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작성일 : 09-04-29 07:30
장성만목사-국민일보 역경의 열매(21-30)
|
|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9,027
|
장성만 목사(21) 민정당 창당 발기인으로 정계 입문
[역경의 열매] [2009.04.28 17:54]
나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다. 정치는 잘 모른다. 정치인과 성직자, 정치인과 학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분이 말한 '새로운 변화'란 곧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우린 지금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고 있다. 기존의 정치에 물들지 않은 신선한 인물을 찾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당신을 추천했다. 이 지역의 새로운 인물은 바로 당신이다."
나는 정치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내가 갈 길은 목회와 교육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지금 우리 학교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놓여 있다. 학교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학교를 크게 성장시키는 것이 나의 기쁨이요, 보람이다."
그는 일단 후퇴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와 정치에 참여해줄 것을 당부했다. 삼고초려(三顧草廬). 나는 세 번째 권유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제5공화국이 지향하는 것은 '복지국가 건설'이라고 했다. 그 말이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내가 추구해온 것도 고급 기술을 가진 인재들을 통한 복지국가 건설이었다. 과연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참 많이 망설였다. 그리고 많은 기도를 했다. 이것이 또 한 번의 소명이라면 거역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교육(Teaching Ministry)이다. 둘째는 목회(Preaching Ministry)다. 셋째는 치유(Healing Ministry)다. 이 셋은 결국 하나다. 나는 목회와 교육은 해보았지만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을 할 기회는 없었다. 그렇다면 정치를 통해 치유 사역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내 인생의 방향키는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의 세 번째 부르심인지도 모른다.
"새 역사 창조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나는 민주정의당 창당 발기인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81년 3월, 제11대 총선에 출마했다. 물론 지역구는 부산 북구였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 오묘했다. 선거전에서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운영해온 경남정보대학 사회교육원의 주부·요리·건강·노인교실에 참여한 주민들이 내 선거운동에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일순간에 수많은 자원봉사자를 확보했다. 돈을 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다. 11대 총선은 중선거구제로써 한 선거구에서 두 사람씩 뽑는데 야당은 신상우 후보, 민주정의당은 내가 출마했다. 등록 마감을 한 결과 후보가 두 사람뿐이었다. 결국 두 후보 모두 당선이 확정됐다. 만약 격렬한 선거를 치렀더라면 정치에 서툰 내가 많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후보들과 공격을 주고받을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하나님은 선거를 하지 않고도 국회에 입성하도록 길을 예비해놓으셨다. 무투표 당선자가 된 것이다. 나는 11대 총선의 첫 당선자였다.
나는 국회의원 선거 기간 동안 다른 후보들의 지역을 순회하며 지원유세에 나섰다. 다른 후보들은 아주 초조한 나날을 보냈으나 나는 아주 넉넉한 시간을 보냈다. 정치가 뭔지, 국회의원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혀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 외에 다른 말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22) “초선이 장관에 쓴 소리” 동료 의원들 관심
[역경의 열매] [2009.04.29 17:52]
제11대 국회의원이 되어 여의도에 입성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국회 선교사'가 되라고 권고하는 분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국회에 보낸 뜻이 무엇일까. 어떤 일을 맡기실까. 모든 것이 궁금했다.
"하나님, 국회의원도 제게 주신 소명임을 믿습니다. 신앙적 신념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기도로 단단히 무장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항상 길을 열어 주신다. 기도하는 사람은 약한 듯해도 강하다는 것을 안다. 중요한 일이 닥치면 더욱 기도의 강도를 높인다. 그때마다 놀라운 위로와 지혜와 힘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힘이다.
국회에서는 교통체신위원회에 배속됐다. 당시에는 각 위원회 중 가장 인기가 없는 부서였다. 초선인 나로서는 내 의지대로 무엇을 선택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보고를 받고 보니 철도사업이 엉망이었다. 철도청장은 대부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하차했다. 적자는 연 수백억 원이 넘었다. 직원들 간의 음해성 투서는 도를 넘고 있었다. 이런 조직이 제대로 운영될 리가 없었다.
"이건 순전히 나랏돈을 집어삼키고 있구나.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양복을 벗어던졌다. 점퍼로 갈아입었다. 6개월 동안 완행열차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그 결과 철도 운영 상황을 훤히 알게 됐다. 나는 현장의 경험을 토대로 '철도 사업 개선 방안'을 마련했다. 철도·철도병원·식당을 민영화하고, 지선은 버스로 교체할 것을 제안했다. 현재 철도 사업은 대부분 이때 내가 제안한 정책대로 운영되고 있다. 철도 자재의 무분별한 수입도 문제였다. 나는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철도청은 창고에 재고가 쌓여 있는데도 계속 발주를 하고 있다. 이건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것은 소중한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행위다."
국회가 발칵 뒤집혔다. 초선 의원이 직접 현장을 발로 뛰어 조사한 것을 토대로 밝힌 것이기 때문에 섣불리 반박할 수도 없었다. 택시 운영도 민원이 많았다. 나는 몇 개월 동안 택시를 타고 다니며 의견을 수렴해 '택시 사업 개선 방안'을 마련했다. 당시 교통부 장관은 4성 장군 출신 이희성씨였다. 나는 국회에 출석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교통부 장관은 최근에 택시를 타본 적이 있습니까?"
그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없습니다."
"그럼 내일 택시를 한번 타보고 와서 답변하세요. 택시 운전자들의 고충이 무엇인가를 들어보고 답변해주기 바랍니다."
주변에서는 참 별난 초선 의원이라며 내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목사로서의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새문안교회 강신명 목사가 입법의원 시절, 국회의사당 지하에 채플 룸을 마련해놓았다. 나는 11대 크리스천 국회의원, 사무처 직원들과 함께 이곳에 모여 수요일 아침마다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국회조찬기도회 고문으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국회에서 해야 할 일을 준비해두셨다.
문병량 의원과의 만남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문 의원은 전북 익산 출신으로 양조장인 '보배'의 사장이었다. 하루는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왔다.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23) 뜻 못 이룬 CBS 뉴스방송 재개
[역경의 열매] [2009.04.30 17:38]
문병량 의원은 부인의 권유로 가끔 교회에 출석하는 정도였다. 그의 부인은 권사로서 많은 봉사를 하고 있었다. 문 의원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지역구의 목사님 100여명이 국회 참관을 위해 상경했습니다. 목사님들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장 의원은 목사잖아요. 고향 목사님들을 장 의원이 좀 맞아줄 수 없겠어요?"
그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지방에서 올라온 목사님들을 한강호텔로 모시고 가서 극진히 대접하고 함께 예배를 드렸다. 아예 설교까지 맡았다.
"여러분이 문 의원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문 의원이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도록 잘 지도해주십시오."
아주 멋진 모임이었다. 목사님들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고, 문 의원은 내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내가 장 의원에게 큰 신세를 졌습니다. 나도 이제부터 예수를 잘 믿어보고 싶습니다."
문 의원은 그 후 독실한 크리스천이 됐다. 크리스천 의원으로서 동료 의원 한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는데 조금이나마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쉬운 일들도 있었다. 어느 날 기독교방송(CBS) 김관석 사장이 국회로 나를 찾아왔다. 당시 기독교방송은 뉴스를 방송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독교방송이 지금 뉴스 방송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뉴스를 방송할 수 있도록 좀 도와주십시오."
나는 기독교방송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부산기독교방송 운영위원장을 맡아 수년간 봉사한 적도 있었다. 방송에 직접 출연해 대담을 한 적도 있었다. 이 일은 반드시 도와주고 싶었다. 그것은 선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목사인 내가 기독교방송을 돕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냉혹했다. 이 문제는 거의 금기사항이었다. 나는 여야를 초월해 크리스천 국회의원들을 국회 귀빈식당으로 초청했다. 10여명이 모였다.
"기독교방송의 뉴스 보도가 중단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의원들이 여야를 초월해 힘을 모읍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국회에 보내신 뜻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연판장을 만들어 정부에 건의하면 어떨까요."
모두 찬성했다. 우리는 기독교방송이 뉴스를 재개하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의 연판장을 만들어 정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영 소식이 없었다. 결국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만약 기독 국회의원이 지금처럼 100명쯤 됐다면 충분히 큰소리를 쳤을 텐데…. 지금도 두고두고 아쉬움이 앞선다.
당시 시국 문제로 정부와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겪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많았다. 대화로 이 갈등을 풀지 않으면 오해의 골이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교회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자고…. 대통령도 선뜻 동의해주었다. 그때 초청된 분들이 아현감리교회 김지길 목사를 비롯해 김장환 유호준 신현균 목사와 각 교단 총회장 등 20여명이었다. 김지길 목사의 만찬기도로 시작된 간담회는 매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그때 김장환 목사가 대통령에게 불쑥 이런 질문을 던졌다.
"대통령께서는 왜 목사를 정책위 의장으로 발탁했습니까?"
일순간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24)아칸소 주지사 시절 클린턴 방문 청바지 입은 모습에 비서로 착각
[역경의 열매][2009.05.04 09:20]
재선의원이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은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장환 목사는 왜 당의 핵심을 내게 맡겼느냐고 질문했다. 대통령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선뜻 대답했다.
"진실하니까요."
일순간 좌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를 일순간에 화기애애하게 바꾸어 놓은 김장환 목사와 대통령의 위트에 모두 감탄했다.
내가 정책위 의장을 맡은 것은 1985년 2월에 치러진 총선 이후였다. 부산 북구에 출마해 1등으로 당선된 것이다. 재선 의원이 정책위 의장을 맡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전임자는 내무부장관 정성모 의원이었다. 나는 정치보다 정책을 만들어 시행하는 자리에서 주로 일하게 됐다.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임을 나중에 알게 됐다. 정책위 의장을 맡아 보니, 처리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시 국가조찬기도회 회장은 나석호 의원이 맡고 있었고, 나는 고문으로 참여했다. 나는 나석호·홍우준 의원과 함께 미국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했다. 귀로인 우리는 아칸소주 주지사인 클린턴을 방문했다. 우리가 청사에 도착했을 때, 청바지에 캐주얼 복장을 한 청년 한 사람이 활짝 웃으며 반겼다. 클린턴의 비서나 청사 관리자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바로 클린턴이라는 것이었다. 너무 소탈한 차림에 깜짝 놀랐다.
"방문해줘서 고맙다. 여러분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는 우리와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었다.
"소를 한국에 수출하고 싶다. 당신들이 좀 도와다오."
그는 철저한 비즈니스맨이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 일반 젊은이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 보였다. 그는 우리를 초청한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참 무서운 젊은이로구나."
그가 나중에 미국의 대통령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의 미래를 미리 알았더라면 그때 좀 진지하게 사귀었을 것을….
12대 국회 전반기는 정책위 의장으로서 분주한 날을 보냈다. 정치가 아니라, 정책에 전념했다. 정책을 개발하고 결정하는 일에 전념하다 보니 정치적인 적이 없었다. 그 대신 많은 민원들이 쏟아졌다. 그것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거의 10분도 쉬지 않고 온종일 일에 매달렸다. 모든 모임은 조찬으로 바꾸었다. 새벽기도에 익숙한 나로서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의원들은 아침 7시 회의가 보통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국회에 조찬모임이 활발하게 시작됐다. 아침에 곰탕을 먹으며 맑은 정신으로 회의를 했다. 처음에는 힘겨워했지만, 나중에는 모두 잘 따라주었다.
종교문제는 당시에도 아주 복잡했다. 종교는 어느 한쪽에 치우칠 수 없었다. 나는 목사지만 타 종교에 대한 배려도 간과할 수 없었다. 종교문제는 정부에서도 가장 민감하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분야였다. 한번은 오녹원 총무원장을 비롯한 불교계 인사들이 나를 찾아왔다. "이 정부가 승가대학 설립을 인가해주길 부탁드립니다.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설립과 총장 취임 문제도 저희들의 숙원사업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모두 메모해 두었다. 나도 정치인이기에 앞서 종교인이다. 종교계와 정부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 종교계와의 접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를 알고 이해하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의 숙원사업이 이루어지도록 정성껏 챙겨드렸다. 그 즈음에 지관스님이 동국대학교 총장에 취임한 것도 하나의 성과였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25) 단군성전 건립 문제로 대통령과 독대
[역경의 열매] [2009.05.03 18:06]
단군성전 건립 문제는 가장 고통스러운 사안이었다. 당시 일부 지자체에서는 군수를 비롯한 관리들의 지원을 받아 신전이 건립되고 있었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될 조짐을 보였다. 전국 교회는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신사참배를 몸으로 막아낸 고려파 장로교회는 순교할 각오로 반대 운동을 벌였다. 시위와 함께 단식투쟁을 벌이는 교회도 점점 늘어갔다. 교회 지도자들은 목사인 나에 대해 무언의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하나님,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답을 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그때 마음속에서 확신의 음성이 들렸다.
"네가 국회에 들어온 것은 이때를 위함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약 이것을 방관하면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책망을 받을 것만 같았다. 나는 전국의 단군성전 건립 계획을 모두 조사했다. 정확한 자료를 토대로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일반 보고를 마친 후, 대통령에게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오늘은 특별 보고를 드릴 일이 있습니다."
대통령은 주변에 배석한 사람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아주 중요한 일인 모양이지요?"
"예,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나라의 장래와 관계된 일입니다."
나는 대통령의 표정을 살펴가며 단군성전을 둘러싼 문제점과 실태를 낱낱이 보고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만약 대통령이 불편한 심기라도 보이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대통령은 보고를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정부가 특정 종교를 지원하면 안 되지요." 나는 대통령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건의한 내용과 대통령의 이해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대통령의 지시는 곧 정책이 되어 그대로 시행된다. 나는 보고를 마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대통령이 자신의 뜻을 밝힐 차례였다. 그 짧은 시간이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대통령은 보고를 모두 들은 후 아주 명쾌하게 지시를 내렸다.
"국비와 지방비로 단군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모두 중지시키도록 하세요. 공무원은 절대로 이 일에 관여하면 안됩니다. 그 대신 민간인들이 하는 일을 정부가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자칫 사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극적인 반전에 성공한 것이다. 만약 대통령이 '당신이 왜 단군성전 건축 문제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합니까. 목사이기 때문입니까'라고 반문이라도 했다면….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인 빌립보서 4장 13절을 떠올렸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는 못해도 하나님은 할 수 있다. 하나님께 힘을 공급 받으면 불가능이 없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결코 짧지 않은 인생을 통해서 수없이 그것을 체험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서서히 돌리고 계신 그분의 손을 믿는다. 청와대를 나오면서 찬송을 불렀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이 쓸데없는 자/왜 구속하여 주는 지/난 알 수 없도다/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늘 보호해주실 것을/나는 확실히 아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26) 총선 당락 하나님께 맡기고 개표 도중 잠들어
[역경의 열매] [2009.05.04 17:55]
노신영 국무총리는 기독교계 대표들에게 정부의 입장을 밝혔다.
"국비와 지방비로 단군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공무원의 관여도 일절 금합니다. 이것이 정부의 입장입니다."
참석한 교단장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가 쉽게 해결된 것이다. 아마 이 문제가 좀 더 오래 계속됐으면 상당한 마찰이 일어났을 것이다. 대통령과 총리의 신속한 결정이 있었기에 해결이 가능했다. 일련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사실 나는 12대 총선에서 처음 선거를 경험한 셈이다. 11대 때는 무투표로 당선됐기 때문에 선거가 얼마나 힘든지도 잘 몰랐다. 1985년 2월에 치러진 선거는 그야말로 혈투였다. 김영삼 김대중씨의 지지를 받은 신민당 바람이 전국을 강타했다. 나는 차분한 정책대결로 맞섰다. 4년 임기 동안 양산∼구포간 도로확장, 구포역 신축, 도서관 신설, 서부터미널 유치, 그린벨트 완화조치 등의 업적을 열거하며 득표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금메달로 당선됐다. 부산의 6개 선거구에서 여당 후보 세 사람이 낙선했다.
나는 아주 낙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 분주한 선거운동 기간에도 집에 돌아오면 곧 잠이 들었다. 반면 아내의 마음고생이 심했다. 아내가 선거운동을 하느라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나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도 이렇게 초조한데, 당신은 참 평안해 보이네요. 어쩌면 이렇게 무감각하나요. 지금 총선에 출마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어련히 알아서들 잘 할까. 초조하고 불안해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겠지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다. 나는 항상 모든 것을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천성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낙천적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이다. 심지어 총선 때도 개표방송을 다 보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아내는 나의 이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밖이 소란스러우면 당선된 것이고, 조용하면 낙선된 것입니다. 지금 밤을 새운다고 득표상황이 달라질 것도 아닌데…. 푹 잠이나 자둡시다."
12대 총선을 치르고서야 비로소 정치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해 2월23일, 민정당의 파격적인 당직개편이 있었다. 대표위원 노태우 의원, 사무총장 이한동 의원, 정책위의장 장성만 의원, 원내총무 이종찬 의원으로 새로운 진용이 갖춰졌다. 당 3역의 요직에 중용된 것이다. 정책위원회는 정부 여당의 정책 산실이었다.
정책위원회는 황금의 팀워크를 구축했다. 정책조정실장 현홍주 의원, 정책국장 김중위씨가 임명됐다. 각 부처에서 16명의 전문위원이 파견됐고, 대부분의 회의는 아침 7시에 열렸다. 첫 정책개발은 목포에서 시범적으로 운영되던 의료보험제도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또 민의수렴반을 만들어 기자들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민심을 파악하고 개선책을 마련했다. 나는 국회 질의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정부는 '회전의자 경제'에서 '부엌 경제'로, '탁상 경제'에서 '들판 경제'로, '손가락 경제'에서 '발가락 경제'로 전환하라."
당시 나의 발언을 모든 신문이 일제히 보도했다. 그런데 민의수렴반 활동에 대해서는 언론이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민정당이 이제서야 민의를 수렴한단 말인가. 그럼 지금까지 민의를 몰라서 일을 못했는가."
우리의 진정성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해 안타까웠다. 우리는 명칭을 '순회정책반'으로 바꾸고 활동을 시작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27) 국민 건강보험 등 복지정책 근간 세워
[역경의 열매][2009.05.05 20:18]
대형 버스를 전세내 타고 다니면서 민의수렴반 활동을 펼쳤다. 김제 전주 광주 여수 등을 방문해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 고위 당정회의를 열어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나갔다. 민의가 굴절되고 대화의 통로가 막히면 불만이 폭발한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그때 내가 강조한 것이 '발바닥 민심'이었다.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라. 탁상 위에서 설계되는 생동감 없는 정책을 지양하라. 발바닥으로 민심을 파악하라."
나는 정책팀을 이끌고 전국을 누볐다. 밤과 낮이 없는 강행군이었다. 대형 버스가 교통수단이었다.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복지사회 건설'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들의 이런 모든 노력도 결국은 복지국가 건설의 일환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7대 복지정책'이다. 나의 모든 열정과 꿈과 소망이 담긴 것이었다. 이것은 여러 절차를 거쳐 민정당의 주요 정책으로 확정됐다.
국민 건강보험, 국민복지 연금제도, 영세민 지원 종합대책, 최저임금제도, 근로자 복지증대 및 임대주택 건설, 중학교 무상 의무교육, 농어촌 종합대책이 7대 복지정책이다. 이것은 오늘날 국가 복지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큰 보람과 자부심을 갖는다.
나는 정치보다는 오히려 목회·문학·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직업적인 문필가는 아니지만 신문이나 잡지에 글쓰기를 좋아했다. 지금도 기독교 주간지 두 곳에 고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 설교집과 에세이집을 합해 모두 25권의 책을 썼다. 수필 동인회를 만들어 '로고스'나 '아가페' 같은 잡지도 만들었다. 내가 설립한 한국지역사회연구소는 계간지 '지역사회'를 60호째 발간하고 있다. 나의 저서 '디지털 사회를 사는 지혜'가 중국어판으로 번역돼 중국 정부가 100대 교양서적으로 선정했다. 2008년 2월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어판 발행 출판기념회가 열렸는데 중국 교육부의 고위 관리들이 대거 참석해 관심을 보였다.
글쓰기는 목회와 연결된다. 설교 원고를 준비하려면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글도 많이 써보아야 한다. 초선 의원 시절에도 글 쓰는 분들과 자주 친교를 가졌다. 당시 내가 소속된 교통체신위원회 위원장은 황인성 의원이었다. 그는 교통부 장관을 거쳐 YS 정권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분이다. 인품이 후덕해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교통체신위원회는 나를 포함해 작가 송지영 선생, 시인 김춘수 선생이 속해 있었다. 모두 정치 초년생이었다. 우리는 만나면 정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문학에 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만남이었다.
1985년 7월16일, 갑자기 당정희의가 소집됐다. '학원 정상화를 위한 임시조치법'이라는 법안에 대한 설명회 자리였다.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학원소요 때문에 휴교나 폐교당한 학교 교수는 월급을 70%만 지급한다. 시위 주동 학생은 3개월간 선도교육을 받는다. 유언비어 살포와 선동에 앞장서면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당시 학원 사태는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법안이 통과되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었다. 참석자들의 의견도 엇갈렸다. 내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단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른다. 단계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만났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제 현행법을 약간 보완하거나 학원안정법을 제정하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그것을 내가 막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28) 부산 고등법원·검찰청 유치 의정 활동 중 최대 보람
[역경의 열매] [2009.05.06 17:48]
당에서는 학원안정법 공청회가 열렸다. 그것은 당의 주요 이슈였다. 그날 청와대 경호실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만찬 초청이었다. 청와대 별관에 전두환 대통령을 중심으로 당 5역, 관계 장관 두 사람, 청와대 참모 두 사람 등 10인이 모였다. 저녁식사와 함께 반주가 몇 순배 돌면서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술과는 거리가 먼 내게는 아무도 술을 권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약간 취기가 돌자, 노래를 한 곡씩 불렀다. 나는 '서울의 찬가'의 노랫말 중 '서울에서 살렵니다'를 '부산에서 살렵니다'로 바꿔 불러 박수를 받았다. 모임은 자정 무렵에야 끝났다. 그런데 만찬을 마치고 본관으로 향하던 대통령이 갑자기 뒤돌아서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여러분들은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지요? 그렇다면 나의 뜻을 따라주기 바랍니다. 학원안정법은 보류합니다."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대통령이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믿는다.
이튿날, 청와대 영빈관에서는 전 국무위원과 당의 중진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당정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학원안정법을 유보한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오랫동안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문제가 일시에 해결된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해결하지 못할 일을, 하나님은 일순간에 해결하신다. 그러므로 인생의 역경을 만날 때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당시 부산 시민들에게는 오랜 숙원 사업이 있었다. 그것은 부산에 고등법원과 고등검찰청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부산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사실 대구 고등법원의 항소심 중 60%가 부산지역 사건이었다. 부산 시민들이 2심 재판을 받으려면 반드시 대구로 올라가야 했다. 나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감안, 부산 출신 국회의원들의 뜻을 모은 후, 대법원과 법무부에 이어 청와대 법무수석 등과 협의했다. "부산은 대한민국 제2의 도시다. 이곳에 고등법원과 고등검찰청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부산 시민들은 2심을 받으려면 모두 대구로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담당 부서의 동의를 얻은 다음, 대통령의 내락을 받아냈다. 뛸 듯이 기뻤다. 고향 사람들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곧장 부산으로 내려와 기자회견을 열어 이 사실을 발표해버렸다. "부산에 고등법원과 고등검찰청이 세워집니다. 정부와 당정협의를 마쳤습니다. 이제는 대구로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부산지역 신문은 일제히 이 기사를 1면 톱으로 다뤘다. 그날 밤부터 집에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대구 지역 유지들의 반발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토요일 기자회견을 하고, 월요일 상경해 보니 사무실이 온통 벌집이었다. 대구 각 단체장들이 상경해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들은 대구 출신 정·관계 지도자들을 불러놓고 호통을 쳤다.
"만약 고법과 고검을 부산에 내주게 되면, 당신들은 앞으로 대구에서 표 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라."
대구 시민들의 애향심은 본받을 만했다. 사실 대구에 있는 고검과 고법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부산에 새로 세워지는 것이었다. 경남 출신 법사위원장인 유상호 의원과 부산 출신 법사위원 곽정출 의원이 이 법안 통과에 노고가 많았다. 정책위 의장 시절, 이것이 가장 보람 있는 일 중 하나다. 고향을 위해, 고향 사람들을 위해 미력하나마 앞장섰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29) 미 문화원 사건으로 어려움 처한 고신대 구제
[역경의 열매][2009.05.07 17:49]
정책위원회에는 수많은 민원이 쏟아졌다. 그 중 기독교 관련 민원이 참 많았다. 이 민원들은 대부분 정부의 각 부처에 호소했다가 거절당한 것들이었다. 교회건축, 무인가 신학교, 교파 간 알력으로 인한 재산권 분쟁 등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것들은 정부의 어느 한 부처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교회와 관련된 민원들을 꼼꼼히 챙겨서 입법화하거나, 정부에 이송해 문제를 해결했다. 어떤 때는 법률 자문단의 협조를 얻기도 했다. 작은 것 하나라도 결코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당시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된 것이 미국 문화원 사건이었다. 고신대 문부식이라는 학생이 문화원을 습격한 것이다. 고신대는 고려파 장로교단이 운영하는 대학이다. 이 사건은 한·미 외교의 근간을 흔들어놓을 정도로 파괴력이 있었다. 한국의 입장은 참으로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론은 매일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고신대도 큰 타격을 받았다. 학교의 이미지는 극도로 나빠졌으며, 문교부로부터 입학정원 동결 조치를 받은 것이다. 그것은 학교에 아주 치명적이었다. 그 즈음, 고신대 김병원 총장이 나를 찾아왔다.
"입학정원 동결이 해제되도록 힘을 좀 써주십시오. 지금 이 상태가 계속되면 학교는 정말 어렵게 됩니다."
참으로 풀기 어려운 민원이었다. 이 문제는 어느 한 부처에 부탁을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여러 부처와 아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문제였다. 한·미 양국의 외교문제를 뒤흔든 사건인 만큼, 그 해결방안도 어려웠다. 김 총장은 거의 매일 찾아왔다. 어떤 때는 내가 출근하기도 전에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 이사장과 함께 찾아와 호소를 한 적도 있었다. 그분들의 애교심과 정성에 감동을 받았다.
"학교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로구나. 저분들을 도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 제게 지혜를 주십시오."
우선 주무 부서인 문교부에 입장을 설명했다. 당시 문교부장관은 서울대 교수 출신인 손재석씨였고, 차관은 부산대 교수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정재훈씨였다. 나는 그들에게 고신대의 역사와 전통을 상세히 설명했다.
"고려파 장로교회는 정통 보수교단입니다. 일제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투옥된 목사님들이 해방 후 세운 교단입니다. 그분들이 세운 학교가 바로 고신대입니다. 가장 보수적이고 반공정신이 투철한 교단이지요. 학생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학교 전체가 피해를 당한다면, 그것은 좀 억울한 일입니다. 입학정원 동결 조치를 풀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장관과 차관에게 고신대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했다. 그들은 내 뜻을 잘 이해해주었다. 이번에는 정보기관을 찾아갔다. 역시 똑같은 설명을 하면서 협조를 구했다. 그들은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을 태세였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진지하게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잘 알았습니다. 방법을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마음을 움직여주셨다. 그 이듬해부터 고신대 입학정원 동결조치가 완전히 풀렸다. 학생 증원이 허락된 것이다. 김 총장은 내 손을 잡고 거듭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이 내게 이런 일을 시키려고 국회에 보내주신 것이다. 나는 단지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장 9절).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시공을 초월한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생각 너머에서 우리의 삶을 조종하신다.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장성만 목사(30) 극비 노동법 개정시안,자리 비운 새 언론에 유출
[역경의 열매][2009.05.08 17:58]
정책위의장이란 자리는 단 10분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나 역시 일에 휘둘리지 않고 즐기는 편이었다. 당시 노동법에 손을 대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그렇다고 노동자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집권당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었다. 그때 노동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문제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정책위의장인 내가 위원장을 겸직했다. 우리는 곧 노동법 개정에 착수했다. 당정협의를 거듭한 끝에 노동법 개정시안을 마련했다. 아직은 상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초극비 문서'였다. 나는 그것을 2부 만들어 캐비닛 깊숙한 곳에 감춰두었다. 아무도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부산에 내려왔다. 지역구는 정치인의 탯줄이나 다름없다. 부산은 나의 교회와 학교가 있는 곳이다. 지역구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 부산에 내려온 다음날, 서울에서 발행하는 어느 신문의 1면 톱기사가 '노동법 개정시안'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가 극비리에 준비해온 내용이 고스란히 나와 있었다. 머리가 텅 비는 느낌이었다.
당 사무총장으로부터 급히 전화가 걸려왔다.
"신문기사 보았지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속히 상경해서 설명을 좀 해주세요."
서울로 올라왔다. 사태가 아주 심각하게 흘렀다. 누군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였다. 사무총장이 내게 제안했다.
"우리 두 사람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냅시다."
"아닙니다. 잘못은 내게 있습니다. 나 혼자 사표를 내겠습니다."
사무총장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두 사람이 사표를 써서 봉투에 넣고 노태우 대표위원의 자택을 방문했다.
우리는 경위를 설명하고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 사표를 전달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노 대표위원은 끝내 사표를 반려했다.
"이런 일로 사임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는 보안에 각별히 신경을 좀 써주십시오."
결국 이 일은 조용하게 무마됐다. 그런데 캐비닛에 들어 있는 노동법 개정시안이 어떻게 외부에 유출됐는지는 영원한 미스터리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나는 그 기사를 쓴 기자를 원망하지 않았다. 문건을 어디서 구했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특종을 찾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는 '기자 정신'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당시 민정당에 출입하던 기자들의 면면은 쟁쟁했다. 조선일보 강천석 기자는 지금 주필이 됐고, 동아일보 이낙연 기자는 국회의원이 됐다. 중앙일보 박보균 기자는 편집국장을 거쳐 대기자로 활약하고 있다. 서울신문 이상철 기자는 지금 서울특별시 부시장으로 재직 중이다. KBS 김인규 기자는 한국 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 회장으로 있고, MBC 정동영 기자는 지난 대선 때 대통령 후보로 나올 만큼 큰 정치인이 됐다. 당시 나와 각별한 친분을 나누던 기자들이다.
정치인들이 언론과의 관계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다. 정치인은 기자들과 너무 가까이 지내도 안 되고, 멀리 지내도 안 된다는 말이다.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뜻이다. 나는 정책위의장으로 재직한 2년3개월 동안 기자들과 아주 잘 지냈다. 노동법 개정시안 유출사건만 없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을….
정리=임한창 기자 hclim@kmib.co.kr
|
|
|
| | |