도움 받아 일본 신학교 유학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2009.04.08 20:19]
마크 맥시(Mark G Maxey).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이름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이 타인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 봉사할 수 있는지를 삶으로 보여준 선교사다. 원래 그는 미군 종군목사로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전역한 후 일본 선교사로 파송 받아 규슈 남단 가노야에서 교회를 개척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6·25 전쟁으로 처참한 상황에 처한 한국의 소식이 궁금해 방한했다. 그때 나를 만난 것이다. 나는 이 만남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수호천사였다. "장성만 목사, 좀더 웅대한 꿈을 가져라. 세계는 아주 넓다. 일본에 유학 와서 공부할 생각은 없는가. 내가 너의 모든 삶을 보장하겠다." 그는 스무 번도 넘게 한국을 찾았다. 내 가슴 속에 '신학의 바다'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심어주었다. 외국유학? 그것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땅에 사는 젊은이가 꿈꿀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 당장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외국유학도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장5∼6절) 유학의 꿈을 갖고 계속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기도하면 할수록 꿈의 그림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힘이었다. 기도는 '추상화'를 '정물화'로 만드는 힘이 있다. 마음은 벌써 일본의 어느 신학교 교실에 앉아 있었다. 외국인 교수들의 강의에 심취해 있었다. 학문의 바다에서 새로운 지식을 포향(飽享)하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가자, 일본으로 가자. 하나님이 내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 나는 일본행을 결심했다. 그리고 맥시 선교사에게 그 뜻을 전했다. "일본에서 공부하게 해주세요." "참 잘 생각했다. 어서 오너라." 일본 오사카의 성서신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직도 내 앞 길은 첩첩산중이었다. 당시 한·일 외교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아 비자를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맥시 선교사는 수십 번 일본 법무성을 찾아가 비자발급을 요청했다. 규슈에서 도쿄를 오가며 보낸 시간만 해도 엄청난 것이었다. "왜 유학을 가는가. 나의 유익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조국을 위해서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후자였다. 신학문을 배워 조국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하리라. 이 민족의 가슴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리라. 규슈행 배에 몸을 실었다. 당시엔 일본행 비행기가 없었다. 부산을 출발한 배는 20시간이 넘게 바다에 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소년가장에게 일본 유학이 웬 말인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였다. "내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예수 없는 인생, 예수 없는 젊음은 얼마나 허허로운가. 일찍 신앙을 가진 것이 최고의 축복이다. 나의 인생은 하나님이 원격조종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이사야 41장 10절을 속으로 묵상하면서 힘을 얻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것은 두려움 없는 도전이었다. 일본 유학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5) 고국 5·16쿠데타 소식에 신학생들과 기도
[역경의 열매] [2009.04.09 17:42]
나는 신앙의 위대함을 안다. 믿음은 두려움을 내쫓는다. 믿음은 고독을 물리친다. 기도는 꿈을 현실로 바꾸어놓는다. 아무 배경도 없는 내가 일본 유학의 꿈을 이룬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는 오사카 성서신학교에 입학해 신학과 영어를 동시에 배웠다. 특히 클라크 교장의 친절과 뜨거운 복음 열정에 감동했다. 그즈음 고국에서는 연일 우울한 소식이 들려왔다. 4·19 학생운동과 5·16 군사정변으로 정국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신학교에서 아침에 경건회가 열렸다. "당신의 나라가 지금 매우 혼란스럽다. 군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정말 걱정이다. 너의 나라를 위해 우리가 힘을 모아 기도해주겠다. 네가 먼저 기도를 시작하거라." 나는 기도를 하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서러움에 북받친 것이다. 선교사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어쩌면 저리도 뜨겁게 기도할까. 예수를 믿는 선진국 사람들은 확실히 다르구나. 선교사들의 차원 높은 사랑을 배웠다. 한번은 나고야에 사는 데이비스 선교사가 나를 초청했다. 선교사 부부는 친절하게도 열차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 목사, 집에서 식사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중국집에서 간단히 우동을 먹고 가자." 우린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제법 규모가 큰 음식점이었다. 그날이 마침 개업 20주년 기념일이었다. 음식점 사장은 경품 행사를 한다면서 손님들에게 번호표를 1장씩 나눠주었다. 음식을 먹고 나오려는데 경품 추첨이 시작됐다. 그런데 내가 특등에 당첨된 것이다. 상품은 대형 냉장고. 모든 음식을 이곳에 넣어두기만 하면 금세 시원해지는 마술 같은 물건이었다. "장 목사, 축하한다. 하나님이 가난한 신학생에게 선물을 주신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라." 참 신기한 일이었다. 우동 한 그릇을 먹고 고가의 상품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냉장고를 팔아서 목돈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일본 전역을 여행할 수 있었다.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화제의 소설가 7인을 방문해 꼼꼼히 취재를 해두었다. 그 중에는 '영원한 서장'을 쓴 시이나 린조, '열쇠'를 쓴 다니자키 준이치로,'육체의 문'을 쓴 다무라 다이지로 등이 포함돼 있었다. 나는 작가들을 방문해 취재한 것을 글로 써서 부산 국제신문에 보냈다. 신문사에서는 '일본 대표 작가 회견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했다. 나중에는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기행문을 신문에 연재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 오묘하시군요. 우동과 냉장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물의 조합입니다. 이 조합을 통해 일본 작가를 만나게 하시고, 집필가로서의 경륜을 쌓게 하셨군요." 일본 생활은 참 행복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자신의 백성을 먹이셨다. 나 역시 하나님이 매일 공급해주시는 만나를 먹으며 학문의 바다에서 마음껏 유영(遊泳)했다. 일본 유학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할 무렵, 맥시 선교사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장 목사,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물론이다. 내 조국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내가 장 목사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맥시 선교사는 아주 신중한 표정으로 나의 반응을 살폈다. 하나님은 맥시 선교사를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선물을 준비해놓으셨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6) 맥시 선교사 “더 큰 물에서 공부”
[역경의 열매] [2009.04.10 17:50]
맥시 선교사는 내 삶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분이다. 내가 일본에 유학한 것도 맥시 선교사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가 또 다른 선물을 제시한 것이다. "장 목사, 이제 더 큰물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미국의 친구들에게 네 이야기를 모두 해두었다. 미국 신시내티의 신학대학교에서는 네게 장학금을 주기로 이미 결정했다. 생활비를 지원할 후원자도 준비해두었다." 웬 은혜인가. 웬 사랑인가. 하나님은 항상 나의 기대와 소망을 뛰어넘는 크고 비밀한 것을 감추어 놓으셨다. 일본 유학도 분에 넘치는데, 미국 유학이 웬 은혜인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내게 넘치나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1961년 말, 2년여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한국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6남매를 헌신적으로 키워낸 어머니…. 그 어머니 곁을 또 떠나야 하는 것이다. 가족들에게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닌지, 혹시 내가 아주 이기적인 사람은 아닐까. 이건 예의가 아니야.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제가 또 미국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싫다고 하시면 이곳에 남겠습니다." 어머니는 펄쩍 뛰셨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큰 나라에 가서 공부를 더 한다는 데 에미의 외로움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떠나거라. 그런 허약한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어머니의 자녀 사랑은 아주 특별했다. 이웃을 섬기고 대접하는 마음도 특별했다. 어머니는 집에 찾아온 손님을 그냥 보내는 일이 없었다. 가족들에겐 식은 밥을 먹이면서도, 손님에게는 반드시 따뜻한 밥을 지어 대접했다. 특히 목사님을 마치 예수님 대하듯 깍듯하게 섬겼다. "세상 모든 일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다. 에미가 남을 잘 섬기면, 결국 너희들이 복을 받을 것이야. 특히 하나님의 종인 목사님을 잘 섬겨라." 이것이 어머니의 삶의 철학이었다. 내가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할 때 사람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선행 덕분이었다. 어머니가 평생 동안 심어놓은 선행과 선의(善意), 기도의 열매를 내가 수확한 것이다. 나는 유학 동안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없다. 학업에만 전념하도록 도처에 돕는 손길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89세에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임종 전 가족들을 모두 모아놓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풀어놓으셨다. 질곡의 인생을 살아온 한 여인의 무거운 인생 보따리였다. 이제 비로소 그 무거운 인생의 짐을 내려놓은 것이다. 주머니에는 깨끗한 신권 화폐들이 들어 있었다. 자녀들이 보내준 용돈을 모두 모아둔 것이다. 어머니는 의학박사이며 서울 은광교회 장로인 동생 장영길이 보내준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좋은 일에 사용하셨다. 그리고 남은 돈을 내려놓으신 것이다. "이 돈을 교회에 헌금해라." 액수는 비록 3만원 정도였으나, 그 돈이 갖는 의미는 각별했다. 그것은 일종의 유언이었다. 교회를 잘 섬기라는 어머니 식 메시지였다. 소천하는 순간에도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어머니, 이런 훌륭한 어머니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기도의 어머니를 둔 자녀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기도는 최고의 유산이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믿는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7) 귀국 후 첫 설교 계기 평생 배필 만나
[역경의 열매] [2009.04.12 17:48]
하나님의 계획은 컴퓨터보다 치밀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도 하나님은 헤아리신다. 나는 그것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고 부른다. 내 삶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1962년 1월 첫주일. 나는 모교회인 부산 항서교회의 새해 첫 설교를 맡았다. 김길창 목사님의 특별한 배려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나를 교인들에게 소개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리라. "장성만 목사, 자네가 원단(元旦)설교를 해주게." 원단설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 목사님은 나에게 특별한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날 예배를 통해 아주 소중한 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 당시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던 한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그녀는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토플점수도 확보해 놓았다. 유학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그런데 부모의 심한 반대 때문에 미국 유학의 꿈을 접어버렸다. "여자가 무슨 유학이냐? 혼자 외국에 나가는 것은 절대로 용납 못한다." 그녀는 나의 설교를 듣고 용기를 냈다. 내가 일본 유학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집회가 끝난 며칠 뒤, 유학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첫눈에도 아주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교양 있는 가정에서, 격조 있는 교육을 받은 기품이 풍겨 나왔다. "목사님, 저도 일본 유학을 가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왜 일본입니까. 아예 미국으로 가시지요." 진지한 질문에 가벼운 대답이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안돼요. 내가 미국에 간다고 하면 집에서 난리가 날 거예요. 사실 일본 유학도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녀는 유학에 대해 많은 것을 물었고, 나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헤어질 때, 내가 쓴 책 '생각 잃은 갈대'를 선물로 주었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만남은 일단 끝났다. 그런데 내 책을 읽고 그녀가 독후감을 보내왔다. 나도 답장을 보냈다. 우리는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신뢰를 쌓아갔다. 그리고 나는 일생을 함께 할 반려자가 되어달라고 프러포즈를 했다. 그녀는 부모님의 허락이 먼저라고 했다. 박동순.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이다. 장인 박정수씨는 오랜 판사생활을 거쳐 부산시변호사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장모 최정선 권사는 부산YWCA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었다. 일찍 사회활동에 눈을 뜬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딸의 유학을 엄격하게 반대했을 정도니, 당시 한국인의 의식이 얼마나 보수적이었는지 능히 유추할 만했다. 일단 장인될 분을 만났다. "저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넓은 세상에서 많은 지식을 배워 조국을 위해 봉사할 것입니다. 특히 고급기술을 가진 젊은이를 많이 양성해 조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따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도 있습니다." "좋다. 자네가 맘에 든다." 나의 책을 그분도 읽었다고 했다. 그것이 도움이 됐는지 너무도 쉽게 승낙을 했다. 그때 내 나이 서른둘이었다.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좋은 배필을 예비해두신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한복음 14장 1절). 우리는 한영교 박사를 모시고 성대한 약혼식을 올렸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8) 미국 유학 도착하니 설교 초청 편지 수북
[역경의 열매] [2009.04.13 19:33]
1962년 9월. 미국에 도착했다. 원래 약혼자 박동순과 함께 미국에 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약혼자의 비자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혼자 온 것이다. 참으로 길고 긴 여행이었다. 여의도비행장을 출발해 도쿄와 호놀룰루에서 비행기에 급유를 한 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다시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사흘을 달려 오하이오주에 도착했다.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다. 첫째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사흘 동안 먹은 것이라곤 바나나 몇 개뿐이었다. 둘째는 시차로 인한 피로 누적이었다. 1주일 동안 편안하게 누워서 자본 적이 없었다. 드디어 신시내티에 도착했다. 신시내티 신학대학교는 오하이오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캠퍼스였다. 기숙사에 짐을 풀어놓고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거의 24시간 동안 잠을 잤다. 그동안의 피로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런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우편배달부였다. 그는 한 보따리나 되는 우편물을 전해주었다. "편지와 소포가 참 많습니다." 미국의 여러 교회에서 온 편지였다. 주로 설교 부탁을 하는 내용이었다. 내가 이곳에 올 줄 어찌 알고 편지를 보냈을까. 일단 대학원장인 루이스 포스터 박사부터 찾아갔다. 하버드 출신의 루이스 포스터 박사는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장 목사, 당신을 많이 기다렸다. 장 목사에게 기대가 크다. 일단 교수 두 사람을 소개해주겠다." 그는 엘리오트 교수와 심스 교수를 소개해줬다. 그리고는 자신의 부친인 R C 포스터 교수에게 나를 데려갔다. 여든이 넘은 포스터 교수는 신약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였다. 그는 마치 손자를 맞이하듯 정겹게 나를 반겼다. "축하한다. 잘 왔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뭐든지 내게 부탁하라." 그는 자신이 쓴 '예수의 생애'(Life of Christ)라는 책에 사인을 해서 내게 선물했다. 3권으로 된 이 책은 신학을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그후에도 자주 나를 초청해 저녁을 대접하고 격려했다. 하나님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서 역사하신다. 왜 그들은 생면부지인 내게 그토록 깊은 애정과 관심을 쏟을까. 하나님이 예비해놓으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준비한 로드맵에 따라 나의 삶은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신학대학원 공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거의 매일 리포트를 작성했다. 짧은 영어로 논문을 준비하고, 그것을 발표하는 일이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허덕이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은 없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나는 이곳에서 관심의 대상이었다. 우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그들에게 참 생소했다. 대한민국은 전쟁과 분쟁이 그치지 않는 아주 참담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한국의 젊은이가 유학을 왔어? 그 참담하고 암울한 코리아에서?" 나는 신시내티에서 가장 분주한 학생이었다. 미국 20여개 주의 교회를 다니며 집회를 인도했다. 서투른 영어로 한국의 참상을 또박또박 알렸다. 그들은 내 말에 때로는 눈물을 흘렸고, 때로는 활짝 웃었다. 일제 치하와 6·25전쟁의 역사를 넘어 극한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은 그들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다. 나는 수업이 없는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집회를 인도했다. 그 힘겨운 시기에 낭보 하나가 날아들었다. 모든 고통을 일시에 날려버린 기쁜 소식이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9) “기술·신앙 겸비한 인재 양성하자” 결심
[역경의 열매] [2009.04.14 17:49]
약혼자가 곧 미국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비자 문제가 깔끔하게 처리된 것이다. 사고무친한 미국 땅에서 인생의 반려자가 될 사람과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여간 큰 기쁨과 위로가 아니었다. 미국에 함께 오지 못한 것이 늘 서운했었다. 나는 약혼자의 비자가 속히 나오기를 빌고 또 빌었다. 여의도비행장에서 손을 흔들며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더했다. 그런데 내가 미국에 온 지 한 달 반 만에 그녀가 도착한 것이다. 그 반가움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신시내티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아내는 기독교교육을 공부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아내가 기독교 교육을 선택한 것은 좀 의외였다. "왜 기독교 교육을 전공하려 하는가." "당신은 조국에 돌아가 기독교 대학을 설립할 꿈을 갖고 있잖은가. 당신이 원대한 꿈을 펼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 좋은 내조자가 되기 위한 준비 공부라고 생각해다오." 얼마나 감사한가. 그 지혜와 배려가 가슴에 절절히 전해져왔다.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미국은 기능사회다. 기술을 가진 사람이 대우받는다. 아이비엠(IBM)에서 컴퓨터 관련 아르바이트를 하면 시간당 4달러45센트를 받았다. 그러나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사람에겐 시간당 1달러40센트가 주어졌다. 아무 기술도 없는 사람은 노동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았다. 심지어 공동묘지 잔디를 깎는 사람도 자동차가 두 대였다. 잔디를 깎는 것도 일종의 기술이었다. 당시 한국 국민 1인당 GNP가 87달러였다. "아, 바로 저것이다. 조국에 돌아가면 고급 기술자를 양성하리라. 기술을 가진 사람이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리라." 인생 계획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놓고 끊임없이 기도했다. 기도하면 할수록 머릿속에 선명한 그림이 그려졌다. 수많은 학생 틈에서 강의하는 내 모습도 그려졌다. 나는 그것을 기도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기도는 꿈을 현실로 만든다. 기도는 기적을 만든다. 나는 여전히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여러 교회로부터 초청이 이어졌다. 미국의 저 수많은 교회가 내 소식을 어떻게 알았을까. 어찌 알고 나를 초청했을까. 이건 정말 신기한 일이다. 이곳은 서울이나 부산이 아니다. 미국의 중심 도시다. 저들이 나를 알아볼 리가 없는데…. 집회 초청을 한 교회에 넌지시 물어보았다. "나를 어떻게 알게 됐나." "맥시 선교사가 편지를 보내왔다. 한국의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미국에 올 것이라고…. 당신을 잘 도와주라는 당부가 있었다." 고마운 맥시 선교사. 부모형제도 이렇게 한결같을 수는 없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수호천사였다. 당시 미국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정말 뜨겁고 순수했다. 집회를 마치고 나오면 연세 좀 드신 교인들이 나를 기다렸다가 악수를 하면서 내 손에 달러 몇 장을 꼬옥 건네기도 했다. 그들은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힘내라. 이 돈을 좋은 곳에 사용해라." 보람과 기쁨이 넘치는 삶이었다. 한국에 기독교 대학을 설립해 기술과 신앙을 가진 인재를 양성할 것이라는 비전을 밝히고 기도를 당부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항상 정확하고 치밀했다. 나는 공부와 설교를 병행하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유학해도 배울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10) 결혼 예물은 1달러짜리 시계 반지하 아파트에 신방
[역경의 열매] [2009.04.15 17:54]
1963년 성탄절은 축복의 절기였다. 우리는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DC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김운용·박동숙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김운용씨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태권도의 세계화에 기여한 국제적 인물이다. 당시 그는 주미 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박동숙씨는 아내의 바로 윗 언니다. 처가는 1남5녀인데, 모두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장녀 동춘씨는 교사이고, 둘째 동근씨는 한신대 이장식 교수의 아내다. 3녀 동숙씨는 김운용씨, 4녀 동순은 나와 결혼했다. 5녀 동혜씨는 언론인 장주석씨의 아내다. 장남 동화씨는 창원대 총장을 지냈다. 장모님의 기도 덕분에 모두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부모의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워싱턴DC에서 한인감리교회 황재경 목사님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다. 유명 한인들은 거의 대부분 참석했다. 외무장관을 지낸 공로명씨는 당시 2등 서기관이었다. 이국에서 갖는 결혼식이라 더욱 감동이 컸다. 이제 비로소 우리는 부부가 된 것이다. 아내에게 준 결혼 예물은 1달러짜리 시계 하나였다. "하나님, 좋은 배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속으로 계속 기도를 드렸다. 결혼식을 마친 후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신시내티로 돌아왔다. 우리에겐 살 집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온종일 눈길을 걸어 다니며 집을 구했다. 하이힐을 신은 신부의 발은 퉁퉁 부어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신부의 발등을 계속 문질러주었다. 어렵게 구한 반지하 아파트. 아주 낡은 공간이지만 우리에겐 천국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머무는 곳이 곧 천국임을 그때 알았다. 결혼은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아내가 곁에 있으니 참으로 든든했다. 두 사람 모두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먼저 온 사람이 식사를 준비했다. 아내의 역할, 남편의 역할이 따로 없었다. 나는 미국 여러 교회를 다니며 메시지를 전했다. "나는 한국에 기술대학을 설립할 것이다.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 여러분의 기도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나님은 곳곳에 믿음의 동역자를 예비해 놓으셨다.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크고 비밀스런 것을 준비하신 것이다. 사업가인 웰렌 밀러는 내게 결정적인 어드바이스를 해주었다. "장 목사, 너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재단을 만들어라. 그러면 우리가 모금을 해서 너를 돕겠다. 아주 좋은 멤버들을 소개하겠다." 즉시 재단이 구성됐다. 윌리엄 홀 목사가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대학원 동기인 쉬퍼드 목사 부부, GM의 중역인 로버트 레슬리 부부와 밀러씨가 이사로 참여했다. 독신 여성 우체국장인 알리스 레이버거는 재정 담당을 자처하고 나섰다. 실로 황금멤버였다. 우리는 공부를 마치고 니어폴리스라는 곳에 이사를 왔다. 교회는 우리가 기거할 집을 제공해 주었다. 어느 것 하나 막힘없이 순조롭게 일이 진행됐다.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장남 제국이를 낳았다. 우드 카운티병원에 누워 있는 아들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백인 아이들 틈에 까만 머리카락의 동양 아이가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하랴.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