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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0-01 15:40
부산에서의 라디오 방송선교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7,585  

2. 부산에서의 라디오 방송선교

1)알렉스와 베티 빌즈(Verlen Alex & Betty Bills)

(1)알렉스 빌즈의 생애와 방송선교에의 비전

1950년대 이후 부산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와 관련하여 두 개의 원대한 꿈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나는 한국인 장성만 목사가 펼친 교육 100년 대계(大計)의 성공한 꿈이었다. 그의 꿈은 오늘날 동서대학교, 경남정보대학, 동서사이버대학교로 실현되었다. 또 하나는 벌렌 알렉스 빌즈가 펼친 실패한 기독교라디오극동방송국에의 꿈이었다. 자금 부족으로 알렉스의 꿈이 비록 실패로 끝나긴 하였으나 그의 꿈은 아름답고 옳았으며 원대한 것이었다. 그가 실패한 기독교극동방송국에의 꿈은 그도 그리스도의 교회도 아닌, 1954년 5월 1일 재단법인 한국복음주의 방송협회 창립(초대 이사장 황성수)으로 시작된 오늘의 ‘극동방송’(FEBC)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다. 오늘의 FEBC는 알렉스의 꿈이 옳았고, 반드시 성공했어야 할 위대한 과업이었다는 점을 잘 웅변한다.

알렉스 빌즈(Verlen Alex Bills)는 1921년 4월 12일에 태어나 2002년 5월 14일에 소천 하였고, 베티 페이 빌즈(Betty Fay Bills)는 1927년 8월 10일 태어나 2012년 3월 2일(금)에 소천 하였다. 두 사람은 교회 캠프에서 만나 결혼하였다. 알렉스는 그곳 캠프에서 매일 저녁 말씀을 설교한 전도자였고, 베티는 예배 때 반주를 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들은 1947년에 결혼하여 55년간 함께 살았다.

알렉스와 베티는 ‘크리스챤 라디오 밋숀’(Christian Radio Mission, CRM)을 세워 일본에서 5년, 한국에서 5년간 방송전파선교사로서 선교방송프로그램의 기획과 제작뿐 아니라, 후속사업(follow-up work)으로 성경통신강좌, 교회개척, 지도자육성 등의 선교사역에 전념하였다. 반면에 베티는 음악 사역자로서 라디오선교방송 프로그램을 위해서 노래한 합창단과 앙상블을 지도하였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베티는 마을이 태풍으로 위태롭게 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출하였다. 이에 정부는 그녀의 용감한 행동을 칭송하며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빌즈 가족은 1961년에 CRM사역을 완전히 접고 고향 미국 텍사스로 돌아갔고, 후일 텍사스 주 휴스턴 소재 트리니티 교회(Trinity Church)에서 사역하였다. 이때 트리니티 성서신학교/사우스텍사스 성서신학교를 세워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후일 오순절 은사운동의 역사가와 자료수집가로 변신하였고, 그가 소장했던 4천권의 서적은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 데이비드 알렌 허버드 도서관 특별서고(David Allan Hubbard Library’s Special Collections)에 기증되었다.

베티는 선교사, 목사, 교수였던 알렉스의 아내요, 목회파트너로서 미국으로 돌아간 후 아마릴로(Amarillo)고등학교에 조지 거슈윈회(George Gershwin Society)를 창립하여 회장을 역임하였다. 베티는 40년간 피아노교습을 하였으며, 전국 피아노 교사 협회(National Guild of Piano Teachers)와 다른 전국 음악조직들에서도 오랜 기간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베티는 오클라호마 대학교에서 음악과 피아노를 전공하여 학사학위를, 오클라호마시티 대학교에서 ‘제2언어로써의 영어교육’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베티는 또 제2언어로써의 영어교육제공사의 교사로서 근무하며 많은 외국인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다년간 텍사스 주 휴스턴에 소재한 한 사립기독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뿐 아니라, 베티는 라이프송 합창단(LifeSong Choir)에서도 20여 년간 봉사하였다. 현재 그의 자녀들 가운데 세 사람(Becca Bills Upham, Guy Don Bills, Kathleen Harder)이 라이프송 합창단에서 활동하며, 2006년 선교연주여행 때에는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집회를 가졌고 방송도 되었다.

알렉스와 베티는 슬하에 다섯 자녀를 두었다. 그중 캐스린(Kathleen Harder), 베카(Becca Bills Upham), 벌렌 알렉스 빌즈 2세(Verlen Alex Bills II)는 일본 오사카에서 나서 일본과 한국에서 자랐고, 가이 돈(Guy Don Bills), 브라이언(Brian L. Bills)은 한국에서 나서 자랐다. 캐스린과 베카는 미주리 주 조플린에 소재한 그리스도의 교회 소속 오자크 기독대학(Ozark Christian College)을 졸업하였다.

(2)‘크리스챤 라디오 밋숀’(Christian Radio Mission)

일본의 베테랑 선교사인 마크 맥시(Mark Maxey)의 “일본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백년”(Christians in Japan 100 Years, 1883-1983)에 의하면, 알렉스와 베티 빌즈 부부는 1951년에 일본 오사카(Osaka)에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빌즈 가족이 일본에 건너간 것은 라디오전파선교를 위한 것이었다.

알렉스 빌즈의 비전은 기독교복음을 전할 라디오방송국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가 처음에 선교방송국을 세우려고 계획했던 곳은 중국 서부지역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공산국이어서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일본을 택하였다. 일본이 상업방송국을 허가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에서 일본으로 갔지만, 일본정부도 허가할 생각이 없었다. 알렉스는 그 대안으로 상업방송국들의 시간을 사서 자신이 직접 제작한 라디오선교프로그램을 방송하였다.

일본 그리스도의 교회 라디오선교방송은 이미 1947년에 시작되었다. 오사카성서신학교의 해롤드 콜(Harold Cole)이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갔을 때 기금을 모아 오사카에서 가장 큰 방송국의 시간을 사서 첫 방송 프로그램을 송출한바가 있었다. 알렉스가 1951년 일본 오사카에 온 이후로는 ‘크리스챤 라디오 밋숀’(Christian Radio Mission, CRM)이 선교방송을 총괄하고 주도하였다. 이후 호카이도에 있는 미군 군목들이 기금을 모아 그곳에서 일본어 프로그램을 방송하였는데, 이것을 주도한 인물은 로버트 스코트(Robert Scott)였다. 그 사이에 마닐라의 DZAS 단파방송국들이 CRM에 프로그램의 제작을 요청하여왔다. 그들은 그것을 일본(인)을 향해서 송출하는 방송국들에 넘겼다. 또 다른 진전은 인디애나 주 가레트(Garrett)의 월터 코블(Walter Coble) 형제자매가 영어프로그램의 제작을 CRM에 의뢰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유럽 라디오 룩셈부르크에서 방송하였다. 이것과 관련해서 CRM은 후속(follow-up) 서신을 관리하고 성경통신과정을 청취자들에게 제공하였다. 오사카성서신학교의 마틴 클라크(Martin Clark)가 독창(solo)과 프로그램의 아나운서로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였다. 1952년 가을에 엑시 풀츠(Exie Fultz)가 일본에 주재한 알렉스 빌즈를 돕기 위해 합류하였고, 특별히 전파선교방송의 후속사역과 성경통신과정의 사역을 맡았다.

‘크리스챤 라디오 밋숀’(CRM)의 최종 목표는 방송국을 설립하여 자신의 방송을 송출하는데 있었다. 그렇게 되면, 상업방송국의 시간을 비싼 가격에 사서 일주일에 몇 번 짧은 시간 전파를 쏘는 대신에 매일 몇 시간씩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최적지에 기독교라디오방송국을 세우도록 허가를 내주는 국가를 찾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 한국정부였다. 1954말에 한국정부는 부산에 기독교라디오방송국을 세워 운영해도 좋다는 허가서를 내주었다.

알렉스는 일본에서 월간소식지 <파장>(Wave Lengths)를 발행하였다. 또 베티와 함께 오사카성서신학교에서 가르쳤다. 알렉스는 기독교라디오방송 관련 과목들(기독교라디오, 시청각매스컴)을 가르쳤고, 베티는 음악을 가르쳤다. 두 사람의 강의는 모두 미래의 방송요원을 육성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밖에도 중고등학교 등에서 영어성경을 가르쳤다.

CRM이 기독교방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제작하여 FM상업방송국의 시간을 사서 방송하기 위해서는 스튜디오가 필요하였다. 알렉스와 엑시 풀츠는 오사카에 스튜디오를 마련해보려고 애를 썼다. 1954년 말에는 오사카성서신학교가 캠퍼스에 부지를 제공하고, CRM이 스튜디오와 사무실로 쓸 건물을 짓기로 합의를 보았다.

한편 알렉스는 일본에서 전파선교를 시작한지 만 일 년 만인 1952년 1월에 이미 한국과 오키나와가 방송국 설립의 최적지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하였고, 한국과 일본 오키나와에 라디오선교방송국을 세우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이것이 삶이다”(This Is Life)라는 방송선교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주일 아침 6:30-7:00시에 NJB_JOOR을 통해서 전파선교를 시작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독창, 뚜엣, 여성합창, 라디오 성경드라마, 설교 등으로 꾸며졌으며, 이후 홋카이도를 비롯한 일본 전역과 필리핀 마닐라에서 일본어로 방송되었다. 유럽에서는 “성경 그리스도인 프로그램”(The Bible Christian Program)이 매주 월요일 밤에 영어로 유럽의 17개국에 방송되었으며, 2백만 명이 청취하였다.

알렉스 빌즈는 1953년 9월에도 선교사들에 대한 한국정부의 호의를 강하게 신뢰하며 인천에 라디오기독교방송국 설립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1954년 4월에는 극동방송이 자신들에게 정기적인 한국어 방송프로그램을 시작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1954년 11월 월간 소식지에서 알렉스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계획을 피력하였다.

    한국(KOREA)

    한국은, 작금의 세계에서 기독교선교에 가장 큰 기회의 나라로써, 우리가 행동해 주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할 사람들은 준비를 마쳤고, 빌의 가족은 부산으로 옮겨가기 위해서 도쿄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건물매입도 가능합니다. 동양선교회는 전시(戰時)에 본부로 사용했던 건물을 우리에게 4천불에 매도하고자 합니다. 기회가 그곳에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우리가 라디오선교방송국을 소유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또 정부는 즉시 국영방송국들의 시간을 우리에게 할애해 줄 것이며, 우리가 한국인 방송직원들을 훈련하고 다른 필요한 기초 작업을 펼치는 동안 준비될 기독교복음프로그램들을 송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주택 매입에 필요한 돈의 절반 이상이 확보되었습니다. 이 사역에 교우 여러분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신다면, 이 일은 착수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기부금은 동시에 필요합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일을 시작하게 할 수 있는 주택을 매입하려는 이 기회는 두 번 다시없을 것입니다.

    일본에서 우리가 하던 일은 엑시 풀츠와 우리의 훌륭한 일본인 직원들이 지속시켜 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유럽에서의 영어방송도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내려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사역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서 크게 확장시켜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이 소유한 라디오선교방송국을 세운다는 궁극적인 목표에 한발 더 다가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방송국 허가서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한국에 살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부산은 우리가 전파사역을 펼쳐나갈 이상적인 장소입니다. 한국 정부는 기독교사역에 대해서 아마 세계에서 가장 호의적일 것입니다. 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전파를 송출하기에 최적인 바다에 인접한 곳들, 무관심지역인 일본의 서부연안에 일본어 방송을, 광둥, 상해, 대만에 이르는 중국의 연안 도시들에 중국어 방송을 송출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어 프로그램들은 남쪽 대한민국을 커버할 뿐 아니라, 심지어 북한의 죽의 장막까지 침투해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엄청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전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고, 절실하며, 호응도가 높은 심장부에 세 나라의 언어로 방송할 기독교라디오방송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알렉스는 1955년 3월 소식지에서 1954년 말에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정부로부터 부산에 기독교선교라디오방송국 설립허가서를 받고 일본으로 돌아왔다고 전하였다. 특히 1956년 4월 서신에서는 허가서에 대해서 언급하며 이렇게 적었다. “그 문서는 한국 정부가 부산에 라디오선교방송국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을 승인한 허가서였다."(That paper was a written approval from the government of Korea to erect and operate a missionary radio broadcasting station in Pusan, Korea.) 이것은 과거 10년간 이 목적으로 노력하고 기도한 결과라고 피력하였다. 부산 라디오기독교방송국의 설립은 대한민국만 커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의 장막인 북한, 중국, 러시아를 커버할 수 있는 최고의 선교도구라고 확신하였다. 알렉스는 부산에 선교방송국을 설립해도 좋다는 허가서를 받자마자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에서 함께 사역할 선교사들의 모집과 기금의 확보를 위해서 노력하였다.

알렉스는 1956년 3월 소식지에서 자신의 계획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첫 단계로써 1956년 6월(실제로는 12월 13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에 부산으로 이사하여 땅을 사고, 이미 매입이 끝난 부산의 주택을 수리하며, 작은 방송기지와 선교사들의 주택들을 짓기 시작하여 가을이나 겨울쯤에 건축을 끝내면 방송장비들을 구입하여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한국어 프로그램을 부산지역에 방송한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에 필요한 기금이 5만2천불이고, 이후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방송을 제작하여 한국 전역, 중국, 일본에 전파를 송출하는데 4만8천 불의 예산이 더 필요하다고 하였다. 알렉스가 10만 불을 목표로 모금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알렉스의 또 다른 서신에 의하면, 10,000와트(watt)를 송출할 수 있는 방송국을 만드는데 필요한 비용이 10만 불 정도라고 보았다. 당시보다 10년 혹은 20년 후까지 버트 엘리스와 조 세걸키 가족의 급여가 4-5백 불이었고, 싱글이었던 버지니아 힐의 급여가 150불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다. 오늘날의 원화가치로 보면 10-12억 원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1950년대에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개 교회와 개인들을 상대로 이 정도의 큰돈을 모금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큰돈은 이미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역에 필요한 비용과는 별도로 추가로 필요한 돈이어서 더더욱 모금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알렉스는 1와트당 10불이 필요하며, 그 돈이면 200명에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계산에 따라 5천불이면 500와트를 살 수 있고, 10만 명에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또 알렉스는 1956년 3월 소식지에서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재차 피력하였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선교지들 가운데 한 곳이며.... 지금은 모든 선교지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고 하였다. 그는 또 “한국은 선교역사가 8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극동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다. 일본이 인구의 0.5퍼센트, 인도가 1퍼센트인 것에 비해 한국은 7퍼센트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는 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한국에서 종교는 애국심과 무관하지만, 일본에서는 다수가 종교인을 애국심이 약한 자로 간주한다.

둘째, 교단의 선교회들이 정책적으로 한국에는 보수주의 선교사들을 보낸 반면, 일본과 중국에는 진보주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셋째, 한국에는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이 많았다. 이들이 끼친 영향이 크다.

넷째, 오늘날 한국에 부흥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바치는 충성심 가득한 우리의 메시지를 들어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 사역은 그들이 분열을 일으키는 근대 교파주의 교단들에 인도되기 전에 이뤄져야 한다.”

1956년 5월 소식지에 의하면, 알렉스는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개최된 북미주그리스도인대회(North American Christian Convention)에 참석하였고, 5월 9일(수) 저녁에 일백여 명 정도가 모인 한 세션에서 자신의 방송선교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알렉스의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난 직후에 인디애나 주 윌리엄스포트(Williamsport)에 소재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더글러스 딕키(Douglas Dickey)란 목회자가 일어나 제안하기를, 각각의 교회에서 50명 단위의 후원클럽을 만들어 각 사람이 향후 20개월 동안 매 주 25센트씩 기부하게 하자고 하였다. 계산상으로는 매 클럽 당 1,083불의 모금이 가능한 제안이었다. 이 ‘50클럽“(50 Clubs) 제안에 알렉스는 한껏 고무되었다. 이런 클럽이 100개만 매월 운영된다면, 자신의 구상은 성공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 모임을 마치자마자 알렉스는 이 모임에서 25명의 설교자들과 지도자들이 6만5천 불의 기부를 CRM에 약속하였다고 소식지와 서신을 통해서 선전하였고, 이후 각 교회가 이런 형식의 후원클럽을 운영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호소하였다. ‘50클럽’을 통해서 후원금이 당도하긴 했어도 그 액수는 미미하였다.

(3)CRM 법인설립

알렉스 빌즈 가족은 1954년 말에 한국정부로부터 부산에 라디오선교방송국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허가서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갔고, 1956년 12월 소식지에 의하면, 무려 22개월간의 미국 체류를 끝내고 1956년 11월 16일에 한국을 향해서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배를 탔다고 적었다. 미국 체류기간이 길어진 것은 함께 일할 선교사 모집과 기금모금이 원활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기간에 법인의 설립과 9명의 새로운 사역자들을 모집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에는 네 가족과 한명의 독신 여성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CRM의 가족은 12명의 성인과 12명의 자녀들로 구성되게 되었다. 알렉스 빌즈 가족은, 1956년 12월 서신에 따르면, 11월 20일에 일본 도쿄에 도착하였다. 1957년 1월 소식지에 의하면, 1956년 12월 13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한국 상륙이 늦어진 이유는 미국 내 위원회와 새로 모집된 사역자들과의 좌담이 있었고, 출발 전까지도 기금의 모금이 원활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 라디오 사역 관계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내려 며칠간 머물려야했으며, 일본에 거주하는 선교사들과 사역자들과의 좌담 때문에도 두 주간 머물러야 했다.

1956년 9월 24일 일리노이 주 댄빌(Danville)에 소재한 제2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CRM Incorporated’의 법인설립정관에 서명하는 모임이 있었고, 일리노이 주 국무장관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인 법인회사가 출범되었다. 이 서명식에 벌렌 알렉스 빌즈(V. Alex Bills), 엑시 풀츠(Exie Jane Fultz), 더글러스 딕키(Douglas Dickey), 로버트 릴리(Robert Lillie), 제임스 퍼니스(James Furniss), 버트와 마조리 엘리스(Bert & Marjory Ellis)가 참석하였다.

(4)한국 CRM의 성과

한국에서의 사역은 생각보다 진척이 매우 더뎠다. 1957년 1월 16일 서신에서 알렉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토지매입이 다음 단계는 아닙니다. 다음의 일은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이 토지매입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 한 건에만 14,000불의 비용이 듭니다. 우리가 기금을 확보하기까지는 사실 아무 것도 더 이상 진척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교우들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건을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긴다면,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돈이 정확히 필요한 시간에 수중에 들어올 것입니다.

    ‘50클럽’을 통한 모금도 물론 토지매입에 필요한 시간 내에 충분히 채워지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한 빠르게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리스챤 라디오 밋숀’ 교우들에게 우리와 함께 앞으로 한 거름 내딛기를 요청합니다.

1957년 4월 소식지에서 알렉스 빌즈는 한국에서의 사역을 다소 서두른 경향이 있지 않았는가를 의심하였다.

    기초부분은 건물의 다른 부분에 비해서 눈에 거의 띄지 않습니다. 건축자는 종종 기초가 구조물의 다른 부분을 잘 떠받쳐줬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러나 위기가 크게 닥치면, 기초는 무시당하거나 지나치게 서둘러집니다. 기초는 친구들에게 보여줄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이곳 한국에서 우리가 직면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공적인 라디오사역을 위해서 수년간 기초를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면한 현실만을 볼 때는 거의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1957년 7-9월호 소식지에 의하면, 한국에 도착한지 7개월 만에 토지매매계약서에 서명하였고, 1958년 2월 소식지에 의하면, 1958년 1월 9일에서야 부산시 광안동 부지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여기까지 오는데 만 13개월이나 걸렸다. 알렉스는 부지선정의 신중과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실은 기금이 부족해서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데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계획(작전)도 좋았고, 조직과 노하우(실전경험)도 있었지만, 돈(실탄)이 부족하였다. 오사카에서 해오던 사업의 유지에다 큰 자금을 요하는 부산에서의 새로운 사업을 위한 모금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무렵 미국도 경제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제1세계대전, 1930년대 경제대공황, 태평양전쟁과 제2세계대전, 한국동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알렉스가 부산에서 진행시킨 건축도 대부분 시멘트블로크를 찍어 말린 후 집을 짓는 수작업이었다. 1958년 9-10월경에 비로서 기초 작업을 시작하여 12월 소식지에서야 비로소 기초를 완성하고 블록을 쌓기 시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2월 26일에는 마룻대(ridgepole)를 올리는 상량식을 가졌다. 알렉스가 부산에 온지 만 2년이 되는 때였다. 이 상량식에 목수들과 김홍균(CRM 매니저), 장성만(CRM 설교담당, 대교교회 목사)과 김히영(CRM 번역과 음악보조)도 참석하였다. 통역 김히영은 CRM에서 PD로 사역하다가 1963년부터 대전에 올라와 김찬영을 대신해서 힐 요한 선교사의 사역을 도왔다.

그러나 이 상량식에 알렉스가 한국에 불러들인 다른 선교사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CRM 소식지도 1959년 2월(47번)호를 끝으로, 그것이 마지막 소식지는 아니었겠지만,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알렉스 빌즈가 추진한 부산에서의 사역은 계획대로 진척되지 못했고, 이에 실망한 선교사들과 미국의 지원자들이 CRM을 탈퇴함으로써 실패로 끝난 허황된 꿈이 되고 말았다.

2)알렉스 빌즈의 동료들

(1)엑시 제인 풀츠(Exie Jane Fultz)

엑시는 부친 밀턴 월터스(Milton Walters)와 모친 내니 밴스(Nannie Vance) 사이에서 1918년 2월 14일 미국 일리노이 주 마셜(Marshall)에서 출생하여 11살 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침례를 받았고, 마셜 타운쉽 고등학교를 1935년에 졸업하였다. 25세 때 결혼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남편과 사별하였다. 엑시는 스마트 어피어런스 뷰티(Smart Appearance Beauty) 대학을 1945년에, 신시내티성서신학교를 1949년에 졸업하고, 버틀러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재학하던 중에 방송선교사의 소명을 받았다. 1951년에 선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여 1952년 11월 6일에 알렉스 빌즈(Verlen Alex Bills)가 창립한 크리스챤 라디오 밋숀(Christian Radio Mission, CRM)에서 사역하기 위해서 일본 오사카에 상륙하였다. 오사카에서 편지업무와 일본어 성경통신강좌와 유럽인을 위한 영어 성경통신강좌를 담당하였으며, 1953년 4월에 고베로 옮겨가 CRM의 전파선교방송 고베 통신원들과 함께 후속사역(follow-up work)을 담당하였다. 일본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냉담하였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는 이들이 고베에서도 생겨났고, 고베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다. 알렉스 빌즈는 방송국 설립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국으로 옮겨가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엑시가 서서히 그의 업무를 이어받아 일본 전파선교방송을 책임지기 시작하였다.

엑시 풀츠에 의한 CRM 소식지는 1959년 2월(47번)호까지만 남아있다. 이후 엑시 풀츠는 자신이 1958년부터 계획한 ‘니폰 크리스천 방송 협의회’(Nippon Christian Broadcasting Association)를 1959년 6월 8일에 설립하여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또 1960년 1월부터는 방송진행표를 뜻하는 ‘큐시트’(The Cue Sheet)란 소식지를 2개월마다 한 번씩 발행하였다. 엑시 풀츠는 일본 CRM의 사역을 사실상 책임졌던 인물로서 알렉스 빌즈가 일본에서 펼쳤던 모든 사역을 그대로 이어갔다.

알렉스 빌즈의 충실한 사역자였던 엑시 풀츠(우측 끝 사진이 1959년 때의 모습)는 고베 근처 아와지 섬(Awaji Island)에 토지를 매입하고 그곳으로 옮겨 은퇴할 때까지 사역을 이어갔다.

(2)플로라 매이 구른지(Flora Maye Guernsey)

플로라 매이 구른지(Flora Maye Guernsey)는 1934년 3월 10일 미국 인디애나 주 헤브론(Hebron)에서 출생하였으며, 한국에 나올 당시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23세의 독신 여성이었다. 1952년에 헤브론 고등학교를, 1957년에 링컨성서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링컨신학교에서는 기독교교육을 전공하였다. 그녀는 업무비서, 음악보조, 성서강의를 위해서 1957년 10월에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알렉스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플로라 매이 구른지는 심사숙고 끝에 1959년 2월 25일 배로 부산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다. 부산을 떠나기 직전에는 조 세걸키와 버트 엘리스의 새로 막 시작한 방송선교를 도왔다. 조와 맥신 세걸키에 의하면, 그녀는 1958년 10월에 한국에 머문 선교사들과 미국에 대기 중인 가족들이 모두 탈퇴함으로써 장래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다행히 그녀는 일리노이 주 졸리엣(Joliet)에 소재한 선교단체(Mission Services)에 직원으로 초빙되어 1959년 2월 25일에 한국을 떠났다.



(3)조와 맥신 세걸키(Joshep & Maxine Seggelki)

조 세걸키(Joshep Seggelki)는 태평양 전쟁 때 항공모함에 승선하여 전기기사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맥신 앰버그(Maxine Amberg)와 결혼하여 1946년부터 일리노이 주 링컨에 거주하면서 링컨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집사와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다가 링컨성서신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에 졸업하였다. 이때가 32살이었다. 조는 1956년 9월 9일에 안수를 받았고, CRM의 업무추진담당자(Traffic Manager)로 1958년 1월 31일에 한국에 입국하였다.

1957년 12월 26일 오후 3시 30분에 미국 일리노이 주 링컨을 출발하여 1958년 1월 7일 오후 6시 30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탔고 1월 26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일본의 첫인상은 깨끗하고 매력적인 나라였다. 1월 28일 짐을 찾아 고베로 가는 배를 탔다. 고베에는 엑시 풀츠(Exie Fultz), 마르틴 클라크(Martin Clark), 이사벨 디트모어(Isabell Dittemore) 등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오사카성서신학교를 방문한 후 오후 1시 배를 탔고 다음 날 아침 8시에 일본 시모노세키 인근의 모지(Moji)에 도착하였다. 다시 출발하여 부산 만에 31일 아침 8시에 도달하였다. 멀리 보이는 부산의 모습은 컬러풀한 일본과는 확연히 다른 음울한 모습이었지만, 한국의 이민국 직원들은 일본인들보다 훨씬 친절하였다. 부산항에는 플로라 매이 구른지(Flora Maye Guernsey) 양과 알렉스 빌즈(Alex and Betty Bills) 가족이 마중 나와 있었다. 출입국관리소를 빠져나오니 ‘크리스챤 라디오 밋숀’(Christian Radio Mission)의 중창단이 환영하였다. 그들에 대한 첫인상은 매우 좋았고 친절하였다.

부산에서 처음 출석한 교회는 장성만 목사가 시무하는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조와 맥신 세걸키는 미국에 보낸 두 번째 서신(1958년 5월)에서 대교교회의 색다른 예배풍경을 상세히 설명하였고, 버트 엘리스 가족이 5월 3일에 도착하였다는 것과 아울러 굳맨 가족, 클레멘스 가족, 클레어 포웰이 한국에 도착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피력하였다. 다른 한편 엘리스 가족이 오던 날 집에서 준비한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항구에 마중을 나가기 전에 한 달 치 급료와 각종 청구서를 해결할 300불을 은행에서 찾아 빌즈의 요리사에게 맡겼는데, 엘리스 가족을 데리고 빌즈의 집에 돌아와 보니 식사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돈도 요리사도 사라지고 없었다는 황당한 경험을 소개하였다. 또 다른 한편 장성만 목사의 대교교회가 4월에 14명에게 침례를 베풀었는데, 조 세걸키가 7명, 장성만 목사가 7명씩 침례를 베풀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조와 맥신 세걸키는 1959년 1월경의 쓴 세 번째 서신에서, 자신들이 선교와 선교지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갖고 부산에 온지 일 년이 조금 지났지만 실망이 컸던 것과 CRM에서 탈퇴하게 된 사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계획은 여러분이 기대했던 것만큼 결코 이뤄지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에서도 동일하게 사실이었습니다. CRM에 대한 실망감은 정말 커져갔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만, 어떤 분들에게는 이것, 즉 우리가 CRM에서 사임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지난 1958년 10월 25일, 국내 위원회의 여섯 분..., 국내 사역자들 (Ray Goodman family, Bob Clemens family, Lewis Myers family, and Clair Powell), 그리고 선교지의 선교사들은 (Bert Ellis family, Flora Maye Guernsey, and the Seggelke family) 벌렌 알렉스 빌즈에 대한 신뢰의 부족과 CRM의 사역방법이 우리와 국내에 계신 분들에게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에 사임하였습니다.”

또 다른 전단에서 조 세걸키는 말하기를, 그들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프로젝트는 예상되었던 것대로 되지 않았고, 실망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걸키 가족과 엘리스 가족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으려고 힘썼고, 한국에 오려고 준비 중인 미국의 예비 선교사들의 앞날도 불투명해졌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플로라 매이 구른지는 1959년 2월 25일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1959년 초부터 버트 엘리스 부부와 조 세걸키 부부는 합심하여 ‘한국방송선교’(Korean Broadcasting Mission)를 설립하고 부산문화방송(HLKU)에서 시간을 임대하여 4월 16일부터 매일 하루 두 번, 일주일에 세 시간씩 방송을 시작하였다. 소요비용은 급여를 포함해서 하루에 23불씩이었다. 부산문화방송 사장과도 친해져서 조와 버트는 부산문화방송국 자문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하였다. 1958년 12월에는 테일러 부부, 래쉬 부부, 여러 한국인 사역자들의 추천을 받아 방송설교자로 이신 목사를 채용하였다. 선교방송과 함께 걸려오는 전화상담, 가정에서의 성경공부, 전도용 문서발송을 통해서 후속선교를 이어갔다.

‘한국방송선교’(KBM)는 1959년부터 계간으로 ‘킬로사이클’(Kilocycles)이란 이름의 소식지를 발행하였다. 비용은 세걸키 가족과 엘리스 가족이 공동으로 부담하였다. 알렉스 빌즈를 도왔던 더글러스 딕키(Doug Dickey, Williamsport, IN) 목사가 회계를 맡아주었다. 이들은 주일 저녁에 별도의 예배모임을 시도하였고, 설교 때 통역을 사용하였다. 매주 평균 35명 정도 참석하였다고 한다. 조와 버트는 방송선교와는 별도로 각각 별도의 성경공부반도 운영하였고, 1959년 9월에는 교회를 개척하였다. 출석인원은 50-70명 정도였다고 한다. 버트와 조의 가족 역시도 자금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특히 버트 가족의 경제난이 심하였다. 날이 갈수록 빚이 늘었기 때문에 1959년 9월부터는 방송을 하루 한 번으로 줄였다. 조의 경우 1960년 서신에 의하면, 매월 200불 정도의 후원금이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조 세걸키 가족은 1960년 6월부터 안식년을 떠나는 테일러를 대신해서 서울에 머물렀으며, 테일러 가족이 돌아오면 안식년을 가진 후 1962년 봄에 돌아올 계획이었다. 버트 엘리스 가족은 1962년에나 안식년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셈이었다. 따라서 부산에서의 일은 버트 엘리스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다.

1960년 4월 서신에서 조와 맥신은 4월 15일에 이신 목사가 서울에 올라가 목회하기 위해서 사임하였다고 적었다. 이신은 이때 부산문화방송을 통해서 매일 밤 10시에 행한 설교들을 모아 기독교문사에서 1980년에 <산다는 것, 믿는다는 것>을 펴냈다. 이때 이신 목사는 방송뿐 아니라, 두 개의 신문에도 기사를 실었다.

조와 맥신 세걸키 가족은 1961년 7월에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1962년 7월에 한국으로 돌아와 더욱 활기차게 선교할 계획이었고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1962년 6월 서신에 의하면, 한국으로 돌아올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고 있고,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출발할 배까지 예약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에 관한 자료를 더 이상 구하지 못해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리처드 래쉬의 서신에 의하면, 세걸키는 1962년 한국정부로부터 비자를 거부당하였고, 링컨기독대학에 취직이 되어 미국에 남았다고 한다.




(4)버트와 마조리 엘리스(Bert & Marjory Ellis)

버트 엘리스 가족은 알렉스가 한국정부로부터 선교방송국 설립 허가서를 받고 나서 부산에 세우려고 한 방송국의 프로그램제작부 담당자로 입국하였다.

버트는 신시내티성서신학교, 링컨성서신학교 및 밀리건 대학에서 수업을 받았고, 플로이드 존스 종교음악학교(Floyd Jones School of Sacred Music, Indianapolis, IN)에 입학하면서부터 목회를 시작하여 한국에 오기 직전에는 미주리 주에 소재한 카불(Cabool) 그리스도의 교회를 3년째 담임한 것을 비롯해서 총 18년간 목회사역을 하였다. 그는 목회자로서 다년간 크고 작은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감독한 유경험자였다.

1958년 3월 소식지에 의하면, 엘리스 가족은 1958년 4월 7일 혹은 9일에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올드 콜로니 마리너(Old Colony Mariner)에 올라 5월 3일에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버트 엘리스 가족이 한국에서 행한 사역은 조 세걸키와 함께 한국방송밋숀(Korean Broadcasting Mission)을 설립하고 부산문화방송(HLKU)에서 시간을 임대하여 매일 3년간 전파선교를 한 것이었다. 다섯 개의 성경클럽을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상대로 운영하였고, 이들 클럽에 125명 정도가 등록하였다. 또 라디오 방송 청취자들과 기타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경통신강좌를 개설하였으며 한번에 100명 정도 등록하였다. 시내 선교부 건물 채플에 동광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들 드렸고, 평균 40여명, 최고 100명까지 참석하였다. 어린이 주일학교는 참석인원이 평균 300명이 넘었다.

버트와 마조리 엘리스 가족은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년 정도의 안식년 끝에 1964년 4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때 학생성경클럽이 4개였고, 참석인원이 100여명에 이르렀다. 동광교회는 여전히 지속되었고, 어린이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어린이의 숫자는 1965년에 평균 425명, 12월 19일에는 510명, 성탄절에는 550명까지 참석하였다.

1966년 1월에는 동아 그리스도의 교회가 부산에 개척되었다. 1966년 5월에 이 교회의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어린이는 350-400명에 이르렀다. 엘리스 부부는 초교파인 부산 연합신학교에서도 가르쳤다.

엘리스 가족은 1982년 6월경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18년 목회, 한국에서 25년 선교를 비롯해서, 1983년 6월 서신에 의하면, 47년 가까이 사역하였다. 1983년 11월은 버트가 65세가 되는 해였다. 아들 존은 밀리건 대학을 나온 후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할 계획이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 같다.

3)CRM 선교사가 되려고 준비 중이던 가족들

(1)레이와 로레타 굳맨(Ray and Loretta Goodman)

레이와 로레타 굳맨(Ray and Loretta Goodman)은 미 공군에서 8년간의 전자기술자로 일하였다. 일리노이 주 빌리빌(Believille) 소재 제일 그리스도의 교회에 소속한 집사(1961년에는 장로)로서 링컨성서신학교를 졸업하는 1958년에 한국에 올 계획이었다.

 

 






(2)밥과 필리스 클레멘스(Bob and Phyllis Clemens)

밥과 필리스 클레멘스(Bob and Phyllis Clemens)는 1958년에 발파라이소(Valparaiso) 기술학교를 마치고 전자기술 준(準)학사를 1958년 10월에 받으면 한국에 입국할 계획이었다. 해군에서 전자학 분야에 복무하였다. 밥은 CRM이 내분을 겪자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소재한 WICS-TV에 엔지니어로 취업하였고, 밥과 필리스는 버트와 조가 새로 시작한 한국방송선교(KBM)의 미국 대리인(representatives)으로 봉사하였다. 







(3)클레어(Clair Powell)

클레어 포웰(Clair Powell)은 엔지니어링과 기계설비 분야에서 감독과 자문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클레어는 하와이에서 단기 선교사로 사역한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라디오 엔지니어 일급 자격증 소유자로서 가족을 미국에 두고 부산에 와서 일 년간 머물 계획이었다.

 

 

 

 

 

 




(4)루이스와 돌로레스 마이어스(Lewis and Dolores Myers)

루이스와 돌로레스 마이어스(Lewis and Dolores Myers) 부부는 교육업무를 맡아보기 위해서 1959년에 부산에 오려고 계획하였다.

 

 

 

 

 

 

 

 

 

 

 




3)한국 CRM의 실패의 원인

1972년에 힐 요한 선교사는 그 원인이 “심한 내분과 버트 엘리스와 조 세걸키의 반대” 때문이었으며, 그로 인해서 한국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정 반대였다.

첫째, 선교사들 간의 친분을 보면, 힐 요한과 제인 부부는 1959년 8월 부산에 입국하였을 때 알렉스 빌즈의 집에서 2개월을 체류하다가 대전으로 올라왔다. 대교교회 장성만 목사는 방송설교자로,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교수와 힐 요한 선교사의 통역이 되기 직전에 김히영은 알렉스의 CRM에서 번역과 음악PD로 사역하였다. 반면에 장성만 목사와 함께 동서기독교실업학교를 개척한 리처드 래쉬 가족은 조 세걸키 가족과 절친하였다. 래쉬는 세걸키 가족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빌즈 가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래쉬 가족은 세걸키 가족과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여름휴가 등을 함께 보내곤 하였다. 서울에 주재한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 가족은 알렉스 빌즈나 조 세걸키 가족 모두와 대체적으로 잘 어울렸다.

둘째, 알렉스 빌즈는 한국 정부로부터 부산에서의 라디오선교방송국 설립과 운영에 대한 허가서를 받고, 그 허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22개월간 모금운동을 펼쳤고, 그 허가서를 가지고 1956년 12월 13일에 부산으로 옮겨왔다.

셋째, “심한 내분”이란 설립자와 협력자들 사이에 있었던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갭을 좁히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알렉스는 방송선교라는 비전을 품은 이상주의자였고, 그 비전을 이미 5년 넘게 현실로 옮기고 있었던 강력한 추진자였다. 알렉스는 실제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버트와 조는 알렉스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아니한 냉철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 버트는 1960년 전반기에 필립스에게 쓴 KBM서신에서 “그 이상은 비현실적이었고, 그 프로젝트를 고안한 사람은 전혀 믿을만하지 못했다.”(the idea was impractical and the man who had originated the project was completely untrustworthy)고 말하였다. 자신들이 CRM에서 탈퇴한 것은 “일을 엉망으로 만든 헛짓들 끝에”(After vain attempts to do something with the mess) 내려진 결단이라고 하였다.

넷째, 그들 사이에 있었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자금부족이었다. 거대한 프로젝트에 비해 자금이 턱없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지난날 한성신학교가 대학개편이란 비전을 품고 캠퍼스를 충남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로 옮기고 나서 근 20년간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기대와 실망으로 파도타기를 시키다가 끝내는 폐교에 처한 상황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한성신학교 재학생, 동문, 교직원들이 겪었던 실망과 좌절감은 필설로 다 표현될 수 없는 것이듯이, 알렉스의 설교와 프레젠테이션에 감동받아 그와 그의 선교를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또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한국에 건너온 선교사들이 선교방송국 공사의 진척과 진행과정을 보고나서 느낀 실망감과 좌절감 또한 그에 못지않았을 것이다. 조 세걸키의 1959년 1월경의 서신에 의하면, 선교에 선교지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갖고 부산에 온지 일 년이 조금 지났지만, “계획은 여러분이 기대했던 것만큼 결코 이뤄지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에서도 동일하게 사실이었습니다. CRM에 대한 실망감은 정말 커져갔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만, 어떤 분들에게는 이것, 즉 우리가 CRM에서 사임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지난 1958년 10월 25일, 국내 위원회의 여섯 분... , 국내 사역자들... , 그리고 선교지의 선교사들은... 벌렌 알렉스 빌즈에 대한 신뢰의 부족과 CRM의 사역방법이 우리와 국내에 계신 분들에게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에 사임하였습니다.”라고 적었다.

이 실망은 곧이어 알렉스의 사업을 비현실적이고 믿을만하지 못하다고 비판한 그들 자신에게서도 찾아왔다. 버트와 조는 선교운영자금의 부족으로 이신 목사를 비롯한 직원들을 퇴사시켜야 했고, 부산문화방송에서 시간을 사서 송출하던 방송 횟수를 매일 2회에서 1회로 줄였으며, 끝내는 방송선교를 접어야 했다. 총회나 총회산하의 선교국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개교회가 선택한 선교사들에게 직접 선교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모금에 탁월한 재능을 갖추지 않는 한 누구나 자금부족을 겪게 될 것이고, 결국 중도에 선교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 알렉스에게도 닥쳤을 것이다. 동료들의 부정적인 견해는 미국 교회들에 알려졌을 것이고, 그것이 알렉스에게는 진행하던 사업을 접어야할 만큼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알렉스 빌즈 가족은 1961년에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1983년까지 부산에 남은 버트 엘리스 가족도, 1962년 5월 서신에 의하면, 선교자금의 부족으로 1년 반 동안을 생활비의 절반을 빚을 갚는데 쓰면서 버텼으나 집세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엘리스 가족은 1962년 7월경에 본국으로 돌아가 긴 안식년을 보내다가 1964년에야 돌아왔고, 1983년까지 부산에서 사역하였다.

크든 작든 하나의 조직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조직 안에 일치와 평화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1953-55년 사이 힐 요한과 폴 잉그람(서울 선교부)과의 내분, 1958년 한국 CRM의 내분, 1977년 힐 요한과 김찬영의 내분,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된 한성신학교의 내분은 조직의 순수성을 빙자로 내분(개혁)을 일으키는 것과 순수성에 문제가 있더라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일치와 평화를 지키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유익한가에 대해서 숙고하도록 만드는 사건들이다. 빈대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속담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은 신약교회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자는데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분열이 자주 있어왔다는 것을 환원운동사는 말해준다. 이것은 비단 그리스도의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의 순수성에 관한 논쟁은 초대교회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왔고, 195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도 이 문제의 연속이었다. 다른 한편 순수성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평화와 일치를 지킨 때도 많았다는 것을 환원운동사는 보여준다. 순수성의 문제는 분열을 가져오고, 일치와 평화의 문제는 순수성을 해친다. 이 두 가지 순수성과 포용 사이의 갈등, 그리스도의 교회식으로 말하자면, 교회일치와 신약교회회복 사이의 갈등을 3세기에 걸쳐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단체는 이 지상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빼고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일치와 순수성 사이에 늘 갈등이 있어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경건하게 고민하면서 끝임 없이 조절능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 능력이 부족할 때 조직이 와해될 수 있다는 경고에 귀를 기우려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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